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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왜 당신은 투표장에 가야만 하는가
게시물ID : sisa_30065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신용전표
추천 : 0
조회수 : 21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12/17 17:17:07

제가 가장 좋아하는 칼럼니스트 중 한 분입니다.

사고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글을 자주 쓰시거든요.

 

그런데 오늘은 조금 노골적인 글을 쓰셨더군요. ㅎㅎ

읽다보니 '기안84'의 트위터 글이 생각났습니다.

 

혹시 아직 고민하고 계신 분이 있을까 싶어 읽어보시라 글을 올립니다.

문제가 된다면 삭제하겠습니다.

 

 

 

 

원본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12162129255&code=990100

 

[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왜 당신은 투표장에 가야만 하는가

강신주 | 철학자

 

당혹스럽기는 했지만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다. 김수영의 이란 시에서 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문제다. 그렇지만 선택지에는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김수영이 없었다. 평소에 풀은 김수영 본인의 삶을 상징한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물론 학교 선생님들이나 참고서에서는 은 민중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나름 설득력이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래도 풀이 김수영 본인을 상징한다는 생각을 접을 수가 없었다.

 

실제로 수업시간에서도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을 때, 국어 선생님도 충분히 가능한 해석이라고 나름 인정하시기도 했다. 그렇지만 지금 시험 문제 선택지에는 김수영이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당혹감을 느끼고 있을 때, 또 다른 선택지로 민중이 보인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답이 없다는 생각에 이 문제에 답을 기재하지 않을 것인가? 아니면 민중이란 가능한 다른 선택지를 정답으로 선택할 것인가?

 

방금 사례는 내가 강연 때 만났던 어느 여고생의 고민을 재구성해본 것이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조언을 그녀에게 해줄 생각인가. 답이 없으니 어떤 선택지도 답으로 표기하지 말라고 권할 것인가? 아니면 그래도 민중이란 다른 가능한 선택지를 답으로 표기하라고 권해줄 것인가?

 

당시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일반 사람들이 동의하는 그리고 본인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는 민중을 정답으로 표기해서, 대학에 들어가라고. 그리고 훌륭한 국문학자가 되어 김수영의 풀이 상징하는 의미로 민중이 왜 부족한지를, 이어서 김수영이 자신의 삶을 풀로 상징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논문이나 책으로 발표하라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그녀에게 나는 오십보백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 이야기는 <맹자(孟子)>양혜왕상(梁惠王上)’에 등장하는 고사와 관련된다. 비겁하게 후퇴했다는 점에서 오십보와 백보는 같다는 취지이다. 그러나 과연 맹자의 말처럼 오십보와 백보는 같은 것일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이론에서만 혹은 관념에서만 오십보와 백보는 같지만, 실천에서 혹은 삶의 차원에서 오십보와 백보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누군가에게 상해를 입힌 것과 누군가를 죽인 것은 타인에게 위해를 가했다는 이론적인 측면에서 같은 것이지만, 삶의 차원에서 두 가지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예를 들어 이미 상해죄를 범했으니, 살인죄도 저질러버리자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잘해야 본질주의자, 혹은 아이와 같은 순수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고매한 이상세계에 매몰되어 있는 유아론자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는 사태와 상황을 정확히 읽어낼 수 있는 안목을 결여한 채 자포자기하고 있는 불쌍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오십보와 백보는 다르다는 것을 알 정도로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상해죄에서 자신의 범죄행위를 멈출 것이다. 그는 다친 사람은 회복할 수 있지만, 죽은 사람은 회생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가 바로 코앞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가진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아마 입맛을 다시게 될 수도 있는 선거일지도 모른다. 어느 후보도 경쟁의 공동체가 아니라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려는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옳은 지적이다. 모든 후보가 민주주의와 인문주의의 잣대로 생각해본다면 오십보백보로 보일 테니까 말이다. 여기서 최선이 아니라면 차선을 선택해야 한다는 진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런 나이브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도 않다. 머릿속에 최선이 있으면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최선을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모든 후보들이 다 마음에 들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역사상 한번이라도 완전한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던 적이 있었는가? 모두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도정에 있었다. 그러니까 민주주의 이념에 백보 물러서 있는 후보와 오십보 물러서 있는 후보는 동일한 후보라고 보아서는 안된다.

 

대통령 선거는 신념과 이상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과 삶의 문제이다. 이미 우리는 과거 정부들에서 아프게 경험하지 않았는가. 대통령이 누구냐에 따라 앞으로 5년간의 우리 삶은 상당한 부침을 겪을 수밖에 없다. 대통령은 우리에게서 받은 혈세를 자신의 신념과 이념에 따라 어디에 쓸지 선택하고 집중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진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제 민주주의 이념에서 오십보 물러나 있는 후보를 선택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이 오십보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면 49보가 될 수 있는 법이다. 그렇지만 백보 물러서 있는 후보를 뽑는 순간, 우리가 똥줄 빠지게 한 걸음을 내딛는다고 해도 99보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 삶에서 오십보와 백보는 상해죄와 살인죄의 차이처럼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일 수밖에 없다. 우리 시대 가장 탁월한 인문정신 발터 벤야민도 말하지 않았던가. “항상 그때그때의 1보만이 진보이며 2보도 3보도 n+1보도 결코 진보가 아니다.”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등장하는 우리에게 너무나 절절한 외침이라고 할 수 있다.

 

벤야민 앞에서 당신은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대통령 후보들이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래서 투표할 생각도 별로 없다고. 그렇다면 당신은 도대체 어느 때 투표를 할 생각인가. 민주주의 이념에서 1보도 후퇴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그대로 실현할 수 있는 후보가 나올 때까지 모든 정치적 현실에 비관하고 낙담할 생각인가. 그러고도 당신은 민주적인 삶을 살아내려고 한다고, 그래서 자신을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자처할 수 있는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향한 1보를 떼지 않고, 2보를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인가. 1, 1, 그리고 1보가 쌓여야, 마침내 우리가, 그리고 인류가 그렇게 절절하게 꿈꾸었던 민주주의 이념에 도달할 수 있는 것 아닌가. 1보도 내딛지 않으면서 2보에 대해 3보를 이야기하는 사람, 다시 말해 당장 개선할 수 있고 선택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지 않고 이상만을 읊조리는 사람은 보수적인 사람보다 더 해로운 사람일 수 있다. 그는 주변에 무기력만을 유포시키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는 어느 후보자가 차선이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최선이란 단지 우리의 관념 속에, 그러니까 이상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니 최선을 전제로 하는 차선도 다분히 우리의 관념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 차선이란 관념을 머릿속에서 완전히 제거하자.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의 눈에는 자신이 직면해 있는 현실이 보일 것이다. 아무래도 좋다는 자포자기의 심정, 그 유아론적 심정을 떨쳐내야만 한다. 이제 보이지 않는가. 오십보 정도 민주주의 이념에서 후퇴한 후보, 그리고 백보 정도 민주주의 이념에서 후퇴한 후보가. , 이제 선택하라. 우리 공동체의 이상을 향해 오십보 뒤에서 출발할 것인가, 아니면 백보 뒤에서 출발할 것인가. 민주주의를 향해 뚜벅뚜벅 우직하게 걸어가야만 하는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한다. 오십보와 백보는 이론에서는 마찬가지로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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