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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사비올라 이야기 (강추)
게시물ID : sports_29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파라미르
추천 : 13
조회수 : 1054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05/07/28 16:25:36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작은 거인 -하비에르 사비올라- >부모님의 애정에 감싸여 1981년 12월 초순, 마리아 '마리' 페르난데스는, 긴장된 기분으로 침대 위에 있었다. 남편인 로베르토 '카쵸' 사비올라와의 사이에 얻은 뱃 속의 아이가 예정보다도 꽤 빨리 태어날 것 같다는 진단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고급 맨션이 늘어 서 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의 주택가, 벨그라노 지구. 그 외곽에 있는 바호 벨그라노에 검소한 집 한 채를 장만한 카쵸와 마리는, 애타게 기다리던 장남의 탄생 준비에 만전의 준비를 하고 갖춰놓고 있었다. 그리고 81년 12월 11일 예정보다 약 한 달이나 빨리 미숙아로 태어난 작은 남자아이는, 하비에르 페드로 사비올라라고 이름 지어졌다. 몸이 작았기 때문에 자주 감기에 걸려 카쵸와 마리는 그 때마에 하비에르를 안고 병원에 달려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아 원인불명의 심한 설사병에 걸리게 되었을 때는 '조금만 더 상태를 지켜봅시다.' 란 의사의 말에 납득하지 못하고 기도술사의 '마술' 에 치료를 부탁했었던 적도 있다고 한다. "어쨌든 작은 아이었기 때문에, 우유를 먹는 양이 평소보다 적거나 조금만 기운이 없거나, 조금이라도 열이나기만 하면 우리들은 정말 굉장히 당황해 했었습니다." 마리는 당시를 떠올리며 이야기한다.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 때는 정말 필사적이었어요(웃음)." 부모님의 넘칠 정도의 애정에 감싸여, 병약했던 유아기를 극복하자, 하비에르는 몰라볼 정도로 건강해져 있었다. 공을 가지고 노는 걸 아주 좋아해서 아장아장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 축구 공을 차며 즐기게 된다. 신장은 물론 동년대 소년들과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작았지만, 축구를 눈에 띄게 잘 했기 때문에 따돌림 당하는 일도 없이 친구들 사이에서는 항상 리더격이었다. 시립 콩그레소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하고 이미 축구 선수로서의 재능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고, 그의 마라도나 급 페인트나 드리블에 반 친구들이나 교원들은 경탄의 소리를 냈다고 한다. 하루 종일 축구로 나날을 보내고 있던 하비에르 소년이 지역 클럽에서 바비 풋볼(5인제 축구)를 시작한 것도 말하자면 당연한 흐름이었다. 하비에르가 플레이하던 바비 팀은 3개 있었다. 처음에 입단 한 것은 '아테네오 코레히알레스' 였고, 그 다음이 '크루브 리오 데 라 플라타',에 들어갔고 그리고 세 번째가 '파르케 챠스'였다. 어느 팀에서나 연 상의 선수들과 섞여 플레이했었지만, 당시 친한 친구였던 알레한드로 코랄레스는 바비 시절의 하비에르에 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시합 전에는 언제나 상대 팀 선수들에게 비웃음을 당했어요. 정말 꼬마아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도 시합이 시작되기 전까지였습니다. 어느 팀이라도 결국은 하비에르 한 사람에게 당해버렸습니다. 그 근방에선 꽤 유명했다니까요. '이녀석은 장래 빅 스타가 될 거다' 라구요." >솔직하고 예의바른 소년 화제의 축구소년은 9살이 되자, 아버지 카쵸를 따라 리베르 플레이에트 입단 테스트를 받는다. 당시 리베르 유스에서 코치를 맡고 있던 가브리엘 로드리게스(현 산 로렌소 유스 코치)는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작은 몸집인 하비에르의 플레이에 눈을 빼앗겼다고 한다. 테스트를 치룰 때의 일을 로드리게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한눈에 반한 녀석입니다(웃음). 말로는 잘 표현할 수 없지만 사비올라의 플레이는 빛이나고 있었어요. 공을 쓰는 방법, 패스를 넣고나서의 움직임, 포지셔닝, 모든 것이 이상적이고 완벽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바비 쪽 스타였다는 이야기를 전에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 아이에게는 연습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특별한 재능이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한편 테스트 하는 모습을 걱정스레 지켜보고 있던 아버지 카쵸는, 도중에 안절부절 어쩔 수가 없어서 참지못하고 결과를 물으러 가버렸다고 한다. "나는 저기서 플레이하는 꼬마아이의 아버지입니다만..." 거기까지 이야기를 하자 카쵸는 로드리게스 코치에게 말을 가로막힌다. "아아, 저 아이요. 합격입니다." 입단 테스트에는 합격했지만 리베르의 유스에 들어간 직후는, 천재 하비에르도 시련을 맛보게 된다. 여기 관해서는 당시 유스 육성부를 총괄하고 있던 테렘씨가 설명해 주었다. "우리 유스 부문 스텝들은 하비에르의 재능을 누구보다 존중하고 있었지만, 실제 시합에서 지휘봉을 잡는 감독들은 아무리 뭐라해도 몸이 큰 선수들을 쓰고 싶어합니다. 입단막 했을 때의 하비에르가 한 동안 벤치에 앉아있었던 이유는 그 때문입니다." 시합에 나갈 수 없어 분해하며, 하비에르는 한 번 리베르를 나와 산 로렌소로 옮기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테렘을 시작으로 하는 코치 군들의 설득도 있어서, 하비에르는 리베르에서 힘든 생존경쟁에 부딪혀 나가기로 결의한 것이다. 리베르에서 한결같이 플레이하면서도, 하비에르는 '에스크루시오니스타' 란 하부리그의 팀을 아주 좋아했고, 그 중에서도 에이스 스트라이커인 기제르모 세스라크의 대 팬이었다. 세스라크는 축구를 하면서 사비올라 집 가까이 있는 슈퍼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그 때문에 마리가 그 슈퍼에 시장을 보러갈 때는 하비에르도 동경의 스타를 만나기 위해 반드시 따라갔다고 한다. 세스라크는 당시의 일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언제나 부끄러운 듯이 이야기를 걸어 왔습니다. '만약 폐가 되지 않는다면 사인을 해주세요,' 라던가, '에스크루시오니스타의 셔츠를 가지고 싶은데요...' 라구요. 어린아이 답게 솔직하고, 게다가 예의도 바른 소년이었습니다." 나도 세스라크와 같은 선수가 되고 싶다. 그 마음은 하비에르를 스트라이커로서 성장시켰다. 그리고 리베르의 9군(14세 카테고리)에 들어가자, '작은 거인' 은 드디어 눈을 뜬다. 갑자기 골을 양산하게 되고 9군에서 단숨에 6군(17세 카테고리)로 '월반' 한 것이다. 리베르 입단 처음부터 팀메이트로서 함께 플레이해 온 안드레스 디알렉산드로도 "그 녀석은 옛날부터 괴물이었으니까요." 라고 웃는 얼굴로 이야기한다. "우리 81년 생 팀은 유스 시절, 어느 카테고리에서건 우승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비는 항상 우리들의 자랑이었어요. 그 아이는 단 혼자서 시합의 흐름을 바꿀 수 있었고, 그런 괴물같은 선수는, 다른 어떤 팀에도 없었습니다." >데뷔전에서 첫 골 6군에서의 플레이를 시작으로 재능을 갈고 닦던 하비에르는, 이윽고 1군 감독의 눈에 띄게 된다. 그리고 98년, 그는 또 다시 '월반' 한다. 이 때 작은 몸집 FW의 플레이에 반해 당장 1군으로 끌어올렸던 것이 당시의 라몬 디아스 감독이었다. GK인 헤르만 부르고스부터 '코네호(토끼)' 란 닉네임을 얻은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그건 시합 형식의 연습을 할 때였는데요. 내가 지키고 있던 골문에 공이 굴러와서 그걸 가지고 하비에르와 내가 싸우는 식이 되었거든요. 먼저 내가 공을 쫓아가 왼발로 컨트롤했습니다만, 그 때 공을 향해 돌진해 오고 있던 하비에르가 사라진겁니다. 설마라고 생각해 당황하고 있었더니 그 순간 그녀석은 옆에서 공을 가로채서 골을 넣었습니다. 뭔가 정말 재빠른 녀석이다 하며 놀랐었습니다. 그 때 이 녀석의 닉네임은 코네호로 하자고 결정한 겁니다." 1군 선배들로부터도 귀여움을 받으며, 날로날로 성장하던 '코네호' 디아스 감독으로부터도 높은 평가를 받았던 그는 98년 10월 드디어 리그 전 멤버에 이름을 올린다. 연습 후 라커룸에 붙여진 원정 멤버 리스트에서 자신의 이름을 발견했을 때 하비에르는 한 동안 무슨일인지도 잘 모르고 얼떨떨했다고 한다. 이 일에 관해서는 본인으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에르난 디아스가 "꿈이 아니야." 하면서 머리를 가볍게 맞았는데도 아직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멍하게 라커룸을 나왔더니 갑자기 많은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질문공세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가는게 늦어져 버렸거든요. 걱정한 아버지가 나를 버스 정류장까지 마중나와 주였습니다만, 거기서 늦게 온 이유를 이야기하자 이번엔 아버지가 어이없어 하셔서(웃음). 그 후에는 버스정류장에서 둘이 껴안고 울었습니다. 정말 기뻤어요." 그러나 사비올라 가의 자랑인 아들이 이뤄낸 쾌거는, 1군 원정 멤버에 뽑힌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98년 10월 18일 힘나시아 데 푸피 전의 전반 15분, FW인 크리스티안 카스틸료(카스티죠)가 부상당해 갑자기 출장 기회가 돌아온 것이다. "카스틸료가 부상을 입었을 때 벤치를 둘러보니 포워드 선수는 나 밖에 없었습니다. 어쩌면 내가 나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순간 양 다리가 덜덜 떨려왔어요." 디아스 감독에게 불러 불안과 흥분을 안으며 '27번' 을 달고 톱 리그의 피치에 선 하비에르였지만 이 데뷔전에서 그는 더더욱 큰 것을 해냈다. 1대1로 맞은 53분에 첫 골까지 넣어보인 것이다. '리베르에 신성이 나타났다!!!' '데뷔전에서 첫 골을 넣은 16살의 뉴 스타' 당연히 다음날 신문은 하비에르의 화제 일색이었다. '하비에르 사비올라' 의 이름은 이윽고 아르헨티나 전국에 알려지고, 하비에르는 많은 소년 소녀들에게 싸인요청을 받게 된다. "그 1년 전 까지 내가 1군 스타 선수에게 사인이나 기념촬영을 부탁했었는데 말이죠. 정말 이상한 느낌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싸인할 때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우승과 득점왕과 회계사 톱 팀의 일원이 되어 고액의 계약금이 날아 들어와도, 하비에르의 생활 스타일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조금 고친 바호 벨그라노의 집에서도 그대로 계속 살았다. 차도 고급차가 아니라 작은 '푸죠 206' 을 구입해, 매일 어머니 마리아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연습을 갔다. 유일하게 변화가 있었던 것은 학교생활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축구뿐만이 아니라 공부도 확실히 하도록 이야기를 들어, 리베르의 고등학교에 다녔지만 99년은 수업의 대부분을 결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선수로서 평가받고 있었다는 것이기도 했지만, 기쁜 반면에 공부가 어중간하게 된 것에 대한 안절부절함도 있었다. 어머니 마리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 아이는 항상 학년 톱의 성적을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 친구들에게 뒤지는 게 분했던 거겠죠.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은 축구에 집중하고 학교 쪽은 연말에 추가시험에서 모든 걸 걸어보면 어떻겠니, 하구요." 99년 12월 리베르는 국내 리그를 제패하고, 하비에르는 18살이면서도 15골이나 마크해 득점왕에 빛났다. 그러나 거기에 들떠할 여유는 없었다. 집에 틀어박혀 추가시험을 위한 공부에 전념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유급은 절대 하고 싶지 않았고, 중퇴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라고 말하는 하비에르는 우등생의 이름을 걸고 모든 과목에서 합격점을 얻어, 회계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99년은 리그 우승, 득점왕, 그리고 회계사 면허 등 원했던 것을 한 번에 많이 손에 넣을 수 있었던 해였습니다."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한 하비에르는 2000년 1월, 18살이면서도 U-23대표팀에 선출되어, 시드니 올림픽 예선에 출장. 유감스럽게도 예선통과는 하지 못했지만, 모국의 대표로서 처음 플레이하고 귀중한 경험을 쌓았다. 그리고 2000-01시즌의 전기리그에서는 파블로 아이마르, 후안 파블로 앙헬, 아리엘 오르테가 등과 함께 '로스 쿠아토르 판타스티코(판타스틱한 4명)' 이라고 불리는 매혹적인 공격 콰르텟을 형성해 아름다운 공격을 선보였다. 동경하던 오르테가와 함께 플레이할 수 있었던 감격은 말할 필요도 없었고, 이 때 아이마르와의 사이에 쌓은 우정은 하비에르에게 있어 평생 넘겨줄 수 없는 보물이 되었다. "파블리토는 자주 우리집에 와서 식사를 하곤 했습니다." 하고 하비에르의 어머니 마리는 이야기한다. "그 아이는 부모님 곁을 떠나 합숙소에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필시 가족의 음식 맛이 그리웠을 거에요. 밀라네사(밀라노 풍의 커틀렛)나 우리집에서 직접 만든 파스타를 주면 정말 기뻐했습니다." >신문사에 보낸 편지 소탈한 됨됨이와 겸허한 태도, 그리고 피치 위에서 보이는 천재적인 플레이에 의해, 하비에르는 더더욱 인기를 넓히고 있었다. 리베르의 팬 뿐만이 아니라, 라이벌인 보카 서포터들까지 하비에르의 골에 미움없는 박수를 보내주었을 정도였다. "길을 걸으면 자주 보켄세(보카 팬들)들이 말을 걸어왔어요. '나는 보켄세지만 너는 응원한다. 다음 시합도 힘내라' 하구요. 내가 보카에서 플레이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지만, 보카란 클럽이나 팬들에 대해서는 경의를 품고 있습니다." 2001년에는 모국서 개최된 월드유스에 출장해, 에이스로서 우승에 공헌한 것 뿐만아니라, 대회 사상 최대인 11골을 넣어 득점왕에 빛남과 동시에, MVP도 수상했다. 한 번에 모든 영광을 손에 넣은 그를 국민들은 '행복의 왕자' 라고 불렀다. 그러나 당시 화려한 무대 뒷편에서 하비에르는 괴로운 현실에 직면하고 있었다. 아버지 카쵸가 암에 걸린 것이었다. 어떻게는 아버지에게 최신 치료를 받게 하고 싶었다는 강한 염원은, 리베르를 떠나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로 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리베르는 이 이적에 난색을 표했고, 하비에르를 놓아주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아르헨티나 전국지에 한 통의 편지를 보낸다. 거기에는 '의학이 진보된 나라로 아버지를 데려가 치료받게 하고 싶다. 그걸 위해 바르셀로나에서의 오퍼를 받아들여주었으면 한다.' 라는 그의 절실한 마음이 쓰여져 있었고, 이 편지는 지면에도 게재되어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리고 리베르 수뇌진들은 바르사에게 'SI' 라는 답장을 보냈던 것이다. 정식으로 바르셀로나 이적을 한 하비에르였지만, 아버지 카쵸는 바르셀로나에서의 데뷔 전 직전에 이국 땅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어머니 마리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버지를 잃었을 때의 충격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컸음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다부지게 행동했고,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고, 한결같이 나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태어났을 때는 만지면 부서질 것 같았을 정도로 작은 그 아이가 이렇게까지 훌륭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 아이 자신이 가진 착한 마음과 겸허함, 그리고 강인함 덕입니다." 스페인에 건너온지도 어연 3년. 명문 바르셀로나의 일원으로서 플레이를 계속하고, 아르헨티나 대표로서도 활약이 기대될 정도로 성장해낸 하비에르지만, 그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서 사랑받고 있는 선수는 드물다. 상대 팀 서포터들로부터도 따뜻한 성원을 받고, 대표팀 게임에서 스탠드 팬들이 출장을 요구하며 이름을 부를만한 선수는, 아르헨티나 긴 역사상에 있어서도 디에고 마라도나와 하비에르 사비올라 두 사람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출처:월드사커다이제스트 2004년 2월 5일 헤이지~//다음 맨유카페 2004년 3월 23일 게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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