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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핥기 로마사(完) - 유럽교회와 교황제도
게시물ID : history_471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악진
추천 : 4
조회수 : 864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2/06/16 14:29:44
1. 동로마의 종교 476년 후 유럽역사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교회를 빠뜨릴 수 없다. 콘스탄티누스 이후 국가종교로서 역할을 하던 것과는 달리, 서로마 멸망 후 교회는, 서방에서는 사실상의 지역사회의 구심점이 되었고 동방에서는 황제가 종교지도자역할을 겸했다. 5~6세기 무렵에는 고전시대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회분위기가 사라지고 미신이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강하게 지배하게 되었다. 이는 고전시대의 정신적 토대가 무너지고 중세적 분위기가 시작된 것을 의미한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종교정책은 이러한 현상을 부채질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아테네의 아카데미 학원을 폐쇄시키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파괴했다.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모든 이교도 우상을 파괴하도록 명령했고, 유대교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했다. 유스티니아누스 스스로 신학논쟁에 끼어드는 것도 매우 즐겼다. 콘스탄티누스를 비롯한 전대의 황제들이 정치적 이익을 달성하기 위하여 신학논쟁에 후견적/방관자적 입장을 취했던 반면에 유스티니아누스의 개입은 매우 적극적인 것이었다. 그는 기독교의 교리문제에 황제가 관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451년 칼케돈(=카르타고)공회에서는 기독론 문제를 확정했다. 2. 동서교회의 분열 유스티니아누스는 동서 교회를 통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여러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는 끝내 실패했다. 동서교회는 서로 다른 문화적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기 때문에 분리될 위험이 상존하고 있었다. 서방 기독교가 종교와 정치의 결합에 소극적인 데 비해 동방에서는 마땅히 황제가 교회의 지도자여야 한다는 생각이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서로마가 무너지고는 동서교회의 통합이 이루어지는 듯하다가도, 결국 서방 교황과 동방 황제의 입장차이가 극복되지 못했다. 3. 서로마의 상황 서로마의 교회는 로마문명이 남긴 유일한 제도적 유산이었다. 서로마의 주교들은 야만족이 지배한 서방에서 그나마 행정경험과 지적능력을 갖춘 이들이었다. 로마제국의 군대가 떠나고 제국의 행정력이 완전히 붕괴된 상황에서 주교들은 마지막으로 남은 권위의 상징이었다. 주교들은 사회적으로도 명문가 출신이었기 때문에 재력도 갖추고 있었다. 평민들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마술적인 힘을 갖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한편 동방에서부터 시작된 수도원 운동이 서방에까지 전해져서, 서방에도 차차 수도원이 생겼다. 성 베네딕트의 베네딕트 수도원을 필두로 수도원들이 늘어났다. 수도원은 성직자를 양성하고 고전시대의 지식과 고등지식을 보전하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 르네상스 시대가 올 때까지는 유럽의 최첨단 지성은 수도원에 기대야만 했다. 4. 교황제도의 등장 베네딕토16세의 교황색 패기. 사람들은 중세를 교황권 우위의 시대로 착각하기 쉽지만, 사실 교황이 세속권력자와 눈이라도 맞출 수 있었던 것은 십자군시대를 전후한 몇몇 사람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중세교황은 이탈리아 군소영주에 불과했고 자기 동네에서도 실권이 없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가톨릭 측은 최초의 로마주교(라고 가톨릭이 주장하는) 베드로의 권위에 기대어 로마 주교가 곧 교황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에는 오히려 "정통성"측면에서는 아시아의 교회들이 로마보다 우월한 것같다. 로마주교가 서방에서 기독교권 최종권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에는 '베드로'보다 세속적인 요인들이 컸다. 첫째, 로마는 수백년 간 세계의 중심지였고 로마의 주교들은 원로원과 황제의 비즈니스 파트너였다. 이러한 현실세계에서의 실력이 로마주교에 각별한 권위를 더해준 것이다. 둘째, 서로마가 멸망하고 동로마가 이탈리아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 시대에는 로마주교(=교황)가 실질적인 이탈리아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아틸라에게 퇴각을 청한 것도 최초의 교황으로 일컬어지는 레오5세였다. 게다가 동고트족을 몰아낸 동로마인들은 이탈리아인들과 썩 사이가 좋지 않았다. 사실 이탈리아인들은 게르만만큼이나 동로마인들이 달갑지 않았다. 결국 이 때에도 실질적인 구심점은 교황이 됐다. 정부기관이 사라진 이탈리아에서 교황은 정부기관과 맞먹는 관할구역과 통치기구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정치적 이익을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한 게르만 족장들은 앞다퉈 교황에게 줄을 댔다. 5. 새로운 유럽의 탄생 기독교는 고전시대 유산의 일부분이었지만, 교황 大그레고리우스의 시대를 거치면서 고전시대와 별개의 것이 되었다. 그레고리우스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치세에 의해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상황이 펼쳐지게 된다. 이 시대에 유럽의 역사는 더 이상 지중해 연안이 아니라 전 유럽을 아우르는 것이 되었다. 그리스 문명과의 단절도 이루어졌다. 서방에서는 그리스어가 더 이상 고급언어로 사용되지 않고 라틴어가 그 지위를 얻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1세. 그는 성인이고, 4대 대교황 중 1명이다. 그는 탁월한 신학자이자 성직자였고 훌륭한 정치인이었다. 한편 야만인들에게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기독교 자체도 야만문명의 영향을 받았다. 기독교 안에 켈트적인 요소와 게르만적인 요소가 섞여 들어왔다. 예컨대, 기독교는 미신적 민간신앙이나 성지를 기독교식 성자와 성지로 대체했다. 과거 다신교 사회에서 신들이 맡았던 역할을 기독교 시대에는 성자들이 맡게 되었다. 서유럽의 중세는 로마제국의 공권력이 사라지고 야만족 족장들이 앞다퉈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면서 시작됐다. 게르만인들은 로마문명에 동화되면서 귀족과 기사계급으로 변모했다. 인구가 격감하여 도시들은 쇠퇴하였고 야만왕국 내부에서도 중앙집권화가 약화되어 점 조직식 봉건제도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 맺는 말 늑대젖을 먹고 자란 목동이 세운 언덕 위의 마을은 이민족 지배자를 축출하고 공화정을 세운 뒤, 지중해의 패권자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희생을 강요받은 시민들과 동맹시는 공화정에 자기의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는데, 그러한 혼란의 과정에서 군인들이 두각을 드러내더니 결국에는 공화정이 무너지고 제정이 시작되었다. 성실하고 지혜로운 황제의 시대를 지나 폭력과 야망이 지배하는 시대가 펼쳐졌다. 경제적 중심이 동쪽으로 이동했고 게르만들이 몰려 왔다. 인플레이션에 의해 경제적 쇠퇴를 겪으면서 행정력과 군사력이 약화되자 여러 명의 황제가 위기해결에 진력했다. 비록 동방을 지켜내는 데에는 성공하지만 서방의 쇠퇴는 막을 수가 없었고 풍요로운 땅을 찾아온 게르만에 의해 서방정부는 와해된다. 로마는 여전히 동쪽에 있었다. 그것이 비록 카피톨리노 언덕이나 포로 로마노와는 전혀 상관이 없지만 말이다. 투르크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중세 내내 유럽의 국력은 비잔틴>>>>>>>>>>>>>>넘사벽>>>>>>>>>>>>>>>>>>>>>>>>>>>>>>베네치아>>>파리였다. 비잔틴은 유럽의 동쪽경계선을 이슬람으로부터 지켜냈다. 반면 이탈리아와 갈리아, 브리타니아는 기나긴 암흑시대에 들어섰다. 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도약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는 기간이었지, 결코 무지몽매한 시간낭비가 아니었다. 계몽주의적 오만함으로부터 중세를 재평가하는 시도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100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흥망성쇠를 맞은 수많은 인간군상과, 그들을 둘러싼 세상을 보는 일은 흥미롭다. 로마사가 우리에게 주는 통찰력과 지식은 실로 엄청나서, 그것을 알기 전과 후의 사람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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