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만에 뒤바뀐 ‘총풍(銃風) 사건’의 진실 [신동아 2007-03-26] 안기부 조사에서 고문받은 장석중씨의 다리를 찍은 것. 1월23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이 1975년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아 숨진 도예종씨 등 8명에 대한 재심에서 “진술자들이 고문과 가혹행위를 당했고, 이들이 만든 조서는 영장도 없이 장기간 구금당한 끝에 작성된 것이어서 신빙성 있는 상태에서 작성됐다고 볼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한 후 과거사 문제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졌다. 이러한 판결에 힘입은 듯 1월31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위원장 송기인)는 1970년대 긴급조치 위반사건을 판결한 법관 492명의 이름을 공개해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그리고 같은 날 대법원이 1972년부터 1987년 사이에 있었던 공안사건 판결 가운데 224건을 재심 예상 판결로 분류해놓았는데, 이 가운데 63%인 141건이 ‘간첩사건’인 것으로 확인돼 파문이 일었다. 최근 사법부는 고문이나 장기 구금 등 불법 수사로 피해를 본 사람에 대해 상당한 액수의 배상을 부과하는 판결을 내리고 있다. 수지킴 사건에 대해서는 유가족에게 42억원을 배상하라고 했고,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다 숨진 최종길 전 서울대 법대 교수 유가족에게는 18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 때문에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유가족들은 100억원대의 배상금을 받을 것이라는 성급한 예측까지 나오고 있다.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인 출신 대통령 시절의 공안사건 수사가 고문과 장기 구금을 수반했다면 6·29선언을 계기로 출범한 노태우 정부 이후의 공안사건 수사에서는 이런 관행이 사라졌어야 한다. 노태우 전 대통령도 장성 출신이라 ‘군사정부’를 이끈 것으로 본다면 적어도 김영삼·김대중 정부 시절엔 이런 관행이 확실히 사라졌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면 민주화 이후의 정부에서 반복된 불법 수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철퇴가 내려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그래야 공정하게 과거사를 밝히는 것이고, 진실로 화해를 추구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다. 장석중, 오정은씨 경우 1월19일 서울고등법원 제1민사부(재판장 유승종)는 김대중 정부 출범 초기인 1998년 말 핫이슈로 떠올랐던 이른바 ‘총풍(銃風) 사건’ 관련자인 장석중·오정은씨가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1심 판결의 일부를 깨고 “정부는 원고인 장씨와 오씨에게 추가로 2억1000만원과 2억4000만원을 각각 지급하라는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1998년은 ‘북풍(北風)’과 관련해 많은 사건이 터져나온 해였다. 가장 먼저 터진 것은 국가안전기획부(이하 안기부) 전 해외공작실장 이대성씨가 작성한 ‘이대성 파일 사건’. 이 파일은 이 전 실장이 만들었으나, 사건이 일어나게 한 장본인은 김영삼 정부 시절 안기부장을 지낸 권영해씨다. 제15대 대선을 앞둔 1997년 12월7일 권영해 당시 안기부장은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방해할 목적으로 이대성 실장에게 윤홍준씨 기자회견을 지시했다. 이에 이 실장이 부하 직원을 시켜 윤씨에게 2만달러를 건넸고, 윤씨는 대선 직전 세 차례나 “김대중 후보는 1971년 대통령선거 때부터 15대 대통령선거 때까지 북한으로부터 선거자금을 수령해왔고, 국민회의 조직국장 조만진이 조선족인 허동웅을 통해 대북접촉을 해왔으며, 김대중 후보가 이사장으로 재직한 바 있는 아태평화재단이 북한측 자금으로 설립됐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러나 12월18일 치러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자 선거 개입공작을 지시한 안기부가 궁지에 몰리게 됐다. 1998년 2월12일 윤씨가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 방지법 위반혐의로 구속되고, 윤씨에게 돈을 건넨 해외공작실 직원들도 구속됐다. 이에 이 전 실장은 국민회의 관련 인사들이 대북접촉을 한 사실을 담은 자료를 모아 자신 등을 수사하면 이 자료를 공개하겠다는 뜻으로 정대철 당시 국민회의 부총재에게 전달했다. 이 자료에는 남북을 오가며 북한 실력자를 접촉했다는 안기부의 비밀 공작원 ‘흑금성(본명 박채서)’이 15대 대선을 앞두고 국민회의 정동영·천용택 의원과 접촉한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이 자료는 ‘내일신문’ 등으로 넘어가 보도되면서 ‘이대성 파일’이란 이름을 얻었고, 여러 언론이 앞다퉈 취재하게 됐다. 왜 고문에 주목하지 않았나 이 과정에서 이른바 ‘흑금성 사건’에 대한 여러 보도가 터져나왔다. 이대성 파일 사건과 흑금성 사건에 관한 보도는 ‘여당이 주요 선거 직전 대가를 전제로 부탁하면 북한은 판문점 등지에서 무력시위를 해 도와주었다’는 인식을 만들었다. 그러나 두 사건에선 이를 증명할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 출범 후 안기부에서는 대대적인 물갈이가 이뤄졌다. 김대중 정부와 호흡을 같이할 수 있을 것 같은 요원들이 요직에 진출한 것이다. 안기부 대공수사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직후인 1998년 8월 안기부 대공수사국은 한성기·장석중씨 등이 15대 대선 직전 북한에 ‘신한국당 후보(이회창)에게 유리하도록 판문점에서 총격을 해달라’는 부탁을 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두 사람의 신병을 확보해 조사에 들어갔다. 9월8일에는 김영삼 대통령 때부터 청와대에서 근무해온 오정은씨도 이 모의에 가담한 것으로 보고 불러 조사하게 됐다. 그리고 세 사람 모두에게서 ‘신한국당 후보의 당선을 위해 북한에 5~6차례 무력시위를 해달라는 요청을 했다’는 내용의 진술서를 받아내 9월24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서울지검에 송치했다. 이에 서울지검은 ‘세 사람이 모의해 북한에 무력시위를 부탁한 혐의가 있다’고 보고, 보안법 위반 혐의 등으로 기소했다. 법정에 선 세 사람은 “고문에 의해 허위자백을 했다”고 주장했으나, 1심 법원은 보안법 위반혐의를 인정해 오씨에게는 징역 5년에 자격정지 3년, 장씨와 한씨에게는 징역 3년에 자격정지 2년을 선고했다(2000년). 이 판결에 원고인 검찰과 피고 모두 불복해 항소했다. 2심 재판부는 ‘세 사람이 안기부와 검찰에서 한 진술을 믿기 어렵다’고 했으나 보안법 위반혐의는 사실로 인정된다며 세 사람에게 집행유예 2년, 자격정지 2년을 선고해 석방했다(2001년). 이에 검찰이 불복해 상고했으나 대법원이 기각함으로써 2심 판결이 확정됐다(2003년). 총풍 사건은 이렇게 용두사미 격으로 일단락됐으나 또 다른 재판이 벌어졌다. 세 사람이 1심 재판을 받을 때인 1999년, 장씨와 오씨는 형사재판을 유리하게 할 생각으로 안기부의 고문과 강요로 허위자백을 했다며, 그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는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마침 장씨가 1998년 9월7일 안기부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두들겨 맞아 멍이 든 자신의 몸을 찍어둔 사진을 갖고 있었으므로 이를 증거로 제출했다. 장씨는 안기부의 협조로 대북사업을 하던 사람이다. 그때만 해도 그는 자신이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고문을 받았다는 주장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검찰이 그를 기소하자 이 사진을 공개하며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허사였다. 배상소송을 맡은 1심 재판부는 안기부와 검찰이 두 사람에 대한 변호인 접견을 허가하지 않은 사실만 인정된다며, 정부는 장씨에게 3000만원, 오씨에게 200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대해 원고와 피고(정부) 모두 항소하자, 2심에서는 두 사람에게 고문을 가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정부가 추가로 장씨에게 2억1000만원, 오씨에게 2억400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민주화 정부 인권탄압도 조사하라” 이 판결이 대법원에서 기각되지 않는다면 DJ 정부에서 안기부가 고문을 한 것은 사실이 된다. 그렇게 되면 한성기씨를 포함한 세 사람은 자신들에게 유죄를 판결한 형사재판에 대해 재심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고, 재심은 무죄 판결로 이어질 수 있다. 과거사위는 ‘반인권적 인권유린을 조사한다’는 내용을 담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을 근거로 만들어졌으므로, 민주화 이후 정부에서 자행된 인권침해에 대해서도 진실을 밝히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