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순이 넘어 백발이 성성한 노장군 홍경래는, 압록강 도하를 앞두고 모든 준비를 마친 대한제국의 최정예사단인 광개토사단의 장병들 앞에 나서 찬 새벽공기를 가르는 쩌렁쩌렁한 힘찬 목소리로 마치 한 마리의 호랑이가 포효하듯 연설을 시작했다.
"제군들, 조국의 자랑스러운 아들들이여. 우리는 이제 모두 역사적 순간의 주인공이 되었다. 천년 세월동안 빼앗겼던 우리 조상님들의 땅을 이제야 비로소 우리 힘으로 찾으러 간다. 단군 성조께서 바로 이 땅에 하늘을 연지 오 천년 동안 만주는 바로 우리 민족의 삶의 터전이었다.
본래 우리 조선족(朝鮮族)과 옛날 역사에 등장하는 숙신족(肅愼族)과 말갈족(靺鞨族), 그리고 지금 중원을 차지하고 있는 여진족(女眞族)은 다 한 뿌리로 같은 민족이었다. 중국 역사에는 이 모두를 동이족(東夷族)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한(漢)나라를 세워 중원(中原)을 차지한 한족(漢族)의 침략으로 고조선(古朝鮮)이 멸망하기 전까지 바로 제군들 눈앞에 펼쳐진 만주 땅은 우리 조상들이 나라를 세워 수 천년간 내려오며 살아 숨쉬던 땅이었다. 잠시 이민족인 한족의 침략으로 빼앗겼던 우리 땅을, 부여(夫餘)와 그 후손인 고구려(高句麗)를 세운 우리 선조들의 투쟁으로 한족을 다시 내쫓고 되찾아 대제국의 역사를 이루어 내었던 것이다.
고구려가 망한 후에도 만주 지방은 발해만 지역에 살던 발해말갈(渤海靺鞨)과 흑룡강 일대에 살던 흑수말갈(黑水靺鞨)이 번갈아 발해(渤海)와 금(金)나라를 세워서 중원의 한족과 경쟁하며 이 땅을 지배해 왔다. 이후 또 다른 형제족속인 몽고족(蒙古族)이 원(元)나라를 세워 만주 땅을 다스리다가, 한족이 세운 명(明)나라에게 망한 뒤 지금의 청(淸)나라가 세워지기 전까지 잠시 동안 한족의 지배를 받아온 것이다.
지금 서울의 조정 일각에서는 우리가 만주를 정벌하러 가는 것을 마치 청을 멸하고 명을 다시 세우기 위한 것이라는 말이 있으나 이 말은 너무나 가당치 않는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썩어빠진 정신을 가진 일부 유학자들이 이민족인 한족과 가까이 지내며 중화(中華)로 섬기길 애원하며 우리 스스로를 소화(小華)로 자처하고, 오히려 형제족속인 몽고족과 여진족들을 오랑캐라 업신여기며 조롱해 왔기에 이들로부터 공격의 빌미를 제공해 왔던 것이다.
고려(高麗) 시대에 한족이 세운 송(宋)과 친해 몽고족이 세운 세계의 대제국인 원(元)의 노여움을 사 수 백년 동안이나 화를 당했으며, 조선(朝鮮) 시대에 들어와서도 다 망해가던 한족의 나라인 명(明)을 도우려 했다가 새로이 강성한 여진족이 만든 청(淸)의 비위를 거슬려 온 나라와 백성이 크게 욕을 보지 않았던가?
이는 제 분수도 모르고 명분만 따지며, 돌아가는 세계의 흐름도 읽지 못한 채 탁상공론만 일삼는 저 한심한 벼슬아치들의 옹졸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로 인해 돌아오는 피해는 고스란히 아무 죄도 없는 인민들의 피땀으로 갚아야만 했던 것이다.
사실 어느 땅을 누가 차지하고 있는가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그 땅에 사는 백성들을 누가 더 편하게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는가가 더욱 중요한 문제일지 모른다. 아무리 같은 민족이라 하더라도 착취와 억압만 일삼는다면 이는 이민족의 침략과 지배보다 나을 게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제군들, 지금 중국 땅은 한족도 아니고 만주족도 아니고 몽고족도 아닌 이 땅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서양 백인들의 차지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중국 뿐 아니라 우리도 언제 이런 처지가 될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하루 빨리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일만이 이민족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걸 명심하길 바란다.
또 지금 우리가 만주 땅으로 진격하는 것은 만주를 침략하고자 함이 아니라 지금 만주를 지배하고 있는 무능력하고 부패한 북경의 조정으로부터 우리 형제족속들을 해방시키러 가는 것이며, 더구나 서양 백인들의 지배는 더 더욱 용인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의 표명인 것이다.
내일의 전투에 조국과 민족의 운명이 달려 있다. 바로 장병 제군들에 달려 있는 것이다. 아무쪼록 조국과 민족을 위해 나아가 중국 인민의 안녕을 위해 용맹스럽고 충성스럽게 전투에 임해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노장군의 놀라운 식견과 혜안이 빛나는 감동적인 연설을 묵묵히 경청한 제국군 병사들의 가슴에는 진한 감동과 함께 벅찬 감격이 밀려 들어왔다. 광활한 만주벌판을 말달리며 호령했던 조상들의 웅대한 기개를 잃어버린 채 대륙의 끄트머리 반도로 밀려나와 겨우 생존을 유지해 온 옹색한 천여 년의 세월이 통탄스러웠다.
오늘 다시 그 땅에, 머리를 조아린 채 조공물을 실어 나르러 온 것이 아니라 고토회복과 인민해방을 위해 총칼로 무장한 채 당당히 돌진해 들어가는 자신들의 모습을 상상하니 마치 꿈결인양 아득하였다.
아편전쟁 당시 만주에 진출한 제국군은 청군의 저항이 그렇게 강력하지 못하자 광개토사단만 북경 쪽으로 전진하도록 하고, 을지문덕 사단은 요동반도(遼東半島)로 남하하여 대련항과 여순항을 점령하는 한편 나머지 강감찬 사단은 북진하여 하얼빈을 중심으로 흑룡강(黑龍江)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는 제국군 총사령관인 홍경래의 장기적 포석에 따른 의미 있는 군대의 배치였다. 남경조약 체결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강경파인 보수당과 유림들은 전쟁을 계속해 북경의 청왕조를 멸하고 명왕조를 복고시켜야 한다는 사대론에 입각한 강경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대한제국 정부는 이미 두 차례의 전쟁을 통해 청국 군사력의 실상을 잘 파악하고 있던 터라, 영국의 도움 없이도 청국과의 독자적인 전쟁에서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고 만주(滿洲)는 옛 고구려(高句麗)의 영토임을 내세워 영국 정부와 청국 조정에게 만주에서 대한제국군을 철수하지 않겠다는 놀라운 통보를 단행하였다.
대한제국의 갑작스런 통보에 영국은 당황하게 되나 영국의 입장에서는 광활한 황무지에 불과한 만주에는 본래 관심을 두지 않고 있던 터이라, 북쪽으로 흑룡강과 서쪽으로 요하(遼河)를 경계로 하는 만주 일대의 점령을 묵인하고 대신 홍콩과 광동, 상해를 잇는 남서해안에 대한 독점권을 인정받는다.
이러한 영국과의 밀약은 대한제국의 군사. 경제력을 바탕으로 신장된 국제적 위상을 대변하는 것으로, 대한제국이 구미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제국주의 국가의 반열에 들어섰음을 영국으로부터 인정받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만주에서 대한제국군이 철수하지 않겠다는 통보를 받은 북경의 청국 조정은 난리가 나고 저의 실성지경에 이르도록 격노한 도광제는 자신들의 조상의 발원지인 만주를 뺏길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로 30만 대군을 총동원해 대한제국과의 결전을 명령하였다.
비록 아편전쟁에서 참패하였지만 영국이 물러난 상태에서 자신들의 속국으로 간주했던 조선에게까지 질 수야 없다는 감정이 다시금 전쟁준비에 착수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홍경래의 진중지휘 하에 10만으로 증원되고 새로 도입된 맥심기관총으로 무장한 제국군의 완강한 수비에 막혀, 명왕조를 축출한 여진족의 자랑인 팔기군은 요하를 도하하지도 못한 채 엄청난 병력의 손실을 입고 패퇴하고 말았다.
오히려 제국군이 요하를 건너 북경으로 본격적인 진공태세를 갖추자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청국 조정은 서둘러 강화에 나섰다. 한. 청 양국 정부는 여순에서 조약을 맺고 대한제국의 만주 병합을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고, 조선은 발해 왕조의 멸망 이후 900여 년만에 다시 만주일대의 지배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1842년)
대한제국군 총사령관인 홍경래가 초대 만주 총독으로 임명되고 행정수도는 봉천(奉天)으로 하여 만주를 지배하게 되었다. 대한제국의 만주 점령은 구미 열강들의 날카로운 주목을 받았으나, 대한제국의 배후에 영국이 존재하고 있고 프랑스는 혁명직전의 국내상황으로, 러시아는 근동에서 투르크와의 분쟁으로 동북아시아의 정세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터라 강력한 견제를 받지 않고 국제 정세에 묵인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