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 번조선은 제와 제장성을 경계로 산동반도와 韓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산동반도 지역에 원절식 돈칼만 나타나므로 제에게 산동반도 지역을 빼앗긴 것으로 추측된다.
황하 동쪽이고, 제수와 대야택 북쪽은 번조선이 중국으로부터 최후까지 지킨 韓 지역이다. 세력이 약해진 번조선은 요동고새 북쪽의 「한혁」편의 한후국과 결합하여 진번조선이 된 것으로 추측된다. 『사기』 「조선열전」에 연이 진번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켰다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기』 「조선열전」 自始全燕時 嘗略屬真番朝鮮 為置吏築鄣塞 (전 연의 시기에 진정 처음으로 진번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킴을 경험하였다. 관리를 두고 장새를 쌓으려 하였다)
중국 동해안의 번조선 중 이 지역이 최후까지 남았고, 왕을 한(칸)이라 하였으므로 중국인들도 이 지역을 韓이라 칭하였을 것이다. 이 지역은 황하 하구이므로 예(왜) 집단이 가장 먼저 정착하였고 번조선이 밀려나면서 타지역 번조선인들도 이 지역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이 지역은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바닷가여서 지배해도 큰 실익이 없고 실효지배도 어려운 지역이었다. 진번조선이 진개에 의해 멸망되었을 때도 요동고새 북쪽에는 진개5군이 설치되었지만 『사기』 「흉노열전」 燕北有東胡 …… 其後燕有賢將秦開,為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走東胡,東胡卻千餘里。… 燕亦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이 지역에 연의 군현은 설치되지 않았다. 진한 교체기에 요동고새 북쪽은 상하장 지역으로 불리면서 사람이 살지 않게 되어 예맥조선의 영향 하에 있었는데 위만이 패수를 건너 망명하여 거주하다 예맥조선의 왕위를 찬탈하였다. 『사기』 「조선열전」 滿亡命聚黨千餘人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鄣稍役屬真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王之都王険
위만의 예맥조선은 원 예맥조선의 당산지역과 구 진번조선에서 패수(영정하) 이남을 뺀 지역을 차지하고 韓 지역도 번국화하였다. 예맥조선이 韓 지역까지 영향력을 가졌다는 것은 예군 남려의 기사에 의해 알 수 있다. 남려가 우거를 배반하고 漢에 귀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후한서』 「동이열전」 예조, 濊君南閭等畔右渠率二十八萬口詣遼東內屬 (예군 남려 등이 우거를 배반하여 이십팔만을 거느리고 요동에 귀속하였다)
그런데 漢은 이 지역을 창해군으로 만들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였다. 남려가 서기전 128년에 항복했지만 漢이 창해군까지 길을 만들다가 공사비가 많이 소요되고 연제 주민의 요역부담이 커서 항복한 지 1년 반만에 漢이 공식적으로 영토로 만들지 않겠다고 결정하였다. 『한서』 「무제기」 (元朔元年)秋, (중략) 東夷薉君南閭等口二十八萬人降, 為蒼海郡. (중략) 三年春,罷蒼海郡。
이와 같은 사실은 다음 기록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ㄱ) 『사기』 「평준서」
『사기』 「평준서」 自是之後,嚴助、朱買臣等招來東甌,事兩越,江淮之閒蕭然煩費矣。唐蒙、司馬相如開路西南夷,鑿山通道千餘里,以廣巴蜀,巴蜀之民罷焉。彭吳賈滅朝鮮,置滄海之郡,則燕齊之閒靡然發動。--- 其後漢將歲以數萬騎出擊胡,及車騎將軍衞青取匈奴河南地,築朔方。當是時,漢通西南夷道,作者數萬人,千里負擔饋糧,率十餘鍾致一石,散幣於邛僰以集之。數歲道不通,蠻夷因以數攻,吏發兵誅之。悉巴蜀租賦不足以更之,乃募豪民田南夷,入粟縣官,而內受錢於都內。東至滄海之郡,人徒之費擬於南夷。
이로부터 엄조 주매신 등은 동구를 끌어들이고 양월의 일에 개입하면서 강회지방이 소란스러워져 많은 군비가 소모되었다. 당몽과 사마상여는 서남이로 통하는 길을 열기 위해, 산을 뚫어 천여리에 달하는 길을 통하게 하여 파촉의 영역을 확대하였으나 파촉의 백성은 그 일로 고달팠다. 팽오가 조선을 멸하려 창해군을 설치하니, 연제 지역이 피폐해졌다. --- (흉노 관련 비용 발생 사실 기술) --- 그 후에 漢의 장군들은 매년 수만의 기병을 이끌고 흉노족을 공격했고, 마침내 거기장군 위청은 흉노의 하남땅을 탈취하여 그곳에 삭방군을 설치했다. 이 때 漢이 서남이와 통하는 도로를 만들려 하였는데, 인부가 수만에 달했다. 천리 밖에서 지거나 메고 양곡을 보냈는데, 대략 십여 종(1鍾은 6石4斗)을 보내면 1石이 도착할 뿐이어서, 공(邛)과 북(僰)에 돈을 풀어 식량을 모았다. 수년이 지나도 도로가 개통되지 않자 만이가 여러 차례 공격했고, 관리들은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물리쳤다. 모든 파촉의 조세로도 이들 비용을 대는데 부족하였다. 이에 부유한 백성을 모집하여 남이의 땅에서 경작하게 하여 곡식을 받고, 그 대금은 도내에서 받도록 하였다. 동쪽으로는 창해군에 이르기 위한 도로도 그 사람비용(동원된 인원의 식량비용)이 남이의 경우와 비슷하였다.
(ㄴ) 『사기』 「평진후주부열전」
『사기』 「평진후주부열전」 元朔三年,張歐免,以弘為御史大夫。是時通西南夷,東置滄海,北築朔方之郡。弘數諫,以為罷敝中國以奉無用之地,願罷之。於是天子乃使朱買臣等難弘置朔方之便。發十策,弘不得一。弘迺謝曰:「山東鄙人,不知其便若是,願罷西南夷、滄海而專奉朔方。」上乃許之。
원삭 3년(서기전 126년), 장구가 면직되니 공손홍을 어사대부로 삼았다. 이때는 서남이와 통하고, 동쪽으로는 창해군을, 북쪽으로는 삭방군을 설치했다. 공손홍이 수차례 간언하여, 쓸모가 없는 땅을 받드는 일로 중국을 피폐하게 한다는 이유로 폐지를 청하였다. 이에 천자가 주매신 등이 삭방군을 세워 얻는 편익을 들어 공손홍을 막도록 하였다. (주매신 등은) 열 가지를 들었으나 공손홍은 한 가지도 반박하지 못했다. 공손홍이 즉시 사죄하며 "(제가) 산동 촌놈이라 그 이점이 이와같은지 몰랐는데, (그렇다면) 서남이와 창해는 폐지하고 삭방군에만 전념하시길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상이 이를 허락했다.
(ㄷ) 『한서』 「食貨志」
『漢書』 「食貨志」 彭吳穿穢貊朝鮮置滄海郡則燕齊之間靡然發動
팽오가 예맥조선을 뚫고 창해군을 설치하자, 연제 지방이 피폐해졌다.
(ㄹ) 『후한서』 「동이열전」 예조
『후한서』 「동이열전」 예조, 元朔元年,濊君南閭等畔右渠,率二十八萬口詣遼東內屬,武帝以其地為蒼海郡,數年乃罷。
元朔 원년(서기전 128년) 에 濊君 南閭 등이 右渠를 배반하고 28萬口를 이끌고 遼東에 귀속하였다. 武帝는 그 지역으로 蒼海郡을 만들었으나, 수년 후에 곧 폐지하였다.
파촉을 확대하고 창주를 실효지배하기 위해 한이 엄청난 재정을 투입해도 얻는 것이 없어 漢은 이를 중지하고, ‘흉노’에 대항하기 위한 삭방군에 전념한다.
파촉은 산악지역이어서 길을 만들기 위해 산을 깎아내야 해서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은 당연하나, 창주는 연과 제 바로 옆의 땅임에도 불구하고 파촉에서 길을 내기 위한 비용과 유사한 비용이 들었다.
漢이 남려의 귀부 후 바로 길을 만들었다면 최대 1년 반, 연제의 지역민이 힘들 정도로 동원을 많이 하여 길을 만들었음에도 그것이 완성되지 않았고 중도에 포기했다. 당시 창주 등 구 번조선의 땅은 황하와 제수와 대야택으로 막혀 있는데, 그 강이 하나의 물줄기가 아니라 여러 물줄기로 되어 있고, 늪지대와 연못이 도처에 있어 연과 제에서 분리되어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육지이지만 섬과 같은 상황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후한서』는 남려가 요동에 내속하였다고 하는데, 이 때의 요동은 요수의 동쪽이 아니라 산서성 지명인 요의 동쪽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조한전쟁 이전 漢의 요동은 항상 예맥조선의 패수 남쪽에서 찾아야 한다. 漢이 요동외요(조양에서 양평)는 지키기 어려워 보정시의 요동고새를 수리하여 고새 바로 북쪽의 패수를 국경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요동외요는 몽염이 쌓은지 얼마되지 않았으므로 요동신새는 되어도 요동고새는 될 수 없다.
『사기』 「흉노열전」에 기술된 ‘흉노’가 서기전 166년 무렵 공격한 요동과 서기전 120년대에 공격한 요서는 중역수를 기준으로 한 요서(상류)와 요동(하류)이다.
강단유사사학은 『사기』와 『한서』가 동시에 기술하고 있는 “燕齊之間靡然發動”과 “요동내속”을 고려하지 않고 예군 남려의 위치나 창해군의 위치를 한반도 동해안이나 요동반도 등지에 비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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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후한서』 「동이열전」 예조 기사에 대한 주석은 다음과 같다. (2022.2.7. 현재)
蒼海郡 : 蒼海郡의 위치에 대한 說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① 압록강 및 佟佳江 流域說: 李丙燾는 蒼海郡이 玄菟郡의 前身이라는 입장에서, 白鳥庫吉은 眞番郡의 前身이라는 입장에서 각기 이를 주장하였다.(「玄菟郡及臨屯郡考」; 白鳥庫吉,「漢の朝鮮四郡疆城考」) 그러나 眞番郡北在說이 부정시되면서 白鳥庫吉 등의 견해는 오늘날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② 東海岸說: 蒼海는 東海를 지칭하는 데에서, 또『三國志』및『後漢書』에 立傳된 3C의 濊가 서기전 2C 以前에도 東海岸에 살고 있었을 것이라고 가정한 위에 세워진 說이다. 韓鎭書·安鼎福 등의 實學者 외에 日本人 和田淸 등이 주장하였다.(韓鎭書,『海東繹史』濊條; 安鼎福,『東史綱目』濊條; 和田淸,「玄菟郡考」)
③ 鴨綠江·東海岸說: 濊君 南閭 等의 遼東과의 交通路를 고려하는 가운데 제기된 說이다. 今西龍은 鴨綠江에서 함흥에 이르는 지역을,(「眞番郡考」) 三上次男은 遼東 東北의 蘇子江 上流에서 永興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濊人とその民族的性格」) 各各 蒼海郡의 위치로 비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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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燕도 고무줄처럼 늘어나 보정시에서 한반도까지 늘어나고 齊는 황해를 건너서 늘어난다는 고도의 상상력을 발휘한다.
진개 침입 후만을 고려하면, 남려는 사료에 나타나는 이 지역 최초의 지배자이다. 남려가 예군이라는 것은 진번조선이 망한 후 왜 집단이 이 지역의 주도권을 잡게 된 것을 의미한다. 남려는 漢과의 무역권을 장악한 위만의 예맥조선에 복종하였으나, 예맥조선이 많은 수수료를 요구하여 漢과 직접 교역하기 위해 漢에 귀부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당시의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한이 이 지역과의 도로 건설을 포기하여 남려의 시도는 무산되었다.
[한 상고사 에서 인용]
출처 | https://blog.naver.com/bbondd0/22301220169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