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루왕(蓋婁王)(128~166년)이 도미의 부인을 취하지 못하자 도미를 눈멀게 하였다. 도미부부는 천성도(泉城島)로 도망갔다. 675년 가을 9월에 설인귀(薛仁貴)가 쳐들어왔다가 패퇴한 곳은 천성(泉城)이다. 설인귀가 해군을 이끌고 온 천성은 『삼국사』 「도미열전」의 도미부부가 배를 타고 온 천성도와 같은 곳이다.
요동반도백제는 서기 22년 이전부터 백제의 영토였는데, 도미부부는 백제 수도(韓지역의 한성)와 요동반도간 자주 있었던 백제의 무역선을 타고 요동반도의 부속도서의 하나인 천성도로 도망갔을 것이다. 요동반도에서도 고구려로 쉽게 갈 수 있으므로 도미부부가 고구려로 갔다는 열전의 내용과도 일치한다.
강단유사사학은 천성을 한강과 임진강 하구의 어느 지점으로 본다. 그러나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한성은 서울인데, 한강 하류로 간다면 도망이라 할 수 없다. 도망갔다고 인정하더라도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대방군과 낙랑군을 지나야 고구려로 갈 수 있으므로 그들의 주장은 도미부부가 고구려로 갔다는 내용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그들의 주장은 도대체 일관성이 전혀 없다.
고구려로 갔다는 내용이 마음에 걸렸는지 이병도는 개루왕대에는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대방군이 있어 곧바로 갈 수 없으므로, 이는 21대 개로왕대(455~475)의 설화일 것으로 추정한다(李丙燾, 1977, 『國譯 三國史記』, 乙酉文化社, 707쪽). 소설이 사료에 어긋나면 사료를 바꾸어버리는 역사소설의 신 이병도를 우리는 추앙하여야 한다.
670년부터 신라와 당은 요동반도와 요양을 두고 싸우고 있었으므로, 당이 요동반도를 지나 한강까지 가기도 어렵다. 실제 신라는 671년 겨울 10월 6일에 당나라 보급선 7십여 척을 쳐서 낭장(郎將) 겸이대후(鉗耳大侯)와 병사 1백여 명을 사로잡았다.
국사편찬위원(https://db.history.go.kr) 보급선 공격기사에 대한 주석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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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672년 8월에 석문전투(石門戰鬪)에서 패배한 이후 9월에 당으로 사죄사(謝罪使)를 파견하였다. 이때 억류하고 있던 당나라와 웅진도독부의 인원 및 병사 170명을 송환하였는데, 병선낭장(兵船郎將) 겸이대후(鉗耳大侯)·내주사마(萊州司馬) 왕예(王藝)·본열주장사(本烈州長史) 왕익(王益) 등 당군과 웅진도독부 사마 예군(禰軍)·증산사마(曾山司馬) 법총(法聰) 등 백제유민이 포함되어 있었다. 671년 10월에 수전을 벌였던 낭장 겸이대후가 포함되어 있고, 병사수도 100여 명으로 거의 일치하고 있다. 그 중에서 왕예의 직함은 ‘내주사마(萊州司馬)’인데, 내주는 산둥반도의 당나라 수군기지가 위치한 곳이다. 또 겸이대후와 함께 송환된 이들 속에 웅진도독부 사마 예군과 증산사마 법총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이들의 직함을 통해 볼 때, 671년 10월에 신라군에게 습격당하였던 당나라의 조운선은 당나라 본국인 산둥반도에서 출항하여 백제 고지인 웅진도독부로 투입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이상훈, 2012, 147~148). 다시 말해 671년 10월에 발생한 수전의 장소는 백제 고지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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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당의 보급선이 백제 고지인 웅진도독부로 투입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요동반도백제를 부인하는 곳에서는 백제와 무관한 곳인 요동 어딘가에 보내진 웅진도독부를 대진이 취하여 백제땅을 대진과 신라가 나누어가졌다는 말이 생겼다고 했다가,
당나라가 침략할 때는 말을 바꾸어 웅진도독부가 한반도의 백제고지에 있다고 말을 바꾼다.
한반도백제는 665년 이전 완전히 신라에 병합되어, 한반도에 파견되었던 당군은 665년 돌아갔다. 670년 이후 신라와 당의 전쟁은 요동반도백제와 고구려 평양(요양)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설인귀가 침략한 천성 기벌포 모두 요동반도의 지명이다.
어떻게든 신라가 확보한 땅은 대동강 원산만이라는 조선총독부의 교시를 수호하기 위해 말바꾸기와 억지와 사료부정을 시전하는 그들의 놀라운 충절에 일제는 주기적인 떡값으로 보답하고 있다.
[한 상고사 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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