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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본명은 김성주
게시물ID : sisa_2697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7418523
추천 : 7/12
조회수 : 1798회
댓글수 : 16개
등록시간 : 2007/02/01 02:24:12
. 김일성은 당시 전설적 항일영웅의 이름으로 이 이름을 만주에서 마적질하던 김성주가 사칭한것 뿐이다. 소련은 북한에 괴뢰정부를 세우기 위해 만주 마적두목 김성주에게 소련군 장교계급을 주어 북한에 끌고 들어오면서 주민들에게는 항일영웅 김일성이 입국했다고 선전했다. 북한주민들은 정말 말로만 듣던 영웅 김일성이 온 줄 알고 열광했으나 정작 평양 집회에 나온 이른바 김일성을 본 시민들은 그 용모에 놀라고 말았다. 수염이 성성한 노장군을 예상했던 평양시민들 앞에 나타난 김일성은 새파란 애송이였던것. 소련과 김성주는 김일성의 명성을 자신들의 집권음모에 이용했던 것이다. 북한 정권의 시작은 이렇듯 사기극으로 시작된 정권이다. 우리는 이러한 북한 정권의 사기성과 불법성을 밝히는 의미에서 그 사기의 중심인물인 김성주를 그 본명으로 불러 줘야 한다. 우리가 그를 김일성으로 부르는것 자체가 그의 사기극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그리고 김성주가 스탈린을 들볶아 일으킨 6.25동란을 한국전쟁으로 부르는 것도 안될 말. 6.25는 불법정권이 일으킨 무장난동이지 국가간의 전쟁이 아니다. 물론 6.25는 남침이며 '김성주의 亂'이다. ================================================================= 김성주와 김일성에 대해 긴가민가하는 사람이 많은가 본데. 진짜 김일성 장군으로 알려진 김광서장군이 우리 정부에 의해 서훈되었다는 것.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크다. 더구나 이 서훈이 좌파정권이라는 평가를 받는 김대중정권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 이건 보기에 따라 다른 시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일단 긍정적인 해석이 가능한 것이고. 그동안 학계가 김성주를 항일투사 김일성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반박할 자료가 없었기 때문인데 당시 김일성 활동무대인 만주가 중국땅이 되면서 우리 학자들이 접근하기가 어려웠고 흘러나오는 자료는 적은데다가 맘먹고 조작해대는 북한측 자료가 넘쳐나는 탓에 어쩔수 없이 김성주를 김일성으로 인정할 수 밖에 없었지. 즉 이제껏 김성주가 김일성으로 인정받은 것은 객관적인 대다수의 자료가 김성주가 즉 김일성이라고 가리키고 있다기 보다는, 일방적으로 자기가 왜정때 항일투쟁한 김일성이라고 북치고 장구치고 떠들어대는데 대해 그걸 아니라고 할 충분한 자료를 구할 수 없어 그냥 방치하다시피 인정해 주는 분위기였다고 할 수 있지. 그런데 이제 상황이 달라졌지. 우선 가장 큰 변화는 소련의 붕괴야.. 그리고 그 와중에 많은 기밀문서가 기밀해제되어 일반인과 학자들의 접근이 가능해져서 이전에는 알 수 없었던 새로운 사실들이 나타나고 그 중에 김일성 관계 사실들도 드러난거지. 그 외의 중국 개방화도 큰 영향이고. 이 와중에 이전에는 그저 전설상의 인물 혹은 김성주의 주장대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김일성에 대한 보다 더 확실하고 자세한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고, 그가 바로 김광서 장군이며 그의 행적이 밝혀지면서 정부에서 서훈까지 하게 되었던 거지. 이 김광서 서훈이 어떤 큰 의미를 가지느냐 하면 지금까지 남한도 암암리에 인정하던 북한의 김일성 관련 주장을 이제는 더 이상 정설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야. 이제까지 김일성 하면 북한 김성주를 가리키는 것이었는데, 남한 정부에서 진짜 김일성이라는 김광서를 서훈함으로써 그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북한의 주장의 신빙성과 김성주의 정통성(?)을 상당히 희석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지. 이것은 김성주의 신격화로 체제를 유지하는 북한에게는 우리가 생각하는것 이상으로 위협적일 수 있는거야. 체제의 뿌리가 흔들리는거지. 물론 이 상황 자체는 아직 굳어진 것은 아니야. 불확실한 면도 있고 반박을 받을 여지도 많이 있어.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제까지의 경색된 상황에 변화가 일고 있고, 균형이 깨지고, 불안한 상태가 되었다는 거야. 지구가 돈다는 말 한마디 만으로 혹독한 고문의 협박을 받던 갈릴레이 시대의 경색성에서 기존의 천동설이 의심받고 시험의 대상이 되는 대 전환기로 접어든 거나 마찬가지야. 이렇게 흔들리는 도그마를 우리는 방치해서는 안된다. 자신이 신으로 믿던 대상이 사실은 가짜였다. 항일영웅이 아닌 사칭양아치였다는 사실을 접할 때 기존 도그마를 기초로 세워졌던 모든 것은 흐르는 모래위의 누각처럼 일순에 무너지는 거지. 우리가 김성주라고 불러야 하는 까닭은 이와 같아. 그의 실체를 까발리는 것이지. 그를 김성주라고 부르면 그는 더이상 항일 영웅이 아닌 발가벗은 인간 김성주가 되는 거야. 그는 더이상 백마를 타고 민족의 원수를 쳐부순 김일성이 아닌 마적질이나 하고 다니며 양민을 털고 다니던 양아치 강도떼의 두목이 되는거지. 또한 '민족의 통일을 위해 통일전쟁을 감행한 위대한 민족주의자'가 아닌 오직 자신의 야욕을 위해 동족에게 총칼을 겨누고 수십만을 살해하며 민족에게 수십년이 지나도 치유가 되지 않는 깊은 상처를 입히고 세계 평화를 크게 훼손시킨 민족의 대 역적이 되는 거야. 주사파들의 구호중에 '위수김동'이 있다면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라고? 우리가 김성주라고 부르는 순간 이 구호 역시 아주 우스꽝스런 정신병자들의 헛소리로 변하지. 김성주에게 누덕누덕 덕지덕지 쳐발라놓은 신격(神格)을 바탕으로 꿰어맞춰 놓은 주체사상도 그를 김성주, 그 정체가 드러나는 본명으로 부르는 순간 공중누각처럼 무너지는 거다. 물론 여태까지 주체사상을 철옹성처럼 지키던 주사파들도 허공에 주먹질하는 사이비종교 신도가 되는거지. 이야기가 좀 옆으로 간듯 하지만 여하튼 정부의 김광서 서훈은 위에서 설명한 우리민족의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을 수 있는 단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둘 수 있어. 김대중 정권이 이 모든것을 염두에 두고 김광서 서훈을 했는지는 알 수 없고 단지 김광서가 공산주의계열 독립운동가라는 점이 서훈의 큰 요인이었을 지도 몰라. 그러나 김광서 서훈이 가지는 이러한 의미가 있는 이상, 우리는 이를 구지 버리는 어리석음을 저질러서는 안되겠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지. 우리는 김성주라고 불러야 한다. 그래서 이 자그마한 사건이 그 지니는 의미를 발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 http://kr.dcinside7.imagesearch.yahoo.com/zb40/zboard.php?id=news&page=4&sn1=&divpage=28&banner=&sn=off&ss=on&sc=off&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70573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blogId=401&logId=660868 전설의 김일성 장군 유족에 건국훈장 수여 (옥포誌 2000년 1월호) 정 현 백 한인들 사이에 전해져 온 김일성장군에 관한 전설은 한인들이 그저 알고 있기로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주권을 약탈하던 그 때부터 '김일성 장군'이란 용맹한 항일전사가 있어서 오랜 세월을 두고 韓滿국경 혹은 露滿국경에서 일본의 군경과 숱한 전투를 백전백승으로 치루어 낸 특출한 군략가이며 애국자였다는 이야기였다. 구전으로 퍼져 와 그야말로 전설적이었던 까닭에 주인공 '김일성'의 이름자가 金日成인지 아니면 金一成인지 또 아니면 金一星 또는 金日星인지도 확실치 않았다. 이러한 전설이 생겨날 만한 사실상의 근거가 있었다는 점이 밝혀졌는데 그것은 '金一成 장군'이란 항일투사와 또 한 사람, 같은 발음의 '金日成 장군'이라는 항일투사 두 사람의 투쟁사에 얽힌 이야기였었다. 그 전설적 김일성장군 그 중의 한 사람인 김경천 장군의 혈육이 8•15 50주년을 맞아 지난 98년에야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게 되었다고 하니 후손 된 우리로서 심히 민망스러워 몸둘 곳을 모르겠지만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작년 8•15 50돌 기념식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은 독립군 장령 김일성장군(金一成. 1888년 함남태생) 즉 김경천 장군에 관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백마를 타고 번개같이 날아다녔다는 김경천 장군의 본명은 '김광서'로서 함경남도 북청출신이며 1911년 일본 육사 23기생으로 기병과를 졸업하고 도쿄 기병 제1연대에 근무한 바 있고, 1917년 1월에서 9월까지는 육군기병실시학교에서 용병법과 기마술을 교육받은 바 있으며 일본육사출신 한인 친목 모임인 "전의회"의 회장으로서 그 회원 중에는 일본 육사 26기 흥사익, 이응준, 27기 김석원, 김인욱 등 34명이 있었다. 앨범에 적힌 김경천(본명 김광서)의 생일은 1887년이나, 종로구청 호적계의 제적서고에 있는 그의 호적등본에는 1888년 6월 5일로 되어있으며, 1919년 6월 망명이전까지의 주소는 사직동 166번지인데 1912년 12월 2일 본인 출원에 의한 취적 등록이라 되어있고 본적도 이곳으로 옮겨져 있고, 본관도 김해에서 시흥으로 되어 있는데 본인 출원에 의한 정정이라 기록되어 있다. 동향인의 증언에 의하면 북청군 해안의 승평태생임이 틀림없다고 한다. 육사 재학 중에 이름을 김광서로 개명했고 그 이전의 이름은 김현충이며 김경천, 윤경천 등의 별호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父 김정우는 구한말 포병부령까지 지낸 자로서 1857년생이며 1894년 5월 38세의 나이로 일본 경응의숙보통과에 입학하였다. 그의 반에는 윤치성(윤치영의 형) 노백린 등이 함께 했는데, 이들은 육사 11기로 1899년에 졸업하게 되고 김정우는 동경고등공업학교를 거쳐 포병공작창에서 총탄제조법을 익힌 후에 돌아와서는 군기창장을 지낸 바 있으며 1906년에는 윤치성과 함께 부령으로 승진된 바 있는 사람이다. 1919년 2월 20일 김경천은 병가를 얻어 귀국하여서는 6월에 일본육사 3년 후배인 이청천(지대형)과 함께 만주로 탈출 신흥무관학교에 찾아가 독립군 교육부터 담당했다. 이 소식에 고무되어 열혈청년이 600여명이나 신흥학교에 몰려들었다 한다. 이 때에 구한국군 정위(대위) 신팔균도 함께 교관으로 있었는데 세 사람이 합심단결하여 조국광복을 쟁취하자는 뜻에서 天자 돌림 별호를 쓰기로 하여 신동천, 김경천(또는 윤경천, 母가 윤씨), 지청천(이청천, 母가 이씨)으로 서로 불렀는데 한인 사회에서는 이들을 남만삼천(南滿三天)이라 부르며 따랐다고 한다. 이 남만 3천에 열혈 청년장교가 한 사람이 더 끼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철기(鐵騎)란 별호를 가진 이범석(李範奭)이었다. 그는 그해 봄에 중국의 운남성에 있는 운남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에 장교로 배치되었는데 남만의 신흥무관학교가 독립군의 집결지라는 소문을 듣고 그해 여름에 그리로 찾아와서 남만 3천과 합세했다. 이들 4사람의 장교들은 당면 목표를 다음해(즉1920년) 3월 1일을 기해 국경을 넘어 조선 땅으로 진격함으로써 3•1민족봉기를 재현시키는 일대 계기를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이범석씨(1900-1972) 증언에 따르면, 1920년 3월 1일을 기하여 국내로 진격하기 위한 거사 계획의 일환으로 김경천은 1919년 초겨울에 무기구입차 소련으로 떠났다고 한다. 그때 시베리아에는 볼셰비키 혁명의 파급을 막기 위해 일본군이 출병해 있었는데 일본군의 한인 독립운동 근거지에 대한 공격 때문에 김경천은 독립군을 규합하여 日軍과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의 적은 동지라는 원리에 따라 赤軍(볼셰비키군)과 연합하여 일본군 또는 白軍(反볼셰비키군)과 싸웠는데 이때에 그는 김일성이란 또 하나의 별호를 쓰게 되었다. 1920년대 전반의 독립운동 소식으로는 김경천에 관한 기사가 가장 으뜸으로써 그에 관한 기사내용이 허다하나 1923년 7월 29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빙설에 쌓인 서백리아(西伯利亞)에서 홍백전쟁을 한 실지 경험담'이란 장문의 인터뷰 기사가 유명하다. 오늘날 누구나 읽어 볼 수가 있다. 전설의 김일성 장군 즉 김경천 장군은 매우 낭만적인 사람이었다. 그 인터뷰기사 말미에는 그가 읊은 '시베리아의 별'이란 시가 실려 있는데 옮겨본다. 뜬구름도 방황하는 시베리아 별 칼을 짚고 출로 서서 흰뫼 저편을 바라보니 사랑하던 무궁화는 희미하고 자유에 목마른 사람이 이천만 애처롭다 뜻이 열 곳이 없으므로 흑룡수에 눈물 뿌려 다시 맹세하노라 그러나 이 전설의 김일성 장군 김경천에게도 불행은 닥쳐왔다. 동맹이었던 볼셰비키의 배신으로 독립전쟁의 꿈이 수포로 돌아갔다. 1922년 가을, 일군이 시베리아로부터 철수하자 볼셰비키는 의리부동하게도 한인 독립군부대들에 대해서 赤軍에의 편입, 영외로의 추방 무장해제 등등의 조치를 취했던 바 "약소민족 해방" 구호에 고무되어 赤軍의 편에 섰던 김경천으로서는 그들의 배신과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부하대원들을 소만 국경으로 이동시켜 둔전병제를 실시하려고 간도방면으로부터 많은 대원들을 모집하여 병력이 일천여명에 이르게 되었고 구로지꼬 부근에 무관학교까지 설립할 계획까지 세웠으니 볼셰비키들의 의도와는 정반대 되는 입장에 서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1925년 4월 28일자 매일신보'에는 '김광서가 독립노선 문제 때문에 공산주의자들과 결별하였다'는 보도가 실려있고 '1925년 6월 21일자 동아일보'에는 '김광서가 1924년 3월에 한족군인구락부를 조직하여 본부를 블라디보스토크에, 지부롤 니콜스크에 두고 제2차 국민회의를 조직하려는 등 그 활동이 매우 컸으며 초지를 관철하기 위하여 동지를 규합하여 대대적인 활동을 개시하고자 한다'라고 전한 것을 마지막으로 그의 소식은 두절되었다. 그후 '1925년 7월호 '전의회'의 회보에 '김광서의 부인이 세 딸을 데리고 한국을 떠나 어디로 사라졌다'는 소식이 실려있는데 김경천(본명 김광서)에 관한 마지막 소식이었다. 김경천과 시베리아에서 얼마 동안 활동을 같이 한 적 있는 "김 마트웨이"라는 사람(소련거주한인)이 20여년 전에 그의 회고록에서 밝힌 김경천에 관한 기록에 의하면 김경천은 그 후 소련의 여러 군사기관에서 군사지도원 또는 원동조선사범대학의 군사교관으로 있은 적이 있고 1933년부터 1936년까지는 소련당국에 의하여 투옥되었는데 그 원인은 밝혀진 바 없었으나 스탈린의 민족주의 말살정책의 일환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석방된 이듬해인 1937년에 다른 한인들과 함께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되는 비운을 맞게 되고 그곳의 한 협동농장의 작업반장으로서 노동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1939년 2차로 체포된 다음 그 후의 소식은 알 길이 없으나 풍문에 의하면 독소전쟁 발발후 서부 전선의 로고스프스키 장군 밑에서 대령계급으로 사단을 지휘하다가 1945년 초에 전사했다는 얘기도 들렸다. 그런데 금번에 찾은 혈육으로부터 그분이 감옥에서 심장질환으로 병사했다는 사실과 소련정부가 그의 사망 17년만인 59년에 복권시켰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http://www.khc21.net/new/freeboard/freeboard.html?ID=230&Board_Page=View&TableCode=B_freeboard 제 목 : 진짜 김일성(김광서)장군과 가짜 김일성(김성주).. 작 성 자 : 007 북한 정부를 수립한 김일성은 가짜 김성주이며 만주 항일 빨치산 투쟁가이며 소련정부 지원으로 성장한 항일운동가는 이육사 시인이 광야 시로 쓴 진짜 김일성 (김광서) 장군이다 1.진짜 김일성(김광서) 장군 김광서(金光瑞)장군의 본명은 김해 김씨 김현충이며 일본육사 23기 기병과를 다닐때는 김광서으로 사용했고 일본군에서 탈주하여 만주빨치산 투쟁을 할때는 시흥김씨(始興 金氏) 시조 김경천으로 사용하거나 윤경천(모친의 성을 본따) 사용했고 일본의 적인 소련군과 공동작전으로 항일운동을 할때는 김일성으로 사용했다 ㄱ.일본육사 출신 조선인 출신 모임 전의보 회보 全誼 1926년 1월 17일 거제된 글 김부인(탈주해 시베리아로 간 육사 23기 기병과 김광서 부인= 김일성부인의 처)은 몇년 전의 부채와 생활난에 시달려 작년 겨울 살던 가옥을 매각, 부채를 정리하고 남은 돈으로 생겨를 꾸려 가면서도 지부인(지청천 또는 이청천 장군 부인)의 비참한 경우를 동정 가옥매각 때 일금 100엔을 지 부인에게 기부하였다 ㄴ.김광서장군의 활동 글은 동아일보나 일본육군 자료로 알 수 있다 ㄷ.김광서장군이 김일성장군이라는 주요 책자 (ㄱ)신흥무관학교---지음(안천-서율교육대 교수). 출판사(교육과학사) (ㄴ)조선군사령부--지음(古野直也) 옮김(김해경). 출판사(대명사) ㄹ.이육사 시인의 광야 시의 주인공 ㅁ.일본육군사관학교 한국인 출신은 114명이며 홍사익장군처럼 별 2개 필리핀군도 부사령관 출신도 있으며 김광서(김일성)이나 지청천(이청천)장군처럼 일본군에서 탈주하여 만주 항일운동가 출신도 있다 그리고 박정희전대통령처럼 일본군 중위출신으로 있다가 광복군으로 귀순하여 한국땅으로 들어 온 분도 있다 2.가짜 김일성(김성주)--북한 최고책임자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이며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 출생했으며 아버지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 사이에 장남이며 그의 동생 김철주. 김영주등을 두었다 어려서는 부모를 따라 만주 지린성(吉林省) 푸쑹(무송)으로 이사하였고 1926년 지린 육문중학에 입학하였으나 1929년 중퇴 하였다 그 뒤 소련에서 특무공작요원으로 훈련을 받고 1945년 소련군 소좌가 되었다 8.15해방과 더불어 따라 평양으로 들어와 김영환이라는 가명으로 정치공작을 폈는데 그 해 10월 14일 소련군 사령관 로마넨코가 평양시민들 앞에서 <김일성장군>이라고 그를 둔갑시켜 소개한 뒤부터 김일성으로 행세하였다 처음에는 자신을 제6사단장 및 제2방면 군장이던 김일성이라 주장하였다 그러나 1949년부터는 동북항일연합군과의 관계를 내세우지 않고 만주사변후부터 독자적 항일운동 유격대를 조직하여 일제와 싸운 것 처럼 날조하였다 ㄱ.김일성은 박헌영. 여운형등이 주도하여 건국한 조선인민공화국에서는 서열이 중앙위원회 위원에 불과했다(자료--조선공산당사와 조선인민공화국) 조선인민공화국 대통령 이승만박사 부통령 여운형선생 수상 박헌영 내무부장 김구선생 외무부장 김규식선생 군사부장 김원봉선생 ㄴ.1992년 소련군부 쿠데타 지지(자료--소련 KGB 김일성 파일) 김성주는 소련군 극동사령부 도움으로 북한정부 권력을 장악했다는 근거 1980년대 이후 국가보안법 위반자 중 주체사상 즉 김일성주의를 무분별하게 수용하여 김일성을 신격화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극우세력은 한국 현대사를 부분적으로 수용하여 김일성 신화운동에 일조해왔다 민혁당 사건때 명문대 출신 변호사가 있었고 사회 각 분야 엘리트층이 김일성주의를 신봉해왔다는 것은 충격적이었다고 본다 http://kr.blog.yahoo.com/lki6095/1355195.html?p=1&pm=l ‘김일성 수수께끼’의 주인공 김경천 2005/06/17 오전 9:38 | 역사속의미스테리 ‘김일성 수수께끼’의 주인공 김경천 일본 육사 출신으로 만주 망명, 시베리아서 ‘백마 탄 항일 영웅’으로 칭송 연해주 마적 소탕… 소련서 간첩죄로 체포돼 1942년 심장질환으로 숨져 ▲ 김경천 장군의 생전 모습. 김경천(金擎天)의 본명은 김광서(金光瑞)이다. 일본 육사 출신인 그는 1920년대에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한 대표적 항일 명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런 그를 당시 언론들은 ‘김 장군’으로 칭송하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1920년대 중반 이후 김 장군은 종적을 감춘다. 세상 사람들은 이후 항일투쟁의 전설적 영웅으로 김 장군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국경지대에서 전개되는 국내 진공작전은 김 장군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인양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결국 이러한 인식은 해방 이후 김일성 장군론과 연결되게 된다. 김경천 장군이 진짜 항일영웅 김일성이란 것이다. 이후 1990년 한ㆍ러 수교 이후 김경천 장군에 대한 많은 사료들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카자흐스탄에 살고 있는 딸과 모스크바 근교에 살고 있는 아들이 한국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김경천은 김일성과 별개의 인물이란 점이 확연히 밝혀지게 되었다. 한국서 오랫동안 김일성 장군으로 알려졌던 김경천 장군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2•8 독립선언으로 만주 망명 결심 김경천 장군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일본군 중위로 3•1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큰 화제가 되었던 인물이다. 만주로 망명한 이후에는 서간도 지역에 위치한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서 지청천(池靑天), 신동천(申東天) 등과 함께 남만주 3천(天)으로 만주지역 항일독립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창해청년단, 수청고려의병대, 고려혁명군 등에서 활동하며 러시아 지역 항일투쟁을 선도하였다. 일본 육사 기병과 출신인 그는 시베리아에서 투쟁시에도 백마를 타고 기병부대를 주로 지휘, 백마를 타고 대륙을 누빈 전설적 항일 영웅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학계에서는 김경천에 대하여 구체적인 실상을 밝히지 못해 그는 항일 영웅이면서도 수수께끼의 인물로 인식되어 왔다. 김경천의 본관은 김해이며, 함남 북청군 신창읍 승평리에서 1888년 6월 5일에 출생하였다. 본적은 서울 사직동 166번지이며, 어릴 때 이름은 현충이다. 1909년 12월 유일한 한국인 관비(官費) 유학생으로 일본 육사 제23기생으로 입학, 1911년에 졸업하였다. 육사 재학시절 군사교육뿐 아니라 중국어•러시아어 등 어학도 공부하였다. 이러한 교육은 김경천이 일본의 전략, 전술, 일본인의 심리상태 등을 이용하여 보다 효과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 '애마'와 함께한 김경천 장군. 1911년 5월 육사를 졸업한 김경천은 동경 제1사단 기병 제1연대에서 근무하였다. 그 때문에 육사 26•27기 후배들과 자주 접촉하였다. 1916년 12월 제 26ㆍ27기생 가운데 홍사익, 이응준 등 동경 제1사단에서 근무하던 한국인 장교들이 발기인이 되어 친목단체인 전의회를 만들었을 때 그는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3•1운동이 일어난 직후까지 회지(會誌)를 발간하여 동창상호간의 친목을 돈독히 하는 한편, 회원 소식을 알려주기도 하였다. 김경천에게 결정적인 심적 변화를 준 것은 동경에서 있었던 2•8독립선언이었다. 그는 그 영향으로 병을 칭하고 휴가를 얻어 서울에 도착, 망명의 기회를 엿보았다. 그리하여 1919년 6월 6일 지청천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 망명 후 김경천은 일단 신의주 맞은편 안동현(현재 단둥시)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대한독립청년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대한독립청년단 단원들과 함께 1919년 8월에는 안병찬 외 28명이 연명해 ‘중화민국 관상보(官商報) 학계 제군에게 고함’이란 제목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성명에서 한ㆍ중연합을 강조하는 한편 민족의 요구가 국제연맹회의에서 원만한 해결을 얻지 못하면 혈전을 도모할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며, 한ㆍ중 공수동맹을 강조하였다. 지청천•신동천과 함께 “남만주 3天” 김경천의 대한독립청년단 활동도 같은해 8월 총재인 안병찬의 체포로 인하여 세력이 약화되자 크게 위축되었다. 이에 보다 효율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서간도 유하현에 있는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가 교관으로서 활동하였다. 이것은 독립운동계에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이곳 무관학교에서 김경천은 이청천과 함께 독립군을 양성하며 시기를 엿보았다. 이 학교에는 구 한국군관학교 출신인 신팔균(申八均)도 있었다. 이 세 사람은 조국을 위해 투쟁할 것을 맹세하고 그 맹세의 뜻으로 다같이 천자(天字)가 붙은 별호를 가지게 되었다. 동천 신팔균, 경천 김광서, 청천 지석규(池錫奎)라고 했으며, 이들을 남만주 3천이라고 하였다. 그때 장길상이 배천택을 시켜 5만원이란 거금을 군자금으로 보내왔는데 이 돈을 그들 3인이 공동관리를 하면서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들은 1920년 3월 1일을 기하여 국경지대인 자성, 후창, 혜산진 등 어느 한 곳을 점령해서 국내에 3•1운동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정신적 자극을 주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신동천은 남만주 한인사회의 지원을 얻기 위해, 지청천은 상해 임시정부와 연락하기 위해 그리고 김경천은 러시아 연해주로 무기 구입 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각각 이동하였다. 한편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하던 김경천은 우선 중간 기착지로 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던 북간도를 택하였다. 단신으로 북간도로 간 그는 그곳에서 동지들을 규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지방파벌간의 갈등으로 그곳에 정착하지 못한 김경천은 러시아 연해주 지역으로 재차 이동하였다. 시베리아 일대서 ‘김 장군’으로 칭송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그는 그곳에서 독립운동의 기회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블라디보스토크도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인한 일본군의 감시와 조선인 체포로 인하여 활동이 어려웠다. 이에 김경천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산림지대인 수청(현재 파르티잔스크) 지역으로 이동하여 산림 속에 일단 피신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처음에는 수청 지역 창해청년단의 총사령관으로 활동하면서 수청 지역의 마적 소탕에 전력을 기울였다. 결국 김경천은 1920년 수청 지역에서의 마적 퇴치 활동 및 항일운동으로 시베리아 지역에서 그 명성을 크게 얻었고, ‘김 장군(金將軍)’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1921년 봄 연해주 수청군 인접지역인 올가군에서 300여명에 달하는 통합빨치산 부대가 조직되자 김경천이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수청의 아누치노(도비허) 구역에 있는 러시아 백군 카벨부대와 전투를 벌였다. 또한 카르투크 마을의 치열한 전투에도 참전하였다. 수청 다우지미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경천은 1921년 초 수청고려의병대에 초빙되어 군대의 총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22년 러시아와 중국 국경지방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 단체들은 각 단의 통일을 도모하는 동시에 장정 모집과 무기 구입에 힘써 같은해 10월 고려혁명군을 조직하였다. 고려혁명군 총재는 이중집(李仲執)이며 소재지는 추풍이었다. 김경천은 동부사령관을 담당, 본부를 그의 근거지인 수청에 두었다. 그러나 러시아 내전이 볼셰비키의 승리로 끝나면서 김경천의 항일운동도 종막을 고하게 되었다. 1922년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자 같은해 12월 말, 러시아측은 지금까지의 동맹군인 한인독립군에 대해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던 것이다. 그 후 김경천은 1937년 스탈린에 의한 ‘중앙아시아로의 한인 강제이주’를 앞두고 간첩죄로 체포되어 결국 1942년 1월 2일 소련의 북쪽 끝 코미자치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 아르항겔스크에서 심장질환으로 사망하였다. 스탈린이 사망한 후인 1959년 2월 16일 김경천은 모스크바 군관구 군법회의에서 사후(死後) 복권되었다. 박환 수원대 사학과 교수([email protected]) 훗. 너희들의 쥐새끼 김성주의 정체를 까발리니 견디기 힘든 모양이구나. 봐라. 윗사진이 민족의 영웅 진짜 김일성 장군이시다. 어딜 아랫사진 만주 개도둑 양아치 김성주 쥐새끼따위가 범접할 분이냐? 뭐? 동아일보 금판? 너희 쥐새끼들이 언제 조중동의 말을 그렇게 믿었나? 뭐? 보천보? 그래, 거기서 주정뱅이 하나 간난애기 하나 쏴죽인게 자랑이냐? 그게 자랑이면 김대두나 유영철은 아주 영웅중의 영웅이겠구나 이 간사한 쥐새끼들아!! 리플 달려면 글이나 읽어보고 달아라 쥐새끼들아. 위 경고문은 보천보를 들이대며 김성주를 굳이 옹호하는 찌질이들을 대상으로 하오니 정상인들은 꺼리낌 없이 리플 달아 주시와요~ 링크만 걸어놔도 들어가 읽지 않고 헛소리하는 인간들 때문에 링크건거 중에서 몇개를 직접 글에 추가했습니다. 길다고 하시는 분이 있으신데 위의 두문단만 읽어도 돼요. 다 읽으면 물론 피가되고 살이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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