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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과 교육...손학규 "똥지게 지고 나르던 어머니 눈에 선해"
게시물ID : sisa_20523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펌생펌사
추천 : 11/2
조회수 : 514회
댓글수 : 10개
등록시간 : 2012/05/28 01:35:17

헌법과 교육 2012. 5. 27 헌법 제31조 ①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어떤 소설가가 일 년에 한 번쯤은 대한민국 헌법을 차분하게 읽어본다는 말을 했었다. ‘간결한 표현들로 채워진 헌법의 언어들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라는 소설가의 말을 듣고, 그 후로 나도 가끔 생각이 막히면 헌법을 들춰 보곤 한다. 헌법을 읽고 있노라면 대한민국의 헌법에는 진보의 내용과 가치가 모두 담겨 있다는 그 소설가의 의견에 동의하게 된다. 지난 4월 25일 늦은 밤 나는 핀란드 헬싱키에 도착했다. 착륙 전 헬싱키 상공을 선회하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헌법을 찾아 교육에 관한 제31조를 다시 읽었다. 이번 핀란드의 방문 목적이 교육현장을 보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교육이 우리 헌법에서는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가를 먼저 보고자 했던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에서 교육이란 국민의 권리임을 정확히 명시하고 있다. 교육은 시장의 상품이 아니라 국민의 권리라는 헌법의 조문이 새삼스러웠다. 교육에 대한 우리 헌법의 정신은 분명히 진보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헬싱키의 라또까르따논 학교. 1학년부터 9학년까지 함께 하는 기초학교인데 각 교실마다 각양각색의 수업이 진행되고 있는 모습이 마치 커다란 놀이터 같았다. 종이 접기를 하고 있는 저학년 아이들, 온 몸을 물감으로 뒤집어 쓰고 열심히 그림 그리고 있는 아이들, 카드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 둥그렇게 둘러 앉아 진지하게 토론하고 있는 아이들, 공작실에서는 대패질하는 아이들, 콜라 캔을 바퀴로 하고 밧데리를 달아 자동차를 굴리는 아이들, 음악실에서 드럼치는 아이들, 부엌에서 케익 만드는 아이들, 가사실에서 재봉틀에 앉아 자기가 입을 옷을 만드는 아이들…… 선생님은 아이들 속에 섞여 있어서 누가 선생이고 누가 학생인지 언뜻 구분이 안 되었다. 학교 전체가 귀신들의 잔치집 같았다. 이 아이들이 전세계 학습능력 1위라니! 혼돈 속에 존재하는 정돈된 질서, 자율과 창의성을 나는 핀란드의 학교에서 보았다. 핀란드 교육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교사들의 위상이었다. 어떤 아이가 우리를 안내하는 교감선생 팔에 안기면서 몸이 아파 집에 가겠다고 떼를 썼다. 선생님은 다정하면서도 단호하게 안 된다고 했다. 저 아이가 공부하기 싫어서 저런다고 내게 귀띔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그 말에는 아이에 대한 사랑이 담뿍 담겨있다. 공부하기 싫은 아이들에게는 다른 놀이를 시키는 프로그램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핀란드에서 학교 교사는 가장 인기가 있는 직업이라고 한다. 대학원을 나와야 교사 자격이 주어지는데, 가장 우수한 학생들이 지망하는 직업이다. 대우가 최고는 아니지만 그런대로 괜찮고, 무엇보다도 사회적으로 가장 존경받는 직업이라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 어머니 생각이 난다. 중학교에 들어갈 때 입학원서를 쓰는데 어머니가 사범학교에 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다. 형과 누나가 ‘사범학교는 고등학교 과정’이라고 말하니 어머니가 물러나셨다. 삼 년이 지나 고등학교 들어갈 때가 되자 어머니가 또 ‘사범학교에 안 가느냐?’고 물으셨다. 형과 누나가 ‘사범학교는 옛날 얘기’라고 하면서 그냥 경기고등학교로 원서를 썼다. 내색은 크게 안 하셨지만 어머니는 못내 뭔가 서운하신 모양이었다. 어머니에게는 선생님이 최고였다. ‘조금 먹고 가는 똥 싸라’고 하면서 내가 선생님이 되기를 바랐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두 분 다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분명 어머니에게는 교사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자랑스럽고 보람있는 직업이었다. 그러니 당시 사람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경기중학교, 경기고등학교에 갈 실력이 충분히 되는 아들이었지만, 어머니는 사랑하는 막내가 사범학교에 가서 선생님이 되는 게 더 좋았던 것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세 살 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시흥초등학교 교장으로 임명받고 안양에 있는 교육청에 가시다가 구름다리에서 차가 굴러 현장에서 돌아가셨다. 졸지에 아버지를 잃은 어머니는 일곱이나 되는 아이들과 함께 살기 위해 갖은 고생을 다하셨다. 아침에는 산에 가서 땔나무를 해 오고, 낮에는 밭에 나가 김매고, 저녁나절에는 밭에서 나온 채소 등을 시장에 내다 팔았다. 우리도 가끔 옥수수를 쪄서 길에 나가 팔았다.  젊어서 아버지와 같이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아이들이 많아지면서 (어머니는 아이 열 명을 낳았다) 학교를 그만두고 집안 살림을 하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무서운 생활력을 보였다. 당시는 밭농사를 짓는데 거름으로 인분을 쓰던 때다. 어머니는 동네에서 인분을 얻어 똥지게를 지고 나르며 농사를 지었다. 손발에 똥독이 올라 퉁퉁 부르터 있던 것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동네 어른들은 이런 ‘사모님’을 직접 대면하기가 면구스러워 어머니가 밭일을 하고 있을 때는 멀리서부터 길을 피해 돌아가곤 했다고 한다. 돌아가신 교장 선생님 사모님이 똥거름 주는 것을 직접 대면하기 어려워 길을 돌아가던 동네 어른들의 마음 가짐. 이것이 교육자를 대하는 우리사회의 모습이었다. 뭇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경기중·고등학교를 마다하고 사범학교 가서 선생님이 되라는 어머니의 말씀. 이것이 교사들의 긍지와 자부심이었다. 요즘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겠지만 학생이 선생님에게 폭언을 하고 폭행까지 가하는 경우를 본다. 차마 글로 옮길 수 없는 일까지도 생기고 있다. 선생님이 자식에게 벌을 주었다고 학교에 찾아가 항의하는 학부모를 보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왜 이렇게 되었나? 한마디로 교육의 상품화 때문이다. 우리 헌법은 분명히 교육은 시장의 상품이 아니라 국민의 권리임을 명확히 선언하고 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교육은 ‘사람’을 만드는 것인데 오늘 우리 교육은 자꾸 성적이 좋은 ‘상품’을 만드는데 치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전에는 학교에 가면 우리 아이들을 ‘사람’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에 선생님을 고마워하고 존경했는데, 요즘은 선생님을 성적 좋은 입학기계, 출세 기계를 만들어 내는 보조도구 쯤으로 보니까 선생님을 우습게 보는 사회가 된 것이다. 유럽의 복지국가에서 가장 선호하는 직업으로 교사가 자리잡게 된 것도 교육을 국민의 권리, 국가의 의무로 삼아서 교육을 시장에 내놓지 않고 국가가 책임을 지는 철학과 문화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한경쟁, 성적제일주의의 교육과정에서는 학생도 선생님도 행복하지 않다. 대신에 사람과 자연을 중시하고 생활 속에서 협동과 실험을 위주로 하는 교육과정이 학생들과 선생님에게 함께 행복을 주고 있다는 것을 나는 핀란드에서 보았다. 교육이 욕망의 세습 혹은 재생산에 불과하고 공교육이 사교육의 보조수단 쯤으로 인식되는데서 선생님에 대한 존경이 생길 수 있을까?  나는 젊어서부터 ‘선생님이 존경받는 사회’가 선진국의 기준이 된다고 생각해 왔다. 국민이 모두 사람대접 받는 사회가 되면 선생님이 존경받는 사회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5월 15일 스승의 날에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선생님들 몇 분을 초청해 점심을 대접하는데 나 자신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에 대한 존경, 무한경쟁 대신에 협동교육, 아이들이 행복한 학교로 교육이 바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육철학이 우선적으로 바뀌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헌법제31조를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출처] 헌법과 교육|작성자 손학규 http://blog.naver.com/hqlove 서민중심, 사람중심의 사회로, 함께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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