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늦은 가을 쯤에 담당자 분이랑 이야기해보고 줄곧 생각해오던 걸 의식의 흐름 순으로 나열해봤습니다.
(그럴 시간에 완결이나 내자...)
1. 전문가물.
지금 전문가물로 쓸 수 있는 건 도배나 게임 이야기 두 가지.
담당자 분은 도배라는 소재로 내가 상상조차 못할 이야깃거리를 던져주셨지만 도무지 소화할 수 없을 것 같아서 패스.
게임 쪽 이야기는 제법 디테일하게 쓸 수는 있겠지만 개발자를 소재로 현실 판타지를 쓸 건지, 아니면 게임 판타지를 전개하면서 그 안에 개발자로서의 경험을 녹일 건지 결정할 수 없다.
2. 역시 인기있는 건 주인공이 나쁜 놈들 싸대기 때려주는 거.
'장르 소설은 대리만족이다.'라는 명제는 이제 정설이 되어버림.
나는 과연 대리만족을 줄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는가?
아~주 나쁜 놈이 있고 주인공이 얘를 죽여야 한다고 쳤을 때, 나는 주인공을 걍 악당을 처단하는 캐릭터로 만들 수 없다.
일단 평소 내 습관대로 악당에게도 나름대로 인과를 부여할 것이고, 그로 인해 주인공은 인간적 고뇌(만약 악당이 순도 100% 쓰레기라고 하더라도 살인에 대한 고민은 하겠지.)에 괴로워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악당이라 하더라도 평면적인 캐릭터를 만들고 싶지는 않다는 바람이 지나치게 크게 발현되고 말 것이다.
주인공은 말할 필요도 없고.
3. 싸나이의 우정과 의리.
애초에 친없찐인 내가 우정이나 의리에 대해 쓸 수 있을 리가 없다.
개인적으로 어린 시절 치기어린 주먹다짐은 아주 어리석은 거라고 생각하며 자랐다.
(물론 어릴 적에는 여자 하나 두고 치고 받아서 이가 부러지긴 했다. 그리고 군대 가서 차였다.)
사나이의 우정과 의리를 다룰 수는 있겠지만 과연 그것은 내 안에서 우러나오는 것인가?
그저 다른 작품들에 나오는 테이스트를 카피한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4. 빠른 전개가 필요한데, 2번을 망설이는 이유로 인해 빠른 전개를 무의식적으로 꺼린다.
자동차가 빨리 달린다고 해서 화물이나 사람을 흘리지는 않겠지만 정신줄을 놓으면 가야 할 곳을 지나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빠른 전개를 선호하지 않는다. 아니, 선호하지 않는다는 것보다 아직은 전개를 빠르게 하면서 빵구도 안 내는 기술이 없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고 느리게 달리면서 빵꾸를 안 내느냐? 그건 또 아니다. 일일이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리 주절거려봐야 언젠가 빵꾸는 난다.
그냥 되는대로 써볼까? 나중에 후회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아무 것도 쓰지 않고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나는 어쩌면 '기껏 쓰고 났더니 그지 같드라.' 라는 상황을 가장 두려워하는 걸지도 모른다.
5. 차기작으로 뭘 쓸까 고민해봤다.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대중성, 내가 잘 아는 분야(혹은 적절한 자료가 어디에 어떻게 퍼져있는지 파악은 하고 있는 분야)를 중심으로 시나리오를 몇 개 구상해봤다.
(1) 라그나로크.
주인공은 사고로 죽는다. 그러나 그의 뇌가 죽기 전에 비밀리에 개발되고 있던 전자화 시스템에 의해 보존된다.
주인공의 의식을 전자화한 사람은 어떤 폐쇄 장치 안에 들어가 내부에서 포트를 열어달라고 부탁한다.
주인공은 어쩔 수 없이 동의하고, 그가 떨어진 곳은 북구 신화를 모티브로 한 가상현실이었다.
게임 판타지를 써볼 생각이었다. 그래서 교보문고 앱을 사면 북유럽 신화 책을 30일 간 무료로 볼 수 있다기에 하룻밤만에 독파했다.
(그 외에도 그 책의 몇 배 분량이나 되는 다른 책을 가지고 있긴 하다.)
북유럽 신화를 기반으로 한 게임이나 미디어는 어마어마하게 많다. 그 책을 읽고 나서 마블의 토르와 로키가 굉장히 북유럽 신화의 캐릭터를 잘 캐치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스토리 자체의 전개보다 소설 안에서 등장하는 신들의 캐릭터를 비틀고 독자들의 기대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깨트리면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주인공은 우울하고 생각이 많은 인물이다.
(2) EO
180년 전, 지구는 외계 생명체에 의해 지배당했다.
인류 중 일부는 궤도에 건설 중이던 스테이션으로 피신했다.
외계 생명체에게 점령당한 지구는 그들이 뿜어내는 가스로 인해 완전하게 뒤덮였다.
인간들은 인간과 거의 유사한 특징을 가지는 인조인간(골격만 합금이고 그 외의 생체조직은 동일함)을 만들어 지구를 재탈환할 계획을 꾸미고 있다.
(게임 니어:오토마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주인공은 감정을 절제당한 인조인간이고, 외계 생명체와 인간의 혼혈인 여주인공과 함께 작전을 수행하면서 인간이란, 또한 살아있다는 것이란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게임에서 모티브를 받은 걸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전개는 완전히 다르다. 개인적으로 닐 블롬캠프 감독을 상당히 좋아하는데, 처음에는 주인공이 이타심을 발휘하는 엔딩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언뜻 제노 기어스(게임)의 엔딩이 생각났다. 참고로 라그나로크의 엔딩도 제노 기어스의 엔딩(애초에 제노 기어스라는 게임 자체가 북유럽 신화 기반이고 주인공과 여주인공이 리프, 그리고 리프트라시르에 대입된다.)과 비슷하게 끝날 예정이었다.
사실 (1)이나 (2)는 라노벨용 컨셉이다.
(3) V.T
주인공은 맨날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찐따다.
자신을 때리는 나쁜 놈의 손을 피할 능력은 있지만 그랬다가 더 맞은 기억이 있어 그냥 맞거나 돈을 상납한다.
주인공은 자신의 아버지가 집으로 배송시킨 가상현실 시스템을 무단으로 작동시키고, 그 안에 들어있는 인공지능의 도움으로 격투기 수련을 하기 시작한다.
자신을 무심하게 대하는 인공지능의 도움으로 주인공의 마음은 점점 단단해지고, 어느 순간 껍질을 깬다. 그리고 주인공의 능력에 눈독을 들이는 사람, 주인공이 쳐부숴야 할 악, 그리고 친구들과 서서히 엮이기 시작한다.
담당자 분이랑 이야기했던 팔릴 만한 것에 가장 근접한 게 아닐까 싶다.
약했던 주인공이 내면의 껍질을 깨고 외적으로도 강해져서 불의와 맞서 싸운다.
주인공은 점점 강해지고, 그에 따라 실수도 하지만 여전히 마음은 따뜻하다. 그리고 그 마음에 이끌린 동료들이 든든하게 6시를 지켜주고 있다.
독자들이 감정이입을 하기에도 좋고, 실제로 이런 전개는 수천 수만 번 변주되어 확실히 검증받았기에 덤벼볼만 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저 그런 아류작에 머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걸 택하면 순전히 내 글빨에 의존해야 한다.
주인공이 격투기 기술을 익히는 것과 동시에 나 역시 격투기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건 미 해병대 격투기 시스템이나 시스테마, 크라브 마가 등 살인을 전제로 개발된 효율이 높은 무술들이다.
같은 플랫폼, 같은 회사와 계약해 차기작을 쓴다면 이걸 쓸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러나 여전히 이번 작품을 잘 완결할 수 있을지, 그리고 완결을 한다 해도 내가 다시 글을 쓸 수 있을지, 글을 쓸 수 있다 해도 계약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생각은 많은데 정리가 되지는 않는다.
일단 모든 컨셉을 어느 정도 분량까지 써보고 판단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만약 그런 짓거리를 한다면 장기 휴재에 들어간 연재작에게 몹쓸 짓을 하는 것이다. 최근에 리크리에이터즈라는 애니메이션을 봤는데, 거기 나오는 인물 중 한 명의 대사처럼 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미안하지 않을 글을 써야만 한다. 나는 그런 글을 쓰고 있는가? 답은 75%정도 NO다.
잠도 안 오고 해서 생각나는대로 써봤네요.
의외로 속이 후련해지는 효과가 있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