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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원춘과 끔찍한 중국 인육시장
게시물ID : panic_3096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오름과내림
추천 : 4
조회수 : 9484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2/06/15 23:08:07
수원지법 제11형사부(이동훈 부장판사)이 15일 ‘살인 및 사체 훼손 혐의 등’으로 기소된 오원춘에 대해 사형을 선고하면서 온라인 게시판 인기검색어에 ‘오원춘’이 1순위에 올랐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시신의 살점을 365점 도려낸 잔혹성과 엽기성을 고려했을 때 오 씨가 피해자를 강간하려 납치했다기보다는 사체 인육을 제공하려는 목적이 상당하다고 볼 수 있다”고 판시했다. 재판부 역시 정황상으로 ‘인육제공을 위한 살인’을 인정한 판결로 다시한번 중국의 ‘인육의 문화’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동서양을 통틀어 고대로부터 인육(카니발)은 문명 이전에 신에게 바치는 제사의식을 통해 이루어져 오거나 극한상황에서 목숨을 연명하려고 시신에 손을 대는 형태로 나타났다.

중국에서 식인의 풍습이 처음 기록된 것은 굴원의 ‘초사’다. 초사의 “하나라 걸왕은 언제나 도리에 어긋나/드디어 재앙을 만났고/신임금은 인육(人肉)을 소금에 절였기에”라는 구절을 보면 이때 이미 사람을 먹는 관습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사마천의 ‘사기’는 은나라 마지막 임금인 주왕이 신하들을 ‘해(인체를 잘게 썰어 누룩과 소금에 절인 고기)’, ‘포(脯 인체를 저며서 말린 고기)’, ‘자(炙 인체를 구운 고기)’ 등 세가지 형태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관습으로서의 인육이 공공연히 ‘시장형태’로 자리잡은 것은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나서 생겨났다고 한다. 같은 문화권인 조선, 일본, 몽골에도 없었으며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기이한 문화라 할 수 있다.

중국 인육의 역사에서 가장 특이한 점은 극심한 기근이 아닌 먹을 것이 풍부한 상황에서도 인육을 즐겨 먹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춘추시대 공자는 ‘해’라고 불리는 사람고기 젓갈 없이는 밥을 먹지 못했는데, 제자 자로가 위나라 신하로 있다가 왕위다툼에 휘말려 죽임을 당해 ‘해’로 만들어져 자신의 식탁에 오르자 다시는 ‘해’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근대로 넘어와서는 중국 국공내전 기간인 1948년 5월부터 10월 사이 창춘의 시민들이 기아에 허덕이자 거리에서 인육을 파는 상점이 등장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60년대말 중국 문화대혁명 기간에 광서성에서 홍위병들이 137명의 반혁명분자를 잡아서 식인잔치를 열어 충성을 보였다는 기사가 뉴욕타임스에 대서 특필되기도 한 것을 보면 식인의 역사가 현대까지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중국 내몽골 자치구 태생인 오원춘은 2007년 한국에 입국한 뒤 막노동을 하면서 중국을 8차례나 드나든 것으로 밝혀졌다. 십원 한 푼이 아까워 벌벌 떨었다는 그가 휴대폰을 4개나 사용해가면서 중국을 오간 경위와 “왜 시신을 365점으로 도려냈는지”에 대해서는 속 시원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인체를 잔인하게 조각 낸 것이 “중국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즐기던 ‘해(인체를 잘게 썰어 누룩과 소금에 절인 고기)’를 만들기 위한 작업이 아니었나”하는 의심이 계속되고 있다. 그만큼 보통사람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곳이 바로 중국이기 때문이다.

유가족은 물론 재판부 역시 인육제공을 위한 살인에 무게를 두고 있는 만큼 더욱 더 철저한 추가 조사가 필요한 시점이다. 지구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풍년이 든 해에도 인육을 즐겼다”는 중국의 인육의 역사를 곰곰이 파헤치면 해결의 실마리가 나올 지도 모를 일이다.

http://news.nate.com/view/20120615n16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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