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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철폐론의 수수께끼
게시물ID : phil_291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타자기사
추천 : 0
조회수 : 475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2/06/03 11:10:53

 도덕적 해이를 근거로 복지정책을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다소 냉정하게 보이는 이들과 인도주의에 따라 이를 반대하는 훈훈한 자들의 대립은 익숙한 광경입니다. 

그리고 대개 현실이 냉정한 이들의 주장에 따라 진행된다는 것 역시 낯설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실이 다만 부조리하고 비도덕적이어서 그런 것이라고 낙담하는 것은 너무 순진합니다. 

신자유주의에서 더욱 현실이 된 복지규제와 인도주의적이지만 현실에선 거의 적용되지 않는 복지확장, 이중 어떤 선택이 올바르다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요? 

개인적 삶은 우리를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갈등하게 합니다. 

그중 어떤 선택은 좋은 것과 덜 좋은 것 사이에, 어떤 선택은 좋은 것과 나쁜 것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삶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문제는 거의 나쁜 것과 덜 나쁜 것 사이의 선택을 요구합니다. 

선택지의 성격에 따라 선택하려는 사람에게 필요한 덕목도 달라집니다. 

좋은 것과 덜 좋은 것 혹은 좋은 것과 나쁜 것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덕목은 그저 합리적 판단력일지 모릅니다. 

합리적으로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나쁜 것과 덜 나쁜 것 사이의 선택에서 상황은 돌변합니다. 

덜 나쁜 것을 선택하는 문제는 단지 합리적 판단력만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합리성은 냉정하고 잔인한 감정의 지지를 받아야 합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의 선택에서 합리적인 사람은 동시에 훈훈한 사람일 수 있지만 나쁜 것과 덜 나쁜 것 사이의 선택에서 합리적인 사람은 냉혹한 사람으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합리성은 덜 나쁜 것을 지목하지만 덜 나쁜 것은 여전히 나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판단은 모종의 잔인함을 감수해야 합니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도움을 규제해야한다는 주장이 좋은 것과 나쁜 것 사이에서 후자를 선택한 것이라면 이러한 주장은 현실적 힘을 발휘할 수 없었을지 모릅니다. 

복지정책을 규제해야 한다는 냉혹한 주장이 현실에서 실질적 힘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은, 복지후퇴 정책이 나쁜 것과 덜 나쁜 것 사이의 선택에서 덜 나쁜 것을 지목하고 있다고 다수의 사람들이 판단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따라서 복지후퇴의 주장이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사람들조차 이를 감수하려 하는 것이지요. 

만약 어떤 사회가 특정한 시기에 나쁜 것과 덜 나쁜 것을 선택해야하는 상황에 내몰리고, 복지후퇴의 주장이 덜 나쁜 선택지에 해당한다면 가난한 자들을 위해 복지를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군의 사람들은 현실을 모르는 그저 훈훈하고 순진한 이상주의자로 포착됩니다. 

이때 복지후퇴의 주장은 오히려 그 반대자들에 의해 더욱 강력하고 견고한 지반을 확보하게 됩니다. 

1834년 스티넘랜드 법의 폐지는 덜 나쁜 선택지가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더 나빠지지 않기 위해 사회가 감당해야 하는 잔인함이라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에서 스티넘랜드법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합니다.  

 15세기 서유럽에서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고 16세기 대서양 무역이 활발해지자 양모생산에 가장 적합한 배후지로 영국의 지정학적 위치가 중요해집니다. 

이 때문에 16,17세기 영국에서는 양모생산을 위해 농경지를 목축지로 용도 변경하는 종획 운동(1차 인클로저)이 활발해집니다. 

인클로저 운동으로 농민들이 농토에서 축출되자 영국 사회는 부랑자들로 넘쳐나게 되고 국왕은 반-인클로저 입법을 통해 이에 맞섭니다. 

1662년 정주법은 교구 농노제라는 규칙을 제정해 농민들의 부랑을 저지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국왕이 주도한 반-인클로저 입법은 별 실효성이 없었고, 귀족과 향신계층은 인클로저 운동을 통해 부를 축적합니다. 

대다수의 농민은 부랑자가 되고 극빈 상태에 빠지게 되지만 국가는 부유해졌습니다. 

축적된 부를 토대로 영국 사회는 18세기 중엽 산업혁명을 이루어내고 기계제 대공업으로 생산 방식이 변형됩니다. 

기계제 공장 생산은 자유로운 임금 노동자(자유 임노동 시장)의 존재를 요청하게 되는데 정주법이 발목을 잡았습니다. 

정주법에 의해 농민들이 일정한 지역에 묶여 있으면 자본가들의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노동자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795년 정주법 완화조치가 시행되자 끝없이 부를 축적하려는 자본가들의 욕망 실현은 순조로워 보였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임금수당 체계인 스티넘랜드 법이 제정되고, 정주법과 다른 방식으로 자유 임노동 시장에 제동을 겁니다. 

기계제 공장 생산에서 노동자의 삶은 1차 인클로저 운동 당시 부랑민이 된 농민의 삶보다 더 가혹했습니다. 

생산과정에서 정교한 거대 기계의 도입은 그저 생산의 효율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계는 작동할 때만이 아니라 정지해 있을 때도 마모되고, 휴지기의 마모는 생산비의 손실을 의미합니다. 

생산 과정에서 기계의 마모는 상품 가격으로 곧바로 이전되고, 이전되는 속도가 빠를수록 생산주기가 짧아져 자본가는 더 빨리 생산할 수 있고 자본 재투자의 시기를 앞당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번 설치된 기계 설비는 훨씬 효율이 좋은 새로운 기계가 나왔다고 함부로 교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새로운 기계로 교체해 이윤을 높이기 위해서는 생산과정에서 기존 기계의 마모분을 상품으로 얼마나 빨리 이전시킬 수 있는지가 중요해집니다. 

결국 자본가에게 생산과정에서 기계 마모는 미덕이지만 휴지기의 기계 마모는 악덕이자 이윤에 대한 저주입니다. 

자본가는 24시간 기계를 작동시키려 했고 이 과정에서 노동자의 삶은 1차 인클로저 당시의 부랑자보다 더 비참해졌습니다. 

당시 노동자들은 자신이 노동자 계급이라는 의식조차 없었고 따라서 자본가에 대한 조직적 대항은 미약했습니다. 

자본가에게 노동자들의 임금은 상품 가격에 직결되는데, 노동자들의 조직적 저항 능력 부재가 임금수준 결정의 칼자루를 자본가에게 넘겨버렸습니다. 

농토에서 축출된 노동자들은 마땅한 생계수단이 없었고 부랑자가 되는 것도 국법에 의해 처벌되었기 때문에 여의치 않았습니다. 

공장에 취업하는 것 이외에 자신의 생존을 보장할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조직적 저항 능력마저 없는 이들의 임금이 다음날 가까스로 공장에 나와 일할 수 있는 비참한 최저 생계비 수준으로 추락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입니다. 

따라서 1795년 정주법 완화조치는 자유 임노동 시장을 개시해 이윤추구라는 자본가의 탐욕을 가속화했고 노동자들을 극빈 상태로 몰아붙였습니다. 

자유 임노동 시장이 없으면 정교한 거대 기계를 24시간 풀-가동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이는 자본가들의 이윤 추구를 가로막아 국가의 부를 좀먹게 됩니다. 

그러나 자유 임노동 시장이라는 선택지는 노동자들의 삶을 극단적으로 추락시켰다는 점에서 나쁜 선택지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 선택지가 나쁜 것인지 덜 나쁜 것인지는 아직 불분명했습니다. 

노동자들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고 임금을 끝없이 추락하게 만드는 자유 임노동 시장이라는 선택지, 이를 나쁜 선택지로 파악한 이들은 1795년 스티넘랜드 법을 제정해 노동자들의 임금을 보조하는 수당체계를 제안합니다. 

그리고 이 법은 정주법과 다른 방식으로 자유 임노동 시장을 공격합니다. 

노동자가 다음날 가까스로 공장에 나가 일할 수 있는 만큼의 생계수단이 아니라, 인간으로써 최소한의 삶을 보장받을 수 있는 생계수단이 만약 빵10개(/일주일)이고 그 싯가가 100만원이라면 노동자의 임금 수준에 상관없이 총임금이 100만원이 되도록 임금을 보조해주는 수당체계가 스티넘랜드 법입니다. 

쉽게 말해 노동자 임금이 10만원이면 90만원을, 50만원이면 50만원을 보조받을 수 있는 것이지요. 

이 법은 노동자의 생존 권리를 주장했고 수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동물보다 열악한 노동자들의 삶에 비추어 볼 때 스티넘랜드 법은 인도주의적인 훌륭한 복지정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임금이 스티넘랜드 법에 의해 보장된 100만원을 넘는 사업장 이외의 경우 노동자들은 더 이상 고용주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됐고 당시 스티넘랜드 법이 보장하는 임금을 상회하는 사업장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고용주의 요구에 따라 일해야 할 동기를 상실했고, 고용주 역시 스티넘랜드 법에 의존해 임금을 더욱 삭감했습니다. 

어떻게 일하든 임금을 보장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노동 생산성은 심각하게 망가졌습니다. 

한편 자본가들은 이제 추락한 노동 생산성을 근거로 임금을 더욱 삭감했지요. 

지나치게 낮은 임금 때문에 스티넘랜드 법 이후로는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할 수 없음이 너무 당연한 현실이 되어버립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호 대상 극빈자 신분이 되었고 자신의 노동이 아닌 구호에 의존해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회의 다수가 자신의 노동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구호에 의존할 경우 그 사회의 전반적인 도덕적 품성은 타락하기 마련입니다. 

한편 산업 사회에서 노동 생산성의 극심한 추락은 그 사회 자체의 근간을 흔들어 버립니다. 

결국 노동자들의 생존 권리를 보장하려던 스티넘랜드 법은 역설적이게도 사회 전체를 대재난에 빠뜨렸고 영국 사회는 바보들의 낙원이 됐습니다. 

사람들은 스티넘랜드의 재앙 이후, 즉 경쟁적인 자유 임노동 시장이 없는 자본주의가 야기한 사회적 대재난을 목격한 이후, 노동 시장에서 생존의 권리라는 복지 정책을 철폐하는 것이 사회 전체가 위험에 빠지지 않는 덜 나쁜 선택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더 나쁜 것과 덜 나쁜 것 사이의 선택이 유일하게 주어진 대안이라면 우리는 반드시 덜 나쁜 것을 선택해야 하고 덜 나쁜 것 속에 있는 가장 나쁜 것조차 감수해야 합니다. 

복지철폐가 현실적 힘을 발휘하는 것은 단지 그 사회가 부조리하거나 부도덕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것이 더 나빠지지 않기 위해 우리가 감수해야 하는 덜 나쁜 것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복지확장을 주장하기 위해서 복지철폐가 비인간적이고 부조리하다고 간곡하게 말하는 것은 현실을 모르는 순진한 이상주의자의 수사로 비쳐지기 때문에 쉽게 무시당합니다. 

복지철폐가 나쁘다는 것은 보수적인 기득권 세력조차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결국 생존의 권리라는 너무도 당연한 주장이 현실성을 갖기 위해서는 복지철폐의 선택지가 정말 덜 나쁜 선택지인지, 혹은 우리에게 주어진 대안이 더 나쁜 것과 덜 나쁜 것 사이의 선택뿐인지를 의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존의 권리라는 스티넘랜드 수당체계가 사회 전체를 도탄에 빠뜨리는 과정에서 1799년 제정된 단결금지법을 주목해야 합니다. 

당시 자본가에 대해 조직적 저항 능력도 없었고, 노동자 계급이라는 의식조차 희박한 이들에게 굳이 단결금지법을 제정해 이후 4반세기 동안 이를 강제했다는 사실은 선뜻 납득이 되지 않는 대목입니다. 

만약 자본가에 대한 노동자 계급의 저항 능력이 활발한 상황에 스티넘랜드 법이 배치됐다면, 생계에 대한 걱정 없이 노동운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을지 모릅니다. 

이는 자본가들에게 재앙이었을지 몰라도 노동자들에겐 자신의 노동에 대해 정당한 임금을 요구할 수 있는 커다란 지지 기반이 되었겠지요. 

한 사회가, 그 구성원들이 창출한 부를 그들에게 공정하게 분배할 때 노동자들의 도덕적 품성이 타락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고, 노동 생산성이 하락한다는 것도 역시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생존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한 사회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게 되고, 이 때문에 사람들이 더 나빠지지 않기 위해 선택한 덜 나쁜 대안, 즉 생존의 권리를 철폐하게 되는 것은 오직 특수한 조건이 만족되었을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특수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더 나쁜 것과 덜 나쁜 것 사이의 선택을 강요받게 되는데, 특수한 상황에 대한 고려가 없는 경우 이러한 양자택일은 불가피한 선택처럼 보이게 됩니다. 

한 사회가 생존 권리 철폐라는 비상식적 주장을 덜 나쁜 선택지 안에 밀어넣고, 더 나쁜 상황과 이를 대조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극단적 양자택일을 불가피한 선택처럼 연출하기 위해 이를 가능케한 특수한 상황을 은폐시켰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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