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겐 한계가 있다. 어느정도 한계치 이상의 충격이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 사람이 어떤행동을 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훈련소를 마친 후 자대배치를 받고 소대를 배정받았을 때 행운을 빈다는 말과 함께 날 도축장 끌려가는 소 보듯 쳐다보던
인사계원의 눈빛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 이유를 알아내기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이유는 우리소대
고참들이 악독하기로 유명한 소대였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건 악랄한 고참들의 대부분이 제대를 몇달 안남긴
말년들이란 것이었다. 몇 달만 꾹 참자고 다짐했지만 아직 사회물이 덜 빠진 나에겐 힘든 시간들이었다. 힘든 나날들을 보내고
있을 때 나에게 많은 힘이 되어준 고참이 있었다. 나와는 5개월 정도가 차이나는 고참이었는데 항상 웃는 얼굴이 인상적인
고참이었다. 그나마 내가 전입왔을 때만해도 대부분의 고참들이 말년이라 많이 독기가 빠져 있는 상태인대도 고참들의
상태는 매우 지랄맞았기에 그 전엔 얼마나 심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런 고난을 반년이나 겪어왔으면서도 그 고참은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부대에서 군종병 업무까지 겸할 정도로 독실한 크리스쳔 이었던 그 고참은 항상 나를
격려해 주곤했다. 내가 군대에서 만난 사람들 중 아니 지금까지 알고 지내던 사람들 중에 가장 착한사람 중 한명이었다.
고참들이 하나 둘 전역하고 힘든 시기를 같이 보낸 우리의 사이는 더욱 돈독해졌다. 항상 웃는 얼굴로 사람을 대하고 후임들에게도
친절하게 대했기에 모두의 귀감이 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너무 답답할 정도로 착한모습이 정말로 날 답답하게 만들때가 있기도 했다.
그 고참이 항상 입버릇처럼 하는 말은 고문관이 날때부터 고문관이 아니다. 우리가 제대로 챙겨주질 못해서 고문관이 되는것이다.
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의 그러한 노력으로 고문관의 모습을 벗어난 후임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성인들의 인생이
늘상 그렇듯 그에게도 고난이 찾아왔다. 그 고난은 한 후임이 전입오면서 부터 시작됐다.
그녀석의 별명은 해리였다. 작고 마른 체격에 겁먹은 듯 동그란 눈. 그리고 그 눈에 어울리는 동그란 안경테까지. 영화에서 해리포터가
튀어나온 것 같이 생긴 모습이었고 그때부터 녀석의 별명은 해리가 되었다. 처음 내무실에서 녀석을 본 순간부터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고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지금까지의 고문관 후임들이 수류탄이었다면 녀석은 대포동 급이었다. 그 고참의 분대로 배치받은
녀석은 전입오자마자 사고를 뻥뻥 터트리기 시작했다. 전입 후 일주일이 지나서 까지 요자를 쓰는가 하면 근무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부터는
불침번이 깨우는데 못일어나기. 암구어 까먹기. 총기함 열쇠 잊어버리기 등 고문관의 교과서 같은 모습을 보였고 두달이 채 안되
역대급중의 역대급이라는 평가를 듣기 시작했다. 이쯤에서 궁금해 지는건 그 고참의 대응이었다. 다들 손을 놓고 포기하기에 이르렀지만
그 선임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끝까지 인상한번 안구기며 격려와 사랑으로 보듬는 그의 모습을 보며 드디어 우리부대에 성자가
강림했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건 마치 무엇이든
뚫을 수 있는 창과 무엇이든 막을 수 있는 방패의 대결을 보는 듯 했다.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는 기색이 보일때 쯤 우리는 다시 해안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달라진 환경에 나아지던 녀석의 모습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새로 해안에 투입되어 부대 정리하랴 근무나가랴 정신없는 와중에 우리의 해리는 또 대형사고를 치고 말았다.
그날 근무에 대대장 순찰이 있을거란 말이 있었고 예상대로 그날 밤 대대장이 순찰을 왔다. 그런데 후방경계를 서던 녀석이
그대로 수하도 못대고 뚫려버리고 만것이다. 미리 예고까지 해줬건만 속수무책으로 뚫려버린것이다. 차가 기동로를 타고 한참을
내려오니 당연히 불빛이 보였을테고 이런경우는 백이면 백 졸거나 정신줄을 놓고있는 경우였다.그렇게 엄청나게 깨지고 난 후
근무가 끝나고 모두의 시선은 당연하다는 듯이 녀석에게 몰려들었다. 하지만 녀석은 끝까지 자신은 졸지 않았고 아무것도 지나가지
않았다고 잡아떼기 시작했다. 어이가 가출한 고참들은 녀석을 향해 속사포 갈굼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이 개x퀴야 그럼 대대장이
하늘을 타는 레토나를 타고 순찰을 왔구나. 니가 있던 초소는 9와3/4 초소였구나. 미천한 머글새퀴.등등 온갖 욕설이 쏟아지고
한 고참이 스투페파이! 라고 외치며 옆차기를 날리려던 순간 조용하던 천사고참이 입을 열었다. 놀랍게도 그는 녀석을 감쌌다.
어쩌면 지금 가장 빡쳐있는 사람이 본인 자신일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좀더 신경쓰지 못한 자신의 탓이라며 녀석을 옹호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관대함에 우리는 모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간 보이지 않던 미간의 주름이 신경쓰였지만 그 고참의
참을성은 거의 김낙수 수준이었다. 그정도면 그는 참을성의 왕자를 넘어 이미 생불에 가까운 수준의 인간이 된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그의 한계였다.
어찌보면 매우 사소한 일이었다. 내무실 청소를 하고 있는 중에 침상청소를 하고 반대편 침상으로 건너가려던 해리를 그 천사고참이
불러세웠다. 그러더니 갑자기 엄청난 쌍욕을 내뱉기 시작했다. 처음보는 고참의 모습에 깜짝 놀란 우리들은 말릴생각도 못하고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성자는 온데간데 없었다. 마치 적그리스도의 재림을 보는듯한 장면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침상을 건너가면서
해리가 그 고참을 슬리퍼를 신고 넘어간 것이었다. 하지만 이 사소한 행동 하나가 그의 인내심의 한계에 불을 당기는 도화선이 되었다.
그 짧은 시간동안 한국어로 할 수 있는 욕은 거의 다 들은것 같았다. 2년 가까이 쌓였던 그의 울분이 그 몇분 사이에 터져 나오는 듯 했다.
그리고 결과는 14박15일 동안 면벽수련을 할 수 있는 마법의 편지였다. 그를 포함한 몇명의 고참들이 영창으로 직행했고 해리는 다른부대로
전출되면서 해리포터가 호그와트를 떠나 듯 우리 곁을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