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이지... 욕나오게 하는 자가 있군요....! 외눈이...이넘은 정말이지 브로커가 맞다는 확신이든다. 네넘 눈깔엔...파키스탄인들의 사기가 도를 넘어서서...영사관에서 공지사항까지 올리는 것이 매우 심각한 수준이어서 이를 예방차원에서 올린것을...! 이게 너 외눈깔엔 그냥 보통수준으로 보이지~! 네 눈깔엔...한국인들 피해보는건 대수롭지 않지~! 만약 다른나라에서...이 정도로 공지사항 올릴정도면 뉴스나..언론 그리고 공무원들이 대단했을것이다. 그러나...네 같은 외눈박이들이 많은 한국에선....그냥 조용하다. 이런걸 인종차별이란다. 한국인 피해 보도하면 인종차별 하지말란다.이게 한국 현실이다....! 자국에서...자국인들이 계속 사기 당하고 범죄에 피해를 보는데도 한다는 소리가 겨우...몇넘들 때문에...전체를 싸잡아 비난하냐고? 네 외눈 시력으론 그렇게 보이것지...! 겨우...몇넘들 때문에...전체를 싸잡아 비난하냐고? 네눈엔...겨우 몇넘이냐?
파키스탄 문화.방송에서 이미 보도한것 소개한걸 가지고 인종차별이고 비난한것이라면...그거 방송한 기자나..방송국은 뭐냐? 그것도...국제단체에서...취재한거던구먼....그럼 그 인권단체는 뭐냐? 인종차별 단체냐? 그런 사실을 보도함으로써...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부끄럼을 느껴서)개선을 해보려는 국제적 노력을 네 눈깔엔...인종차별로만 보이냐?
그런 식이면...아프리카...난민들 보도하고 캄보디아 문제 보도하면 전부 인종차별이냐고? 네넘 말대로 네넘 논리대로하자면...유엔이...인종차별 집단이란 말이냐? 후진국들의 인권문제나 문화 보도하면...그런 방송들은 뭔가? 지오그래픽에서하는 프로나 영국 BBC방송 보도는 인종차별 방송인가? 네넘 썩은 눈깔엔...해외방송은 그런방송 해도 괜찮고....한국은 하면 않돼지~!!!! 외국인은 뭐든해도 만사OK~! 한국인은 안돼~! 이게 네넘 생각이냐~! 내가 올린 글 보지도 않았냐? 넌 한국에서 국어 교육 안받은 해외에서 온 위장국적 한국인인가? 넌 왜 한국인이 쓴 글 문맥 파악도 못하고 주제 파악도 못하냐? 신기하다. 계속 본질은 놔두고..,헛소릴 해대니....이전에도 그런넘들 몇넘있었지~! 처음엔 신경을 안ㅤㅆㅓㅅ는데...너무 말을 왜곡 시켜가기에 몇마디 하고있는 것이다. 내가 한 질문에 답이나 해라....! 그러니까...!
모단체가 주장한 불체자 성문제에 외눈이도 불체자들 성문제 해결을 위해서 네 가족들 바칠 준비가 되었나보구나? 그들을 위한 위안부 만드는데 동의하는구나~!...네 가족중 누구를 보낼거냐고? 서00목사가 주장한...한국내 외노들 가족들 초청하여 취업시켜 그들의 인권과 행복을 개선하자했다는데 외눈이...외눈박아...네넘이 제일먼저 초청하여...그 가족들 취업 시켜주거라...! 먼저 시범을 보이고 솔선하거라...~! 노벨상 감이 따로없을 것이다. 답해보거라. 또 헛소릴 해보거라..그럼으써 너는 브로커라는 사실 명백해진다. 베트남 부부 글 올린거 말하냐?...그거 불법자들 아니었냐? 미등록이 합법이냐?....
넌 차도 미등록으로 몰고 집도 미등록으로 사고팔고....핸드폰도 미등록 사고팔고 그게 정상이고 합법으로 보는 네넘 사고가 의심스럽다.
불법이 아니고 미등록이라고 하는 불체자들 말대로면 그들이 몰고다닌는 대포차도 미등록이고 그들이 사용하는 대포폰도 미등록이다. 미등록이 합법이냐? 니눈엔 불법이 합법으로 보이냐?...합법이 불법으로 보이냐? 내가 언제 합법자들을 불법으로 고쳐서 글 올린적 있냐? 사기꾼들 특성중 하나가 남의 말 돌려치기 (그리고 말하다가..글쓰다가 몇글자 빠지면 전체 문맥에서 이해를 해야지) (종종 빨리 적다보니 그냥 외국인들 이라했다고 시비거는데...그걸 그대로 보냐? 네 수준이 보인다.) 일관성 없다...에라이...적반하장도 유분수지...네 눈알은 썩은 동태눈이냐? 일관성이 없다고? 내가 보니...너 같은 외눈이들이 일관성이 없다. 난 줄곧 말했다 법의 원칙성을 지키면서..강력하게 실행하고 문제점은 원칙성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개선해야한다라고 말이다. (물론 방법상에선 각자 어느정도 이견 있을 수 있겟지만) 이런 취지의 말을 했건만
외눈이 이넘들은...무슨 발암물질만 먹고살았나? 처음부터...합법과 불법의 문제를 언급하면서...합법자들이 불법자로 전환되지않도록 상황을 개선하고 불법자들은 원칙에따라 엄격히 처리하는 가운데 개선점은 계속 고쳐나가야한다느 취지를 여러곳에서 언급한게 한둘이 아닌데도...~!
그 가운데...불체자들로 인한 범죄 사건 보도를 예로 들면서... 한국내에서 불체자들로 인한 부작용도 이런점이 있으니... 더이상 확대와 상호 오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적정한 법집행과 합리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했다. 다만 글 올리면서...앞에서...이미 몇변 언급을 했기에...종종 나의 직접 언급은 종종 줄였다. 난 법 실행에 원칙성을 훼손하지 않는 점을 누차 강조했다. 너처럼 오히려 그냥 무조건 글 제대로 읽지도 않고 비난하는넘은 아니다. 정말 이런 넘들 보면 입에서 욕이 나온다고 하면 다른 대다수 분들도 수긍한다. 한국에서...너 같은 넘들...외눈박이 많기에....한국인들이 한국내에서는 물론....해외에서도 차별 받는다....바로 너같은 외눈이들 때문에 알것냐~! 너 같이 전체를 못보고....일관성 없는 외눈이들 때문이란걸 알아야 한다. 오히려 너가 하는 언행과 주장이야말로 일관성이 없다는 걸 알아라~! 오히려 너가 하는 언행과 주장이야말로 일관성이 없다는 걸 알아라~! 겉으론 그럴사하고 동정적이고 보기좋을진 몰라도~! 절대 그런게 아니다. 사기꾼 수법이지 그게~!
중국에서...탈북자가 영사관에 구조 요청하면...답.."세금 얼마나 많이 냈냐? 이게 한국 외교의 실체다....~!...18넘들아~! ...욕 안나오면 한국인 아니다.~!!!! 국군 포로 한국 귀환 요청하면..."그냥살지...세금은 제대로 냈냐?..." 이게 한국 외교의 대국민 행동이다......18넘아! 입에서 난 욕이 나온다...그렇지만 너 같은 외눈이 눈엔 입엔 욕이 안나올것이다.
그말한 넘이나....외눈이 같은넘이나 근본사고는 하나도 다른게 없기 때문이다. 아레 글 잘보고 생각 좀 해보라...! 한국이 국제상에서 자국민도 안챙긴다. 그러니...한국인들은 해외에서 쓰레기 취급당한다. 이게 자주외교의 일환이냐? 한국인의 범죄를 옹호 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적어도 한국정부는 자국민의 생존권을 먼저 챙겨야 한다. 이건 우리보다 못한 나라들도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진 않는다. 자국민을 잘챙겨야 한국인 권리가 신장되고...해외에서 한국을 무시하지 않는다. 일본인들 한국인보다 인구도 많고...해외에서 범죄도 많다. 그러나 일본정부 대책은 한국과 천양지차다, 각 나라는....
자국에서는 자국인이든..외국인든..범죄예방에 최선을 다하는데. 어찌된게 한국은 자국에선 외국인들이 범죄해도 손해보는 것 없는 상황이고 한국인들만 피해보는 상황 해외에선...한국인들 문제 생기거나..피해보면...외교부는 나몰라라한다. 그런데...이런 문제를 거론하면...! 해외서 한국인들 범죄도 많다면서...불체자 범죄를 마치 한국인 범죄와 비교해서 흐리려는 수법을 쓴다. 그러면서 합법화 시킨잔다. 이게 말이 되냐고?
이건 한국에선 발생하는 웃긴 일들이다. 이게 비교가 되냐고~! 누가 이런넘들 말에 비판좀 해주시기 바랍니다. 자꾸 내가 불체자 범죄 말하면 한국인 범죄도 많다고 시비거는데...~! 그걸 말이라고 하냐? 해외에서 한국인 범죄자들에 대한 한국과 일본 비교를 보거라.~! 중국도 그정도는 아니다.
외교관이 법과 원칙을 준수하고 따랐으면 이런일들이 일어났겟냐? 한국법이 인종차별 법으로 만들어졌는가? 한국법은 인권무시 법이더냐? 법 지키자는데 왠넘의 말이 그리도 많냐? 법 지키자는 말에 항의 하는것 보니...법 지키지 말자는 넘 같은데...바로
외눈이 네넘이 불체자.브로커라는 의심도 드는 이유중 하나다. 한국 영사관과 대사관 행동들이 한국인을 역차별하는게 아니고 뭔란 말인가? 한국법에 그렇게 되어있다던가?
법과 원칙에 충실만 했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는다. 법 지키자데....18...~! 인종차별이 왠말이냐? 군인이 법과 원칙을 안지키니까...전두환 같은넘들이 쿠데타나 일으키는거지~! 외눈이 이넘은 전두환 옹호론자라는게 분명히 보인다. 내가 지어낸것도 아니고...기존 메이져 대형 방송언론사들에선 거의 보도도 되지않는 사건을 지금 인터넷판 신문들이 보도를 하고있다. 그나마 인터넷의 헤택이라면 헤택이다. 그래서...노동문제 언급하면서...불체자 문제를 사건보도 알라면서...참고하고 대책을 세우고...너무 기존의 방송언론만 믿지말고 객관적으로 사고하면서...!
법과 원칙을 모두가 지키도록하자는데~! 일관성이 없다는 헛소리를 계속 해대니 이넘이 제정신인가? 베트남 부부...불법이 아니라..미등록이라고 자기들이 말하쟎아...네넘도 미등록이야? 그런가 보구나~!!!!!!!! 외눈이...미등록자......대포차 쓰고 대포폰 쓰고~! 인터넷도...대포등록 한것 같다.....~!
미등록이 합법으로 치부되는 사회면 앞으로 좋은 사회가 되겟다. 외눈이 이넘은 계속.....인종차별?....싸잡아서 비난? 한다고?웃기구 지랄한다라고 말하고 싶다.
너의 심리가 보인다. 전두환이 처럼 법과 원칙을 훼손해서라도.... 불체자 무조건 합법화 시키고.외노들 가족들 전부 입국 시켜서 취직 시키고 외노들 성문제 해결을 한국정부와 국민들이 앞장서서 하라고 하는 주장에 동조하는 네넘도 알만한 넘이다....알만한 넘이다~!!! 알만한 넘이다.~!!! 이미..기존방송에서 한 보도를...타문화...싸잡아서 비난하는것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하면서 은근슬적 자기의 이해도 낮음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치사한 수법을 사용하지말라. 일관성은 너처럼 남의 말 왜곡하면서 말장난하면서 하는게 일관성이 아니다. 그리고 경제학을 가지고 시비걸지 말라. 여기 누구 이전에 경제학 원론 같은 책 안본 사람들 없을 것이다. (외노들에 대한 긍정적 사고와 부정적 사고가 있다...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르다.무슨 일방적이 아니라는 말이다.) 법 잘 만들고 바로 세우고 잘 지킵시다. 원칙이 한번 훼손되면...그 부작용은 엄청납니다. 프랑스 인권 선진국 입니다....그러나....자국민은 철저히 챙깁니다. 그들 보기에 따라선 인권 선진국 아닐수도 있습니다. 일본인들도 한국인 못지않게 해외에서 문제 일으키는 사람들 꽤 상당수됩니다. 그러나... 한국과 한국국민과는 처리방법이 완전히 다릅니다.
외눈이가 우연히 불체자들이 모는 대포차에 피해를 보면 외눈인 뭐라할까? 불법차 아니라 미등록차라서 합법이란 그들의 말을 재판정에서 인정해줄까? 외눈이가 해외에선 아래글 상황 같은 상황을 당하면 뭐라할까? 한국국민들이 법과 원칙을 지키고 공무원들이 법과 원칙성을 알고 지키면 좋은 사회가 안됩니까? 외교부 직원들이...계속 저런 행동을 보이는건....한국법이 인종차별 법이고 인권무시법이라서 그럽니까? 외눈이 같은 사고를 가지신 분들 곰곰히 생각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법 지키고 원칙 지키자는 주장들에 대해서... 반대하고 비판하는 분들은 법 지키지말고 원칙무시하자는 걸로 우리 모두는 이해 하겟습니다. ---------------------------------------------------------------------------- [퍼온글]
http://news.kbs.co.kr/article/world/200706/20070611/1370335.html KBS Home> 뉴스> 국제
“미 구치소 인권 침해, 현지 공관에 알렸다 <앵커 멘트> 불법 체류 혐의로 미국 구치소에 수감됐던 한인 여성이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숨졌다는 소식 그저께 전해드렸는데요. 당시 우리 영사관도 이 여성의 위급성을 알았지만 제대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증언이 나왔습니다. 김연주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미국 뉴멕시코 구치소에서 숨진 김영순씨와 함께 수감돼 있던 이 모씨는 김씨가 숨지기 전에 이미 미국 주재 한국 영사관이 김씨 문제를 알고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녹취> 이모씨(당시 수감자) : "저희들이 전화통화가 되면서 가족들마다 영사관에 연락을 했죠. 영사관에 얘기를 했는데, 영사관에서 오기를 한 달이 넘어서 왔어요." 이 씨는 뒤늦게 도착한 영사관 직원이 지나치게 고압적이고 무성의했다고도 말했습니다. <녹취> 이모씨(당시 수감자) :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너무 바빠서 못 왔대요. 그래도 여러분은 행운이래요. 영사관이 왜 있어요? 자국민 보호하기 위해서 거기 나와 계신거 아닌가요? 그런데 총영사님 얼굴 보는게 영광이에요?" 또 다른 한인 환자가 생겼을 때는 거리가 멀다는 핑계로 아예 오지도 않았다고 했습니다. <녹취> 이모씨(당시 수감자) : "20명 중에 한 명이 죽어서 이렇게 까지 힘들게 있는데... 어떻게 손 좀 써줘라 하니까 너무 거리가 멀어서 자기네들이 갈 수가 없대요." 외교부는 김영순씨가 숨진 뒤에 미국 정부로부터 통보를 받았다며 이씨의 증언에 대해서는 진상을 확인해 보겠다고만 밝혔습니다. KBS 뉴스 김연주입니다. [국제] 김연주 기자 입력시간 : 2007.06.11 (07:58) / 수정시간 : 2007.06.11 (09:31) ---------------------------------------------------------------------------------------------- ============================================================================================== 신동아
http://shindonga.donga.com/ 2007.03.01 통권 570 호 (p172 ~ 185) 주부 장미정씨가 대서양 감옥에서 보낸 악몽의 2년
“배고픔, 성추행, 인종차별… 누가 프랑스를 선진국이라 하는가” 정리·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email protected] 장미정(37)씨. 평범한 주부이던 그는 2004년 가을, 남편 친구에게서 프랑스로 ‘짐’을 가져다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금강석 원석인 줄 알고 파리 오를리 공항에 내렸지만, 그를 기다린 것은 2년여의 수감생활이었다. 미처 내용을 확인하지 못했던 ‘짐’은 코카인. 장씨는 파리 인근 구치소에서 3개월, 프랑스 본토에서 7100km 떨어진 대서양의 프랑스령(領) 마르티니크 섬의 뒤코스 구치소에서 1년여를 보냈다. 이후에는 보호관찰 형태로 마르티니크 섬에서 9개월을 살았다. 2005년 11월 ‘동아일보’ 보도를 통해 장씨의 사연이 국내에 전해지자 방송과 인터넷에서는 현지 영사관계자들에 대한 질타가 이어졌다. 2006년 11월 마침내 귀국한 장씨에게서 순간의 판단 실수로 대서양의 절해고도에서 보낸 세월에 대한 회고를 들었다. 프랑스 교도행정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우리가 가진 프랑스의 이미지가 말 그대로 ‘이미지’일 뿐임을 실감하게 만든다. 장씨의 회고를 1인칭 시점으로 정리해 소개한다.
................................................................................................... 끌처럼 생긴 연장을 들고 한참을 씨름하던 세관 직원이 마침내 가방을 열어젖혔다. 책처럼 생긴 물건을 검정색 비닐테이프로 둘둘 감은 뭉치가 쏟아졌다. 금강석 원석(原石)이 아닌 건 분명했다. 투명한 물약을 갖고 들어온 다른 직원이 뭉치를 찢어 병 속에 넣었다. 갑자기 색깔이 붉게 변했다. “코카인입니다.” 세관 직원이 무서운 표정으로 한마디를 던졌다. 그리고 내 인생도 완전히 바뀌었다.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었다. 남편의 오랜 친구이던, 나를 늘 ‘형수님’이라고 부르던 ‘조 사장’의 부탁은 간단했다. “남미 가이아나에서 유럽까지 원석을 운반해야 하는데, 한 명이 옮기면 세금 문제가 있어 여러 명이 나눠 들고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는, 그리고 옮겨주기만 하면 400만원을 주겠다는 말이었다. 형편이 넉넉지 않던 나는 석연치 않은 마음을 애써 지우고 남미에 갔다. 그리고 거기서 무거운 여행가방 2개를 받아들고 일행과 함께 파리행 비행기를 탔다. 세관 직원은 가방을 열어보라고 요구했다. 가방은 잠겨 있었고 나는 비밀번호를 몰랐다. 남미에서부터 동행했던 일행 박씨는 말을 하지 않았다. 세관 직원이 조사실로 우리를 데려갔고, 거기서 비로소 가방이 열린 것이다. 이렇게 사형을 당하는구나 싶었다. 남편과 세 살배기 딸아이의 얼굴이 스쳤다. 철저한 몸수색과 조사가 이어졌다. 나를 조직원이라고 생각한 경찰들의 표정은 무서웠다. 조 사장에게 속았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남미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모든 얘기를 경찰에게 했다. 다섯 시간 만에 가이아나와 파리에서 일행이 모두 검거됐다. 나의 소변검사 결과가 음성으로 나오자 경찰은 한결 부드러워졌다. 수갑도 풀어줬다. 동행자 박씨의 가방에서 한국인 여권 사본 100여 장이 나오자 경찰도 박씨가 모집책이고 해외여행이 처음인 나는 단순가담자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나는 파리 시내의 경찰청 유치장으로 옮겨졌다. 딱딱한 침대에 억지로 몸을 뉘었지만 잠이 올 리 없었다. 금방 다녀오겠다며 친구집에 맡겨놓고 온 딸아이를 언제 다시 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유치장에서는 전화도 쓸 수 없었고 편지도 불가능했다. 바보 같은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계속 눈물만 흘렀다. 프렌 구치소 이틀 후 파리 근교에 있는 프렌 구치소로 이송됐다. 그곳에서는 편지를 쓸 수 있다고 했다. 일단 남편에게 알리는 것이 급선무였다. 하루에 몇 통씩 편지를 써서 부쳤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편지를 받은 서울의 남편은 외교통상부에 신고를 했다. 통보를 받은 파리의 한국대사관 관계자가 면회를 온 것은 체포 후 한 달이 조금 지난 2004년 12월9일이었다. 오랜만에 한국말로 사건개요와 상황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나자 긴장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오를리 공항에서 가까운 프렌 구치소에는 대부분 외국인이 수감돼 있었다. 95%가 마약이나 위조여권 관련사범이라고 했다. 재판이 시작되지 않은 이들은 3층에, 재판이 진행 중인 이들은 2층에 있었다. 2층 수감자들은 하루에 한 번씩 전화도 쓸 수 있지만 3층 수감자들은 불가능했고, 면회는 오직 대사관 직원과 가족에게만 허용됐다. 편지와 대사관 직원만이 세상과의 유일한 통로였다. (계속)
1| 2 | 3 | 4 | 5 | 6 | 7 | ------------------------------------------------------------------------------------------ 2007.03.01 통권 570 호 (p172 ~ 185) 주부 장미정씨가 대서양 감옥에서 보낸 악몽의 2년
“배고픔, 성추행, 인종차별… 누가 프랑스를 선진국이라 하는가” 수감중이던 장미정씨가 가족에게 보낸 편지들. 프랑스의 교도소는 두 사람이 한 방을 쓴다. 양쪽에 침대가 하나씩 있고, 작은 세면대와 거울, 변기가 전부다. 그나마 화장실은 칸막이가 없어서 천으로 가려놓았다. 가로 세로 2.5m쯤 될까. 창문 밖으로는 도로가 보였지만, 그나마 오래 쳐다보고 있으면 교도관이 와서 창가에서 물러나라고 꾸짖는다. 밤에는 달이 떴다. 별도 보였다. 서울에 뜨는 달이나 파리에 뜨는 달이나 다를 리 없겠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같은 달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모든 것이 완전히 다르게만 느껴졌다. 나에게 이전의 삶이라는 게 있었던가. 눈물이 났다. 아이를 생각하면 ‘가슴에 못을 박는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실감할 수 있을 정도로 아팠다. 우울증이 몰려왔다. 밤에도 한숨 자지 못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구치소의 아침은 오전 7시에 시작한다. 8시까지 일을 하러 작업장에 가려면 서둘러 씻고 아침식사를 마쳐야 한다. 작업은 오후 4시에 끝난다. 작업은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CD 케이스에 종이를 끼우고 포장하는 단순한 일. 수감자들은 그걸 목숨 걸고 한다. 몇 박스를 작업했는지에 따라 돈을 주기 때문이다. 첫날 내 파트너가 됐던 수감자는 왜 이렇게 일을 못하냐고 핀잔을 주었다. 밤에도 방에서 작업을 하는 사람이 많아 구치소는 불도 끄지 않았다. 열심히 하면 한 달에 100~120유로를 벌 수 있다고 했다. 억지로 잠을 청해봐야 잠이 올 리 없다. 수면제를 먹지 않으면 잠들 수가 없는데, 며칠을 먹다보니 자꾸 손을 대게 되고 생각이 나는 것이었다. 중독되는 것 같았다. 구치소에서 주는 수면제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먹으면 잠깐 동안 기분이 붕 뜬다. 공연히 옆에 있는 친구가 예뻐 보일 정도로 심신이 풀어진다. 그 잠깐의 기분을 잊지 못해 자꾸 수면제를 찾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0.5mg을 먹었다. 하루 이틀 지나면 안 듣는다. 그러면 1mg으로 늘리고, 다시 2mg으로….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7.5mg까지 늘어났다. 어떤 친구는 한번에 100mg을 먹는다고 했다. 안 죽는 게 기적일 정도다. 무엇보다도 구치소측의 잘못이 크다. 수감자들이 말썽을 부리면 귀찮으니까 수면제라도 먹여서 재운다. 본인이 원치 않아도 약을 주는 사람이 약과 물을 들고 온다. 그 앞에서 약을 삼켜야 한다. VIP룸의 비밀 내가 머무는 3층에 한국 사람은 없었다. 방을 같이 쓰던 태국인 수감자는 프랑스에 온 지 3년 가까이 되어 프랑스 말이 꽤 늘었다고 했다. 그 친구의 도움으로 나도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는 우울증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게 그 친구의 말이었다. 그 뒤로는 낮이고 밤이고 미친 듯이 일만 했다. 첫 달에 월급을 95유로, 둘째 달에는 100유로 남짓, 셋째 달에는 200유로를 탔다. 다들 “역시 한국 사람은 일을 무섭게 한다”며 웃었다. 금세 작업반 부반장이 됐다. 한 층에서 일하는 사람 20~30명이 같은 작업반을 이루는데, 프랑스 말을 전혀 못해도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일을 다 하면 세어서 표에 적어 교도관에게 내는 게 전부였다. 3층의 한 방에는 ‘VIP’라는 팻말이 붙은 방이 있었다. 감옥에 웬 VIP룸인가 싶었지만,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보통 크기의 방 두 개를 터서 만든 그 방은 3층의 유일한 프랑스인과 유일한 일본인 수감자가 쓰고 있었다. 다른 방과 달리 칸막이 있는 화장실이 따로 있었다. 방 배정은 물론 구치소측이 한다. 일본대사관 직원이 하루에 한 번씩 면회를 왔다. 다른 수감자들은 면회실에 가야 면회를 할 수 있지만, 일본인 수감자는 방에서 대사관 직원을 만났다. 묘한 것이, 프랑스 교도관들은 일본 사람한테는 꼼짝 못했다. 영어도 잘 안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일본인에게는 “하이!” 하고 일본어로 대답한다. 일본인 수감자는 원래 작업에도 참여하지 않았는데, 하루는 심심했던지 작업실에 왔다. 그런데 교도관이 내가 쓰던 작업기계를 일본인 수감자에게 쓰라고 내주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 일도 아니지만, 그때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작업기계는 어느 정도 숙련된 사람만이 쓰는 게 원칙이었다. 교도관이 지정한 일본인 수감자의 파트너는 반장이었다. 교도관은 일본인에게 의자까지 갖다주며 한껏 친절하게 굴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일본인 수감자는 하루 만에 일을 그만뒀다. 재미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다시 원래 기계를 차지했지만 기분은 풀리지 않았다. 생긴 걸로 따지자면 일본 사람이나 한국 사람이나 무슨 큰 차이가 있을까. 차이가 있다면 일본이 한국보다 강국이라는 것뿐이었다. 교도관이 조금만 서운하게 대하면 하루에 한 번씩 면회를 오는 대사관 직원에게 바로 얘기할 테니까. 프렌 구치소에 있는 3개월 동안 모두 세 번 대사관 직원의 면회를 받은 한국인 수감자와는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VIP룸’에 얽힌 비밀이다. (계속) 1 |
2 | 3 | 4 | 5 | 6 | 7 | ------------------------------------------------------------------------------------------------- 2007.03.01 통권 570 호 (p172 ~ 185) 주부 장미정씨가 대서양 감옥에서 보낸 악몽의 2년
“배고픔, 성추행, 인종차별… 누가 프랑스를 선진국이라 하는가” ‘톰보이’라는 별명의 교도관
장미정씨가 수감생활을 했던 대서양의 프랑스령 마르티니크 섬 해안풍경. 구치소에서 공공연한 또 하나의 비밀은 성추행이었다. 여자 재소자만이 있는 구치소이므로 교도관도 모두 여자였지만, 원래 동성애자여서인지, 특수한 환경에서 일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인지 교도관 중에는 노골적으로 성향을 드러내는 이들이 있었다. 작업시간에 일하고 있는 수감자의 몸을 더듬고 가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예쁘장하게 생긴 수감자가 새로 들어오면 ‘단독 조사’라는 명목으로 온몸을 거칠게 다루는 일이 있었다. 그렇게 한 친구가 불려가면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악명이 높은 것은 ‘톰보이(tomboy, 말괄량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교도관이었다. 작업시간에 와서 수감자들을 만지는 것이 취미인 모양이었다. 싫은 기색을 보이거나 뿌리치면 바로 ‘찍힌다’. 무언가 잘못을 해서 괴롭힘을 당한다면 모르겠지만 이건 납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프랑스는 선진국으로 불리는 나라가 아닌가. 이것도 편견이라고 하면 할 수 없지만, 구치소에 있는 동안 내가 본 프랑스 교도관들은 겉으로만 점잖은 척할 뿐 실제로는 엉망진창이었다. 작은 일이라도 기분을 거슬리면 어떤 식으로든 꼭 불이익을 주곤 했다. 백인우월주의 역시 다반사였다. 아프리카나 남미의 프랑스령 식민지 출신 수감자들에 대한 인종차별은 노골적이었다. 하다못해 배식을 할 때도 백인에게는 제대로 된 생선토막을 주지만 흑인에게는 자투리만 주는 식이다. 교도관들의 수준이 그렇다보니 차라리 프랑스 말을 모르는 게 더 편했다. 어차피 외국인이 많아 재소자들끼리의 공용어는 프랑스어가 아니라 영어였다. 교도관이 지시하는 걸 못 알아들으니 조금 있으면 자기가 귀찮아서 그냥 가버린다. 눈치로 대충 알아듣고 손짓발짓으로 되물으면 오히려 시비를 걸고 말꼬리를 잡는 식이었다. 11월 한 달이 지나고 크리스마스 시즌이 왔다. 언제 풀려날지는커녕 재판이 언제 시작될지도 가늠할 수 없는 나날이었다. 갇혀 있는 사람에게는 작은 일도 큰 기쁨이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버텨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창 밖으로 보이는 도로변에는 산장 분위기의 자그마한 카페가 하나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카페 주인은 트리 장식을 하고 전구도 연결해놓았다. 전구에 불이 켜지던 날, 나와 다른 수감자들이 모두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한참을 보고 있노라니 다시 눈물이 났다. 크리스마스에는 봉사단체 사람들이 와서 과자와 우표를 나눠주고 갔다. 구치소 안에서 우표는 화폐 구실을 한다. 편지를 부치려면 우표가 필요하기 때문에 월급을 타면 50장, 100장씩 사곤 했다. 외국인 수감자가 고향에 편지를 부치려면 0.5유로짜리 우표 두 장을 붙여야 한다. 봉사단체 사람들이 주고 간 봉투에는 우표 두 장이 붙어 있었다. 그래봐야 우리 돈 1000원 남짓. 그 작은 선물이 사람을 그렇게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참으로 절절하게 깨달았다. 대서양을 건너서 아침 10시, 교도관이 방으로 들어섰다. 짐을 싸라는 것이었다. 새해가 되고도 한 달가량이 흐른 1월31일이었다. 방을 옮기는 것일까, 아니면 층을? 사전에 아무런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에 별일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방을 짊어지고 나선 나를 교도관들이 차에 태웠다. 간혹 수용 인원이 넘치면 근처에 있는 다른 구치소로 옮기는 일이 있다는 말을 들은 것도 같았다. 그렇지만 차가 도착한 곳은 공항이었다. 검색을 하고 바로 비행기 맨 뒷자리에 태워졌다. 나이가 많은 남자 호송관은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고, 손짓발짓으로 물어보니 화를 내며 조용히 하라고 소리쳤다. 내가 탈 때는 한 사람도 없었지만 오후 2시가 가까워오자 승객들이 타기 시작했다. 이제 보니 에어프랑스 여객기였다. 비행기는 가도가도 멈출 줄을 몰랐다. 멀리 창문으로 보니 바다 위를 날아가는 듯했다. 무려 9시간을 날아간 끝에 착륙했다. 다른 승객들이 내리는 동안 죄수복을 입고 수갑이 채워진 나는 조용히 기다려야 했다. 내리자마자 후끈한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탈 때는 한겨울이었는데 여름이 된 것이다. 껴입은 겨울옷 사이로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뒤코스라는 이름의 새 구치소에 도착한 다음에야 알았다. 영어를 하는 재소자가 “여기도 프랑스는 프랑스다. 대서양에 있는 마르티니크라는 프랑스령 섬”이라고 했다. 기가 막혔다. 사전에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고, 당연히 가족이나 대사관에 알릴 틈도 없었다. 모르긴 해도 한국 교도소에서도 이렇게 일을 처리하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계속) 1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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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픔, 성추행, 인종차별… 누가 프랑스를 선진국이라 하는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가 연루된 사건의 재판 관할지가 마르티니크였기 때문에 재판 개시와 함께 이감(移監)한 것이었다. 사전에 알려주지 않은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프랑스 법무부도 문제가 있다고 인정했다. 누가 잘못한 건지는 파리 당국과 마르티니크 당국이 서로 책임을 떠넘기긴 했지만. 마르티니크는 무척이나 더웠다. 비는 며칠 만에 한 번씩, 그것도 5분 남짓 잠깐씩 내리고 말았다. 기본적인 것들은 프렌 구치소와 비슷했다. 다만 짜증스러운 것은 파리에서와는 달리 전혀 일을 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작업제도 자체가 없었다. 그저 하루 종일 문이 잠긴 방 안에 앉아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혼자 쓰는 방도 있었지만, 내 우울증이 심하다고 판단한 교도관들이 혼자 있게 두지를 않았다. 마르티니크의 교도관들은 프랑스어는 거의 안 쓰고 마르티니크 말을 썼다. 말이 통할 리 없고, 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갈 수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한국에서 더 멀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심리적으로 매우 고통스러웠다. 뒤코스 구치소는 수감자들에게 식사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명색이 프랑스의 구치소가 그랬다. 아침에는 블랙커피 한 사발, 점심식사, 저녁에는 요구르트 하나와 비스켓 하나 정도. 점심메뉴는 그때그때 달랐지만 그나마 질도 낮고 양도 부족했다. 다만 돈이 있으면 갖가지 군것질거리를 얼마든지 사먹을 수 있다. 일도 할 수 없으니 외부에서 돈을 부쳐줄 사람이 없으면 그대로 배를 곯을 수밖에 없다. 반대로 돈이 많으면 왕 대접을 받는다. 교도관에게 뇌물을 주고 휴대전화를 쓰는 이도 있었다. 아예 전화를 갖고 있는 경우도 보았다. 일을 하지 않으니 교도관들과 부딪칠 일이 많고, 그럴수록 말썽도 많았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수감자끼리 걸핏하면 먹을 것을 훔치거나 치고받고 싸우는 식이었다. 언제나 욕설과 고함이 넘쳐 흘렀다. 여기는 정글이었다. ‘정글’에서의 삶 창문은 있지만 벽에 막혀 밖은 보이지 않는다. 하루 24시간 가운데 방을 나서는 시간은 다 합쳐봐야 1시간30분을 넘지 않는다. 식사도 배식만 받아다 방에서 먹는 식이다. 더운 날씨 때문에 하루에 세 차례 샤워를 하게 돼 있었지만 실제로는 두 번만 허락된다. 그나마 5분을 넘기면 아예 물을 꺼버렸다. 비누질을 한 채로 방으로 돌아와야 하는 일도 생겼다. 하루에 한 번 있는 운동시간에는 더워서 가만히 앉아 있는 게 고작이다. 그래도 그 시간만 기다릴 수밖에 없다. 밤에는 온 건물에 마리화나 피우는 냄새가 진동한다. 운동장 구석에서 키운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대마초 흡입이 불법이 아니라지만 구치소에서 피우는 것은 금지돼 있다. 교도관에게 얘기했더니 ‘고자쟁이’라는 핀잔만 돌아온다. “그러는 너는 마약관련 사범 아니냐?”는 것이었다. 4개월마다 열리는 구속적부심에 나가 판사가 애로사항을 묻길래 같은 얘기를 했다. 조치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감감무소식. 모든 게 그런 식이었다. 교도관의 수준도 파리와는 다르다. 겉으로는 마르티니크의 교도관들이 더 친절하다. 파리는 말을 짧게, 엄격하게 했다. ‘저리로 가세요’가 아니라 ‘저리로 가’ 하는 식이다. 파리에서는 성추행을 하는 교도관도 소수에 불과했다. 그런데 여기는 대부분의 교도관이 그랬다. 겉으로는 친절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더 음흉한 것이다. 뒤코스로 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샤워를 마치고 돌아서는데 누군가 뒤에 서 있었다. 가장 평판이 나쁜 교도관이었다. 묘한 웃음을 흘리면서 내 몸쪽으로 손을 뻗었다. 노골적인 의사 표시였다. 단호하게 뿌리쳤다. 뭐라고 하는데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척하면서 도망쳤다. 뒤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같이 방을 쓰던 친구도 며칠 전 같은 교도관에게서 비슷한 일을 당한 모양이었다. 한참을 씩씩대다보니 식사시간이 되었다. 배식을 타러 가야 하는데, 바로 그 교도관이 방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래봐야 비스켓 한 조각에 요구르트 하나였지만 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근무 교대시간이 되어 다음 교도관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항의하자, 문제의 교도관이 다가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무슨 일 있었나? 깜빡 했다.” 그게 전부였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올랐지만, 방법이 없었다. (계속) 1 | 2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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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픔, 성추행, 인종차별… 누가 프랑스를 선진국이라 하는가” 수면제를 삼키며
2006년 11월 최종선고를 받을 당시의 마르티니크 재판정. 구속기간으로 형기를 채운 장미정씨는 이틀 후 귀국허가를 받았다. 힘든 시간이 이어졌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 가장 어려운 노릇이었다. 유일한 통로는 대사관뿐이었지만, 뒤코스로 이감된 후부터 출감할 때까지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대사관 직원은 딱 한 차례 면회를 왔다. 경찰 조사가 마무리되자 대사관의 관심은 눈에 띄게 소홀해졌다. 뭘 열심히 도와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려달라는 편지를 계속 썼지만, 답신은 하염없이 늦어졌다. 처음에는 워낙 바쁜 사람들이니까 하고 이해하려 애썼다. 분명 나는 범법자였고, 면목이 없었다. 그러나 가만 보니 우리보다 훨씬 뒤떨어진 제3세계 국가들도 그렇게 무심하지는 않았다. 그 나라들 대사관도 모두 파리에 있지만 일주일에 한 번,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아홉 시간을 날아와 수감자를 면회했다. 사람이다보니 비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 온 재소자들에게 한국 얘기를 할라치면 “그렇게 잘사는 나라 대사관에서 왜 면회도 안 오냐”는 비아냥이 돌아오기 일쑤였다. 구치소에서 가장 구하기 쉬운 것이 수면제다. 잠을 못 이루는 사람이 많아 아예 매일 배급한다. 특히 주말에는 약국이 일을 하지 않으므로 금요일에는 사흘치를 한꺼번에 몰아준다. 안 먹은 애들에게 달라고 하면 아무도 아끼지 않고 한 알씩 내준다. 금방 수십 알이 모인다. 나는 마르티니크에서 몇 차례 자살을 시도했다. 그 가운데 가장 위험했던 것은 2005년 5월이었다. 대사관 관계자가 면회를 다녀간 직후였다. 4시30분이면 면회가 끝나는데, 대사관 관계자는 4시에 와서 남자 두 명을 포함해 세 사람을 면회한다고 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10분뿐이었다. 그는 국선변호사를 만나고 왔다고 했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다 싶어 내가 형량을 얼마나 받을 것 같냐고 물었다. 대사관 관계자는 10년을 말했다. 그 순간 든 생각은 오로지 죽음뿐이었다. 여기서 10년을 버티는 건 불가능했다. 남편에게 나는 죽는다고,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편지를 썼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뒤코스에는 의사가 없어 수감자가 자살을 시도하면 응급차로 바깥에 있는 병원으로 실어나른다. 이틀이 지났다고 했다. 온몸이 뒤틀릴 정도로 우울했다. 왜 또 깨어났을까. 자신이 너무 싫었다. 그러다가 문득 아이 생각이 났다. 울었다. 희망이 없었다. 한 달쯤 후 4개월마다 한 번씩 열리는 구속적부심에 나갔다. 변호인에게 “당신이 대사관에 10년이라고 얘기했느냐”고 물었다. 자기는 그런 얘기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길어봐야 1년6개월일 거라고 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냥 해보는 소리일까. 그럼 도대체 10년이라는 얘기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 뒤로 프랑스 법무부 관계자, 판사를 만날수록 조금씩 희망이 생겼다.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만 더 고생해라, 그런 말이 이어지자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뒤코스 구치소 생활에 적응해가기 시작했다. 내 친구 얄카 인간은 환경의 동물이라고 하지 않는가. 사람의 적응력이라는 건 무서운 것이다. 편지쓰기 외에는 다른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책이라고는 모두 프랑스어로 된 것뿐인 그런 곳에서도 적응하면 다 할 일이 보인다. 나는 화장지로 학과 꽃을 접는 일에 취미를 붙였다. 다른 재소자들에게 나눠주니 모두 아이처럼 좋아했다. 방을 함께 쓴 친구는 슬로바키아 출신의 얄카라는 아가씨였다. 스물일곱, 아직 꽃다운 이 친구는 코카인 370kg 운반 혐의로 4년형을 받았다. 원래는 카리브해에 있는 프랑스령 섬의 사창가에서 일했다고 했다. 고향을 떠나 돈을 벌려고 하다 보니 어찌어찌 거기까지 흘러들어간 모양이었다. 한 남자가 요트여행을 가자고 졸랐다. 돈을 준다니 따라나섰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해경을 만났고, 요트에서 코카인이 발견됐다. 남자는 혼자 요트를 모는 사람을 특히 의심하는 해경의 단속을 피해볼 요량으로 얄카를 데리고 간 것이었다. 몰랐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죄를 면할 수는 없다. 바로 내가 그랬던 것처럼. (계속) 1 | 2 | 3 |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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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픔, 성추행, 인종차별… 누가 프랑스를 선진국이라 하는가” 얄카는 처음 만났을 때 수감생활 갓 1년을 넘긴 상태였다. 마약운반으로 체포되면 다른 이들을 붙잡는 데 얼마나 협조하느냐에 따라 형기가 달라지는 듯했다. 밖에서 아무리 친하던 사람이라도 일단 잡히면 배신하는 것이 상례라고 했다. 그러나 얄카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고, 남자는 전혀 입을 열지 않았다. 법보다 조직의 보복이 더 무서운 모양이었다. 얄카의 형기도 덩달아 길어졌다. 뒤코스의 수감자들은 둘로 나뉜다. 돈이 있는 자들과 없는 자들. 나는 두세 달에 한 번씩 남편으로부터 송금을 받았으니 그나마 좀 여유가 있었다. 음식이나 우표를 조금씩 나눠주면 어린 친구들은 금방 감동한다. 갇혀 있으면 사람은 단순해진다. 얄카는 기본적인 영어도 못했기 때문에 거의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다. 돈 없는 애들은 그런 얄카를 반기지 않았지만, 나는 함께 방을 쓰겠다고 했다. 얄카는 무척이나 고마워했다. 얄카처럼 젊은 아가씨들은 남자 재소자들과 ‘연애’를 하곤 했다. 연애라고 해봐야 우스운 장난이다. 남녀 구치소는 분리되어 있지만 운동장은 높다란 벽을 사이에 두고 나눠 쓴다. 서로 얼굴도 모르는 남녀가 고함을 질러가며 얘기를 나누고 “너 나랑 사귈래?” 그렇게 되는 것이다. 간혹 병원에 갈 때나 재판정에 갈 때면 남자측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야 한다. 그럼 자기 ‘남자친구’가 누구인지 비로소 얼굴을 힐끔 쳐다볼 수 있다. 모두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발버둥처럼 보였다. 2006년 2월, 구속적부심에 나갔다. 판사는 “서울에서 공범의 재판이 끝났다는데 왜 판결문이 도착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알 수 없었다. 대사관이 보내주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변호사도 갑갑해할 뿐 못 받았다고 했다. 판사는 “단순가담자라서 1년이 지났으니 풀어주긴 하겠는데, 다만 마르티니크를 떠날 수는 없다”고 했다. 보호감찰이었다. 구치소를 나가라는 도장이 쾅 떨어졌다.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면 어디로 가란 말인가. 변호사는 한 달에 240유로의 방값을 내야 하는 수용센터를 알아봐주겠다고 했다. 밥값은 또 어떻게 해야 할까. 법적으로는 일을 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말도 안 통하는 보호감찰대상자를 써줄 직장이 있을 리 없다. 여권이 없으니 은행카드도 못 만들고 전화도 놓을 수 없었다. 봉사단체에서 알선해준 방에서 그렇게 6개월을 다시 하염없이 보냈다. 동네를 오가던 도둑고양이가 유일한 친구였다. ‘나비’라는 이름도 지어주고 함께 지내다보니 몇 달 사이 새끼를 두 번이나 낳았다. 한번은 네 마리, 또 한번은 다섯 마리. 지난 십수 개월 사이에 내게 일어난 일 중 가장 기쁜 일이었다. 한국 언론을 통해 내 얘기가 알려졌다. 남편이 방송국 카메라맨과 함께 마르티니크로 날아왔다. ‘이렇게 보려고 안 죽었구나.’ 그냥 그 자리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눈물이 왈칵 솟아올랐다. 원래 눈물이 많은 성격은 아니었는데, 평생 울 것을 그날 다 운 것 같았다. 언론보도가 이어지고, 인터넷에 카페가 생기고, 사람들이 힘내라는 편지를 보내줬다. 편지를 쓸 사람이 많아졌다. 그 역시 위안이 되고 힘이 되는 일이었다. 언론이 관심을 갖고 많은 이가 지켜보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보호감찰관이나 판사의 태도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묘한 일이었다. 감찰관이 하루에 한 번씩 찾아왔다. 한국에서 진행된 재판결과가 법정에 도착했다. 대사관에서는 벌써 몇 달 전에 부쳤는데, 마르티니크법원에서 못 받았다고 하자 4개월 만에 다시 보냈다고 했다. 2006년 11월 열린 구속적부심에서 판사는 “한국 판결문이 일찌감치 도착했으면 더 일찍 집에 보내줄 수 있었다”며 징역1년을 선고했다. 이미 구치소에서 1년 이상을 보냈기 때문에 바로 집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판결문이 늦게 도착한 것은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이후 외교통상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2005년 11월24일 판결문을 송부한 것으로 파일되어 있으나 등기로 송부하지 않아 프랑스측이 접수했는지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증빙이 어렵다’고 밝혔다-편집자). 원래는 검찰의 항소여부를 지켜보며 보름쯤 기다려야 하지만 판사는 자기 책임하에 이틀 만에 여권을 내줬다. 서울로 돌아갔던 남편이 귀국소식을 취재하기 위해 방송국 사람들과 함께 다시 마르티니크로 왔다. 아이도 데리고 왔다. 마르티니크 공항에 마중을 나갔다. 2년 만에 아이의 얼굴을 직접 봤을 때는…. 이게 정말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엄마인 줄은 알지만 워낙 오랜만에 만난 터라 낯설었던 아이는 내게 선뜻 안기지 못하고 뒤로 뺐다. 세 살 때 헤어졌다가 다섯 살이 되어 만나는 것이니 그럴 만도 했다. 아이한테 정말 큰 죄를 지었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계속) 1 | 2 | 3 | 4 |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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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픔, 성추행, 인종차별… 누가 프랑스를 선진국이라 하는가” 집으로 가는 길 마르티니크를 떠나려고 비행기를 탔다. 구치소에서 다들 그렇게 얘기하곤 했다. 이곳을 떠날 때는 공항에서 침을 뱉겠노라고. 내가 죄를 지었고, 마르티니크가 무슨 잘못을 한 것은 아니지만, 너무 고생스러웠으니까. 파리를 들러 한국행 비행기로 갈아탈 때가 되자 갑자기 한국 사람이 늘었다. 한국 사람을 많이 보면 좋을 줄 알았는데 막상 닥치고보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죄송스러운 마음뿐이었다. 자격도 없는 사람이 너무 큰 도움을 받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비상구’라는 세 글자였다. 그 단어 하나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아 정말 왔구나, 진짜 왔구나. 집에 왔지만, 그러나 잠은 계속 오지 않았다. 며칠간 수면제를 먹었지만 듣지 않았다. 현실인지 아닌지 분간이 되지 않은 채 계속 어리둥절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르티니크에서는 늘 집에서 잠을 깨는 꿈을 꾸곤 했다. 혹시 내가 지금 구치소에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잠에서 깨어나는 아침마다 혼란스러웠다. 가까스로 잠이 들면 이번에는 마르티니크에 있는 꿈을 꾼다. 구치소 운동장 땡볕 아래 다른 재소자들과 나란히 앉아있는 나. 멀리서 보면 흡사 원숭이들이 이를 잡는 것처럼 보인다며 깔깔대던 그 모습이다. 가끔씩 환청도 들린다. 가장 듣기 싫던 그 소리…문을 잠그는 소리다. 자물쇠 네 개가 딱딱딱딱 닫힌다. 현관문을 잠글 때마다 몸서리치게 놀란다. 교도관들은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쇠몽둥이로 쇠창살을 드르륵 긁고 지나간다. 혹시 톱질을 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그 소리도 환청의 고정 레퍼토리다. 내가 보낸 편지를 집에서 다시 보니 기분이 정말 묘했다. 세어보니 200통이 넘었다. 이틀에 한 번 이상 쓴 셈이다. 일주일 내내, 하루 24시간 TV를 봤다. 원래는 TV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특히 일기예보를 보자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한국 지도와 낯익은 지명이 너무나도 반가웠다. 현실감이 뚝뚝 묻어났다. 그랬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나는 한국사람이었다. (끝) 1 | 2 | 3 | 4 | 5 |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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