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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역사소설]대한제국200년사-(12)종이호랑이
게시물ID : history_473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2013년체제
추천 : 22
조회수 : 1084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2/06/17 22:03:45
아편전쟁과 대한제국과의 전쟁에서 연이은 참패를 당하고 자신들의 발원지인 만주마저 상실하자 중국대륙 전역에 대한 북경 조정의 지배력은 급속히 약화되어 나갔다. 광동성 화현의 농가 출신인 홍수전(洪秀全)은 향시를 보기 위해 광주에 갔다가 거리에서 영국인 전도사에게 《관세양언(觀世良言)》이라는 책자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 통독하면서부터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홍수전은 이후 자신을 여호와 천부의 둘째아들이며 그리스도 천형의 동생이라 자처하며, 상제인 여호와를 숭배하는 결사라는 뜻으로 '배상제회(拜上帝會)'라는 교단을 조직하였다. 일상적인 삶에 지친 농민들을 대상으로 이들의 교세가 급속도로 신장되자 홍수전은 자신들의 세를 더욱 확장하기 위해 '태평천국(太平天國)'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군사를 일으켰다. 
태평천국군의 군율은 모세의 십계를 기본으로 하는 매우 엄격한 것이었다. 태평천국군은 중국의 남부 농업지역에 근거한 한족(漢族) 중심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의 성장 배경에는 바로 만주족이 지배하고 있는 북경 조정에 대한 민족적인 배타성도 크게 작용하였다. 태평천국군이 군사행동을 개시하자 도처의 군사들이 반청복명(反淸復明)을 기치로 합류한 연유도 다 여기에 있는 것이었다. 

이들이 민간에 뿌린 격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하늘의 뜻을 받들어 오랑캐를 토벌한다는 뜻의 '봉천토호격(奉天討胡檄)'으로 내용은 민족감정을 자극하는 매우 노골적이고 선동적이었다. '슬프다, 이네 중생들아. 내 말을 잘 들을지어다. 무릇 천하는 상제의 천하이지 오랑캐의 천하가 아니며 의식 또한 상제의 의식이지 오랑캐의 의식은 아니다. 중국에는 중국의 풍습과 의관이 있거늘 지금은 어떠한가? 

모두가 오랑캐의 풍습이고 의관도 원숭이의 관을 쓰고 있으니 참으로 해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우리 선조들의 풍습과 의관을 파괴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근본을 잊게 하고 있다. 중국에는 중국인의 배우자가 있거늘 그들은 중국의 미녀를 강제로 유혹하여 처첩으로 거느리고 3천의 미녀를 노리개로 삼고 있다. 

백만이 넘는 젊은 미녀가 오랑캐와 동침하고 있으니 이렇게 가다간 중국 천지가 모두 오랑캐의 종자로 바뀔 것이다. 말하자니 마음이 아프고 혀가 더러워 참을 길이 없도다!' 50만의 막강한 병력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난 태평천국군은 마침내 남경성을 함락시키고, 남경을 천경이라 개칭하여 수도로 정하고 새로운 왕조로서의 위엄을 갖추었다. 

태평천국은 공산주의 생산방식을 채택하여 천하의 토지는 천하의 사람이 함께 경작해야 한다는 원칙을 정하고, 따라서 모든 토지는 국가 소유로 하며 사유를 금하고 생산물은 경작자에게 골고루 나누어주되 수확의 잉여분은 국고에 납입시키며 개인적인 축재는 허용하지 않기로 하였다. 

남경에 도읍한 태평천국군은 전열을 정비하여 북벌군을 편성하고 마침내 황하를 건너 천진에까지 이르러 북경을 위협하는 지경에 달하였다. 그러나 황하를 건너자 화북지방의 민심은 확연히 달랐고, 민간의 호응이 덜하자 식량의 보급도 원활치 못하고 군대의 사기가 저하되는 등 여러 면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다가 북경 근처에 이르자 조정의 대응 방식도 예전과 달리 필사적이었다. 

천진을 둘러 싼 전투에서 몽고족의 맹장 승격임심(僧格林沁)이 지휘하는 청나라의 최정예 철기군의 기동력에, 대부분 농민들로 구성된 태평천국군은 대패하고 때마침 동절기가 닥치자 추위에 약한 남방 출신들이라 서둘러 패주하기 시작했다. 

북경의 청조와 남경의 태평천국이 서로 대치하자 중국에 진출해 있던 열강들은 처음에는 중립을 지키며 사태의 추이를 예의주시 해왔는데, 태평천국군이 외국조계가 몰려 있는 상해를 공격하자 영국과 프랑스군은 군대를 동원하여 반격에 나서 치열한 교전이 발생하였다.
 
태평천국군의 상해 공략을 계기로 중국에 진출해 있던 열강들은 태평천국이 반외세적 성격을 지향한다고 판단하고 양측의 싸움에서 청 조정을 지원하기로 최종 결심하게 되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남경에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내분이 일어나 태평천국은 급속히 몰락의 길로 접어들고, 막강한 화력으로 무장한 청조의 용병 외인부대인 상승군의 공격으로 결국 남경이 함락되어 13년에 걸친 태평천국의 난은 막을 내리게 되나, 이미 청제국은 소생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태평천국의 난이 한참이던 1856년에 소위 애로우(Arrow)호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 등 구미 열강들이 15년 전에 발생한 아편전쟁의 소득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유리한 조약을 체결하고자, 태평천국의 난으로 위기에 처한 북경 조정을 협박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었다. 

광주 앞바다에 정박 중이던 영국 선적 애로우호를 청국 관헌이 수색하여 해적 용의자들을 체포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광주 주재 영국 영사는 강력히 항의하고 결국 이를 구실로 다시금 군사 침공을 서두르게 되었다. 

아편전쟁 당시 외상을 맡아 부도덕한 전쟁을 총지휘했던 파머스턴(Lord Palmerston)이 이제는 내각의 수상이 되어, 이번에는 의회의 찬성을 얻기 위해 하원을 해산하고 총선거를 실시하는 비상 수단까지 동원하여 가까스로 전쟁의 비준을 얻어내는데 성공하였다. 

또 영국보다 한 발 늦게 중국에 진출한 프랑스는 자국의 카톨릭 신부가 사형을 당한 것을 구실로 같이 참전하게 되었다. 지난 아편전쟁에서 청국의 군사력에 두려움을 느껴 대한제국의 참전을 독려했던 영국은, 이번에는 그 동안 위협적으로 강성해진 대한제국이 본격적으로 참전하면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는 대한제국에 자칫 중국에 대한 패권을 뺏길지도 모른다는 우려로 오히려 전쟁에 개입을 못하게 외교경로를 통해 견제의 눈길을 늦추지 않았다. 

대한제국도 일본과 미국과의 연이은 전쟁으로 국력이 쇠진해진데다 중국과의 전쟁에서 별 실익이 없다고 최종 판단하고 참전하지는 않지만 전쟁 진행상황을 예의주시하며 지속적인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영불 연합군은 먼저 광주 공격을 개시하여 점령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남쪽에서 한 두 도시쯤 점령된다고 해도 북경 조정이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난 아편전쟁의 경험에서 너무도 잘 아는 영국은 북경을 위협하기 위하여 프랑스. 러시아와 연합함대를 편성하여 북상을 시작했다. 

천진의 외항인 백하 하구의 대고에 이르러 꼬박 24시간 동안 계속된 쌍방의 치열한 포격전 끝에 결과는 의외로 영불 연합함대의 참패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이는 영불 연합함대가 청군을 만만히 본 까닭도 있지만, 청 조정이 지난 번 아편전쟁의 치욕적인 경험을 교훈 삼아 백하 하구에 장애물을 설치하고 포대를 대폭 강화한 결과이기도 했다. 

일단 패주한 영불 연합군은 이듬해에 영국 군함 73척에 병력 1만 8천명, 프랑스 군함 33척에 병력 6천 3백의 대규모의 원정군으로 다시 침입하여 마침내 상륙에 성공하였다. 이 전쟁에서 이 곳을 수비하고 있던,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전설적인 맹장 승격임심이 지휘하던 청군 최강의 몽고족 철기군이 패퇴하자 청국 조정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 협상에 응하고 말게 되었다. 

그런데 국서 친정 문제가 다시 분쟁거리가 되어 협상은 결렬되고 말았다. 빅토리아 여왕의 친서를 지닌 영국 측 전권대사 엘긴은 국서를 황제에게 직접 건네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나, 청국 측은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궤 구고두(三 九叩頭)의 예를 다하지 않는 한 황제를 배알할 수 없다고 맞섰다. 

영국 측은 그것은 결국 영국의 빅토리아(Victoria) 여왕이 청국의 함풍제(咸豊帝)에게 예를 올리는 것이 되므로 당연히 거절하게 되고 결국 교섭은 결렬되고 말았다. 최종 협상이 결렬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함풍제는 동생 공친왕(恭親王) 혁흔(奕緖)에게 조정을 맡기고 자신은 후비들을 거느리고 만리장성 너머 여름 별궁이 위치한 열하(熱河)로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황제의 탈출로 북경은 공백상태에 빠지고 더 이상의 군사적 저항이 없자 영불 연합군은 북경으로 진주하던 도중 원명원을 약탈하고 방화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원명원(圓明園)은 북경성 밖 25리에 있던 별궁으로 옹정제가 황자로 있을 때 아버지 강희제가 하사하였는데 이후 건륭제가 위구르족의 여성인 향비를 사랑한 나머지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프랑스 베르샤이유 궁전을 본 따 분수까지 짓고 유럽풍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여 역대 황제들이 주로 사생활을 즐기던 곳이었다. 

이 곳에는 역대 황제들이 아끼던 세계 각국의 희귀한 미술품과 서적 그리고 금은 보화들이 수집되어 있었는데 영불 연합군은 남김없이 약탈하고 흔적을 없애기 위하여 방화까지 저지르고 만 것이었다. 영불 연합군이 중국의 심장부인 북경에까지 난입해 살인. 강간. 약탈. 방화 등 아수라장을 만들자 청국 조정은 무조건 항복하게 되었고, 주중 대한제국 대사로 있던 황실의 종친 흥선군 이하응의 중재로 굴욕적인 북경 조약을 맺은 후에야 영불 연합군은 철수하게 되었다. 

북경 조약으로 구미 열강의 사신이 북경에 상주하게 되며 기독교의 선교가 자유로워지게 되었다. 또 북경의 관문인 천진항이 개항되었으며 영국은 구룡(九龍)반도를 할양 받았다. 러시아는 청국과 별도로 아이훈 조약을 체결하고 흑룡강의 북쪽 땅을 할양 받게 되었다. 

청국으로서는 이미 흑룡강 이남의 땅을 대한제국이 차지하고 있어, 지리적으로도 단절되어 통치하기에 어려움이 많은데다가 더 이상 쓸모가 없게된 흑룡강 이북의 땅을 러시아에게 줌으로써 만주를 차지하고 있는 대한제국도 견제하고 러시아도 달래려는 이중적 효과를 기대한 것이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청국과 구미 열강들과의 전쟁에서 중립적 태도를 견지하다 영불 연합군이 도성에까지 난입해 무자비하게 살육과 약탈을 저지르자 서울에 있는 영국과 프랑스 양국의 주한 대사들을 불러 강력한 유감의 뜻을 표하였다. 

또 러시아가 흑룡강 이북의 땅을 차지하자 강 하나를 사이에 놓고 미지의 거대한 대제국과 조우하게 된 대한제국 정부는 심기가 불편함을 감추지 않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 동안 대한제국의 후견자 노릇을 자처하던 영국을 위시한 구미열강은 이러한 대한제국의 적대적 태도와 쉽게 상대하지 못할 정도로 성장한 군사력에 긴장감을 가지고 경계하기 시작하였다. 

만리장성 너머 열하(熱河)로 도망간 함풍제(咸豊帝)가 갑자기 죽자, 황제의 측실인 자희(慈 禧)와 황제의 측근들 간에 황위를 둘러싼 치열한 암투가 벌어졌다. 이 싸움은 최종적으로 자희의 승리로 돌아가고 불과 세 살배기 어린 황제가 등극하니 이가 바로 동치제(同治帝)이고 서태후(西太后)가 된 자희는 섭정의 자리에 올라 천하의 권력을 한 손에 움켜잡게 되었다. 

동치제가 즉위하자 정권을 담당한 서태후는 증국번(曾國藩) . 이홍장(李鴻章) 등을 기용하여 기존의 폐쇄적인 정책에서 탈피하여 적극적으로 외국의 선진문물을 도입하여 자강의 기틀을 마련하려 노력하여 갔다. 

이를 양무운동(洋務運動)이라 부르는데, 집권세력이 여전히 보수적 사고에서 탈피하지 못한 채 제도나 의식의 개혁 없이 물질적 모방에만 치우쳐 이들의 노력도 헛되이 청조는 몰락의 길을 멈출 수 없었다. 19세기 들어 외국과의 전쟁에서 단 한 차례도 승리하지 못한 청제국의 운명은, 20세기에 이르러 겨우 숨만 지탱하는 식물인간의 처지로 몰락하여 그 생을 마감할 날이 이미 초읽기로 돌입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수 차례의 전쟁에서 연이은 참패로 중국은 이제 완전히 제국주의 열강들의 분할 통치에 의한 반식민지 상태에 직면하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열강 상호간의 견제로 중국이 완전히 어느 한 나라의 식민지가 되는 최악의 상황만은 오히려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영국은 아편전쟁으로 할양 받은 홍콩과 구룡반도를 거점으로 광동, 상해를 잇는 주요 항구의 무역권을 이미 선점하고 있는 상태였고, 프랑스는 청불전쟁으로 획득한 베트남을 근거지로 캄보디아, 라오스까지 그 세력을 넓혀 나갔다. 

뒤늦게 중국으로 달려온 독일은 청도를 근거지로 하여 산동반도 일대에 진출하는데 성공하고 러시아는 흑룡강 이북을 차지하고 만주마저 차지하기 위해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만을 노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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