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디는 잔인한 고문을 중지시키기 위해 테러리스트 유수프에게 핵폭탄의 위치 정보를 넘겨달라고 간청한다.
하지만 핵폭탄의 존재 여부조차 아직 확실하지 않다.
유수프는 핵폭탄이 없음을 고백하고 가짜 핵폭탄 모형의 위치를 발설한다.
그러나 이는 함정이었고 가짜 핵폭탄을 확인하러 간 브로디로 하여금 대형 쇼핑센터 폭발을 목격하게 만든다.
53명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무고한 시민의 죽음에 분노한 브로디는 유수프에게 신체적 위협을 가하려 한다.
그러나 유수프는 그녀의 분노가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폭로한다.
“난 조국을 사랑하는데 너희 국민들이 파괴하지!! 난 내 종교를 사랑하는데 너희 국민이 침뱉지!! 날 야만인이라고 하겠지? 그럼 당신은 뭔데! 50명 좀 넘게 죽었다고 내가 울길 바랬나? 너희 국민은 매일 그 숫자를 죽여!!! 느낌이 어때? 이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 느껴야 하는 거야! 당신은 암덩어리야!!!”
미국이 아랍 지역에 군대를 주둔시켜 압박을 가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압박이 진행되고 있는지는 미국 시민들, 심지어 파병된 미군들조차 잘 알지 못한다.
미국 도심 쇼핑센터에서 C4 폭탄을 폭발시켜 무고한 시민의 생명을 앗아가는 테러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하지만 미국이 일으킨 전쟁에 의해 파괴되는 무고한 아랍인들의 삶 역시 마찬가지로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런데 테러의 피해는 가시적인데 반해 전쟁의 피해는 비가시적이다.
도심 한 가운데서 극소수의 사람이 작은 피해를 입어도 그것이 테러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라면 언론은 이를 소홀히 취급할 수 없다.
하지만 유수프의 주장대로 무고한 아랍인들이 전쟁에 의해 매일 50명씩 사망해도 서방 주류 언론은 이에 주목하지 않는다.
한편 아랍 주둔 미군조차 그 실상에 무감각할 수밖에 없다.
전쟁의 성격이 변했기 때문이다.
베트남전 이후 미국은 자국 젊은이들을 죽음의 전장에 보낼 수 없다는 반전 시위에 시달렸고, 이후 미국의 군사 전략에서 기술주의자들이 우세해진다.
이들은 테크놀로지의 우위를 내세워 미군과 그 동맹국의 군인이 절대로 죽지 않는 비신체적 전쟁을 기획했다.
테크놀로지의 압도적인 우위에 의해 진행되는 전쟁은 자국 군인의 생명을 완벽하게 보호하지만 적국의 군인을 반드시 죽게 만든다.
이때 절대로 죽지 않는 군인은 고도로 발달한 테크놀로지 기계의 보철물이다.
따라서 이들이 경험하는 전쟁의 무자비한 폭력은 모니터 상의 버츄얼한 데이터로 해석된다.
절대로 죽지 않는, 비신체적인 군인들은 전쟁의 실상에 무감각하다.
미국 시민은 언론에 의해서, 전쟁을 수행하는 미군과 그 동맹국 군인들은 고도로 발달한 테크놀로지에 의해서 전쟁의 실상에 무감각하다.
한편 테크놀로지의 치명적인 비대칭적 전쟁에서 죽음을 완벽하게 보장받은 군인들은 전통적 방식의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
전쟁터에서 이들은 상대를 타격할 수도, 생명을 보존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자살 폭탄 테러는 죽음을 완벽하게 보장받은 군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 수단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전쟁의 실상에 무감각한 미군과 미국 시민들에게 무자비한 자살 폭탄 테러의 증가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인종적 열등함이라는 편견이 덧씌워지고, 악마라는 신비주의적인 종교 개념으로 다시 채색된다.
미국과 그 동맹국의 눈에 이들은 유수프의 말대로 이해할 수 없는 끔찍한 야만인이다.
쇼핑센터 폭발을 목격한 브로디는 고문 기술자 H를 뒤로한 채 유수프를 고문하려 하지만 전쟁의 실상에 대한 폭로가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제 우리는 어떤 선택이 더 나쁜지, 덜 나쁜지 조차 파악할 수가 없다.
그러나 급박한 상황은 선택을 종용한다.
무고한 미국 시민을 위협하는 자살 폭탄 테러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하지만 무고한 아랍인들을 위협하는 전쟁에 대한 저항일 뿐인 자살 폭탄 테러리스트의 인권을 덮어놓고 무시할 수도 없다.
급박한 상황의 논리는 양자택일의 논리에 사람들을 가두어놓는다.
그러나 우리가 두 개의 선택지를 번갈아 보며 심각하게 고뇌할 때 자살 폭탄 테러를 양산하는 미군의 전쟁 성격 변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은 은폐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