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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 사람, 멍청한 사회
게시물ID : phil_310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타자기사
추천 : 2
조회수 : 930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2/07/02 09:30:12
요즘 사람들은 정말 똑똑합니다. 

여기 철학 게시판만 봐도 자신의 직업과 무관하게 지적인 사람들이 수두룩 빡빡하지요.

세대가 거듭되면 될수록 한 사회의 구성원에게 주어지는 과제는 증가하고 생존을 위해 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최근 세대가 그들의 선조보다 더 우수한 지적, 기능적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하지만 한 사회가 부과하는 과제를 수월하게 이행하기 위해 요청되는 지적인 역량과 최근 우리 세대가 지니게 된 지적인 능력은 구분됩니다. 

생존을 위해 사회가 부과하는 과제 수행을 노동이라고 한다면, 전자의 지적 능력은 노동과 직결되는 반면 후자는 이와 무관하거나 간접적으로 연관됩니다. 

따라서 지적 능력은 두 가지 경로의 계보를 지닙니다. 

첫 번째 지성은 노동에 복무함으로써 사회의 생존과 안전을 지지하고, 두 번째 지성은 노동과 무관하거나 심지어 비판적이기 때문에 극단적인 경우 한 사회의 존립을 위협할 수도 있습니다. 

전자를 공동체적 지성이라 하고, 후자를 비-공동체적 지성이라고 한다면, 예컨대 소크라테스의 지성은 후자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지요.

그는 아테네 청년들을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됐습니다. 

음미되지 않는 삶, 엄밀히 말하자면 의심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다지요?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아무런 의심없이 성실하게 살았다면 소크라테스의 인생은 평탄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공동체의 코드를 의심했고, 청년들에게 이를 부추키다 법정에 기소됐습니다.

한 공동체의 진리가 다른 공동체에서는 비-진리인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때 어떤 공동체에 소속됐다는 이유로 그 공동체의 코드를 아무런 의심 없이 내면화하여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의 삶이 아니라 동물, 혹은 로봇과 같은 무의미한 기계적 삶이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청년들에게 공동체를 의심하라고 부추겼습니다.

소크라테스에게 인간적 삶이란 주체적으로 판단함으로써, 삶의 기준을 강요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기획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공동체적 지성은 공동체를 위협함으로써 그 구성원들의 생존과 안전을 박탈할 수 있습니다. 

결국 공동체적 지성은 생존과 안전을 보장함으로써 비-인간(동물,로봇)의 삶을 지지하고, 비-공동체적 지성은 인간적 삶을 보장함으로써 직접적인 생존과 안전을 해치는 위험을 감수합니다.   

사상가란 공동체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다 이방인으로 추방되어 생존을 박탈당하는 사람입니다. 

노동자의 지성이 공동체적이라면 사상가의 지성은 비-공동체적입니다. 

인간과 동물을 비교하면 공동체의 의미가 좀 더 명확해집니다. 

인간은 상대적으로 동물에 비해 빈약한 본능을 지니고 태어납니다. 

즉 동물은 인간과 달리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따로 고민할 필요가 없지요.

그 빵빵한 본능에 준해서 그저 살아가면 됩니다. 

반면 빈약한 본능의 인간은 삶의 방식이 따로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이를 스스로 만들어내야 합니다. 

이것을 만드는데 실패하면 생존이 위태로워집니다.

주어져 있지 않은 삶의 방식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이 쉽지 않은 인간의 과제를 대행해주는 것이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공동체에 귀속되면 삶의 방식을 기획해야 한다는 과제를 떠넘길 수 있고, 손쉽게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공동체는 동물의 본능을 대행해줍니다. 

공동체와의 결속이 강하면 강할수록 인간은 동물적 삶의 수준으로 전락하지만 안전을 획득하게 되기 때문에 '배부른 돼지'가 될 수도 있지요.

사상가란 빈약한 본능의 인간이 스스로 삶의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는 숙명을 공동체에 떠넘기지 않으려고 저항하는 사람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요즘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모두 지적입니다. 

철학 게시판에 댓글 하나 다는 것 역시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지적 역량을 요청합니다.

한편 공동체는 세대를 거듭할수록 축적된 지식을 구성원들에게 전수하기 때문에 어느 시대이건 간에 "요즘 사람들은" 항상 이전 세대보다 지적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지성은 이러한 공동체적 지성이 아니라 사상가의 지성에 더 가깝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예전처럼 삶의 방향을 실질적으로 설정해줄 공동체가 부재하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를 자처하는 단체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이것들이 예전만큼 힘을 발휘하지는 못합니다. 

가족 마저도 예전만큼 개인의 삶에 개입할 수 없습니다. 

공동체는 해체됐고 우리는 이방인이 됐습니다. 

예전에 동물의 본능을 대행해주던 강력한 공동체가 존재했던 시절 사상가는 공동체를 의심함으로써 삶의 방향을 스스로 설정하려 했고 이때문에 공동체의 이방인이 됐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겐 사상가와 달리 의심해야할 강력한 공동체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상가와 동일하게 삶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사상가가 능동적으로 이방인임을 자처했다면 우리는 어떤한 공동체에도 소속되지 않은 이방인이기 때문에 사상가가 될 수 밖에 없지요.

사상가들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인간의 권리에 대한 공동체의 강탈에 대항하다 이방인이 되었다면 지금 우리는 삶을 의탁할 공동체가 부재하기 때문에 스스로 삶을 결정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사상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공동체적 인간에게 삶은 지극히 명확합니다. 

공동체의 코드에 따라 몇 살이 되면 성년식을 하고, 시기가 되면 결혼을 하고 직업을 갖고 어떤 방식으로 생각해야 하는 등등의 것들이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동체가 해체된 우리에게 삶은 매우 혼란스럽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어떤 것도 쉽게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의심합니다. 

의심하기 때문에 우리는 사상가적으로 사유하고 비-공동체적 지성을 수동적으로 개발시킬 수 밖에 없습니다. 

의심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소크라테스의 꿈은 드디어 실현됐습니다. 

오늘의 유머 철학 게시판에는 공동체로 수렴되는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라 각자 자신의 삶을 설계하는 다양한 사상가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모두가 사상가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 꿈의 실현 속에 소크라테스가 장담한 인간적 삶의 유토피아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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