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오유를 하는건 아니지만 가끔 들릴적이면 항상 고게를 들어옵니다. 정말 다양한 세상을 볼 수 있는 일종의 통로 같거든요. 그러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돌아보곤 합니다. 모두 다 다르지만 그래도 크게 보면 하나하나 묶이는걸 보면 허투루 살진 않았구나 싶습니다..... 오늘도 그런 생각이 드네요......... 그래서 좀 끄적거려보고 싶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는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았던 것 같다. 남자들 사이 벌어지는 소위 서열다툼도 중1때의 사건이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과장된게 도움이 됐다면 됐을까. 아니면 속한 반 아이들이 다들 착했던 걸까. 중1부터 고3까지 이어지는 6년이란 시간동안 큰 주먹다짐이 없음에도 반에서 싸움을 가장 잘하는 아이가 되어있었고, 잘나간다는 애들과도 부딪침없이 지내고 범생이류 애들과도 스스럼없이 지냈었다.
중3 고입시험. 당시 내가 살던 곳은 평준화는 되었으나 고입시험으로 인문계와 실업계를 나누었다. 체육실기 점수를 제외한 각 문항당 1점. 180문항 180점만점으로 94점 이상 받아야 인문계 진학이 가능했다. 내가 받은 점수는 97점. 턱걸이라 말해도 크게 무리는 없었으리라.
중학교때부터 수학만큼은 자신있었다. 크게 많은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는 과목. 그래서 수학에 메리트를 느꼈던 것 같다. 다른 과목들은 젬병이었지만 수학만큼은 독보적이었다. 중학교 3년 동안 치룬 중간,기말 시험 총 12번의 수학 시험에서 2문제만 틀렸으니까. 그중 한문제는 그 후 세월이 강산을 변화시키고도 남을만큼 지났음에도 또렷이 기억하는거 보면 특이하긴 특이한 놈이었던 것 같다.
잘하는건 두가지 뿐이었다. 수학, 체육. 다른 과목들은 잘받으면 80점대를 받고, 지금 기억에 최저점을 받은 점수는 28점이었던걸로 기억한다. 기본 교과서조차 제쳐두고 있었으니 할말 다한거 같기도 하고.... 수학은 온갖 시중에 나온 어려운 문제집들을 섭렵했었다. 어쩌면 그래서 다른 과목 공부할 시간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당시엔 그런 어려운 수학 문제를 푸는게 더 재밌었다. 그래서 꽤나 특이했던 놈이라고 지금의 친구들도 회고한다.
남들과 다를바 없는 평범한 고등학교 생활. 그나마 조금 달랐다면 우연치 않게 여자친구를 사귀게 되었다는 점?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만난 그 아이만큼 나와 편했던 여자는 없었다. 착실하게 고3이 되었을 때. 나에게도 대입 스트레스가 찾아왔다. 꿈과 이상은 높은데 현실에 마주한 성적표는 꿈에 비할바 못되는 초라한 숫자들. 그렇게 나는 대입 시험을 마치고 대학에 원서조차 넣지 않음으로써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방황의 시기였다. 대충 공부해도 인문계 갔고, 그냥 있어도 또래들은 나를 추켜세워줬었다. 오만한 객기였을까. 그런 나에게 대입실패는 처절한 비참함을 안겨줬다. 대인기피증도 생겼었다. 주위에선 모두들 날 비웃는 것만 같았다. 그런 방황의 20살 때 내가 택한건 스스로를 혹사시키는 쪽이었다.
겉으로는 경험하기 위한다고 하면서 여러 막일을 전전하고, 학창시절 손에도 들어보지 않았던 담배에 라이터를 켜고, 술은 마셨다 하면 다음날 필름은 여지없이 끊겼다.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하고, 사기당하고 온갖 사회의 어두운 면들을 대하면서 황폐화 되어갔었다. 하지만 사람이란게 그토록 약했던 걸까. 방황의 시간이 5개월쯤 됐을 때 몸은 적신호를 알렸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을만큼 무너져 내렸다. 대학에 간 친구들은 시험을 친다, 애인이 생겼다 하는 동안 나는 나락으로 빠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색'에 빠지지 않은건 내가 생각해도 신기하다. 아마도 지나친 패배감이 성욕마저 없애버렸던걸게다. 우울증 증상도 보였다. 눈꺼풀이 무거워져 누울 때면 그냥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며칠간 했었으니까.
그러던 중 일찍 군대로 간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한동안 군대 얘기로 떠들어대던 친구가 나지막히 말을 꺼냈다. 이제 헛짓거리 할만큼 했을테니 대학 가자고. 그리고 그날 홀로 단칸방에 독립해서 벽을 마주하고 밥을 먹던 나는 대성통곡하며 소리내 울었다. 그런 친구가 고마웠다. 지금까지 나를 지켜보고 있었고 이해해주고 있었다는 뜻이었을테니까...
한동안 눈물 마를날 없으시던 부모님께 다시금 대입시험을 치루겠다는 말을 꺼냈다. 그리고 원서를 썼다. 이상하리만큼 그 이후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뭔가 오늘을 준비하고 내일을 준비하는 목적이 있다는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냉혹한 현실의 벽에 막혔다. 이번엔 원서 3패를 했다. 그 어느곳도 나를 받아주지 않았다. 또다시 맛보는 쓰디쓴 패배감. 군대를 갈까. 아니면 기술이라도 배울까. 이런저런 고민들을 하던 때에 군대로 향하던 친구들은 모두들 나에게 제대로 1년 준비해서 대학가라는 말뿐이었다. 그놈에 대학이 뭐그리 대수였을까만은......
그리고 대학에 입학했다. 동기들은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어렸다. 달달한 대학의 자유로움은 내가 하고싶은 것들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방학이 되면 배낭메고 어디론가 여행을 떠났다. 혼자면 혼자인데로 그냥 떠났다. 그렇게 온갖 여행들을 했었다. 기차여행을 하기도 했고, 자전거 여행을 하기도 하고, 무전여행을 하기도 하고..... 군대는 뒤로 미루었다. 사랑도 하게됐다. 가랑비 젖듯 서서히 들어온 그 사랑. 그전까지는 사랑이라 부르기엔 너무 가벼웠다는 느낌이 들만큼 크고 강렬했고, 그만큼 마음 고생을 하기도 했다.
대학 오기전 수많은 경험들이 삶의 지표를 열어줬던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면서 답해주길 원했다. 인생, 진로, 연애등등 가릴 것 없었다. 대학생활을 통틀어 즐겁게 웃고 떠드는 술자리와 고민상담 술자리로 나눈다면 3:7정도일게다. 나에게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밝힌 사람도 2명이 있었다. 한명은 게이, 한명은 레즈비언. 그들의 삶 역시 들어보면 구구절절하고 힘차게 살아왔음이 느껴졌다.
한번은 물어본적이 있다. 무엇때문에 나에게 사람들이 그런 말들을 꺼낼 수 있는걸까하고....... 친한 누나가 해준 말. '너에겐 뭔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이 한마디는 지금도 큰 힘이 되어 날 지탱하고 있다.
서서히 대학졸업이 가까워지고 새로운 목표가 하나 생겼다. 고시를 치루고 합격하는 것. 답답한 고시원 생활을 하기도 했다. 잠들 때면 항상 군대 생각에 밤잠 설치곤 했다. 배수진을 친 느낌. 시험에서 미끄러지면 그대로 나는 군대로 입대할테고 2년이란 시간이 지나가버릴게 분명했다.
시험일이 다가 올때마다 긴장감은 극에 달했고, 예민해졌다. 시험당일. 그 많은 수험생들 중에 비장함만은 둘째가라면 서러웠을 것 같다. 나이는 나이대로 먹어서 대학 졸업을 미룰 수도 없이 강제로 떠밀려 졸업을 하고 입영연기 마지막 1년을 쓰면서 앉게된 시험장 의자는 왜그리도 딱딱했는지 모른다.
시험이 끝나고 홀로 자취방에 돌아와서 책장에 꽂힌 여러 책들을 보며, 다시 한번 소리내 울었다. 무엇때문인진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북받쳐 올라왔다. 묘했다. 머리는 내가 왜울고 있는거지? 하면서도 입은 소리를 내고 있었고 눈은 울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그 시험에서 합격했다. 뭔가 모를 긴 터널을 빠져나온 듯했다.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되었고, 군대는 다른 방식으로 가게 되었다. 인생의 항로가 달라져있다. 20대초반을 방황했고, 20대 중반을 즐기며 보냈다. 20대 후반에 거시적인 '인생'을 돌아본다는게 참으로 우습지만, 이루 말로 다 하지 못할 굴곡 있는 삶이었는진 몰라도 카페에 앉아 커피 한잔 마시며 돌아보면 쓴웃음 입가에 머무는 20대였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는 지금도, 앞으로도 '나의 20대는 진짜 유쾌했다'고 말하고 있고, 말할 것이다.
고게에 들어와서 많이 배우고도 갑니다. 많이 경험했다 해도 아직 세상은 넓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내가 느끼지 못한 것들 그리고 내가 생각치 못한 것들을 일깨우게 해줍니다. 왠지 갑자기 글을 적고 싶어졌네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