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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황진이와 서경덕
게시물ID : humorbest_30655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동물의피
추천 : 25
조회수 : 16456회
댓글수 : 3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0/10/25 01:08:21
원본글 작성시간 : 2010/10/22 11:5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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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는 용모가 출중했고 뛰어난 총명성과 민감한 예술적 재능을 두루 갖춘 여성이였습니다. 
노래뿐만 아니라 학문에도 정통하고 시(詩)에도 능했다죠. 
당대를 풍미했던 사내들은 그저 황진이의 손목이라고 잡아보려고 보채기 일쑤였습니다. 
그녀는 최고의 스타였습니다. 
"자네, 황진이하고 하룻밤 지내보았는가?" 당시 선비들은 그녀와의 풋사랑을 대단한 감투처럼 여겼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녀와 살을 맞댄 사내들은 이름 석자만 대면 알만한 사회의 저명인사들이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첫남자'만은 아니였죠.
황진이의 첫남자는 평범한 동네 총각이였습니다. 그는 황진이를 남몰래 짝사랑하다 그만 상사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마지막 이승을 떠나 가는 길목. 황진이 집을 지나는데 상여가 끔적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놀라 허둥대고 있는데 황진이가 술잔을 들고 앞으로 다가가서 관에 절을하고 자신의 속옷을 올려놓자 
그제서야 상여가 움직였다고 합니다.

이일을 계기로 영혼과 혼인을 한 몸이라 생각한 황진이는 세상 모든 남자들의 애인이 되기로 마음을 먹고 기녀 세계에 발을 들여놓습니다. 
그로부터 황진이의 자유분방한 삶은 시작되고 뭇 남성의들의 애장간을 녹입니다..


황진이의 남자는 많지만 그중 가장 유명한게 바로 지족선사와 서화담 입니다. 
10년동안 도를 닦아 '생불'이라 불리던 지족선사는 그만 황진이의 유혹에 넘어가 파계승으로 전락하는 창피를 당합니다. 
반면 당대의 대학자 화담 서경덕은 끝끝내 황진이의 유혹을 물리칩니다. 
유혹에 실패한 황진이는 서화담의 인품에 매료되어 사제사이로 남아 만남을 계속했다고 합니다.



화담 서경덕은 조선 중종 때의 유명한 도학자입니다. 
1489년에 태어난 그는 18세 때에 <대학>을 배우다가 '격물치지(格物致知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명확히 함, 혹은 자기 마음을 바로잡고 선천적인 좋은 지식을 갈고 닦음)'에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그 원리에 의지하여 학문을 연구하였다고 하죠. 
그러니 과거 시험에는 뜻이 없었기에 어머니의 명령으로 사마시(司馬試 생원과 진사를 뽑는 작은 규모의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했을 뿐 벼슬살이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오로지 도학에만 전념하였다. 
집은 극히 가난하여 며칠 동안 굶주려도 태연자약하였으며, 제자들의 학문이 진취된 것을 볼 때에는 매우 기뻐했다고 합니다.
(서경덕의 제자중 유명한 분이 토정비결을 지은 이지함 입니다) 

얼핏보면 평생을 산림 속에 은거하여 산 것을 볼 때에는 세상에 대한 뜻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정치의 잘못을 들을 때에는 개탄함을 금하지 못해 임금께 상소를 올려 잘못된 정치를 비판했다고 합다. 

 


이 서경덕이 바로 송도 부근의 성거산(聖居山)에 은둔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자연히 그의 인물됨이 인근에 자자하게 소문이 났고, 그 소문을 황진이도 들은 모양이였습니다. 
지족을 무너뜨린 기세를 몰아 황진이는 서경덕에게도 도전을 했습니다.

그녀는 지족에게 썼던 수법을 그대로 서경덕에게 옮겼습니다. 
일부러 비를 맡고 그를 찾아간거죠..
하얀 속치마 저고리, 그 위에 흘러내린 비. 비에 젖은 하얀 비단 속옷이 알몸에 밀착되어 가뜩이나 요염한 기녀의 몸을 한층 돋보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차림으로 계속 비를 맞으며 서경덕이 은거하고 있던 초당으로 들어갔습니다. 
물론 서경덕 혼자 있는 집이었다. 


그러나 서경덕은 지족과 달랐던 모양이였습니다. 
조용히 글을 읽고 있던 서경덕은 오히려 황진이를 반갑게 맞이했고, 비에 젖은 몸을 말려야 한다며 아예 황진이의 옷을 홀딱 벗긴 모양이었다. 
옷을 벗기고는 직접 물기를 닦아주는 서경덕의 자세에 오히려 황진이가 부끄러울 판이였습니다. 
그래도 황진이는 
"저도 사내인 것을……"
하며 은근히 오기를 가졌던 모양입니다. 


황진이의 몸에서 물기를 다 닦아낸 서경덕은 마른 이부자리를 펴 황진이를 눕히고는 몸을
말리라고 하고는 
그리고는 다시 꼿꼿한 자세로 글읽기를 계속했습니다. 
날은 어두워졌고 이윽고 밤이 깊었습니다. 
삼경쯤 되자 이윽고 서경덕이 황진이 옆에 누웠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이내 가볍게 코까지 골며 편안하게 꿈나라로 가버리는 서경덕. 
아침에 황진이가 눈을 떴을 때 서경덕은 태연하게 밥까지 차린 뒤 였습니다


대충 말린 옷을 입고는 부끄러워서라도 황진이는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황진이는 성거산을 다시 찾았다. 
이번엔 의관을 제대로 갖추고 음식을 장만하여 서경덕을 찾아갔습니다. 
역시 글을 읽고 있던 서경덕이 이번에도 반갑게 맞았고, 방 안에 들어선 황진이는 서경덕에게 큰절을 올리며 제자로 삼아달라는 뜻을 밝혔습니다. 
빙그레 웃는 서경덕. 이 후의 일은 상상을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야사에도 서경덕이 황진이와 놀아났다는 기록은 없다. 
둘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오직 흠모 혹은 존경이라는 단어뿐이다.

황진이가 문득 서경덕에게 이렇게 말했다. 
<송도에는 꺾을 수 없는 것이 세 가지가 있사옵니다.>

서경덕이 황진이를 쳐다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첫째가 박연폭포요, 둘째가 선생님이십니다.>

서경덕이 미소를 지으며 셋째를 물었다. 
<바로 저올시다.> 


송도에 있는 것 중 도저히 꺾을 수 없는 세 가지 혹은 가장 뛰어난 세 가지. 
송도삼절(松都三絶)은 그렇게 황진이의 입을 통해 만들어졌습니다. 
서경덕도 동감이나 하는 듯이 소리 없는 미소만 지었다고 합니다


서경덕이 아무리 도학자이고 뛰어난 사상가라고는 하나 당시의 신분으로 보면 양반이요, 그도 역시 사내였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결혼을 했고 첩까지 두었죠. 
그러니 여자를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진이와의 관계는 왜 그렇게 아름답고 순수했을까. 
이는 황진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서경덕을 대하는 그녀의 자세는 스승을 대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오로지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었지 사내로서의 서경덕이 아니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성거산에 은거하여 살던 서경덕이 가끔은 황진이를 그리워했던 모양이다. 
그가 남긴 시조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죠.





마음이 어린 후(後)이니 하난 일이 다 어리다.
만중 운산(萬重雲山)에 어내 님 오리마난,
지난 닙 부난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


이시는 대충 해석하자면 마음이 어리석고 보니 하는 일마다 모두 어리석다, 
만겹으로 구름이 둘러싸인 성거산에 어느 누가 나를 찾아오겠는가, 
그런데도 불어오는 바람결에 떨어지는 낙엽소리를 듣고 
혹시 그녀가 왔나 하는 마음에 방문을 열어본다. 



조선조의 벼슬아치나 유학자들이 임금을 생각하며 일반적으로 부르는 님이 아닙니다 
서경덕의 시조에서는 분명 여인을 그리는 남자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죠. 

서경덕이 이 시조를 부를 때에 누군가가(마당을 쓸던 하인일 수도 있고, 제자일 수도 있다)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시는 그대로 황진이에게 전해졌다. 

황진이는 어땟을까요?
그녀 역시 비록 스승으로 서경덕을 모시고는 있지만 끔찍이도 그를 사모했던 모양입니다. 
그녀는 서경덕이 부른 시조에 곧바로 화답합니다.


  



내 언제 무신(無信)하야 님을 언제 속였관대 
월침삼경(月沈三更)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난 닢 소래야 낸들 어이 하리오


내가 언제 신의도 없이 님을 속였겠는가, 
절대 그런 일이 없다, 
그런데 달 밝은 깊은 밤에 무기력하게 무엇을 해야겠다는 마음도 없다, 
즉 허전하다, 가을 바람에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까지 내가 어쩌겠는가. 


분명 서경덕의 시조 종장에 대한 답입니다. 
나도 당신이 그리운 것을, 당신이 나를 그리며 나뭇잎 소리를 내 발걸음 소리로 착각하는 것까지 내가 어쩔 수 있겠는가,
뭐 그런 뜻이죠.





이런 서화담이 황진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마치 부녀지간과도 같은 
많은 나이 차 때문이었다고 전합니다. ( 31살 정도 많아요 )
다시 말해 요즘의 원조교제 같은 것을 명예를 생명으로 아는 대쪽같은 선비로서 감히 꿈도 꿀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황진이가 찾아와도 시(詩) 놀이 이상 분위기가 되면 홀연히 자리를 뜨고 해서 명월이 애간장을 타게 했는데- 
결국 황진이는 그러한 화담선생의 야속한 마음과 그리움을 시조로 읊게 된 것입니다.

청산리벽계수(靑山裏碧溪水)야 
수이감(水易感)을 자랑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다시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여기서 "청산리벽계수(靑山裏碧溪水)"란 황진이가 선생을 격조있게 부른 별칭입니다. 
기개있는 청렴한 선비 서화담을 "푸른산속에 흐르는 맑은 계곡수"로 비유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수이감(水易感)은 물이 잘 흐르는 것을 말하므로 "청산리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의 의미는, 
"화담선생님! 선비의 기개는 높으시지만 그것이 자랑만은 아닙니다!" 하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도창해(一到滄海)는 "단숨에 넓은 바다에 도달한다"는 뜻이라 계곡 물이 바다에 이르면 돌아오지 못한다는 말이지만 
"늙어지면 다시 청춘을 찾을 수 없어요!" 하는 깊고 애달픈 비유가 담긴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명월이 만공산(滿空山) 할 때", "밝은 달빛이 온산에 가득한 이 때에" 사랑을 나누시면 어떻겠어요! 하는 말이지요. 



화담선생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대자연에 비유할 정도로 컷던 것이 황진이의 마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황진이는 화담의 제자 였지만 서경덕의 문집에는 황진이에 관한 어떠한 기록도 전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이는 양반 사대부의 문집에 기생과의 교유를 기록한 예가 없어 그럴 수 있는 문제로 
볼 수 있죠. 
그때문이 둘이 사랑을 한다는 소문이 들리기도 했습니다.. 서화담은 정말 황진이와 아무 일이 없었을까요? 
이 대목에서 황진이의 시 한편을 살펴 보면 그뜻이 얼추 나옵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여 /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 어론님 오신 날 밤이여거든 구뷔구뷔 펴리라" 
이 시는 교과서에도 나올만큼 유명하지만 은근하게 말초 시경을 건드리는 야한 시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육체적 사랑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시이기도 합니다.. 
임에 대한 그리움이 '이불'을 통해 성관계로 바뀝니다. 그리고 한번 임과 만나 이불 속으로 들어가면 영영 안나올 것 같은 보통 이상의 성욕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단순히 초절정의 그리움에 대한 노래일 수도 있고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에 대한 반항의 한 단면일 수 도 있습니다. 

실제로 황진이는 한 번 문 고기는 놓치지 않으려는 듯 엄청난 남성 편력을 보입니다. 
당대 선전관이라는 벼슬을 하고 있던 이사종과는 6년 계약으로 동거를 하기도 했고 재상의 아들 이생과는 금강산을 유람하며 사랑을 벌입니다. 

그리고 이생과 깊은 산골 안가본데 없이 두루 돌아다던 황진이는 먹을게 다 떨어지자 중에게 몸을 팔아 식량을 구해왔다고 전해져 내려옵니다. 
아직까지 현대인 사이에서도 찬성보다 반대가 더 큰 '계약결혼'을 황진이는 이미 4백년전에 몸소 행동으로 나타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랑의 노예'가 되어 무엇이든 희생하는 면모를 보여줍니다. 



이런 황진이가 서화담을 남자로서가 아니라 스승으로서 모셨다는 것은 참으로 특이한 일입니다. 
고금을 통틀어 사제지간에서 연인사이로 승화되는 경우는 종종 보이지만 연인사이가 사제지간으로 바뀌는 경우는 무척 드물기 때문이죠. 
어쩌면 황진이는 매일 제자라는 신분으로 스승의 방을 자주 들락거렸을 터인데 그때마다 불쑥불쑥 솟구치는 
서화담을 향한 애정을 어떻게 가누었는지 자못 궁금합니다. 

황진이의 유혹을 받은 서화담은 어땟을까요? 그의 유연을 보면 그의 뜻이 어렷품이 드러납니다..
"내가 죽거든 관을 쓰지말고 시체를 동문밖에 내쳐두어 개미와 벌레들이 내살을 뜯어먹게 하라" 
그것은 황진이 자신 때문에 천하의 남자가 자신들을 자애(自愛)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화담 선생은 말했습니다. 
그 '천하의 남자'들속에 서화담도 포함됐을까요? 그것은 영원한 물음표입니다.



황진이는 원래 학문적인 소질이 있었기에 화담의 학문과 도를 잘 계승 하듯 합니다..
화담의 제자중 허윤(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의 저자인 허균의 아버지)이 그가 화담에게 사사한 것으로 보아 기록에 나타나는 황진이와 
관련된 화담에 관한 내용은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 황진이는 화담에게서 인간의 참모습, 우주의 진리 등을 배우고 깨달았다. 
화담을 모시고 도학을 배운 후 그녀는 저항의 방향을 달리했다. 
황진이도 도학자가 된 것이다. 
화담의 도학은 '기일원론'으로 모든 사물이 기작용에 의해 생성. 발전한다는 것이다. 
황진이가 이를 터득할 무렵 화담이 세상을 떠났다.}
(진이 27세 때 57년을 살다 1546년에 감)


그녀는 자신의 스승이자 마지막인 정인을 잃은 것입니다. 
화담 선생은 전국의 명산을 돌아다닌 적이 있다. 
그녀는 화담의 발이 닿았던 곳, 곧 금강산. 속리산. 지리산을 찾아다녔습니다. 
화담이 내디딘 발자취를 따라 운수행각을 한 것이죠. 


황진이는 세상의 모든 명리를 끊고 세상의 이목도 피해가면서 지팡이와 짚신을 벗 삼아 전국을 떠돌아 다녔습니다. 
그리고 유랑중 서화담의 화신을 만나게 됩니다..

토정 이지함이 남긴 기록에도 이지함은 화담을 따라 전국을 순회하며 학문을 쌓았다고 나오는데 이때가 화담이 죽은후 1년인 1547년 이였다고 합니다..
당시 이지함은 산에서 도를 공부하고 있었기에 스승이 죽었는지 몰랐다고 합니다..
이지함과 다니던 화담은 몸이 엄청 빠르고 건장 했다고 나옵니다..

순회가 끝나던 날 화담은 이것으로 나의 인연중 대의적 인연을 정리 했으니 인의적 인연을 만나러 가겠다고 말하며 그자리에서 사라지자
이지함은 스승이 돌아가신걸 알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의적 인연은 황진이를 얘기 하는 겁니다..

결국 황진이는 서화담이 죽어서야 그와의 인연을 이었다고 합니다..
그후  그녀는 전국을 돌아다니면 도와 명상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세상 사람이 알아보지 못하는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결국 화담의 곁으로 간 것이죠..


[출처] 루리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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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이니 너무 역사고증적으로 파고 드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신건강에 무지 해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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