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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임금들의 패턴(5)
게시물ID : history_293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악진
추천 : 7
조회수 : 213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1/10/30 05:11:49
후반으로 갈수록 글이 길어지고 있는데, 아무래도 근대로 올수록 중요한 사건이 많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제가 '잘 몰라서' 한줄요약이 안되는 탓이 큽니다. 
잘 아는 사람은 요약도 잘하지만, 역시 아는 게 없을수록 요약도 안되고 글만 길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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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경종 : 비리비리하게 자기 주장 한 마디 못하다가 요절한 것으로 기억되는 이 인물은,
사실 노골적인 소론편향의 정치를 벌이며 세제 연잉군과 미묘한 갈등을 벌입니다. 
조선조 임금들이 아무리 병진같더라도 한 명 한 명을 따지고 들어가면 모두가 녹록치 않다는게 경종같은 인물에서 드러나죠.

물론 경종의 기본캐릭터는 비실비실하고 남에게 잘 휘둘리는 약골이 맞습니다. 하지만 경종은 장희빈의 친아들이라, 출신배경부터가 
친 소론입니다. 어머니의 복수를 내걸고 광역숙청을 단행한 연산군과는 달리, 경종은 뭘로 봐도 쉴드쳐 줄 구석이 없는 어머니얘기를 
꺼내기 보다는 오히려 노론들이 경종이 쳐놓은 함정에 빠질 때까지 기다리는 참을성 있는 면모를 보여줍니다.
경종이 늘 비실대고 골골거리자 다수당 노론은 연잉군을 세제로 삼고 심지어 대리청정까지 맡길 것을 경종에게 요구합니다. 이게 사실 
아무리 약골일지라도 아직 30대초반인 임금에게는 감히 할 수 없는 요구 아닙니까? 성질 더러운 태종같은 이에게 했다가는 뼛조각도 
못 추릴 얘기가 30대 초반 임금에게 나오는 겁니다. 그 나이라면 아직 세자가 태어나기를 기다리는게 정석이고 나이차 몇 살 나지도 
않는 동생에게 대리청정이라는건 사리에 맞지 않죠. 처음부터 노론이 임금을 우습게 본 근원적인 잘못이 있는 겁니다. 당시로서는 경
종이 그만큼 비리비리하기도 했구요.
하지만 경종은 무기력한듯이 연잉군을 세제로 세웁니다. 그리고는 신의 한 수를 던지는데.... 연잉군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겠다는 의사를 천명하는데, 보통은 대리청정을 맡기겠다고 하면 "예의상 거절"을 해야함에도
노론에서는 표정관리를 못하고 넙죽 OK싸인을 보낸 겁니다.
이걸 빌미로 경종은 "너 이새끼들 왜 그 때 나를 안 말렸냐"며 순식간에 조정을 소론 일색으로 바꿔버립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목호룡의 고변사건(노론이 경종을 암살하고 연잉군을 추대하려고 하는 음모를, 목호룡이라는 인물이 고발한 사건)마저 터지자 노론은 아예 역사에서 퇴갤할 위기까지 내몰립니다만, 이 사건을 파고들면 연잉군도 무사할 수 없다는 걸 안 탓인지 경종은 진상조사를 중단시켜 버립니다. 
경종이 정적인 연잉군을 왜 보호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순수한 형제 간의 의리라고 보기도 하는 반면, 유일한 왕위승계자인 연잉군이 죽고나면 왕조 자체가 파탄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칼자루를 쥔 것은 경종이었다는 거죠. 목호룡의 고발이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영원히 알 수 없는 일입니다만 아마도 어느 정도 실제 있었던 시도가 조사과정에서 확대된 것으로 보는 게 맞을 겁니다.

어쨌건 경종은 4년의 짧은 치세를 했음에도 노론 다수당의 조정을 소론조정으로 바꾸어 놓았고
노론에게 목호룡사건이라는 아킬레스건까지 덮어씌운 탓에 영조집권초반은 목호룡사건의 진상규명에 조정 전체가 매달리는 형국이 됩니다.


21. 영조 : 장희빈의 친아들인 경종이 소론배경을 가진 임금이라면 영조는 출신 자체는 한미하지만 노론의 비호를 받으며 왕위에 오릅니다. 탕평책을 구호로 내걸고 탕평과를 시행하는 듯도 했지만 속내는 노론군주.

1) 탕평책?
경종 시절 노론의 반역사건으로 규정되었던 목호룡사건을 30여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조금씩 조금씩 진상규명이라는 명목으로 조사결과를 번복합니다. 그 중에는 정말 억울하다가 구제된 이도 있겠지만 최종적으로 영조가 내린 결론은 목호룡사건이 100% 무고사건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영조는 노론군주 맞다니까...
영조의 의도는 노론이 다수파를 장악하고 소수파 소론이 노론을 견제하는 구도로 가고 싶었겠지만, 유달리 영조시절에 소론의 반란이 되풀이되면서 소론은 스스로 몰락합니다. 영조 말년에는 소론은 정치세력으로서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하기에 이르죠.

2) 사도세자
사도세자에 대해서는 최소한
① 문무를 갖춘 인물인데 사도세자의 친 소론성향을 우려한 노론에 의해 제거당했다
② 영조와의 성격차이, 세손에 대한 편애 때문에 제거됐다
③ 완전히 빗나간 그냥 망나니였다
3가지 평가가 갈라지고 있고 자세히 파고들어가면 수십가지가 넘는 이론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영조는 편애하는 자식과 그렇지 않은 자식을 대하는 온도차가 매우 컸던 걸로 보입니다.
사도세자를 둘러싼 진실이 무엇이건간에 사도세자가 영조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이 중요한 원인이 되었고, 영조와 복제인간이라고 할만한 세손(=정조)에 대한 편애가 사도세자의 몰락을 부채질한 것만큼은 확실한 것으로 보이네요.
영조는 신하들을 죽도록 굴려댄 완벽주의자였는데, 마흔이 넘어 얻은 늦둥이 아들에 대한 과도한 기대가 점점 사도세자를 짓눌렀으리라 짐작됩니다. 사도세자는 원래는 무인적 기질을 가진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영감의 카리스마에 짓눌려 기를 펴지 못하고, 점점 심약해지고 파탄적인 성격이 된 듯합니다. 발자국 소리를 듣고도 깜짝 놀라 벌벌 떠는가 하면 계단에서 기절을 한 적도 있습니다. 사도세자에 대한 연민이 느껴지는 부분도 있지만 정사에 기록된 사도세자의 비행도 만만치는 않습니다. 괴상한 소문을 전부 빼더라도, 왕자 지위를 이용한 지저분한 채무관계가 문제되어 영조가 채무를 해결해준 적이 있었습니다. 아프다는 핑계로 몇 달이나 영조와 한 궁궐에서 살면서도 얼굴 한 번 안 보다가 그 와중에 몰래 가출(관서행)해서 평양까지 놀러갔다가 뒤늦게 들통이 난 사건도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이미 한참을 엇나간 부자관계에, 살해라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동원된 계기는
정치적 이유를 전혀 배제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영조는 불과 15세에 불과한 사도세자에게 대리업무를 맡겼다가 다시 뺏았고 이후에도 대리청정이나 선위소동을 여러 번 벌였습니다. 사도세자가 대리업무를 맡으면서 친 소론 성향을 내비친 것이 노론의 미움을 사게되고 노론이 영조와 사도세자를 이간질하게 된다는 것이 기본적인 통설입니다.

이런 정치적 정황과는 별개로 사도세자의 비행은 점점 수위가 높아졌고
마지막에는 사도세자의 친모 영빈 이씨가 청하고, 장인 홍봉한이 주도해서, 영조가 자살명령을 내리는, 미증유의 사건이 벌어집니다.

요즘은 사도세자를 둘러싼 갖가지 사료가 거의 정리가 끝났고 신빙성에 대한 검증도 끝났습니다만
워낙 이 사건에 관해서는 달리 해석할 여지가 많고
도대체 어떤 것이 사건의 본질인지 파악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지경이라고 보입니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일생일대의 목표로 삼으면서 새로운 비극이 벌어지죠.

3) 통치술
영조의 통치술은 탕평책을 구호로 내걸어 놓고는 실질적으로는 노론을 지지한 형태를 띕니다. 무소속대통령을 자처하지만 전국민이 어디가 여당인지 아는....뭐 그런 형국이랄까요. 그럼에도 탕평탕평탕평탕평 귀에 딱지가 앉도록 강조하긴 했고 집권후반기에는 "탕평당"이라는 당이 따로 생길 지경이었지만 사실은 그게 전부 영조의 외척.
선조/숙종이 손바닥 뒤집기를 통해 신하들을 조련했던 반면 영조는 손바닥 뒤집기의 부작용-택군 현상:당파들이 특정왕자를 후견하며 미래를 보장받으려는 현상-을 온몸으로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여야를 뒤바꾸는 술수를 쓰기보다는 처음부터 (사실상의)여당을 정해놓고는 탕평이라는 간판을 내걸은 것. 여당에서 임금한테 개기면 어떻게 하냐고요? 여당에서 개기는 것을 순전히 개인 카리스마+학식+토론능력으로 발라버릴 수 있는 인물이 바로 영조였습니다. 탕평책 자체만 놓고보면 선조/숙종의 무한손바닥뒤집기 술수보다 약발이 떨어져 보이지만 영조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신하들과 키배를 떠서 발라버릴 수 있는 능력자였으므로 가능했던 것..

집권후반기에 접어들어 소론도 씨가 마르자 영조는 외척을 통해 신하를 컨트롤하는 경영방식으로 바꿉니다. 영조가 선택한 외척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는데 사도세자의 처가인 홍봉한 일가와 정순왕후의 가문인 김귀주 일가가 그것입니다. 그것들이 탕평당(홍봉한)이니 청명당(김귀주)이니 하는 것들. 탕평당의 현실은 이 모냥이고, 탕평과는 그냥 집권말년에 벌인 정치숍니다.

4) 국정운영
영조는 어린시절 10년간을 사가에서 지낸 것을 자랑스러워 했던 사람입니다. 균역법의 도입은 경제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대목이죠. 백성들과의 만남도 자주 했다고... 평민들에게는 꽤 좋은 임금님이었던 걸로 보입니다.
친모가 무수리 출신이라는 것이 열등감으로 작용해 왕권에 대한 도전에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였다는 설명도 유력하지만, 저는 영조가 열등감이 있었다는 얘기가 그다지 믿기지가 않습니다(다만 100%정통 경종에 비해서는 정통성이 후달리기 때문에, 그런 문제점을 경종과 영조 두 사람의 우애가 각별했다는 것을 과장하여 무마시키려고 한 것같기는 합니다. 정작 경종 입장에서는 연잉군이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세제였을텐데 말이죠). 

5) 총평
개인능력도 출중하고, 신체는 나이를 먹을수록 회춘, 정치술수도 뛰어난데다가 성실하기까지 해서 세종에 비길만한 오랜 치세와 훌륭한 정치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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