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다이 요코 - 잠자는 거리 혹은 가라앉는 지층
게시물ID : art_370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8비트
추천 : 4
조회수 : 63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05/29 23:30:23
1. 꿈

전철은 경쾌한 소리를 내며 달리기 시작했다
도서관과 인터넷에서 정보를 얻어
프레젠테이션 준비는 끝났다
쉬는 시간에는 쇼윈도를 보러 다니고
붉은 샌들을 신어 보았다
오늘 밤의 초대 자리에는
질 좋은 와인을 마실 수 있을 것 같다
다음 휴일에는 그림을 보러 갈까
영화를 보러 갈까 수영장을 갈까
고민이다

바라보는 만큼의
뭐든 다 있었으므로
만족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눈을 뜨니
나는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고
반들반들한 대지
지표는 서늘한 탄력이 있고
만져 보니 파르르 흔들린다

집이 없다 빌딩이 없다
풀도 나무도 나 있지 않았다
바라보는 만큼의
지평선 구석구석까지
젤리 상태의 지층이 뒤덮여 있다


투명한 지층을 들여다보니
내가 사는 거리가
화석처럼 잠들어 있다


2. 일과

이 반들반들한 대지 위에서
나는 기를 게 없다

손에 닿는 것 어루만지는 것
꼭 껴안는 것
무엇 하나도

젤리 상태의 지층에 심어 놓을
씨앗 한 톨도

다만 매일
해가 뜨고 해가 지고
하늘을 채우는 물빛과 짙은 감색
한순간의 오렌지색만이
여기에 남겨진 전부였다

나는 그것을
‘당신’이라고 부르며
매일같이 바라보고 살았다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면
조용하게 사랑할 수 있었다

당신의 눈부심에 몸을 떠는 것도
당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도

하지만 조금이라도
사랑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면
마음이 무너져
금세 나는
혼자임을 깊이 알게 되었다

지금 내가 기를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쏟아지는,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뿐


3. 또 하나의 눈뜸

눈을 뜨는 것으로 시작되는 꿈을
밤마다 꾸고 있다면
하물며 그것이
채색과 소리와 질감으로 가득 찬
일련의 이야기로 이어져 있다면
현실과 꿈의 구분을
어디서 그으면 되는 것인지

어제 
젤리 상태의 지층에 가라앉는
꿈을 꾸었다

천천히, 천천히 가라앉으면서
내가 사는 거리로 내려갔다

오래 살아 정이 든 방문을 열고
그리운 벽지를 더듬어 가자
그는 담요에 덮여
희미한 숨소리를 내고 있다

눈을 뜨면
의심할 것도 없이 양복으로 갈아입고
여느 때의 회사로 향하는
그런 잠자는 얼굴이다

그리고 나는
파르르 차가운 젤리 상태의 지표 위
오늘도 꿈에서 깨어났다

대지에 수직으로
발딱 일어서면
이 신체의 모든 무게로
정말로
가라앉을 수 있을까

일어서 보자 그리고 가라앉는다면
천천히, 천천히
가라앉자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의 잠을 깨우러 가자

이 지층 아래
작은 상자 모양의 방에서
그 사람이 아직도
또 하나의 눈뜸을
믿고 있다면


4. 곡괭이를 든 남자

“부술까요 이 지층을?”
당돌하고 뜨겁게 말을 건네 온, 처음 보는 남자는
곡괭이를 치켜들었다

다음 순간
지층으로부터 솟아오르듯 나타난 사람들에게
붙잡혔다

“놔둬! 방해하지 마라!”

사람들은 표정 없이
최면술에 걸린 것처럼
흔들흔들 손발을 움직이며
곡괭이를 든 남자에게
우르르 일제히 몰려간다

“이봐! 그만둬”

겹쳐지는 사람들의 무게로
지표는 조금씩 움푹 패어 간다

“그만둬! 눈을 떠!”

곡괭이를 든 남자와 사람들은
산처럼 쌓인 시체처럼 겹쳐져서
눈 깜짝할 사이에
젤리 상태의 지층 속으로
가라앉아 갔다

그 자초지종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가라앉을 때 곡괭이를 든 남자는
“죽은 듯이 살지 마라!”
절규하고 있었다

남자들을 삼켜 버린 구덩이는 곧바로
원래대로 메워졌으나
지층 밑에서 밀려 올라오는 진동으로
지표는 파르르파르르 흔들리고 있었다

곡괭이를 든 남자가 아직도
외치고 있다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