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저 굉장히 섭섭합니다 [191] 1171053| peter10 (typar****) 추천 990 | 반대 24 | 조회 91084 | 2012.06.18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니 우리 인생에 100% 확실한 정답이 뭐 있겠습니까 마는.. 여름휴가 시댁과 같이 가시나요란 글을 읽고 생각나는 대로 몇자 적어 보겠습니다.
저는 이제 50대 중반에 들어섰고 고향이 경상도입니다. 집안이 어려웠던 관계로 좀 힘들게 대학졸업하고 결혼도 했는데.. 결혼 후 보란듯이 한번 잘 살아보겠다고 이를 악물고 직장을 다니면서 밤에는 부업을 계속했는데 그 놈의 돈이 뭔지..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셨는지 다행히 풍족지는 많아도 돈이 조금씩 모여지더이다. 돈이 모이는 게 눈에 보이니 힘든 줄도 모르겠고.. .
어쨌든 형편이 나아지면서 저희 부부는 휴가를 받으면 항상 부모님과 같이 여행을 다녔습니다. 여행이 참 좋은 것이 적어도 며칠은 같이 지내야 하니 제 경우 부모님과 멀리 서울에 떨어져 살고 있어 평소 같으면 일년 동안 얼굴보고 얘기하는 시간을 합친 것 보다도 그 며칠간의 여행이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제주도 갔을 때 입니다. 바로 전 해에 IMF가 터져서 아직 사회가 어수선했고 당시 해외로 여행가면 욕을 바가지로 먹는 분위기라 그 해 휴가는 제주도로 갔었는데 늘 그랬듯이 제 부모님, 처부모, 형제조카들 까지 해서 거의 20명 정도… 제주도에서 며칠을 같이 보내고 마지막 날 제주공항에서 저희들은 서울로 오고 제 부모님은 고향으로 가는 비행기라 제주공항에서 헤어지게 되었지요.
헤어지기 직전에 우리 어머니, 제 손을 꼭 잡으시며 그러시데요. “00아 (제 이름) 이렇게 자식들하고 손주들까지 해서 여행오니까 너무 좋구나. 가끔 사돈들 보는 것도 좋고.. 번번이 너무 고맙다. 니가 많이 힘들겠지만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해주면 참 좋겠구나.. 그럴 수 있겠니?” 어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시는 데 어떻게 안된다 할 수 있나요 당연히 네 그럴께요 했지요. 대부분 경비는 늘 제가 부담해야 되니 적지않은 부담이긴 했지만 그래도 어머니께서 저렇게 좋아하시는데.. 여행갈 때마다 우리 어머니 어떡하든 손주 한 명이라도 더 데리고 갈려고 제 눈치를 보시곤 했지요.
마침 개인적으로 아주 친한 친구가 여행사를 운영해서 우리 가족 매번 그 친구와 같이 다녔는데.. 호주 시드니에서 면세점에 들러 쇼핑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대부분 남자들이 그렇지만 쇼핑에 관심이 없는 저는 입구 모퉁이에서 시간 죽이고 있는 데 갑자기 이 친구가 안으로 들어오라고 저를 부르는 겁니다.
“야 임마 니 진짜 마누라 잘 얻었다” “뚱딴지 같이 무슨 소리고?” 그랬더니 이 친구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니 마누리 지금 뭐 하는 지 함 잘 봐라” 보니까 아내, 우리 어머니 팔짱을 끼고 다니면서 연방 열심히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보고 있다 근데 와?” “아까부터 내가 유심히 봤는데 내가 지금까지 여행사 하면서 시부모와 같이 여행다니는 가족도 드물지만 와도 대개 며느리들 가능하면 시부모에게서 떨어져 다닐라카지 니 마누라처럼 저렇게 시종 시어머니 붙어다니는 며느리는 첨 봤다” 아닌게 아니라 그말 듣고 저도 한참을 지켜 보았는데 정말 아내 시종 그림자처럼 어머니 옆을 지키며 다니더군요. 그동안 시부모님과 같이 (물론 가끔 처부모님들도 같이 가긴 했지만..) 휴가보내는 것에 대해 불평한마디 없이 따라준 그것 하나 만도 아내에게 늘 고맙게 생각했었는데.. 새삼 아내가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께서 병원에 입원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평소에도 몸이 약하셔서 약을 달고 살면서 가끔 입원도 하시곤 해서 크게 놀라진 않았는데 그래도 혹시나 해서 급히 내려가 보니 병실에서 앉아 계시데요.
“에이 어머니 대기 아픈 줄 알았더니 말짱하네 뭐. 빨리 일어나소 마.” 늘 그랬듯 농담하듯이 그랬죠. “그래 말이다. 안와도 되는 데 뭐하러 서울서 일부러 내려와.. 미안타. 이제 나이도 들고 했으니 아프지 말고 죽어야 할낀데.. ” “아이고 할마시 또 이상한 소리 하시네. 아직 구경갈 곳이 천진데 뭘 벌써 죽는다카능교. 그래 이번에 퇴원하면 꼭 가고 싶은데 없능교? ” “아이다. 이미 마이 다녔다. 니 덕분에 외국구경도 마이 해보고. 고맙데이 OO아, 내가 니 안 낳았으면 우짤뻔 했노.. “ “마 됐심다. 빨리 퇴원해서 좋은데 놀러 갈 생각이나 하소”
그러고 다시 서울로 왔는데 이 장난 같은 대화가 마지막이 될 줄이야… 불과 며칠 뒤에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내려가는 사이에 운명을 하셨답니다. 정말 거짓말 처럼… 그렇게 쉽게, 그렇게 갑자기 돌아가실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렇게 허망하게 어머니 돌아가시고 한동안 얼마나 헤맸는지… 매일같이 술 퍼마시고 울고… 일손도 잡히지 않고 그저 인생이 허무하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솔직히 어머니로 해서 제가 느끼는 부담이 얼마나 컸던지… 우리 아버지, 평생을 직업도 없이 매일 술에 취해 툭하면 때리고 부시고… 부부간 애정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이 우리 가족에게는 너무도 무책임했던 그야말로 한량.. 그래서 어린 시절 우리 집은 가족끼리 오붓하게 외식하는 그런 기억은 아예 없고 늘 계속되는 아버지의 폭력과 가난, 그래도 한없이 착하기만 했던 울보 우리 어머니를 보면 너무나 가슴 아팠지요..
집안사정이 그렇다 보니 두 형도 공부와는 아예 담을 쌓고 늘 사고만 치고 다니고… 그나마 제가 비교적 착실하게 그래도 서울에서 대학까지 졸업했으니 무학에 한글조차 제대로 읽지 못했던 어머니는 제게 가장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겠죠. 사실 대학 졸업해도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닌데 ..
하지만 돌아가신 뒤에야 깨달았습니다. 어머니는 제게 결코 부담스런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제 인생에서 아무리 큰 시련이 와도 제가 이겨낼 수 있도록 지켜주던 크나큰 버팀목이었다는 것을.. 어머니 생전에는 정말 몰랐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오히려 부담스러워하고 불평했던 제 자신이 참 부끄러웠습니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일년반 만에 아버지,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장모님도 돌아가시고… 해서 4년 전에 저희 결혼 25주년 기념으로 정말 오랜만에 아내와 둘이서 유럽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그때 아내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oo아빠, 그동안 늘 부모님과 같이 여럿이 다니다 이렇게 둘만 오니 참 좋기는 한데 한편으론 웬지 좀 쓸쓸하네… 지금도 살아계셔서 같이 왔으면 좋을텐데.. 그때는 솔직히 부담도 되고 나이드신 분들 모시고 다니는게 힘들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정말 너무 잘했던 것 같애. 나 지금까지 살면서 잘못한 것도 많지만 가장 잘했던거 꼽으라면 우리 결혼한 거 하고 부모님과 같이 여행다닌거 두 개가 아닌가 싶어요. 우리 그때 그러길 참 잘했죠?” 아내가 한 말은 마치 평소 제 마음을 글자 한자 한자 그대로 읽는 것 같아 아내도 같은 마음이라는 게 참 고맙기도 하면서 행복했습니다.
얼마전에는 근무중에 아들에게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기분좋은 일이 생겨서 가족들 다 불러서 한턱내겠다고… 그래 알았다 했는데 장소를 잠실 롯데호텔 부페로 예약을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롯데호텔 부페에 할아버지(제 장인어른)하고 사돈어른들까지 하면 돈 백만원 가까이 우습게 깨질텐데 좀 더 싼 곳으로 하라고 강하게 얘기 했더니 마지못해 그러겠다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습니다.
한 10분이나 지났을까 아들에게 다시 전화가 왔습니다. 근데 이 자슥이 대뜸 하는 말이 “아버지 저 굉장히 섭섭합니다” 우리 아들 평소에 저에게는 물론 지 엄마한테도 말대꾸 하는 것 조차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착한 놈이라 순간 좀 당황해서 왜 그러냐고 물었습니다. “전 아버지 어머니께서 옛날 할아버지 할머니 살아계실 때 어떻게 해드렸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생활비는 말할 것도 없고 휴가때만 되면 거금 쓰시면서 모시고 다녔지요. 그렇죠? 그기에 비교하면 호텔부페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아버지 어머니는 부모님께 그렇게 하셨으면서 왜 저는 부페식사 대접도 안되나요?”
억…. 할말이 없었습니다. 찍소리 못하고 결국 그날 롯데호텔 부페에서 잘 먹고 아들과 술도 한잔 걸쳤지요. 기분 좋았습니다. 돌아오면서 아내에게 그랬지요. “우리 아들 하나는 기똥차게 키운 것 같애.. ”
우리 인생에서 진짜 행복이란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자기가 원하는 대로 편한 대로 하는 것도 행복이겠지만 어느 정도 희생이 따르면서 후에 그 일을 돌이켜볼 때 마다 가슴 짠~하게 느끼지는 기억들 또한 진짜 행복이 아닐까요. 비록 당시는 힘들고 희새이 따르더라도 말입니다.
이제 장인어른도 이미 80 후반이시니 얼마나 더 사실지는 모르겠지만 곧 그 다음은 우리 차례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