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KBS 월드컵호'를 지휘할 스포츠국 간부들도 보직을 내려놨다. 브라질 월드컵이 불과 20여일 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내린 용단이었다. 이번 월드컵을 통해 지상파 3사 스포츠 중계전에서 '자존심 회복'을 모색했던 KBS로선 스포츠국 부장 5명의 보직 사퇴는 막대한 타격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스포츠국 간부들은 "KBS를 위해 시급한 일은 '길환영 사장의 퇴진'"이라고 강조했다.
23일 오후 스포츠국 부장급 간부 5명은 "시청자의 신뢰와 기대 없이 KBS 월드컵호는 출항할 수 없다"며 보직에서 물러났다.
이들은 "천문학적인 중계권료와 제작비를 투입해 오래 전부터 준비해 온 KBS월드컵이 그 개막을 불과 20여 일 남겨두고 있다"며 "피를 말리는 고민의 시간들이 더욱 깊어져간다"고 했다.
2014 브라질 월드컵이 8년 만에 3사 공동중계를 하게 된 지난 과정을 돌아보면 스포츠국 간부들이 말하는 '고민의 시간'을 이해할 법 하다. 지난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은 SBS의 단독중계로 진행됐고, 2006년 독일 월드컵은 차범근-김성주 콤비를 앞세운 MBC 의 압승이라, 지난 8년간 KBS는 월드컵 중계에선 발을 디딜 틈조차 없었다. 이번 브라질 월드컵은 앞서 올초 진행된 소치 동계올림픽 중계전의 참패와 지난 8년간의 수모를 갚아줄 절호의 기회였다. 때문에 KBS에선 퇴사한 아나운서 전현무를 노사합의까지 어겨가며 캐스터로 기용하고자 했다. 사측에선 막대한 중계권료를 지불한 대형 스포츠 이벤트에서 타사에 시청률이 밀릴 경우 입을 타격을 먼저 고려했던 것으로 비친 대목이었다. 더불어 최소 800억원의 광고시장을 점하기 위해 인지도가 높은 퇴사한 아나운서를 욕심내는 경제논리가 먼저 작동했다.
KBS가 그간 브라질 월드컵 중계전에 쏟아온 공력을 비춰본다면, 부장단 5인의 보직 사퇴는 작금의 KBS 사태를 길환영 사장의 규정처럼 '직종 이기주의'나 '좌파 노조의 불온한 정치투쟁'으로 치부할 수 없는 대목이다.
스포츠국 부장 5인은 이에 성명서를 통해 "방송권을 독점하고 횡포 부리는 경쟁사에 대항하며 협상하고 준비해 온 스포츠국 뿐 아니라, 광고, 예능, 편성, 기술, 그래픽, 세트, 홍보, 뉴스, 경영 등 KBS 전 분야에 걸쳐 수많은 직종의 선후배, 동료들이 해당 월드컵 방송의 성공적 수행을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묵묵히 헌신하고 있다"며 "이미 엔지니어 선발대가 브라질 현장으로 출발했고, 현지의 각종 방송시설과 장비들, 기타 인력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KBS월드컵에 거는 시청자와 광고주들의 기대를 생각할 때, 우리는 결코 가볍지 않은 책임감과 사태의 위중함을 느낀다"고 했다.
그러나 이들은 "신뢰 잃은 공영방송의 월드컵이 과연 성공할 수 있겠냐"고 반문하며 "제 아무리 훌륭한 해설자와 캐스터가 있더라도 그 결과는 명약관화다. 그동안 기울여 온 각고의 노력과 이미 적지않이 투입된 비용 및 예상되는 손익은 차치하더라도, 국민의 수신료를 재원으로 진행되는 이번 월드컵에 있어 시청자의 신뢰와 따뜻한 사랑은 향후 KBS의 영향력과 위상, 채널 이미지 제고와 직결되는 핵심요소"라고 했다.
"개막이 이제 3주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막강한 경쟁력으로 무장한 타사들은 지금 속으로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며 "이대로 KBS월드컵이 좌초될 수 있는 참담한 상황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다. 생명과도 같이 지켜왔고 지켜내야 할 KBS월드컵과 아시안게임, 저희도 직을 내려놓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길환영 사장에게 간곡히 요청했다. "결자해지의 심정으로 자리에서 내려와달라", "진정 후배들을 도와주는 길이 무엇인지 고민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스포츠국 부장급 간부 5명의 보직 사퇴로 KBS는 23일 오후 7시 현재 총 281명의 팀장급 이상 간부들이 보직에서 물러났다. 앵커들을 포함하면 295명에 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