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할 수 없다’는 수사적 표현의 긍정적 용법은 현실을 고양하는 자극제로써의 의미를 지닌다.
반대의 경우 그것은 일상의 질서를 파괴하고 분란을 일으킨다.
현실을 위협하는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을 사회는 깊숙한 곳에 억압시키거나 바깥으로 추방해야 한다.
그러나 사회를 파괴하는 언싱커블한 것은 어떤 경우 그 사회를 구원한다.
고대 로마의 늙은 농부였던 킨킨나투스는 공화국이 위험이 빠졌다는 소식을 전해온 동향 사람의 간청으로 독재자의 역할을 수락했다.
16일이 지나 적들이 사라지자 킨킨나투스는 다시 농부로 돌아왔다고 한다.
공화주의란 법 위에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독재란 공화국을 파괴하는 것이고 따라서 공화주의적 사회에서 억압되거나 추방된 언싱커블한 정치 형태이다.
킨킨나투스는 위기에 빠진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독재자의 역할을 받아들였다.
이 경우 공화국은 보호받기 위해 스스로를 정지시켜야 하고 정상적인 상황에서 추방했던 ‘언싱커블’한 독재를 불러들여야 한다.
영화 ‘언싱커블’은 정상적인 상황에서 한 사회가 추방했던 끔찍한 어떤 것이 그 사회를 구원할 경우, 그것을 수락하는 것이 정당할 수 있는지를 질문한다.
테러리스트 유수프는 미국의 세 개 도시에 핵폭탄을 설치하고 자진해서 체포된다.
군당국은 핵폭탄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애국법이 허용하는 선에서 유수프를 고문하지만 성과를 얻지 못한다.
FBI 대테러-지원팀과 CIA에서 특별 관리하는 고문 기술자 'H'가 급파된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한 H의 고문을 용납할 수 없는 FBI 요원 브로디는 그를 막아서지만 여의치 않다.
수천만 미국 시민의 안전이 테러리스트의 인권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참다못한 브로디는 그의 상관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거절당한다.
“잭, 피의자가 받는 고문은 비합헌적이란 말입니다.”
“브로디, 폭탄이 터지면 헌법이라는 것도 씨발 없게 된단 말이야!”
정상적인 상황에서 사회는 헌법에서 고문을 추방했으나 위기의 순간, 헌법은 지켜지기 위해 스스로를 유예시키고 비합헌적인 고문을 불러들여야 한다.
테러리스트는 어떠한 강도 높은 고문에도 흔들림 없고 그 단호함의 크기만큼 미국 시민의 안전도 위태로워진다.
거대한 대재난이 눈앞에 다가오자 브로디는 H의 고문에 의지하고 이를 종용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고문 기술자 H는 상황에 연루된 모든 이들로부터 경멸받는다.
이중 일부는 그를 필요악이라 생각했고 일부는 그 필요성마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핵폭발의 시간이 눈앞에 다가오자 모두 고문의 강도를 높여야 한다는 주장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게 되고 H는 ‘Unthinkable'을 제안한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고문 외에는 미국 시민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테러리스트의 어린 자녀를 고문의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
아동에 대한 부모의 가벼운 구타조차 법으로 허용하지 않은 나라에서, 위기의 순간 어른들의 세계에서 벌어진 갈등과 무관한 아이들을 고문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만큼 위선적인 것은 없다.
그러나 테러리스트의 인권 혹은 아동을 보호할 것인가?, 수천만 미국 시민의 생명을 구할 것인가? 라는 두 가지 선택지 밖에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후자를 선택해야한다.
수천만 미국 시민 중엔 다수의 아동이 있을 것이고, 소수의 아동을 고문해야 다수의 아동 및 시민을 구할 수 있다면 선택의 여지는 없어 보인다.
위선성이란 아동을 보호하던 사회가 특정 시기 아동을 의도적으로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위기 상황에서 혼자 고결하게 인권 따위나 운운하면서 다수 시민들을 위험에 빠뜨린 브로디 자신이다.
경멸스런 고문 기술자 H의 단호함은 킨킨나투스의 그것과 유사해보인다.
덜 나쁜 것과 더 나쁜 것 중 반드시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덜 나쁜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테러리스트의 인권을 무시하는 것도 나쁘고, 미국 시민의 생명을 내팽게치는 것도 나쁘다.
그러나 테러리스트의 인권을 짓밟는 것이 더 나빠지지 않기 위한 덜 나쁜 선택지일 경우 인권에 대한 주장은 고결해보일지는 몰라도 비현실적 이상주의자의 주장으로 폄하된다.
영화 ‘언싱커블’은 관객으로 하여금 덜 나쁜 선택지와 더 나쁜 선택지 사이의 양자택일의 갈등에 몰입시킨다.
그리나 관객이 처한 이 갈등의 결과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더럽게 찝찝하다.
영화는 덜 나쁜 선택지와 더 나쁜 선택지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이러한 양자택일이 어째서 우리의 현실이 되었는지를 은폐하기 때문이다.
일상적 삶에서 추방되었던 고문을 현실적인 대안으로 삼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버린 상황이야말로 고문의 폭력성보다 더 폭력적이다.
테러리스트의 인권을 짓밟아야 미국 시민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거나, 미국 시민의 생명을 등한시해야 테러리스트의 인권을 존중할 수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양자택일의 갈등에 몰입하기 전에 누가 그러한 상황을 창출하는지 혹은 그러한 상황의 창출과 이해관계가 가장 민감하게 얽혀 있는 집단이 누구인지를 먼저 의심해야 할지도 모른다.
만약 이러한 상황을 인위적으로 창출하는 집단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덜 나쁜 것과 더 나쁜 것 사이에서 선택하는 순간 함정에 빠져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