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료
『三國史』 「新羅本紀」 赫居世 居西干 30년 樂浪人將兵來侵. 見邊人夜户不扃, 露積被野, 相謂曰, “此方民不相盗, 可謂有道之國. 吾儕濳師而襲之, 無異於盗, 得不愧乎.” 乃引還.
〔30년(B.C. 28)〕 낙랑인(樂浪人)이 병사를 이끌고 침략해 왔다. 변경 사람들이 밤에 문을 걸어 잠그지 않고 곡식도 한데에 쌓아 들판에 널린 것을 보고서 서로 말하기를, “이곳의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으니, 가히 도(道)가 있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군사를 몰래 내어 습격하는 것은 도적이나 다를 바 없으니 부끄럽지 않겠는가?”라고 하며 병사를 물려서 돌아갔다.
『三國史』 「新羅本紀」 南解 次次雄 元年, 秋七月, 樂浪兵至, 國金城數重, 王謂左右曰, “二聖弃國, 孤以國人推戴, 謬居於位, 危懼若涉川水. 今鄰國來侵, 是孤之不德也, 爲之若何.” 左右對曰, “賊幸我有喪, 妾以兵來, 天必不祐. 不足畏也.” 賊俄而退歸.
원년(4) 가을 7월에 낙랑(樂浪) 병사들이 와서 금성(金城)을 여러 겹으로 에워쌌다. 왕이 좌우 신하에게 말하기를, “두 성인이 나라를 버리시고 내가 국인들의 추대로 왕위에 그릇되게 거하게 되어 위태롭고 두렵기가 마치 하천의 물을 건너는 것 같다. 지금 이웃 나라가 침략해 온 것은 나의 부덕이라 하겠으니, 어찌하면 되겠는가?”라고 하니, 좌우 신하들이 대답하기를, “적들이 우리에게 상(喪)이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고 망령되게 병사를 동원하여 왔으니 하늘이 반드시 도와주지 않을 것입니다.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적이 얼마 있지 않아 물러나 돌아갔다.
『三國史』 「新羅本紀」 南解 次次雄 十一年, 倭人遣兵舩百餘艘, 掠海邊民戶. 發六部勁兵以禦之. 樂浪謂内虚, 求攻金城甚急. 夜有流星墜於賊營, 衆懼而退, 屯於閼川之上, 造石堆二十而去. 六部兵一千人追之, 自吐含山東至閼川, 見石堆知賊衆, 乃止
11년(14)에 왜인이 병선 1백여 척을 보내 바닷가의 민가를 노략질하였다. 〔왕이〕 6부(六部)의 날랜 병사를 발동하여 이들을 막게 하였다. 낙랑(樂浪)이 〔우리〕 내부가 비었을 것이라고 하고 금성(金城)을 공격해 오기를 매우 급하게 하였다. 밤에 유성(流星)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니 그 무리들이 두려워하여 물러나 알천(閼川)의 주위에 주둔하며 돌무지 20개를 만들어 놓고서 떠나갔다. 6부(六部)의 병사 1,000명이 그들을 추격하여 토함산(吐含山)의 동쪽으로부터 알천에 이르렀는데, 돌무지를 보고 적들의 숫자가 많음을 알고서 추격을 그만두었다.
『三國史』 「新羅本紀」 儒理 尼師今 十三年, 秋八月, 樂浪犯北邊, 攻䧟朶山城
13년(36) 가을 8월에 낙랑(樂浪)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朶山城)을 공격해서 함락시켰다.
『三國史』 「髙句麗本紀」 大武神王 二十年, 王襲樂浪滅之.
20년(37) 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三國史』 「新羅本紀」 儒理 尼師今 十四年, 髙句麗王無恤, 襲樂浪滅之. 其國人五千來投, 分居六部.
14년(37)에 고구려왕 무휼(無恤)이 낙랑(樂浪)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 나라 사람 5,000명이 투항해 오니 6부(六部)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三國史』 「新羅本紀」 儒理 尼師今 十七年, 秋九月, 華麗·不耐二縣人連謀, 率騎兵犯北境. 貊國渠帥, 以兵要曲河西, 敗之. 王喜, 與貊國結好.
17년(40) 가을 9월에 화려현(華麗縣)과 불내현(不耐縣) 두 현의 사람들이 연계하여 모의하고서는 기병을 이끌고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맥국(貊國)의 거수(渠帥)가 군사를 내어 곡하(曲河)의 서쪽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쳐서 물리쳤다. 왕이 기뻐하여 맥국과 더불어 우호 관계를 맺었다.
『三國史』 「髙句麗本紀」 大武神王 二十七年, 秋九月, 漢光武帝遣兵渡海伐樂浪, 取其地爲郡·縣, 薩水已南屬漢.
27년(44) 가을 9월에 유수가 병력을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으니, 살수(薩水) 이남이 한(漢)에 속하게 되었다.
『後漢書』 「本紀」 光武帝 劉秀 建武二十年 秋,東夷韓國人率眾詣樂浪內附
유수 20년(44) 가을 동이 한국인이 무리를 이끌고 낙랑에 이르러 내부하였다
『後漢書』 「동이열전」 삼한, 建武二十年,韓人廉斯人蘇馬諟等詣樂浪貢獻。光武封蘇馬諟為漢廉斯邑君,使屬樂浪郡,四時朝謁。靈帝末,韓、濊並盛,郡縣不能制,百姓苦亂,多流亡入韓者。
유수 20년(44)에 韓의 염사 사람인 소마시 등이 樂浪에 와서 공물을 바쳤다. 유수는 소마시를 封하여 漢의 염사邑君으로 삼아 樂浪郡에 소속시키니, 철마다 조알하였다. 유굉 말년에 韓과 濊가 모두 강성해져 郡縣이 제대로 제압하지 못하자, 난리에 고통스러운 백성들이 많이 韓으로 도망하였다.
2. 사료의 합리적 해석
당시 신라는 여섯 개의 마을사람들이 세운 마을국가였다. 낙랑군 동부도위가 남쪽 경계의 신라를 침입하였다. 40년 화려현과 불내현 사람이 침략하는데, 화려현과 불이현은 낙랑군 동부도위의 현이다.
대무신왕은 후한 초 혼란기인 37년 낙랑군을 점령하였다. 그러자 낙랑군에서 살던 조선인들 중 5천명이 신라로 피난을 갔다. 40년 신라를 침입한 낙랑 사람은 낙랑의 잔당이다.
44년 유수가 한나라를 안정시킨 후 낙랑군을 탈환하였다. 중국 사서는 37년 낙랑군을 상실한 사실을 기록하지 않기 위해 낙랑군을 탈환한 사실을 명시하지 않고 있다. 삼국사는 대무신왕의 37년 낙랑군 점령과, 44년의 고구려 패배도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
44년 유수가 낙랑군을 탈환하자, 신라에 있던 피난민들이 다시 낙랑군으로 돌아간다. 중국 사서는 이를 한인들의 낙랑 내부, 염사 사람 소마시의 귀부 등으로 기술하고 있다. [삼국지가 인용한 위략의 염사치 기사는 모순이 많지만, 후한서의 염사 사람 소마시의 기사는 사실적이다. 물론 한나라의 낙랑군이 탈취 당했던 사실을 숨기기 위해 한나라가 새로 영토를 넗힌 것으로 오해하도록 쓰여 있다]
3. 강단유사사학의 소설
사료에 의하면 초기 신라와 낙랑군 동부도위는 이웃이다. 신라 초기는 마을국가였다는 것은 그들도 인정한다. 그들의 소설에 의하면 낙랑군 평양과 신라 경주는 모순에 빠진다. 평양과 경주는 이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강단유사사학은 그들의 소설을 방어하기 위해 더 말도 안 되는 소설을 창작한다. 낙랑의 신라 침공에 대한 국산편찬위원회의 주석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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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신라의 중심지인 경주 지역과 낙랑군이 위치했던 한반도 서북부 지역이 거리상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혁거세거서간 시기에 낙랑인이 신라를 침략하였다는 내용의 본 기사는 사료적 신빙성을 두고 많은 논란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 이래 일본인 학자들은 아예 후대의 날조된 기사로 치부해 왔으며(津田左右吉, 1924), 우리 학계에서는 중국 본토에서 한사군에 와 있던 관리 및 상인집단이 군대를 대동하고 교역을 위하여 바닷길로 경주 지역까지 왔다가 충돌을 일으킨 사실로 이해하기도 하고(李鍾旭, 1979), 이른바 ‘북진한(北辰韓)’ 세력이 남하하던 도중에 낙랑과 충돌한 사건으로 파악하기도 한다(千寬宇, 1989). 그리고 6세기 이후의 사실이 『삼국사기』 편찬 과정에서 앞 시기로 소급·부회된 것으로 판단하기도 하고(宣石悅, 2001),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기에 보이는 최리(崔理)의 ‘낙랑국(樂浪國)’과 연관 지어 ‘낙랑’을 자칭한 옥저 지역의 토착 세력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文安植, 1997; 文昌魯, 2004). 이와는 달리 신라본기와 백제본기의 초기 기사에 보이는 ‘낙랑’은 본래 ‘진한(辰韓)’으로 표기되어 있던 원자료가 『삼국사기』에 기술되기까지 수차에 걸쳐 전록(轉錄)되는 과정에서 편사자의 오해로 말미암아 변개되었을 가능성을 타진한 견해도 있다(강종훈,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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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을 휘갈겨 놓고 학문이라 한다. 아무 근거도 없다. 일제가 싸놓은 낙랑군 평양설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그저 헌신할 뿐이다. 일제 똥을 빨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해야 한다는 그들의 일제 똥을 향한 일편단심의 붉음이 역겨울 뿐이다.
4.
사료에 의하면 초기 신라는 경주가 아니다. 신라의 韓에서 경주로의 이동을 상정하지 않으면 모든 사서를 해석할 수 없다.
황하 하류의 韓을 부정하는 모든 주장은 유사사학이다.
강단유사사학만이 문제가 아니다. 재야의 주류 견해인 난하 하류에 낙랑군이 있었다는 주장도 이제는 유사사학이다. 갈석산이 황하 하류에 있었다는 여러 신뢰성 있는 사료를 무시하고 갈석산이 난하 하류에 있었다고 거짓말한다. 난하설은 삼국사 초기기록을 절대로 설명할 수 없다. 후삼한을 바닷속에 빠뜨려 강단유사사학의 학문권력에 일조하고 있다. [강단이 재야는 후삼한 바닷속에 빠뜨린다 하면 역사에 무관심한 대중은 재야는 허황되고 강단은 과학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난하설 즉 재야유사사학은 강단이 제도권에서 학문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거짓말하는 것처럼, 재야에서 그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거짓말하고 있다.
[한 상고사 에서 인용]
출처 | https://blog.naver.com/bbondd0/22305301464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