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경찰의 불법 약재·약물 일제단속 때 약사법 위반으로 붙잡혀 10일 현재 인천 부평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는 서옥란씨(47세).
서울역 지하차도에서 좌판을 벌이고 중국제 약품류를 판매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서씨의 증조부는 독립운동가 서일 장군이다. 청산리전투 이듬해인 1921년 일제의 만행에 비분강개해 범민족적 단결을 호소하며 자결한 서장군은 청산리전투 등에서 일본군을 떨게 만들었던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군단의 총재였다.
서씨는 구속되기 며칠 전에 서울역으로 찾아간 기자에게 그의 가족사를 털어놓았다.
서씨가 어렸을 때 들은 얘기에 따르면 서일 장군 집안은 1943년쯤 일본군이 마을로 쳐들어왔을 때 몰살당했다고 한다. 일본군은 사람들을 모두 한집에 몰아넣고 총으로 쏴 죽였으며, 서일 장군의 부친도 이때 총살당했다고. 그 당시 재산도 모두 빼앗겼는데, 심지어 집에 있던 유품까지 모두 불태워 서일 장군 사진 한장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서일 장군의 아들 서윤제씨도 42년 임오교변 때 일본경찰에 체포돼 44년까지 목단강 액하감옥에서 옥살이를 했다.
"중국에서 살다가 한국에 정착하고 난 뒤 놀란 것은 친일했던 사람들이 떵떵거리며 잘살고 있다는 얘기였어요. 중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는데, 왜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루 벌어 근근이 먹고 사는 서씨에게 '독립군의 증손녀'라는 사실은 거추장스러운 장식품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다.
서씨는 지난 93년 먼저 영구귀국한 아버지 초청으로 2000년 3월 한국땅을 처음 밟을 때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중국 하얼빈시에 있을 때 한국에 가면 잘살 수 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취직이 여의치 않자 어머니가 마련한 좌판에서 함께 일을 하기 시작했다.
서씨의 거주지는 서울 서대문구 아현동의 전세 3,500만원짜리 반지하방. 아버지와 어머니, 남편, 그리고 두딸 등 모두 여섯식구가 산다. 첫째딸이 이번에 모 여대에 합격했고, 둘째도 여고에 진학했다. 아버지는 치매에 걸려 몇차례 보훈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았지만 병세가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
기자가 만났을 때 서씨는 중국 보따리상을 통해 가져온 중국산 약재와 약물을 판매하고 있었다. 서씨는 "불법 약물 판매로 두번 불구속 기소된 적이 있고, 벌금을 물고 나왔다"고 했다. 하지만 지하도 좌판 일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국가에서 독립유공자에게 주는 연금만으로는 여섯식구가 살아가기에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기자를 만난 며칠 뒤 서씨는 다시 경찰에 잡혀갔고 이번에는 벌금을 물고 나올 정도가 아니라 '마약 판매책'으로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기자가 만났을 때는 근근이 살아가는 독립유공자 후손의 모습이었으나, 불과 며칠 만에 마약판매책이라는 무거운 범법자가 된 것이다.
서씨는 죄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서씨가 한 말 가운데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구절이 있다.
"조국이 우리 독립군 자식들에게 해준 게 뭐가 있습니까. 우리에게 남겨준 것은 가난뿐이에요. 먹고살려고 이렇게 발버둥치는데, 이제 와서 친일청산을 한다고 하니…. 정말 이상한 나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