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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달라 소리치던 아이들 생각에.."술 없인 잠을 못 이뤘제"
게시물ID : sewol_3029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사닥호
추천 : 19
조회수 : 903회
댓글수 : 19개
등록시간 : 2014/05/26 11:18:01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40525201010555&RIGHT_COMM=R12

진도군 조도면 대마도에 사는 어민 김현호(46)씨는 4월16일 오전 세월호 침몰사고 직후 쪽배를 몰아 25명의 생명을 구했다. 그 뒤로도 열흘 넘게 바닷속으로 사라지고 없는 세월호 주변을 맴돌았다. 생존자가 떠오를지 모른다는 한 가닥 희망을 품고서. 김씨는 사고 당일 눈앞에 두고도 구하지 못한 두 명을 떠올리며 "그냥 바다로 들어가버링께, 그 안타까운 마음은 말로 표현 못하제…"라며 말끝을 흐렸다. 참사 34일째인 19일 오전, 김씨가 다시 세월호 침몰사고 현장으로 향하고 있다. 언론과 접촉을 피해온 그를 <한겨레>가 처음으로 1박2일간 동행 취재했다.

텅빈 섬등포항에 어민 김현호(46)씨가 나타난 때는 해질 무렵, 오후 6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길고 납작한 생김새의 1.11t짜리 소형 어장관리선 '피시헌터'호를 몰고 온 김씨는 선착장에 닿자마자 땅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호리호리한 몸매만큼 날렵한 동작이다.

텅 빈 섬등포항에 어민 김현호(46)씨가 나타난 때는 해질 무렵, 오후 6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길고 납작한 생김새의 1.11t짜리 소형 어장관리선 '피시헌터'호를 몰고 온 김씨는 선착장에 닿자마자 땅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호리호리한 몸매만큼 날렵한 동작이다.

"먼 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소."

악수를 건네는 김씨의 손이 억셌다. 꽉 쥔 그의 손바닥 안쪽에서 단단히 박인 굳은살이 느껴졌다. 수십년 '배질'을 해온 세월의 흔적은 구릿빛 피부로도 나타났다. 눈빛은 날카로우나 사납지 않았고, 모자 속에 가려진 잿빛 머리카락과 턱선을 따라 하얗게 자리잡은 수염은 멋스러웠다.

"갑시다."

짧은 인사를 주고받은 뒤 김씨는 다시 피시헌터의 시동을 걸었다. 진도군 조도면 상조도에 있는 섬등포항에서 다시 배로 10~20분을 더 들어가야 나타나는 작은 섬, 대마도로 뱃머리를 돌렸다. 피시헌터 꼬리 부분에 달린 일본제 혼다 모터가 굉음을 내며 힘차게 돌았다. 지난 18일 오후 선착장에서 떠난 지 5분쯤 지나자 저 멀리 대마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모두 70가구 107명(2013년 1월31일 기준)이 사는 대마도에서 김씨는 나고 자랐다. 대다수 대마도 주민의 삶이 그렇듯, 그도 봄이면 새벽부터 바다로 나가 미역과 톳을 길렀다. 해조류 수확이 끝나면 낭장망(조류가 강한 바닷속에 설치하는 긴 자루 모양의 그물)으로 멸치 큰 놈들을 잡았다. 배질이 아니었다면 아들 민준(23)과 큰딸 예림(21)이를 대학에 보낼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바다는 그에게 참 고마운 삶터였다. 4월16일 오전에 벌어진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말이다. 사고 발생 33일째인 지난 18일 밤, 그는 대마도 대마리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그 일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직접 담근 백하수오술이 줄어드는 만큼 그때 기억은 되살아났다.

김현호씨가 여객선 세월호 침몰사고 소식을 맨 처음 들은 건 지난달 16일 오전 9시30분께다.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던 세월호가 맹골도와 대마도, 병풍도(무인도) 중간 지점에서 크게 중심을 잃고 기울던 시점이다. 김씨는 티브이 '7번'에서 날마다 틀어주는 아침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지금이야 바쁘니까 테레비 볼 시간도 없지만, 그때는 쬐까 한가할 때였응께 아침밥 묵고 연속극 보고 있었어. 그란데 조금 지나니까 드라마는 계속 나옴스로 밑에 자막이 뜨더만. 진도 부근에서 여객선 침몰했다고. 집사람이 '진도 부근이라는디 안 가봐?' 헌디, 진도 부근이라도 여그 조도인지 쩌그 위쪽인지 어떻게 알어. 그냥 '어어어' 하고 있었제."

그때 정순배 조도면 이장단장 겸 청년회장의 긴급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정 회장이 아래 내용의 문자를 보낸 시각은 9시42분, 김씨가 받은 시각은 9시43분. "긴급상황 맹골근처 여객선 침몰중. 학생 500여명 승선. 어선 소유자 긴급 구조요청. 정순배." 정씨는 한번에 25명씩, 모두 250명의 조도면 어민한테 부지런히 문자를 뿌렸다.

청년회장에게 메시지를 받은 뒤
배에 기름 채워넣을 시간도 아까워
기름통을 들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해경이 세월호 접근을 말렸지만
눈앞에 보이는 승객이 더 중요했다
지시를 무시하고 뱃머리를 댔다
승객에 목청높여 소리를 질러가며
배가 뒤집힐뻔한 아찔한 위기 끝에
2차례에 걸쳐 25명을 구조했다 
생존자가 떠오를수도 있단 생각에
사고 뒤 열흘 넘게 바다를 헤집었다
그는 아직도 술 없이 잠들지 못한다


정 회장의 문자를 받은 김씨는 대형 사고를 직감했다. 평소 맹골수도의 "물발이 싸다"(조류가 빠르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마음이 급했다. 텔레비전을 그대로 켜둔 채 곧바로 피시헌터가 있는 대마항 쪽으로 뛰었다. 기름(휘발유) 채우는 시간도 아까워 20리터(ℓ)들이 말통에 담긴 기름을 통째로 들고 달렸다. 집에서 20~30m 거리에 있는 대마항으로 가던 길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허겁지겁 뛰쳐나온 마을 형님 김승태(53)씨를 만났다. 대막리에 사는 동생 김준석(40)씨도 비슷한 시각 어선 '태선호'(1.05t)에 역시 이웃 김대열(44)씨를 태우고 침몰사고 현장으로 향했다.

"우리 섬 바로 앞에 2분 정도 나가면 목섬이라고 무인도가 있는디, 그 옆으로 딱 도니까 사고 현장이 바로 보여불더만. 그때부터 나는 30노트(시속 55.56㎞) 전속력으로 달리고, 승태 성님은 뒤에서 말통으로 기름 넣음스로 10시3분인가 5분인가에 도착했어. 여기서 15분 정도 걸렸제."

사고 현장에 도착한 김현호씨는 할 말을 잃었다. 평생을 바다에서 산 그한테도 그렇게 큰 배가 침몰하는 장면은 처음이었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세월호는 이날 오전 8시30분 진행 방향을 틀다가 왼쪽으로 크게 기울기 시작했다. 김씨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75도 이상 기울어, 완전히 옆으로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세월호 1층과 2층은 벌써 바닷속에 가라앉아 보이지 않았고 3층도 절반 남짓 물에 잠겼다.

"배는 많이 있었응께 잠깐 2~3분 정도 지켜봤어. 목포 해경의 경비함 123정도 있고 고속단정, 어업지도선도 여러 대 있었지. 거기에 상선 네 척, 어선이 한 50척 정도 전부 주위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사람들을 빨리빨리 못 실어내드랑께. 큰 배는 접안을 못항께, 123정에서 내린 쬐깐한 고무보트로 시명(3명) 빼내 뒤로 빠져불고, 어업지도선 단정으로 5명 실어 빠져불고 그라는디 깝깝하제."

현장에 달려간 많은 어선이 일제히 구조에 참여했더라면 피해 규모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던 이유가 있다. 현장에서 구조 작업을 지휘하던 해경은 2차 피해를 막겠다며 민간 어선의 세월호 접근을 막았다. 해경의 이런 판단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뱃머리부터 꼬리까지 길이 145m에 이르는 거대한 세월호 선체가 뒤집어지는 상황이었다. 다만 김현호씨의 선택은 해경과도, 동행한 이웃 주민 김승태씨와도 달랐다. 김씨가 세월호 꼬리 왼쪽 부분으로 뱃머리를 들이댔다. 김승태씨는 말렸다.

"123정이 '빵빵' 기적을 울리며 어선들을 못 가게 하드만. 그 큰 배랑 함께 넘어지면 위험항께. 그란디 넘어올라믄 시간이 좀 걸리겄고, 무엇보다 3층 복도 뒤쪽에 사람들이 매달려 있었어. 사람들이 빨리 나오면 살 거인디, 물이 무서워서 안 나오고 버티드만. 그래서 (피시헌터) 이물(뱃머리)을 그냥 무조건 들이대고 '빨리빨리 나오시오' 해서 끄잡아냈어."

대막리 어민 김준석씨도 그랬다. 해경의 지시보다 눈앞에 보이는 세월호 승객의 목숨이 더 중요했다. "이런 염병, 해경이 다 뭔 소용이여. 눈앞에서 사람이 가라앉는디, 일단 막 갖다대서 살리고 보는 게 이상적이제. 해경 지시 들었다가는 갸들 다 죽었어. 안 그렇겄소?" 19일 오전 대막리에서 만난 김준석씨가 동의를 구했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들었다. 김준석씨가 김현호씨와 별도로 태선호로 구해낸 생존자는 20명이다.

해경의 접근금지 명령을 뒤로하고 세월호에 배를 붙인 김현호씨는 좌현 후미에서 모두 8명을 "빼냈다". 김현호씨가 세월호 쪽으로 다가갈 때만 해도 "니가 지금 나 죽여불라고 그러냐"던 김승태씨도 힘을 보탰다. 가슴 철렁한 순간도 있었다. 세월호의 후미 철제난간에 피시헌터의 뱃머리가 걸려 함께 기우뚱할 때였다. "야 너 배 들어간다!" 김승태씨의 이 말 한마디가 없었다면 피시헌터의 운명도 세월호와 다르지 않았을지 모른다. 온 힘을 다해 피시헌터호를 세월호 난간에서 빼냈다.

1차로 구해낸 8명을 뒤쪽에서 대기하던 행정선 진도아리랑호에 옮겨 싣곤, 다시 세월호 쪽으로 다가갔다. 그 짧은 순간 세월호는 왼쪽으로 완전히 거꾸러졌다. 처음에 다가갔던 세월호의 왼쪽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대신 뒤집어진 오른쪽 허리 부분이 모습을 드러내며 선체 통로에 모여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배 안에 있다가 배가 자꾸 가라앉으니께 물로 다 뛰어들었어. 나도 힘이 좀 빠졌응께 구명조끼 잡고 그냥 막 끄집어올렸지. 나중에 티브이에서 보니까 해경도 지들 고무보트가 작응께, 우리 배 뒤에 타서 생존자 5명 정도 실었더만."

피시헌터가 2차로 진도아리랑호에 다가가 건넨 생존자는 22명이었다. 이 가운데 김현호씨가 김승태씨의 도움을 받아 건진 생존자는 17명이었다. 정순배 조도면 청년회장과 행정선 진도아리랑호 관계자 등의 설명을 종합하면 김씨는 두 차례에 걸쳐 모두 25명의 목숨을 살렸다. 정부가 "투입된 경비함정만 81척, 헬기 15대, 유도탄 고속함, 유디티(UDT) 정예병력 등 동원해 구조에 총력"을 기울였다고 보도자료를 뿌린 사고 첫날, 달랑 선박용 모터 하나 달린 "쬐깐한" 피시헌터와 태선호 두척이 승객 45명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참담한 비극의 와중에 빛나는 활약을 펼친 김씨는 그로부터 한 달 넘게 언론을 피해다녔다. 겉으로는 "실종자도 아직 다 못 건졌는디, 내가 뭘 했다고 그란 걸 하겄어요"라며 인터뷰 요청에 손사래를 치며, 속으로는 자신이 구한 생존자 25명 대신 구하지 못한 두 사람을 떠올리며 술로 괴로움을 짓이겼다. 김씨는 사고 당일 세월호 우현 허리에서 생존자를 구출하던 중, 구명조끼를 입은 승객 두 명이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모습을 봤다.

"창문 안쪽에도 (구출을 기다리는 승객이) 보였제. 창문 하나에 한 명씩, 두 명. 나는 그짝도 통로로 연결이 되는 줄만 알고 '옆으로 오시오, 옆으로!'라고 오른쪽을 계속 가리킨디, 안 된다고 고개를 가로젓더라니께. 나중에 알고보니 문을 열고 나와야 하는디, 문이 물이 잠긴 쪽에 있어서 그란 것 같드만…."

처음으로 바다가 무서운 존재로 다가왔다. 날이 밝으면 넋이 나간 사람처럼 대마도 바다를 헤집고 다녔다. 열흘 넘게 그랬다. 생존자가 바다로 떠오를지 모른다는 미련한,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실낱같은 희망이 그의 등을 자꾸 밀었다. 김씨는 "유리창이라도 깨려고 시도했지만, 배가 미끄러운데다 망치나 쇠막대기 같은 게 없어서 그냥 바라만 봤다"며 안타까워했다.

"많이 안타까웠지. 그냥 사람이 바다로 들어가버리니까…, 그 심정은 말로 다 표현 못하제."

이웃 주민 이아무개씨는 5월 초 김현호씨의 근황을 전하며 "소주 반 되(세 병 정도) 넘게 마시지 않으면 잠을 못 잔다"고 말했다. 당사자인 김씨는 "반 되는 모르겄고, 취하지 않으면 잠을 못 이뤘다"고 말했다.

김준석씨도 술만 마시면 울음이 터져나와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맨정신으로 버티기엔 너무나 괴로운 나날이다. 지난주에는 침몰한 세월호가 갑자기 멀쩡하게 바다 위로 떠오른 뒤 항해하는 이상한 꿈을 꾸기도 했다.

두 사람이 아직도 안타까워하는 건 해경의 이해할 수 없는 초기 대응이다. 무엇보다도 사고 현장에서 승객을 세월호 밖으로 탈출시키려는 해경의 노력이 눈에 띄지 않은 점이 아쉬웠다. "해경이 단 한 명이라도 세월호 안으로 들어가서 나오라고 방송만 했어도, 그 소리가 '야 나오란다' 이렇게 전달돼 다 나왔을 거여." 먼바다로 고개를 돌리는 김현호씨의 눈가가 젖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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