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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이 신화라고? 삼국지와 후한서에도 나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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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우익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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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 117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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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시간 : 2023/02/25 07:36:48

 

단군조선(=삼한조선)의 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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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수와 범엽의 횡설수설

진수와 범엽은 낙랑·대방군의 韓·倭 침략과 관구검의 고구려 침략 시 획득한 사료와 침략군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동이의 역사에 관해 쓸 수 있게 되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而公孫淵仍父祖三世有遼東,天子為其絕域,委以海外之事,遂隔斷東夷,不得通於諸夏。景初中,大興師旅,誅淵,又潛軍浮海,收樂浪、帶方之郡,而後海表謐然,東夷屈服。其後高句麗背叛,又遣偏師致討,窮追極遠,踰烏丸、骨都,過沃沮,踐肅慎之庭,東臨大海。長老說有異面之人,近日之所出,遂周觀諸國,采其法俗,小大區別,各有名號,可得詳紀。

그러나 이들은 우리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으므로 약탈한 사료를 잘못 해석한 경우가 많았다. 가장 중요한 실수가 삼한조선의 삼한과 준왕의 중마한(중마한 시의 신한(=진한)과 번한은 마을 단위의 소국으로 마한의 속국이었다)을 구별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준왕의 중마한과 중마한 시 마을에 불과했던 신한과 번한을 삼한으로 이해한다.

진수는 마한을 설명하면서, 위만에 공격당한 준왕이 좌우 궁인을 거느리고 바다로 도망가서 韓의 땅에 자리잡고 스스로 韓왕이라 하였다고 하며,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 侯準既僭號稱王,為燕亡人衞滿所攻奪,將其左右宮人走入海,居韓地,自號韓王。

범엽은 삼한을 설명한 다음에, 衛滿에게 패한 준왕이 남은 무리 수천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도망,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韓王이 되었는데, 準의 後孫이 絶滅되자, 마한 사람이 다시 自立하여 辰王이 되었다고 한다. 『후한서』 「동이열전」 三韓, 初, 朝鮮王 準爲衛滿所破, 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 攻馬韓, 破之, 自立爲韓王. 準後滅絶, 馬韓人復自立爲辰王.

辰韓에 대해선 진수와 범엽 모두 辰韓 노인들의 말을 근거로 秦나라의 苦役을 피하여 韓國으로 왔고, 馬韓이 그들의 동쪽 땅을 분할하여 辰韓에게 주었다고 기술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 其耆老傳世, 自言古之亡人避秦役 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與之. 『후한서』 「동이열전」 三韓, 辰韓, 耆老自言秦之亡人, 避苦役, 適韓國, 馬韓割東界地與之.

둘 모두 弁韓이나 弁辰이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해선 말이 없다. 따라서 이들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삼한의 관계는 빨라야 辰韓이 秦나라의 苦役을 피하여 韓國으로 왔던 시기부터 마한이 백제에 망한 9년까지의 이야기이다. 준왕이 온 지역은 번조선(변한) 지역 즉 연제 사이 지역이고, 이들이 번조선(변한)을 점령하여 (중)마한을 세우고, 辰韓은 漢의 왕검성 점령 시(서기전 108년) 이주한 사람들이 주가 된다.

그러나 진수나 범엽이 없는 것을 쓴 것은 아니다. 이들은 고구려나 韓·倭에서 약탈한 사료에 나온 것을 나름대로 편집하여 韓의 역사를 썼다. 이들이 약탈한 사료에서 본 삼한조선의 삼한을 기술하여 준 덕분에 『삼성기전』, 『단군세기』, 『태백일사』가 위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들이 쓴 것을 조선의 삼한에 관한 것과 중마한에 관한 것으로 나누기만 하면 조선의 삼한을 알 수 있게 된다.

진수는 처음에는 韓은 馬韓 辰韓 弁韓이고 방4천리인데, 辰韓은 옛 辰國이라 하지만,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 韓在帶方之南,東西以海為限,南與倭接,方可四千里。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辰韓者,古之辰國也

馬韓 辰韓을 설명한 다음에는, 별다른 설명도 없이 弁韓이라 하지 않고, 弁辰이라는 용어를 계속 사용한다. 3韓 중 辰韓과 弁韓이 있기 때문에 弁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위해선 반드시 설명이 필요한데 모호하게 기술한다. 진수는 마한 55국을 열거하고 辰王이 月支國을 통치했다고 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 凡五十餘國。大國萬餘家,小國數千家,總十餘萬戶。辰王治月支國。

그는 辰王이 마한 전체의 왕인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리고 辰韓은 6국이었는데 12국으로 나뉘었다고 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 始有六國, 稍分爲十二國

또 弁辰은 24국인데 그 중 12국은 辰王에 臣屬되어 있는데, 辰王은 항상 馬韓사람으로 王을 삼아 대대로 세습하였으며, 辰王이 자립하여 王이 되지는 못하였다고 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 弁·辰韓合二十四國, 大國四五千家, 小國六七百家, 總四五萬戶. 其十二國屬辰王. 辰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 辰王不得自立爲王.

月支國을 통치했다는 辰王과 弁辰을 기술할 때 나오는 辰王은 같은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만약 둘이 다르다면 진수는 독자의 혼동을 방지하기 위해 다르다는 설명을 했을 것이다.

辰王에게 弁辰 24국 중 12국이 속해 있다는 것과 月支國 통치자로서의 辰王과 연결고리가 없다. 弁辰을 설명하면서 弁韓과 辰韓의 합계가 24國이나 된다고『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 弁·辰韓合二十四國,

하면서도 23국만 열거한다.

24국 중 辰王에 속한 12국이 辰韓 12국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 진수가 열거한 弁辰의 국가는 24국이 아니라 23국이며 弁辰이 앞에 붙는 국가는 12국이고, 弁辰이 앞에 없는 국가는 11국이다. 도대체 辰韓 12국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다. 대대로 세습한다고 하면서도 자립하여 왕이 되지는 못하였다고 한다. 아주 모호하고 모순되는 설명을 하고 있다.

범엽은 삼한은 馬韓 辰韓과 弁辰이라고 한다. 『후한서』 「동이열전」 三韓, 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

왕회분(王會汾)은 『晉書』, 『梁書』, 모두 ‘弁韓’이라 하니 弁辰은 틀린 말이라고 한다. 『후한서』 「동이열전」 三韓, 【集解】王會汾曰, 案晋梁二書, 皆作弁韓, 當從改. 下云, 弁辰在辰韓之南, 弁辰亦弁韓之訛. 惠棟曰, 魏志作弁韓.

범엽은 馬韓은 54國이고 辰韓과 弁辰은 각각 12國이라 하면서 『후한서』 「동이열전」 三韓, 馬韓在西,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亦與倭接。凡七十八國,

국명은 열거하지 않는다. 범엽은 삼한이 큰 나라는 萬餘戶, 작은 나라는 數千家인데, 각기 산과 바다 사이에 있어서 전체 국토의 넓이가 방 4천여리나 되며, 모두 옛 辰國이라고 하면서, 마한이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王을 세워 辰王으로 삼아 目支國에 도읍하여 전체 三韓 지역의 王으로 군림하고, 三韓의 諸國王의 선대는 모두 마한 종족이라고 한다. 『후한서』 「동이열전」 三韓, 大者萬餘戶,小者數千家,各在山海閒,地合方四千餘里,東西以海為限,皆古之辰國也。馬韓最大,共立其種為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그의 견해도 모호하긴 마찬가지이다. 왜 마한이 가장 강대하면서 왕의 이름을 馬王이 아닌 辰王으로 하는지가 설명되어 있지 않다. 辰韓이 없다면 辰王으로 이름지을 수 있으나, 辰韓이 옆에 있는데 왕의 이름을 辰王으로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진수는 이 점이 이상해서 辰王에 대해 횡설수설하는 식으로 넘어간다. 진수와 범엽이 본 책에는 馬韓 辰韓 弁韓의 삼한이라 기술된 책도 있고, 弁辰이 기술된 책도 있었을 것이다. 진수는 처음에는 弁韓이라 하였다가 구체적 설명 시에는 辰韓과 弁辰을 섞어서 모호하게 기술하면서 弁韓은 언급없이 넘어가고, 범엽은 弁韓을 삭제하는 식으로 정리한다. 진수는 辰韓은 옛 辰國이라 하는데, 범엽은 삼한이 모두 옛 辰國이라 한다. 분명히 그들은 같은 사료를 본 것으로 추측되는데, 둘의 기술이 다르며, 그것도 둘 다 횡설수설하거나, 모호하게 쓰거나, 사리에 맞지 않게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모호성은 『단군세기』와 『삼국사』로 조선의 삼한과 중마한을 살펴보면 사라진다. 진수와 범엽의 오해와 고민과 모호성이 바로 이해된다. 『단군세기』 등에 의하면 삼한이 모두 조선의 영토이고 조선의 즉 삼한의 왕은 辰王인데, 신한(辰韓)은 단군(삼한의 왕)이 직접 다스리고, 모한과 번한은 단군이 제후를 봉하여 다스린다. 『단군세기』 6세단군, 眞韓鎭國中 治道咸維新 慕韓保其左 番韓控其南

『태백일사』 而始有檀君王儉, 以熊氏裨王, 遂代神市, 統一九域, 分三韓以管境, 是謂檀君朝鮮也. 『태백일사』는 「마한세가」와 「번한세가」를 별도로 기술하고 있다.

『삼국사』에 의하면 馬韓 辰韓 弁韓 즉 후삼한과 백제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삼국사』에 의하면 신라는 서기전 57년 辰韓 6부가 모여 건국하는데, 6부는 나라가 아니라 골짜기 마을이다. 변한은 서기전 39년 신라에 항복한다. 辰韓과 弁韓이 합병하니 이들을 弁辰이라 불렀을 것이다. 즉 弁辰은 신라를 의미한다. 辰韓과 弁韓이 합병했어도 서기전 38년의 마한왕은 여전히 辰韓과 弁韓을 속국으로 여긴다. 즉 마한왕에게 辰韓과 弁韓의 합병은 마을끼리 뭉치는 것으로 무의미한 것이다. 辰韓이 마한의 동북쪽 마을이므로 辰韓과 합병한 弁韓도 마한의 동북쪽이었을 것이다. 백제는 마한에게 사슴을 보내고, 이주하는 것의 허락을 받고, 사로잡은 말갈 추장을 보내고, 마한왕이 목책에 대해 질책하자 그것을 헐어버린다. 백제가 마한을 정복할 때, 마한이 50여개 국가인 것은 전혀 암시되지 않는다.

진수와 범엽은 『단군세기』에 적힌 삼한을 기술하는 당시의 사서와 『삼국사』에 나오는 삼한을 기술하는 당시의 사서를 모두 보았고, 도저히 부합하지 않는 두 사료들을 나름대로 뭉뚱그려 모호하게 요약했다.

그들은 후삼한에선 마한이 우위에 있다는 것과 마한이 서쪽에 있다는 것을 취하고, 전삼한에선 편의상 단군조선의 삼한을 전삼한이라 하고, 서기전 2세기 이후의 삼한을 후삼한이라 한다.

辰王이 지배한다는 것을 취하여 이상한 역사를 만들었다.

(2) 단군조선의 삼한(서기전 24세기)과 서기전 2세기 이후 삼한의 분리

[삼국지 후한서가 기록하는 단군조선의 사회상]

후삼한은 나라들의 연합체가 아니다. 위에서 보았듯 마한이 백제에 망할 때 끝까지 저항한 것은 어떤 나라가 아니라 원산성과 금현성의 두 城이다. 후삼한의 辰韓은 12나라가 있지도 않았고, 여섯 마을이 결합한 나라이다. 진수가 辰韓은 6국이었는데 12국으로 나뉘었다고 한 것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 始有六國, 稍分爲十二國

상반되는 두 자료 즉 6촌과 12국을 아우르기 위한 진수의 추측에 불과하다.

진수와 범엽이 말한 馬韓 50여국, 辰韓과 弁韓 각 12국은 전삼한의 나라 수이다. 진수가 기록한 마한의 나라이름은 전삼한의 慕韓의 각국 이름이다. 辰韓과 番韓의 나라이름은 진수가 弁辰으로 헷갈려 모호하게 기술하고 있으나, 弁辰이 붙지 않은 나라 11개는 辰韓의 국호, 弁辰이 붙은 것 12개는 弁辰을 빼면 番韓의 국호이다. 전삼한은 방사천리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 方可四千里, 『후한서』 「동이열전」 三韓조, 地合方四千餘里

대국이므로 여러 국가가 있을 수 있다.

모한의 남부는 바다이므로 왜와 접하는 것은 番韓이다. 즉 번한은 양자강 유역의 왜와 접하는 지점까지 중국 동해안을 차지하였다. 진수가 辰王은 항상 馬韓사람으로 王을 삼아 대대로 세습하였으며, 辰王이 자립하여 王이 되지는 못하였다는 말은 전삼한에서 慕韓王은 항상 辰韓사람으로 왕을 삼았고, 세습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慕韓王이 자립하여 왕이 되지는 못한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범엽이 삼한은 모두 옛 辰國이라고 하면서, 마한이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王을 세워 辰王으로 삼아 目支國에 도읍하여 전체 三韓 지역의 王으로 군림하고, 三韓의 諸國王의 선대는 모두 마한 종족이라고 한 말은, 삼한이 모두 辰國이며 辰韓이 가장 강대하였고, 辰韓의 目支國에 도읍하여 전체 삼한의 왕으로 군림하였고, 삼한의 제국왕의 선대는 모두 진한인이라는 사실을 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제 진수가 열거한 弁辰이 붙지 않은 나라들 즉 辰韓의 나라이름이 11개인 것이 해결된다. 目支國(진수에 의하면 月支國)은 辰韓의 나라이름이었는데 후삼한에서는 마한이 지배하다보니 이들은 目支國(月支國)을 마한의 나라로 주장한 것이다. 진수는 目支國을 마한의 나라로 열거하여 마한이 55국이 되고 辰韓의 나라는 11국이 된 것이다. 그러나 원사료에는 범엽이 기술한 것처럼, 54, 12, 12로 기록되어 있었을 것이다. 진수는 마한을 55개로 만들어 50여국이라 하고, 辰韓을 바로 기술하면 辰韓이 11개로 드러나므로 辰韓과 弁辰을 묶어서 23개만 기술해놓고 마지막에는 24개라 모호하게 넘어갔다. 범엽은 나라이름 열거하면 복잡해지므로 기술하지 않고 나라 숫자만 열거했다. 그들은 전삼한에서 辰王의 삼한 지배 사실과 후삼한에서 마한의 弁辰(신라) 지배사실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나름대로 사료를 해석 또는 조작했던 것이다.

후삼한에서 이웃 마을이었던 辰韓과 弁韓이 합병하니 이들을 弁辰이라 불렀고 변진은 신라이다. 따라서 진수와 범엽이 弁辰은 辰韓 사람들과 뒤섞여 살고 衣服과 주택이 辰韓과 같다 한 것은 후삼한의 상황이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 弁辰與辰韓雜居, 亦有城郭. 衣服居處與辰韓同, 『후한서』 「동이열전」 三韓조, 弁辰與辰韓雜居, 城郭衣服皆同,

韓이 대방의 남쪽이라든가,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 韓在帶方之南

마한의 북쪽은 낙랑이고, 진한의 북쪽은 예맥이라든가 『후한서』 「동이열전」 三韓, 馬韓在西, 有五十四國 其北與樂浪, 辰韓在東, 十有二國, 其北與濊貊接.

하는 주장은 후삼한 관련한 기술이다.

범엽이 삼한이 모두 옛 辰國이라 『후한서』 「동이열전」 三韓, 皆古之辰國

한 것은 고구려로부터 탈취한 사서에 『단군세기』와 같은 기록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수가 신한(辰韓)이 옛 신국(辰國)이라고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 辰韓者 古之辰國也

하였는데, 신한을 부를 때 辰國이라 하기도 하였다는 것과, 조선의 천자국을 일반적으로 辰國으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대부여나 북부여를 부를 때도 조선의 천자국(중심국)이라는 의미로 신국이라 하였을 것이다. 역계경이 우거와 정책 차이로 예맥조선을 떠나 辰國으로 갔는데, 역계경 집단이 예맥조선과 무역하는 나라와도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 魏略曰: 初, 右渠未破時, 朝鮮相歷谿卿以諫右渠不用, 東之辰國, 時民隨出居者二千餘戶, 亦與朝鮮貢 蕃不相往來.

점에서 이들이 갈 수 있는 곳은 당시 예맥조선과 적대적 관계에 있었던 북부여밖에 『북부여기』에 의하면, 북부여는 서기전 118년, 서기전 117년, 서기전 115년 예맥조선과 싸우고 있다.

없기 때문이다.

또 소위 발해의 국호가 진국(震國)이었다는 『신당서』 「북적열전」 발해, 祚榮即幷比羽之眾,恃荒遠,乃建國,自號震國王, 『태백일사』 「대진국본기」 國號定爲大震, 年號曰天統

사실에서도 辰國이 삼한조선의 천자국을 부르는 명칭이었음이 확인된다. 소위 발해는 조선의 천자국을 계승하였다는 의미로 국호를 大震이라 한 것이고, 이는 조선으로부터의 정통성은 부여와 고구려를 거쳐 대진에게 이어졌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발해는 당이 부른 명칭일 뿐이다.

낙랑왕 최리가 호동에게 북국 신왕의 아들이라 하고 사위로 삼았는데, 『삼국사』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32년 夏四月, 王子好童遊於沃沮, 樂浪王崔理出行, 因見之問曰, “觀君顔色, 非常人. 豈非北國神王之子乎.” 遂同歸, 以女妻之.

당시 고구려는 동부여를 점령하여 辰國이라 할 수 있었다. 낙랑국은 辰國인 고구려와 혼인을 통한 우호적 관계를 맺어 나라를 보전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왕망도 국호를 신이라 하였는데 이는 왕망을 중심으로 한 신의 건국세력이 김일제의 후손인 흉노집단이었음을 나타낸다.

징기즈칸은 진국칸 즉 震國王이다. 전원철, 「칭기즈칸은 진국왕(震國王)의 옛소리?」 “11세기 <송본광운>에 따르면 ‘진국왕(震國王)’의 옛 한자음은 ‘팅궤트칸’인데, 300년 후인 14~15세기에 기록된 <사국사>에 적힌 ‘텡기즈칸’은 자음접변을 거친 말이다. 이것이 ‘칭기즈칸’으로 바뀐 것이다.”

월간중앙(https://jmagazine.joins.com) 제201706호(2017.05.17.)

징기즈칸도 辰韓과 大震(발해)으로부터의 정통성을 주장한 조선인이었음을 그 호칭으로부터 알 수 있다.

강단유사사학은 근거도 없이 문학적 상상력에 기반하여 辰國을 한반도 중남부라 주장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삼국사』 시조 혁거세 즉위기사에 대한 주석. (2022.1.3. 현재)

“조선(朝鮮):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古朝鮮). 여기서는 고조선의 마지막 단계로서 위만조선을 가리킨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에 인용된 『위략(魏略)』의 기사에 의하면, 위만조선 말기에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이 동쪽으로 ‘진국(辰國)’으로 갔다고 하는데, 이를 통해 한(漢)에 의해 위만조선이 멸망하던 때를 전후하여 많은 수의 유이민이 한반도 중·남부로 내려왔음을 알 수 있다. 경주 지역을 포함한 영남 지방 각지에서 서기전 1세기 무렵으로 편년되는 고조선 계통의 유적·유물이 다수 확인된 것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다(李賢惠, 1984, 『三韓社會形成過程硏究』, 一潮閣, 73~74쪽).”

후삼한은 한 나라이므로 즉 한 골짜기에 수천가가 살 수는 없으므로, 진수와 범엽이 큰 나라는 萬餘家이고, 작은 나라는 數千家라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 大國萬餘家, 小國數千家, 『후한서』 「동이열전」 三韓조, 大者萬餘戶, 小者數千家,

한 것은 전삼한의 모한에 관한 기술이다.

농경 정착생활을 하면서 성곽이 없다는 것은 기원전 2세기 이후에는 생각하기 어려우므로 성곽이 없다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 散在山海間, 無城郭. 『후한서』 「동이열전」 三韓조, 邑落雜居, 亦無城郭

말도 전삼한의 모한에 해당된다. 『삼국사』도 온조왕이 마한을 정복할 때 원산성과 금현성이 성을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고 하여 마한에 성이 있었다고 기술한다.

마한의 백성은 정착하여 곡식을 심으며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꿀 줄을 알고 綿布를 만들었다고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 其民土著,種植,知蠶桑,作綿布。『후한서』 「동이열전」 三韓조, 馬韓人知田蠶, 作緜布.

하는데 이는 전삼한 모한에 관한 기술이다. 환국인이 이동하여 만든 홍산문화에서 옥잠이 출토되며, 박선희, 『고조선 복식문화의 발견』, 지식산업사, 2011. 214쪽.

서기전 3000년의 것인, 평양 호남리에서 밑바닥에 통잎 뽕나무 무늬가 있는 질그릇이 출토되었고, 봉산 지탑리 신석기 유적에서는 메뽕누에를 반복하여 새긴 문양의 질그릇이 출토되었고, 만주와 한반도 신석기유적에서 누에고치로부터 실을 뽑는 가락바퀴가 출토되므로, 박선희, 위 책, 222-223쪽.

모한에서 양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군세기』에도 단군이 양잠을 권하는 사실이 『단군세기』 2세단군, 勸農桑

기술되어 있다.

물론 발해만 남쪽과 한반도 남부도 양잠이 가능하지만, 면포를 생산했다는 다음 말로 보아, 전삼한 모한에 관한 기술을 옮겨 적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에서 출토된 면직물로 가장 오래된 것은 상대 후기인 3300년에서 3600년 정도 된 것인데, 따뜻한 기후에서 자라는 인도면은 중국에 7세기에나 들어오며, 백첩포를 만드는 원료인 야생의 초면은 한랭한 대륙성 기후에서 자라서 중국에서는 초면이 없었고, 강계에서 청동기시대의 물레가 출토되었고, 고구려와 9세기의 신라가 당시 신라의 영토는 요동까지 차지하여 환국이나 모한의 영토와 비슷하다.

백첩포를 중국에 수출했으므로, 모한에서 상에 수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박선희, 위 책, 185-210쪽.

따라서 면포를 만들었다는 말은 전삼한 모한 북부에만 해당된다. 초면은 따뜻한 지역에서는 잘 자라지 않으므로 초면을 만든 나라를 한반도 남부의 나라로 보기 어렵고, 황하 하류의 발해만 남쪽은 건조한 지역이 아니므로 후삼한 마한으로 보기도 어렵다.

진수와 범엽이 등가죽을 뚫고 막대기를 꼽아 일을 한다느니,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 其國中有所爲及官家使築城郭, 諸年少勇健者, 皆鑿脊皮, 以大繩貫之, 又以丈許木鍤之, 『후한서』 「동이열전」 三韓조, 少年有築室作力者, 輒以繩貫脊皮, 縋以大木

금은과 비단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느니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 不以金銀錦繡爲珍 『후한서』 「동이열전」 三韓조, 不貴金寶錦罽

하면서 마한사회를 기술하는 부분은 사료가치가 떨어지긴 하지만, 원시적 사회를 묘사하는 점에서 전삼한의 모한과 관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5월과 10월의 농업관련 민속과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 常以五月下種訖, 祭鬼神, 羣聚歌舞, 飮酒晝夜無休. 其舞, 數十人俱起相隨, 踏地低昂, 手足相應, 節奏有似鐸舞. 十月農功畢, 亦復如之. 『후한서』 「동이열전」 三韓조, 常以五月田竟祭鬼神, 晝夜酒會 羣聚歌舞, 舞輒數十人相隨蹋地爲節. 十月農功畢, 亦復如之.

소도에 관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 信鬼神, 國邑各立一人主祭天神, 名之天君. 又諸國各有別邑, 名之爲蘇塗. 立大木 縣鈴鼓, 事鬼神. 諸亡逃至其中, 皆不還之, 『후한서』 「동이열전」 三韓조, 諸國邑各以一人主祭天神, 號爲「天君」. 又立蘇塗 建大木以縣鈴鼓, 事鬼神.

기술은 모한의 사회상과 부합하다고 할 것이다.

辰韓에 대해선 진수와 범엽 모두 辰韓 노인들의 말을 근거로 秦나라의 苦役을 피하여 韓國으로 왔다고 하므로 후삼한의 辰韓에 관한 기술이다. 진수는 弁辰이 철을 생산하여 韓 倭 낙랑 대방에 수출한다고 하며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 國出鐵, 韓·濊·倭皆從取之. 諸市買皆用鐵, 如中國用錢, 又以供給二郡.

범엽은 辰韓이 철을 생산하여 倭, 馬韓에 수출한다고 한다. 『후한서』 「동이열전」 三韓, 國出鐵, 濊·倭·馬韓 並從市之

둘이 달리 기술하고 있으나, 진한과 변한이 합병하였기 때문에 서로 표현을 달리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 기사는 당연히 후삼한 기사이다. 진수는 辰韓사람이 왜와 가까워 문신하기도 한다고 하며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 今辰韓人皆褊頭. 男女近倭, 亦文身.

범엽은 弁辰 사람들이 왜와 가까워 문신을 많이 한다고 한다. 『후한서』 「동이열전」 三韓, 弁辰與辰韓雜居, 城郭衣服皆同, 言語風俗有異. 其人形皆長大, 美髮, 衣服絜淸. 而刑法嚴峻. 其國近倭, 故頗有文身者.

즉 진수와 범엽에 의하면 辰韓 弁辰 倭가 아주 가깝게 살고 있는 것이 된다. 이는 이들의 거주지가 한반도 경상도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왜와 弁辰(辰韓·弁韓)이 이웃에서 살고 있었던 곳은 황하 어귀이다. 이 지역이 본고에서 기술하는 韓 지역이다.

진수와 범엽 둘 다 주호국을 언급하는데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 又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 其人差短小, 言語不與韓同, 皆髡頭如鮮卑, 但衣韋, 好養牛及豬. 其衣有上無下, 略如裸勢. 乘船往來, 市買韓中. 『후한서』 「동이열전」 三韓조, 馬韓之西, 海㠀上有州胡國. 其人短小, 髡頭, 衣韋衣, 有上無下. 好養牛豕. 乘船往來貨市韓中.

마한의 서쪽 바다 가운데의 섬이라 하며, 하의를 입지 않고 가죽옷만 있다고 하는 등 원시적 행태를 기술하고 있으므로 전삼한의 사실을 말한다. (후삼한 마한의 서쪽은 황하이다)

『북부여기』는 후삼한의 마한을 중마한(中馬韓)이라 칭하여 즉 중국 쪽의 마한이라고 하여 전삼한의 慕韓과 구별하고 있다. 『북부여기』 二世檀君慕漱離 丁未年。番朝鮮王箕準, 久居須與, 嘗多樹恩, 民皆富饒, 後為流賊, 所敗亡, 入于海而不還。諸加之眾, 奉上將卓, 大擧登程, 直到月支立國。月支卓之生鄉也。是謂中馬韓。

『북부여기』가 전삼한과 후삼한을 구별하고 있는 점에서 『삼국지』 『후한서』보다 더 정확하게 사실을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진수의 월지국 언급에서도 『북부여기』가 위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북부여기』는 상장군 탁이 주도하여 자신의 고향인 월지에 마한을 세웠다고 하는데, 진수가 『북부여기』와 같은 내용의 사료를 보고 辰王의 나라를 월지국이라 하였을 것이다. 실제 辰王이 다스리는 국가는 범엽이 말한 目支國일 것이다. 진수가 적극적으로 辰韓의 나라였던 목지국을 마한으로 옮기는 등 전삼한의 사료를 더 신뢰하지 않았고, 후삼한의 마한을 세운 곳인 월지와 전삼한의 목지가 같다고 착각하여 목지를 월지로 기록하였을 수 있기 때문이다.

(3) 강단유사사학의 날조

강단유사사학은 한반도 북부는 낙랑군, 남부는 야마토임나라는 소설을 창작하기 위해 삼한이 한반도 남부에서 4세기까지 지속되었다고 날조한다. 야마토임나설을 위해 4세기까지는 한반도 남부에는 소국이 우글거린다고 한다. 그래야 소위 야마토라는 외부집단이 쉽게 점령하거나 강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증거가 없으니까 증거를 날조하고 야마토임나설에 반대되는 증거를 날조라 공격한다. 강단유사사학은 『삼국지』와 『후한서』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삼한이 한반도 남부이고, 그 삼한은 70여개의 소국인데 4세기까지 존재하였고, 마한은 9년에 멸망하지 않았으며 『삼국사』는 4세기까지는 다 날조라고 한다.

(가) 『삼국지』와 『후한서』의 날조 해석

『삼국지』와 『후한서』의 삼한은 횡설수설이다. 강단유사사학이 그들의 주장을 하기 위해선 엄밀한 사료비판을 통해서 횡설수설 속에서 명확한 사실을 찾아내어 근거를 대야 한다. 그들은 아무런 절차 없이 즉 마한왕이 왜 辰王인지, 弁辰과 辰韓·弁韓은 어떤 관계인지, 왜 진수는 辰韓·弁韓의 수가 24개라 하면서 23개만 열거하고, 마한의 수는 범엽은 54개라 하는데 진수는 55개를 열거하는지에 대한 납득할 만한 구체적 설명 없이, 횡설수설로부터 바로 소설에 필요한 부분만 선택하여 주장한다. 그것은 역사학의 방법이 아니다. 유사역사학자나 역사소설도 그렇게 유치하게 근거를 대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삼국지』가 韓에 대해 3세기의 일로 기술한 것은 공손강의 대방군 설치와 낙랑군·대방군과 韓의 기리영 전투의 두 사건뿐임에도, 『삼국지』와 『후한서』가 韓의 역사에 대해 기술한 것을 모두 3세기의 일이라고 근거없이 의제하면서 『삼국사』를 부정한다. 필자는 위에서 『삼국지』와 『후한서』의 사료비판을 통해 전삼한과 후삼한이 있었음을 합리적으로 논증한 바, 78개 소국은 삼한조선(전삼한)의 일로서 중국 동해안 요서 요동 한반도에 걸친 나라들이었고, 후삼한은 사실상 서기전 1세기의 마한 한 나라임을 밝혔다. 이것만으로도 그들의 날조는 다 드러났지만 그들 날조의 의도성을 보기 위해 다음의 논의가 필요하다.

『삼국지』에 의하면 245년경 조위는[조조(曹操)의 위나라] 辰韓 여덟 마을을 원문의 國은 마을을 의미한다. 辰韓이 원래 여섯 마을이었는데, 弁韓과 합하여 마을 수가 늘어났다.

낙랑군에 귀속 시키려 했는데 韓이 반발하여 대방군을 공격하자, 대방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韓을 침략하여 궁준이 전사하였지만 韓을 滅하였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 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 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 吏譯轉有異同, 臣智激韓忿, 攻帶方郡崎離營. 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 遵戰死, 二郡遂滅韓.

진수는 韓을 멸하는 기사 바로 앞에서 공손강은 군대를 일으켜 倭와 韓을 공격하여 帶方에 복속시켰다 하므로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 桓·靈之末, 韓濊彊盛, 郡縣不能制, 民多流入韓國. 建安中, 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爲帶方郡 遣公孫模·張敞等收集遺民, 興兵伐韓濊, 舊民稍出, 是後倭韓遂屬帶方.

멸했다는 것은 복속시킨 것이 아니라 韓이라는 정치체가 있었다면 그것을 말 그대로 없앴음을 뜻한다. 여기의 韓은 황하 이동으로 황하 서쪽에 위치하게 되어 황하 동쪽의 韓백제에서 분리되었고, 그 결과 조위에 쉽게 멸망되었다. 그러나 강단유사사학은 辰韓이 4세기까지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삼국사』 시조 혁거세 즉위기사에 대한 주석. (2021.12.28. 현재)

“진한(辰韓): 기원을 전후한 시기부터 서기 4세기경까지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고대 정치체. 마한(馬韓), 변한(弁韓: 변진[弁辰])과 함께 삼한을 이루었다. 서기전 2세기에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 자리 잡았던 것으로 알려진 ‘진국(辰國)’의 후신으로 전한다( 『삼국지』 권30 오환선비동이전 한조, “辰韓者 古之辰國也”). 일반적으로 지금의 경상북도 지역을 중심으로 소백산맥 이남 낙동강 중상류 지역에 분포하던 소국들의 연합체로 일컬어지나, 애초에는 소백산맥 이북의 남한강 중상류 지역의 소국들도 진한에 속했을 것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강종훈, 2011; 전진국, 2018).”

근거는 없다. 임나 선생님께서 4세기에 들어오시므로 4세기까지는 辰韓이 죽어도 버텨줘야 하기 때문이다. 강단유사사학에 의하면 조위가 辰韓을 멸하여 충청도까지 차지하였다고 하는데, - 국립중앙박물관, 「중국 역사 영상지도」

중앙일보 2021.09.16. 입력 기사 (https://www.joongang.co.kr)

- 연세대·서강대 산학협력단이 제출한 동북아역사지도에는 조위가 경기도 북부를 차지했다고 그려져 있다.

그렇다면 경기도와 충청도가 辰韓인 것이 되어 辰韓이 경상도라는 그들의 주장과 모순된다. 강단유사사학은 구체적 근거도 없이 『삼국지』의 문언과 달리 馬韓이 조위와 싸웠다고 주장하거나 이정빈, 「기리영(崎離營)을 통해 본 마한 제국(諸國)과 조위(曹魏)」, 『백제학보, 22』, 2017. 59-78쪽.

목지국이라 하거나, 백제가 중심이 되어 목지국과 공동 대응하였다고 하거나 신분활국(신분고국)이라 하는 등 정재윤, 「魏의 對韓政策과 崎離營 전투」, 『중원문화연구 5』, 2001. 31-50쪽.

문학적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한다. 그들에게 사료는 무의미하다. 강단유사사학의 말은 앞뒤의 정합성이 전혀 없다. 『삼국지』 『후한서』 모두 삼한이 방4천리라 하는데, 한반도 남부에 삼한이 있었다고 문학을 한다. 역사학이 아닌 창작이다.

(나) 『삼국사』와 『삼국유사』를 날조 사서로 공격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삼국사』에 의하면 후삼한 변한은 서기전 39년 신라(辰韓 6부가 세운 나라)와 합병한다. 필자는 위에서 이 기사와 『삼국사』의 다른 기사들을 근거로 弁辰은 후삼한의 弁韓과 辰韓이 합병한 마을 즉 신라임을 밝혔다. 弁辰 즉 韓 지역 신라는 백제의 속국이었는데 독립하기 위해 경상도로 떠나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韓이라 불리면서 백제의 주민이고, 나중에 광개토대왕이 황하 어귀의 韓과 예(왜)를 점령하고, 이들 중 광개토대왕릉비에 나오는 수묘인을 차출한다.

강단유사사학은 『삼국사』 기사는 못 본 척하고 변한이 가야연맹체로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삼국사』 변한 항복기사에 대한 주석. (2021.12.28. 현재)

“변한(卞韓): 『삼국지』 권30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한조에는 ‘변진(弁辰)’으로 나오며, ‘馬韓’, ‘辰韓’과 더불어 삼한의 하나라는 의미로 ‘弁韓’으로도 표기되어 있다. ‘弁辰’이라는 명칭에서 드러나듯이 애초에 진한과 밀접한 관계를 지녔을 것인바, 『삼국지』에서는 진한과 ‘잡거(雜居)’하며 의복과 거처는 진한과 같았고, 언어와 법속 역시 진한과 비슷하지만 귀신을 섬기는 것이 다르다고 기록하였다. 대체로 낙동강 하류 지역을 중심으로 한 지금의 경상남도 일대에 산재했던 소국들의 연합체로서, 가야연맹체로 이어지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여기서 가야연맹체는 임나이다. 가야의 역사가 자세히 기록되지 않아서 가야를 임나로 둔갑시키기 위해 변한을 살려 놓는다. 변한도 임나 선생님께서 한반도로 오시기 위해서 죽어도 못 죽는 것이다. 가야세력이 열도에 진출하여 세운 소국이 임나인데, 조희승, 이덕일 주해, 『북한학자 조희승의 임나일본부 해부』, 도서출판 말, 2019. 198-254쪽.

이미 서기전에 실체가 없게 된 변한이, 4세기에 한반도의 임나가 되었다고 날조한다.

弁韓이 가야가 된다는 근거는 전혀 없다. 할 말이 없으니까 『삼국사』는 4세기까지 날조라고 주장한다. 날조라는 주장의 근거는 『삼국사』 초기기록이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조와 『후한서』 「동이열전」 三韓조에 배치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 근거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사료비판 없이 되는 대로 취사선택한 그들의 주장이 무의미함은 두 사서에 대한 필자의 사료비판을 통해 이미 논증하였다. 횡설수설에서 아무렇게 뽑아내면 더한 횡설수설일 뿐이다. 강단유사사학이 말하는 가짜 가야(임나)가 아닌 진짜 가야에 대해 가장 자세하게 기술한 『삼국유사』도 날조라고 한다. 물론 근거는 없다. 『삼국유사』가 사실을 기록한 것이면 가야는 임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임나 선생님을 영접하기 위해 진짜 가야는 그냥 죽어야 되는 것이다. 가야 건국설화가 담긴 토제방울이 출토되어도 파사석탑이 있어도 『삼국유사』는 날조라고 한다.

『삼국사』에 의하면 마한은 9년에 백제에 멸망당하는데, 강단유사사학은 『진서(晉書)』에 마한이 등장한다고 하여 『삼국사』의 기사를 부정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삼국사』 마한 멸망기사에 대한 주석. (2021.12.28. 현재)

“마한의 멸망 시기에 대해 본서 백제본기 초기기록을 믿는 입장에서는 본 기사를 그대로 받아들여 온조왕 27년(9)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千寬宇, 1976). 그러나 『진서(晉書)』 권97 마한전에는 태희(太熙) 원년(290)에도 마한이 서진(西晉)에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온조왕 27년조의 기사를 받아들일 수 없다. 백제에 의한 마한의 멸망이 온조왕대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때 백제에 멸망당한 마한의 실체에 대해서는 당시 마한의 맹주국인 목지국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목지국은 위나라 정시(正始) 6~7년(245~246)에 일어난 한(韓)과 대방군과의 전쟁에서 한이 패배하여 위상이 약화되었는데, 이 틈을 타 백제국의 고이왕이 목지국을 멸망시킨 것이므로, 그 시기는 3세기 중엽경에 해당된다고 보았다(盧重國, 85~94쪽; 李基東, 1990).”

그러면서 마한은 4세기 후반에나 망한다고 주장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삼국사』 호공이 마한에 사신으로 가는 기사에 대한 주석. (2021.12.28. 현재)

“마한(馬韓): 서기전 2세기 무렵부터 서기 4세기경까지 한반도 중남부의 서쪽, 지금의 경기, 충청, 전라 지방에 위치했던 소국들의 연맹체. 3세기 전반의 한반도 상황을 전해주는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한(韓)조에 따르면, 당시 목지국(目支國)을 비롯하여 55개 전후의 소국들이 마한을 구성하고 있었고, 전체 호수는 10만에 이른다고 하였다. 삼국 가운데 하나인 백제가 애초에 마한의 한 소국이었으며, 한강 유역에서 시작된 백제의 세력 확장에 밀려 마한 연맹체의 범위는 남쪽으로 계속 축소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일본서기」 권9 신공황후 49년(249) 3월조에 보이는 남만(南蠻) 침미다례(忱彌多禮) 정복 기사를 근거로, 오늘날의 영산강 유역과 전남 해안 일대에 잔존해 있던 마한 소국들도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대에는 백제에 완전히 통합된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李丙燾, 1976; 盧重國, 1988). 한편 백제본기에는 시조인 온조왕 27년에 해당하는 서기 9년에 백제가 마한을 소멸시킨 것으로 나와 차이를 보이는데, 이에 대해서는 본서 권23 백제본기1 온조왕 27년(9) 4월조 참조.”

물론 근거는 없다. 「일본서기」를 근거로 제시하나 「일본서기」 문언 그대로를 사료로 인정하더라도 근거는 없다. 마한이라고 나오지도 않고 그들이 소설적 상상력으로 마한이라 강변하는 것일 뿐이다. 영산강 일대는 백제의 국민인 왜인들이 정착해 있다가, 백제가 광개토대왕과 싸우면서 동원과 징발이 많아지자, 집단적으로 신라에 항복하였다. 후삼한의 마한은 한반도에 있지도 않았다. 영산강의 백제주민은 왜인들이므로 마한이 될 수도 없다.

「일본서기」를 사료로 인정한다면 『삼국사』는 사료의 하늘님의 할아버지쯤 된다. 그들은 사료비판을 전혀 하지 않는다. 날조를 위해 『삼국사』는 날조서, 「일본서기」는 문언 그대로 믿어야 할 책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강단유사사학은 그들의 소설에 부합하지 않는 「일본서기」의 문언은 철저히 무시한다. 「일본서기」를 문언 그대로 믿어도 그들이 창작한 소설은 도출되지 않는다. 그냥 일제유사사학에 대한 충성맹세만 할 뿐이다.

강단유사사학은 『진서』에 마한이 진에 조공했으므로 백제가 마한을 멸망시키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진서』는 645년 고구려에게 거의 죽었다 돌아온 이세민이 주도하여 646년부터 20여명이 2년간 편찬한 책으로 당시부터 평가가 좋지 않았고, 당의 유지기는 『진서』의 서례와 내용이 맞지 않으며, 믿기 힘든 잡서를 인용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임동민, 「『晉書』 馬韓 교섭기사의 주체와 경로」, 『한국고대사연구.89』, 2018. 19쪽.

특히 『진서』의 「동이열전」은 부여국, 馬韓, 辰韓, 숙신씨, 倭人, 비리등십국을 기술하는데, 고구려 백제가 없고, 馬韓조와 辰韓조는 『삼국지』 조금 베끼고, 조공을 여러 번 왔다는 내용밖에 없다. 『진서』 「동이열전」 馬韓조, 武帝太康元年、二年,其主頻遣使入貢方物,七年、八年、十年,又頻至。太熙元年,詣東夷校尉何龕上獻。咸寧三年復來,明年又請內附。辰韓조, 武帝 太康元年, 其王遣使獻方物. 二年復來朝貢, 七年又來.

마한조는 조공한 해가 순서대로 기재되어 있지 않아 날조된 기사로 볼 수 있다. 『진서』의 진한과 마한이 韓 지역 후삼한의 나라를 지칭한다면, 조위와 백제에 의해 멸망된 나라들이므로 조공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는 없다. 이세민이 고구려 보기 싫어 고구려를 뺐고 고구려가 빠지다 보니 넣을 나라가 없어서 이미 망한 나라까지 넣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세민이 『진서』를 직접 편찬하게 된 동기도 기존의 여러 『진서』에 나오는 고구려가 보기 싫어서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세민은 후세에 당의 역사를 쓸 때 고구려에 관해 쓰게 되면 이세민 개망신 당했다는 것이 기술될까봐 사서에서 고구려를 빼는 전통을 자기가 만들어보고 싶었을 것이다. 이세민은 『양서』, 『진서(陳書)』, 『주서』, 『북제서』, 『남사』, 『북사』, 『수서』도 다 날조하고 싶었겠지만 병이 악화되어 못하고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

강단유사사학은 이런 수준의 『진서』와 비교하여 『삼국사』의 사료가치를 부정한다. 물론 『진서』에 마한의 기재가 없었어도 『삼국사』 마한 멸망기사를 부정하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4세기까지 다 부정하는데, 마한 멸망기사에 대해선 마침 『진서』가 있으니 좋다고 떠벌리는 것일 뿐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다른 기사도 근거가 있어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임나 선생님을 영접하기 위한 목적에서 하는 것이므로 근거는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설사 『진서』의 마한 조공기사가 사실이더라도 말갈을 마한이라고 오해하여 마한에 기술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조선 말 단군의 중심국이 약화되고 서기전 195년 말조선(마한)의 수도였던 평양이 최씨 낙랑국에 의해 무너지자, 『북부여기』 三世檀君 高奚斯 壬申元年。正月, 樂浪王崔崇, 納穀三百石,于海域。先是, 崔崇自樂浪山, 載積珍寶, 而渡海至馬韓都王俊城, 是檀君解慕漱丙午冬也。

조선의 구성원이었던 소국들이 좌현왕(慕韓)을 자칭하면서, 말갈이 이들 소국들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준왕이 韓으로 옮겨 마한이라 하였고, 61년 마한의 성주 맹소가 경주 신라에 항복하였다. 이 두 경우도 소국들이 좌현왕의 의미로 마한이라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소국들이 辰國 즉 천자국은 아니지만 다른 국가에 종속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좌현왕 즉 제2인자의 의미가 있는 마한이나 말갈이라 스스로 칭하였다.

이들 요서 요동과 한반도 북부의 말갈제국(諸國)은 고구려에 복속하여 고구려의 국민이 되었으나 일정 수준의 자치를 인정 받아 독자적으로 또는 고구려의 명령에 의해 백제나 신라를 약탈하는 전쟁을 하기도 하며, 고구려의 동원이 있을 때는 항상 고구려의 전쟁에 참여하였다. 『삼국사』에 의하면 말갈은 서기전 16년부터 507년까지 백제와 26차례나 전쟁을 하고, 125년부터 481년까지 신라와 10차례 전쟁을 한다.

이는 백제로부터 약간의 자치를 허용받은 백제의 국민인 왜의 소국들이 백제의 명령으로 신라나 고구려를 공격한 것과 같다.

『후한서』 권5 효안제기 제5 연광(延光) 원년(122) 2월조에 “부여왕이 병사를 파견하여 현도를 구하고 고구려 마한 예맥을 격퇴하고 마침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라는 『후한서』 「효안제기」 연광(延光) 원년(122), 夫餘王遣子將兵救玄菟, 擊高句驪·馬韓·穢貊, 破之, 遂遣使貢獻

기사가 있다. 김부식도 『후한서』에 맞추어 121년과 122년의 고구려와 후한 전쟁의 참가자를 마한으로 표기하였다. 『三國史』 「髙句麗本紀」 太祖大王 十六年 十二月, 王率馬韓·穢貊一萬餘騎, 進圍玄莬校城. 扶餘王遣子尉仇台, 領兵二萬, 與漢兵并力拒戰, 我軍大敗. 太祖大王 七十年, 王與馬韓·穢貊侵遼東, 扶餘王遣兵救破之 馬韓以百濟温祚王二十七年㓕. 今與麗王行兵者, 盖滅而復興者歟.

그러나 중요한 전쟁에서 고구려가 말갈을 동원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므로 여기의 마한은 말갈로 봄이 타당하다. 중국인은 말갈을 마한으로 표기하였음이 『후한서』에서 입증되므로, 『진서』의 마한 조공 기사가 사실이라 하더라도 말갈을 이미 서기 9년에 망한 마한과 같은 것으로 오해하여 마한조에 기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한 상고사 에서 인용]

출처 https://blog.naver.com/bbondd0/223027047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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