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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한 구한말 화적
게시물ID : history_2918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역둔토
추천 : 8
조회수 : 139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12/18 01:15:08



초적, 비적, 강도, 적도, 토적, 폭도 등으로도 불렸던 화적은 구한말 이전에 비하여 구한말 들어와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다. 구한말 이전에도 화적은 존재하였으나 1894년 동학농민운동 이후 조직력과 무장 수준이 상당히 올라간 화적이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이시기 화적은 최대 수십명으로 단체를 이루었고 총포를 다루고 말을 탄 이도 있었다.

단순한 도적으로 보기에는 상당한 세력을 이루고 무장 수준도 이전 시대에 비하여 확실히 달라진 면모를 보였다.


화적이 전국으로 급속도로 퍼지게 된 원인 중 가장 주요한 것은 농민의 대규모 몰락이었다.

구한말 농민의 대규모 몰락은 갑오개혁부터 광무개혁까지 이어진 농민 수탈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왕권 강화와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재정은 오롯이 농민의 부담이었다.

유의미하게 성장하지 못한 상공업 분야는 재정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고 관세도 차관 담보로 잡혀 외국의 손아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농민에게 특히 부담을 주었던 것은 지세 인상이었다. 지세는 대한제국 세입의 70%를

차지할 만큼 중요하였는데, 30냥 하던 지세가 1900년에는 50냥, 1902년에는 80냥으로 올랐다. 이렇게 급격히 상승한 지세가

투명하게 징수되었다면 좀 나았겠지만 상태가 썩 좋지 않았던 구한말 다른 분야처럼 징세분야도 상태가 영 메롱이었다.

농민들이 소유한 토지의 비옥도를 마음대로 올린 후에 더 많은 지세를 걷거나 실제로 보유한 것보다 많은 토지를 보유한

것처럼 기록하여 지세를 걷는 경우는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농민들은 개개인에게 부과되는 세금이 아니라 군 단위로 배정된 총액제 아래에서 불공정하게 지세를 납부했다.

수취도 농민이 직접 행정기관에 납부하는 것이 아니라 향임 같은 지역의 납세 책임자와 이서층을 거쳐야 했기 때문에

부정, 횡령, 추가적인 수탈의 위험에 항상 노출되었다.


여기에 대한제국 시기, 지세 수입의 증가를 목적으로 실시한 양전사업이 부작용을 낸 것도 농민층의 몰락을 불러왔다.

양전 사업은 지주경영의 확산을 불러왔고 농민층은 이로 말미암아 토지를 상실하고 빈농이나 농업노동자로 전락하였다.

이것은 양전사업에 들어가는 경비를 농민에게 거두면서 더욱 심각해졌는데 지방관리들은 당연히 경비의 몇배를 수탈하였다.


농민은 동학농민운동에서 패배함에 따라 구한말 지배계층의 토지 소유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에 더하여 양전사업을

말미암아 농업의 지주경영이 고착화되자 몰락의 쐐기가 박혔다. 1902년 조사에 따르면 충주군에서 4.7%의 지주계층이

전체 토지의 약 50%를 점유하였고 빈농 약 56%는 고작 5.6%만을 가지고 있었을 정도였다.


국내 상황 뿐 아니라 외세의 경제 침탈도 농민계층 몰락의 주요 원인이었다. 청일전쟁이후 일본상인들이 들여온 면제품은

농민의 주요 부수입 중 하나인 직물업을 몰락하게 만들었다. 또한 구한말 일본으로의 쌀 수출 때문에 발생한 쌀값 폭등은

지주와 대상인들에게는 이익을 안겨주었지만 농민들과 농촌의 소상인들을 몰락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몰락한 농민들 중

일부가 화적에 가담하기 시작하면서 화적이 크게 늘어났다.


화적은 대개 10명 정도로 조직을 구성하였지만 일부는 수십, 백여명, 수백여명으로 구성된 대화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은 체포한 화적을 심문하여 얻은 자료이기 때문에 화적의 실제 규모는 이보다 더 클 가능성이 매우 크다.

화적 구성원들이 동료와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조직 규모를 축소하거나 상위 화적 조직을 숨기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이다. 

화적들은 마을을 직접 약탈하거나 외따로 떨어진 인가를 습격하거나 행인, 주막을 공격하였는데 경기도, 삼남지방에서

그 피해가 극심하였다. 특히 가장 물산이 풍부하고 부유한 삼남은 전체 화적활동의 약 70%가 일어날 정도로 피해가

집중되었다.


삼남의 화적들은 대개 위에서 언급한 곳을 공격하였지만 일부 화적들은 대규모로 연계하여 지방 관청을 공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군수를 사로잡아 구타하거나 감옥을 부수고 죄인을 풀어주거나 자신들을 진압한 관리의 아들을 죽이고 집에 불을

지르고 중앙으로 올라가는 세금이나 지방관아에서 보유한 돈을 탈취하는 경우도 일어났다.


화적들은 태생적으로 일본으로 대표되는 외국에 매우 적대적이었는데 이들이 그들의 경제침투로 말미암아 피해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외국 중 특히 일본은 상품경제침투 뿐 아니라 토지 잠매를 통한 일본인 지주경영을 확대하자

일본인은 외국인 중 주요 목표가 되었다. 일본인 다음으로 공격을 많이 받은 것은 청인이었다. 청인은 일본인들처럼

지주경영을 시도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상인과 같이 상업침투를 통해 조선 곳곳을 누비고 있었기 때문에 화적의 목표였다.


이런 이유로 화적들은 특히 20세기 이후 일본이 한반도에서 우월적인 권리를 구축해 나가기 시작하자 의병에 가담하는

경우도 있었다. 의병 참여자도 대개 빈농 출신이었기 때문에 같은 빈농 출신인 화적들이 의병에 참여하는 것은

드문 일은 아니었다. 이들은 반외세 정서 뿐 아니라 안정적으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서도 의병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의병장들이 의병들에게 일정한 임금을 지불하고 식사를 제공했기 때문에 급료와 식량을 위해 의병에 가담하였다.

당연히 이러한 이유로 의병에 가담한 화적들은 급료를 받고 도망치거나 의병장이 부하들을 대접하기 위해 소나 돼지를

잡기를 기다렸다가 대접을 받고 도망치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면 이시기 의병장인 유인석 휘하로 약 370여명이

모여들었다가 유인석이 그들을 대접하기 위해 소를 잡아 대접하자 그날 밤 40여명이 도망치고 이튿날에는 30여명이 도망쳐

유인석의 제자가 탄식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여기에 일부 화적은 아예 의병을 가장하고 각지에서 도적질을 자행했기 때문에

지방에서 의병들이 화적들과 충돌하는 경우도 종종 일어났다.  그러나 항일구국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화적들도 많았는데,

이들은 의병장이나 의병으로 활동하며 관군 및 일본군과 저항하며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구한말 화적 대책은 피해를 막심하게 입고 있는 지방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지방에서 유림과 재지향반은 동학농민운동 당시

관군 및 일본군과 연대하여 동학농민군을 격파하는데 일조한 민포나 사포로 불렸던 포군을 재조직하여 화적에 맞서기

시작했다. 이러한 포군은 관군과 연합하여 출몰하는 화적들을 공격하는 데 매우 적격이었다. 이는 화적들이 대개 근방

지리에 익숙한 것을 최고의 무기로 삼고 있었는데 포군도 근방 주민으로 해당 지리에 매우 익숙하였기 때문이었다.

포군과 함께 오가작통제의 강화와 향약의 강화도 화적진압책으로 쓰여졌지만 큰 효과는 보지 못했으며 오히려 수탈을

강하게 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화적의 몰락은 아이러니하게 의병의 몰락과 궤를 같이했다. 일제는 한반도를 장악하기 위한 가장 큰 걸림돌인 의병을

탄압하면서 화적도 같이 공격했다. 의병만큼이나 고갯길이나 산에서 관청이나 행인을 공격하는 화적도 걸림돌이었기

때문이다. 의병 공격, 귀순정책은 화적을 대상으로도 시행되었고 최종적으로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의병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던 것처럼 삼남의 화적도 남한대토벌작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몰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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