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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정치집단은 어떻게 한국을 신자유주의 국가로 만들었는가?
게시물ID : sisa_21248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풍월을읊는개
추천 : 1
조회수 : 423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2/07/05 12:17:59
딴지일보 펌. <br>
http://www.ddanzi.com/blog/archives/91226

여-야 정치집단은 어떻게 한국을 신자유주의 국가로 만들었는가?
 
1. IMF 외환위기 원인과 터무니 없는 오진
2. 한국은 어떻게 신자유주의 국가가 되었나
3. 김영삼 정부의 한국 경제 수술과 외환위기.
4. '민주 정부'는 어떻게 신자유주의를 확산시켰나

 


<1. IMF 외환위기 원인과 터무니 없는 오진>
 

앞선 글에서 지적한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적 병폐로 지적되는 저성장, 저투자, 양극화가 전면적으로 확산된 결정적 계기로 IMF 외환위기를 드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그 사태를 야기한 직접적인 책임이 김영삼 정부에 있음도 분명하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질문, IMF 외환위기가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터무니없는 진단만이 난무했다.


‘모럴 해저드’, ‘글로벌 스탠더드’. 외환위기를 겪을 당시 유행어처럼 번졌던 용어였다. 이 말에 그 모든 원인을 함축시켰다. 즉, ‘글로벌 스탠더드’를 지키지 않고 ‘모럴 해저드’에 빠졌기 때문에 이 사태를 맞이했다는 말이다.


정경유착, 부정부패, 무모한 투자, 관치 경제 등 우리 사회에 있는 모든 관행과 제도들이 막연하게 외환 위기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이런 지적에는 뉴욕 월가의 언론인과 경제학자를 비롯해 국내에서도 여권과 야권의 이견도 없었고, 보수와 진보의 차이도 없었으며, 조선일보에서 한겨레까지 간만에 의견 일치를 보이며 성토까지 했었다. 그 결과 자학사관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내탓이오 운동마저 전개될 양상이었다.


그러나 이런 진단은 사실 국제 투기 금융자본, 시장자유주의 정책의 책임을 스스로에게 뒤집어씌우는 어처구니없는 논리가 아닐 수 없다.


한국 경제에 대해 ‘불투명한 회계, 부정부패, 정경유착’을 운운하며 모럴헤저드를 지적하는 미국을 보노라면, 마치 마피아가 동네 골목대장에게 준법정신을 훈계하는 모습이 연상될 정도로 어처구니가 없다.


미국은 우리가 외환위기를 맞은지 얼마 안 지난 시기에, 엔론이라는 기업이 수조 원대에 달하는 회계부정과 실체도 없는 금융상품들로 인해 전대미문의 부도사태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것이 발각되어 자살한 경영자는 부시의 정치입문을 적극 후원하며 부시와 엄청난 커넥션을 맺었던 자였으며, 그 사태를 청문회하는 정치인들 중, 그들과 연관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런 천문학적인 부정 속에도 처벌받은 사람은 단 한 명뿐. 정치인들 중 책임지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 나라는 로비법으로 정경유착이 아예 제도화된 나라다. 아니 정경유착 정도가 아니라, 부시나 부통령 딕 체니의 사례, 투기금융회사 임원이 재무부장관이 되고, 또 그 관료가 다시 투기금융회사 임원이 되는 회전문인사에서 보듯이, 군산+정경 슈퍼 복합체로 작동하고 있다.


모럴 해저드를 말하는가? 2008년 금융위기 때 보여준 뉴욕 월가의 모습은 도덕적 해이 정도가 아니라 그 도덕적 파산이라 이름 붙여야 될 정도였다. 수석 펀드매니저들의 수백억씩의 천문학적 보너스 잔치. CEO와 직원들간의 황당한 임금격차.


평소에는 작은 정부를 외치며 정부의 개입을 극도로 혐오하던 이들이 위기 때는 정부에 잽싸게 의존하는 모습. 수익은 사적으로 점유하고, 위기는 공공에게 전가하는 그들의 몰염치한 행각. 심지어는 세금으로 구제금융을 받아서 겨우 회생한 금융기관이 바로 그 돈으로 또다시 보너스 잔치를 벌이고, 전대미문의 금융위기를 야기시킨 투기상품을 다시 개발하는 행태는 도덕적 금치산자가 아니고서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그들은 외환위기 당시 한국의 ‘모럴 해저드’로 인해 국제자본이 이탈한다고 했는데, 그로부터 몇 년 후, BRIC's로 일컬어지는 신흥시장, 즉 브라질, 인도, 중국 등의 나라에 묻지마 투자를 하였다.


그런데 그 나라들은 한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관치경제는 물론이거니와 부정부패의 관행이 엄청나게 후진 나라다. 모럴 해저드로 한국에서의 자본이탈과 외환위기 이유를 대던 자들이 그런 나라에 대대적으로 몰려드는 것을 보면 다음의 대화를 나누는 정신분열적 증세를 연상케 한다.
 

“자네, 맥주 한 잔 하겠나?”
“아니, 운전해야 되어서 사양하겠네. 대신 위스키 한 병만 마시고 가지.”
 

그런데, 이런 터무니없는 자기파멸적 진단은 비단 국제투기자본과 그 정치적 대리인인 미재무부와 IMF 관료들로부터 나온 것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에 오염된 한국의 관료 및 여야정치권 모두와 심지어 시민운동 진영에까지 공유된 믿음이었다.

 

 

<<2. 한국은 어떻게 신자유주의 국가가 되었나>>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지주형, 책세상)이라는 책을 보면, 한국에서 신자유주의라는 말이 회자된 것은 외환위기 이후부터였지만, 그 이데올로기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훨씬 오래 전 전두환 집권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는 말로 유명한 전두환의 경제참모 김재익 청와대 수석이 대표적인 인물인데, 70년대부터 미국에서 유학하고 온 이들 신흥관료 그룹층은 기존 관료들의 경제 철학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즉, 기존 관료들은 일제 강점기에 교육을 받고 국내 유치산업 보호를 주장한 독일 리스트나 정부 재정지출을 통한 경기 조절을 주장한 케인스주의에 익숙했었다.

 
남덕우 등 60년대에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온 교수들로 충원된 경제기획원 관료들 역시 그 이전부터 심정적 시장주의자들이었지만, 박정희의 강력한 근대화와 산업화 정책 드라이브에 압도당해 시장주의적 정책을 전면에 내세울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 70년대 이후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온 이들은 하이에크, 프리드먼 등 신고전학파의 이론에 깊이 심취된 시장근본주의자들이었다. 강경식, 김기호, 김재익 등 경제기획원 관료들이 특히 그러했는데, 강경식은 경제기획원 공무원들을 미국으로 유학보내는 제도까지 마련할 정도였다.
 

이런 미국 유학파들이 대거 포진되어 있던 한국개발연구원은 정부 내 신자유주의자들의 본거지가 되다시피했다. 

강경식, 김재익은 당시 경제기획원 내에서도 아주 완강한 시장주의자였다, “수출보다는 수입해야 한다”, “세율은 낮추고 세수는 확장해야 한다” 등의 주장으로 주변 관료로부터 ‘정신나간 친구’라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들은 박정희 정권 말기 경제화 안정시책으로 ‘금융자율화, 통화량 감소, 가격통제 해제, 중화학공업 투자 중지, 수출금융 축소, 수입자유화 등을 내세웠으나, 관계부처의 반발과 박정희의 통치철학에 반한 내용이라 그 실행 여부는 불확실했다.
 

그러나 박정희가 사망하고 전두환이 집권하면서 정부 내의 신자유주의적 경제처방과 이념은 급속히 확산되었다. 전두환은 김재익에게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는 말까지 해가며 그에게 경제정책의 전권을 부여했다. 철저한 시장주의자였던 김재익은 자신과 시장주의를 공유했던 강경식을 재무장관으로 천거하여 은행 민영화, 외자도입 자율화, 금융자율화, 관세제도 개정 등 수입자유화를 추진했다. 그는 또, 신자유주의의 주요 교리중 하나인 ‘작은 정부’의 신념 또한 확고했다.
 

전두환의 경제 교사였던 김재익은 '단과반 과외 강사'로 사공일, 김기환 등을 천거하였고, 이들은 후에 경제수석과 재무장관까지 올랐다. 또 김기환은 훗날 IMF 외환위기의 협상을 주도하고, 노무현 정권때는 '동북아금융허브'론을 기획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철두철미한 시장주의자들에 대한 정부 내 반발도 없지 않았다. 수입개방을 주도했던 강경식과 김기환은 전두환 정부 내의 실세였던 허화평, 허삼수로부터 'CIA 앞잡이'라는 비난까지 들을 정도였지만 그 시장주의자들이 관료계를 장악한 것은 이미 대세로 기울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1983년 북한의 아웅산 테러 사건으로 김재익 등 핵심 경제관료들이 대거 사망함으로서, 시장주의를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이들의 급진적인 신자유주의적 개혁은 어느 정도 동력을 상실했다.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핵심인 금융자유화는 좌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는 이들 관료엘리트들의 지배이데올로기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김재익 등 미국 유학파 관료들은 70년대 중반 미국에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전적으로 꽃피던 시기에 공부하고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들 관료엘리트들의 눈에는 박정희식 발전국가 모델은 매우 낙후된 이데올로기로 보였다. 더구나 군부통치에 대한 반감으로 그런 모델은 같은 쌍둥이로 인식되기까지 했다.
 

김재익의 대학생 아들이 독재정권에 협력한다고 항의하자, 그는 "경제의 개방화와 국제화는 결국 독재체제를 어렵게 하고 시장경제가 자리잡으면 정치의 민주화는 자연히 따라온다" 고 타일렀다고 한다.
 

그가 주변의 만류를 무릅쓰고 신군부 정권에 들어가 협력한 것은 민주화를 위한 선의로서의 동기가 가장 컸다. 그리고 김재익은 우리나라의 발전 모델로 염두에 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이 아니라 스웨덴 같은 복지국가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는 복지국가라는 목표를 위해 철저한 시장주의를 수단으로 강구한 것이지만, 그 당시로서의 그는 신자유주의가 이처럼 복지체제뿐만 아니라 국가 산업 경제 체제를 철저히 파괴하는 흡혈귀로 작동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유학파 관료출신들이 대거 포진되었다 하더라도, 80년대 전반적으로 본다면 박정희 정권 시기 경제발전 전략으로서의 발전국가 모델이 붕괴된 것은 아니었다. 장하준의 평가에 따르면 여전히 많은 관료들이 발전주의에 대해 본능적 애착심을 가졌고, 정책방향 전반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견해가 특정영역의 발전주의적 정책들과 어색하게 섞여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진심으로 신자유주의적으로 전향하여 때로는 교조적이기조차 했던 관료들도 많았다. 경제가 복잡해지기 때문에 경제계획은 더이상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이유로, 국가의 근본적인 배제를 요구하는 경제기획원의 관료들도 자주 볼 수 있었다.


경제기획원이라는 부서야말로, 박정희 시대 국가 경제 계획의 근간을 이룬 부서인데, 역설적이게도 이 부서가 신자유주의의 본거지가 되었던 것이고, 급기야는 자신들의 부서 폐지를 주장하기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미국유학파 출신 관료들뿐만 아니라 80년대에서 90년대 전반기 미국에서 교육을 마치고 돌아온 경제학자들도 대거 양산되면서, 이러한 경제철학이 학계에도 급증하면서 주류로 자리잡았을 공산도 크다.
 

장하준에 따르면, 1987년과 95년 사이 미국 대학 내 경제학과의 박사학위자 리스트에서 한국인 이름을 갖고 있는 비율은 무려 10% 가까이 되었다고 한다.(8040명 중 776명) 한국인구가 세계인구의 1%도 안 되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숫자다. 한국에서 신자유주의가 급속하게 발흥하게 된 배경에는 이와 같이 관계와 학계에 포진해 있던 경제 엘리트들의 인적 요건이 이런 사정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한편으로 한국 경제를 이끌던 재벌 세력 역시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에 급격히 기울었는데, 80년대말 들어 김우중의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 등의 베스트셀러가 상징하는 바와 같이, 반도체와 자동차 등 선진국의 산업분야로 일컬어지는 분야에서 어느 정도 경쟁력을 갖추면서, 국제자본 시장에서 인정을 받게 되니까, 그들에게 국가는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어버렸다. 9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재벌들은 국가에 경제관리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전경련이 설립한 '자유기업원'이라는 연구기관에서는 외교부와 국방부를 제외한 모든 정부부처를 폐지하고 공무원 90% 감축이라는 울트라 신자유주의적 정책보고서를 발간하기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80년대 호황 속에서 소비력을 갖춘 중산층 전반적인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다. 개발경제 시대 때 애국심에 호소하는 절약과 국산품 소비의 미덕을 기꺼이 따르고 싶어하지 않았다. 무역자유화와 사치품 소비재 등에 대한 규제를 철폐하고 소비능력을 제약하는 각종 규제에 대하여 불만을 느끼게 되었다.
 

여기에 87년 민주화와 90년대 초 소련과 동구사회주의권 붕괴는 국가의 경제 개입에 대한 반감을 사회 전반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큰 계기가 되었다. 지금까지도 심심찮게 회자되는 '경제에 정치논리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라는 언술은 경제는 경제 그 자체의 논리(보이지 않는 손?)에 맡기라는 정언명령과도 같은 힘으로 작용하고 있을 정도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국가의 경제개입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우파뿐만 아니라, 민주화 운동을 이끌던 세력들도 어느 정도 공감하는 편이었다는 점이다. 비록 그 동기는 전혀 다른 것이었지만 말이다. 이들은 박정희와 전두환 등 군부정권과 싸우는 과정에서 정권이 취했던 강압적인 모든 정책에 대해서 민주화와 연관지어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뚜렷했다. 더구나, 그들은 국민의 세금으로 재벌들에게 특혜를 주어서, 불평등이 심화되었다는 관념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었다.
 

'국가는 부르조아지의 집행위원회'라는 마르크스의 언급에 강한 영향을 받았던 맑스주의자들은 한국 경제의 신자유주의적 성격 변모에 대해 관심을 가질 이유조차 없었다.
 

이처럼 한국 사회 전반에 퍼져있던 발전주의 모델, 개발국가 모델에 대한 반감은 계급과 계층은 물론, 다양한 정치세력들 전반에 걸쳐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 어떤 세력의 커다란 반대도 없이 신자유주의적인 경제정책이 급속히 추진된 동기였으며, 외환 위기 직후 서민경제의 파멸에도 불구하고 국민적 저항도 없이 순응하게 된 근본적 원인이기도 했다.

 

 

<<3. 김영삼 정부의 한국 경제 수술과 외환위기.>>

 

발전국가의 해체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문을 연 90년대는, 반세기에 걸쳐 지속되던 냉전대결 구도 속에서 미국식 자본주의의 승리로 귀결되는 것처럼 비추어졌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우리나라는 유신독재와 전두환 군부통치가 종식되고, 민주화 이행기에 접어들었다.
 

앞서 말한 대로 시장주의에 대한 경제 관료들의 굳건한 신념은 이미 대세로 자리잡은 상태였으며, 김영상 정부 출범과 동시에 그들은 청와대와 내각 등 관련 부처에 등용되면서 한국 경제 체제에 대한 수술을 집도했다.

이른바 국제화, 세계화를 모토로 내세운 신경제 플랜 중 외환위기를 직접적으로 야기한 핵심적인 정책은 산업정책의 해체와 금융자유화 조처였다.

 
첫째, 지난 수십 년 동안 지탱해온 산업정책은 해체되었다. 경제기획원은 없어지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의 기본 산업 정책은 사라졌다. 이것은 국가 차원에서의 거시적 투자 조정 역할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로 인해 과잉, 중복투자의 개연성이 높아졌다.

둘째, 금융산업에 대한 진입을 크게 완화하여 상업은행과 종금사, 생명보험사들 50~60개가 우후죽순 설립되었다. 외환통제도 거의 해체하고 자본계정마저 자유화하여 기업이 직접 외자를 도입하도록 했다.


이런 금융자유화 정책으로 인해, 재벌그룹들이 자신들이 세운 종금사 등을 통해 경쟁적으로 외자 도입을 하게 되었는데, 주로 단기대출을 통해 대규모 설비투자를 하게 되었다. 이들 종금사는 외국으로부터 1년만기 단기 차입을 하여, 기업들에게 장기대출을 해주었던 것이다. 이런 만기구조의 불일치는, 국제 자본이 만기 연장을 해주지 않는다면 대출금 회수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구조였다.

 
더구나 정부는 이러한 금융적 위험 구조를 감독하기는 커녕, 오히려 장기차입은 규제하고 단기차입은 자유화하는 식으로하여 이런 위험한 외채 구조를 더욱 조장한 셈이 되었다.
 

이처럼 개발국가의 성장 환경의 해체와 금융자유화, 지구화라는 국가 전략적 흐름 속에서 재벌과 대기업은 지구적 투자확대로 공격적인 경영에 나섰다. 해외차입으로 조달한 자본으로 막대한 규모의 투자를 지속했다. 대표적으로 대우는 2000년까지 해외사업장 1,000개를 구축하고 1730억 달러의 매출을 달성한다는 야심찬 '세계 경영'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삼성, LG, 삼미 등 다른 국내 대기업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철강, 자동차 등에 공격적으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공격적인 사업확장은 지역적 수요의 결여와 서구수출 시장 수요의 한계로 과잉설비와 과잉생산을 초래하였고, 만기 연장을 기대한 단기 대출금으로 장기적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것은 재무적 위험성이 매우 컸다.

 

외환위기의 발발 

90년대 중반 이후 대외적인 경제환경은 급속히 악화되어가고 있었다. 우선 무역적자를 들 수 있다. 95년도 이전까지만 본다면 적자규모는 40억~90억 달러 이내로 대략 균형적인 상황이었지만, 주요 수출품이었던 반도체 가격의 폭락 등의 여파로 96년도에는 무역적자가 237억 달러(GNP대비 5%)로 급속히 악화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97년도에는 수입둔화 덕분에 무역적자 규모는 어느 정도 줄어들었는데, 한보사태와 기아사태가 터지면서 사태는 심상치 않은 조짐이 보였다.
 

재벌의 연쇄부도와 부도유예협약은 막대한 여신을 제공한 은행들에게 심각한 부실을 초래했다. 이런 상황에서 태국의 바트화 평가절하로 시작한 동남아의 경제위기가 급속히 번졌다. 동남아 금융위기 원인의 배경은 초국적 금융자본의 투기적 공격이 있었다. 미 연방기금 금리가 0.25% 인상이 되면서 장기적으로 미국 금리가 상승할 것이 예상되자 투자펀드들은 동남아에서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고, 태국의 바트화가 고평가되었다는 인식이 확산되자 헤지펀드들은 바트화를 투매하기 시작했다.

 
동남아에 급속히 금융위기가 번지자, 그 지역에 일본 은행들은 자신들의 재무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한국 종금사에 빌려준 돈을 신속하게 회수하기 시작했다. 일본을 비롯한 외국인 채권자와 투자자의 패닉과 뱅크런으로 한국의 외환부족은 급박하게 악화되었고, 미국의 모건 스탠리 등 월가의 세력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지금 당장 한국을 탈출하라"며 한국의 외환보유고와 외채에 부정적인 메시지를 전 세계에 퍼트렸다.

 
일본계를 비롯한 외국계 금융기관들은 한국의 금융기관과 기업들의 단기외채에 만기연장을 11월부터 전면적으로 거부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외환위기에 직접적으로 직면하게 된다.

 


정부는 외환위기가 코 앞에 닥치자, 처음엔 미국, 중국, 일본 등의 정부에 직접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들 모두에게 거절당했다. 이것의 배후에는 미국이 있었는데, 미국이 일본 정부에게 은밀히 한국에 자금을 빌려주지 말라고 압박했던 것이다.
 

미국은 이미 외환위기 발발 몇 달 전부터 CIA를 통해 한국에 50여 명의 요원들을 급파해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점과 외환위기 가능성을 샅샅이 조사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최근에 공개된 CIA 문건에서 보자.(지주형, 윗책 174쪽 참조)

"한국의 외환보유고 대비 단기부채비율은 어느 신흥국가보다도 높으며 최근 한보와 기아그룹의 부도는 이미 취약해진 은행시스템을 압박하고 있다" (1997년 8월 5일)

"외환 보유고대비 단기부채의 비율이 막대한 인도네시아와 한국은 해외은행이 신용공급을 중단할 경우 유동성 경색에 직면할 수 있다" (1997년 9월 4일)

"한국의 단기부채는 외환보유고의 250퍼센트를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태국 주식을 산 투자자들은…태국에서의 투자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아직 가치가 있는 한국의 주식들을 팔아 치워야 할 지 모른다" (1994년 10월 21일)
 

이렇게 CIA는 한국의 외환위기 가능성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으나, 전혀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외환위기가 발발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미국은 한국 정부에 자금 지원을 주변국들조차 못하게끔 원천 봉쇄하고 IMF로의 구제금융의 길로 몰고 간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한국의 외환위기를 유도, 혹은 방조를 했는가?
 

국제 투기자본의 메커니즘

이 대목에서 한국의 외환위기에 방아쇠를 당긴 국제투기 자본의 메커니즘과 이해관계를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1971년 미국은, 금태환 본위제와 자본 이동 통제를 포기하고, 변동환율제와 자본이동의 자유화로 돌아서게 된다. 브레텐우즈 체제의 종말.
 

베트남 전쟁 등으로 미 재정 상황이 악화되고, 유로달러 시장의 등장으로 미국 자본시장이 상대적으로 손해를 보는 등 여러 요인들이 작용한 결과였다. 그러나 금태환 중지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달러는 기축통화 지위를 공인받았고, 금에 묶이지 않은 미국의 자본은 이동의 자유를 얻었고 시장 확대에 열을 내었다.

 
이제 금융 자본과 초국적 자본은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케인스적 재정, 통화정책과 각종 사회적 규제를 무력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초국적 자본은 값싼 노동과 자원, 넓은 시장을 찾아 생산활동을 지구화하기 시작했으며, 제조업 시설을 외국으로 이전시키거나 제품 공정과 부품을 역외 아웃소싱하는 등 전 지구적인 생산과 서비스 네트워크를 분할하고 비용을 감축했다.

 
초국적 자본은 값싼 노동과 자원, 넓은 시장을 찾아 생산활동을 지구화하기 시작했으며, 제조업 시설을 외국으로 이전시키거나 제품 공정과 부품을 역외 아웃소싱하는 등 전 지구적인 생산과 서비스 네트워크를 분할하고 비용을 감축했다.

 
이러한 지구화 네트웍은 직접투자뿐 아니라 금융자본에 있어서 자산가치 상승이나 주식배당 등 포트폴리오 투자의 해외 확대 기회를 제공했다. 가격변동성의 증대에 따른 금융차익거래, 외환투기 등도 가능해졌고, 금리가 낮은 곳에서 자금을 빌려 금리가 높은 곳에 투자하는 캐리 트레이드도 가능해졌다.
 

생산과 자본의 지구화에 따른 무정부성과 환율 변동에 따른 가격 변동성으로 인해 리스크는 증대된다. 그리고 이 리스크조차 금융 자본은 상품화로 전환시킨다. 선물거래 같은 파생금융상품의 거래는 더욱 확산되었다.

 
이처럼 신자유주의적 축적은 재화의 무역을 근간으로 삼는 기존의 산업 자본의 축적과는 전혀 다른 '카지노 자본주의'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전 지구적인 자본시장과 외환시장 개방은 투자 시장 확대라는 측면에서 중대한 과제로 대두될 수밖에 없었다.
 

냉전이 종식된 1990년 미국과 IMF, 남미 금융 당국자들이 모여 제시한 남미국가들이 따라야 할 경제정책 방향인 10가지 항목, 이른바 '워싱턴 컨센서스'는 신자유주의의 강령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 주된 항목은 공공지출 축소, 자유 무역과 금융자유화. 외국인 직접투자, 국영기업 민영화, 각종 경제규제 폐지 등이었다.

 
이 '강령'은 세계 모든 나라에 마치 어떤 공산품의 메뉴얼처럼 기계적으로 적용된다. 각 나라마다의 상이한 발전수준과 산업의 특성 여부는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다. 만병통치약처럼 아프리카부터 아시아 남미까지 전 대륙에 걸쳐 거의 반강제적으로 적용된다.


 

이런 처방을 전 지구적으로 확산시키는 주체는, '월스트리트-IMF-미재무부 복합체'이다. IMF의 85%의 지분을 미국이 갖고 있는데, 미재무부에 속한 위원회라 생각하면 쉽다. 그리고 미 재무부는 월스트리트의 전위대에 다름 아니다.
 

80년대 이후부터 미 재무부 장관과 관료들 대부분은 미 월가의 경영진 출신이며 임기를 마치면 그들은 다시 월가로 돌아간다. 우리나라 외환위기 때 극단적인 구조조정과 시장개방을 가혹하게 강요했던 미 재무장관 로버트 루빈은 골드만삭스 회장이었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원래 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주류는 아니었다. 그러나 70년대 브레턴우즈 체제가 종말을 맞이하는 시점에 미국의 국제금융관료들은 신자유주의적 사상과 이념을 가지고 있었고, 조지 슐츠 미 국무장관은 신자유주의의 태두인 밀턴 프리드먼과 막역한 사이로 그의 경제관에 깊이 공감하며 자본이동 자유화를 옹호하게 되었다.
 

70년대부터 미국에서 발흥하게 된 신자유주의는 80년 레이건 정권을 경과하면서 '자본의 고삐가 풀려버린' 시장 자유화 시대의 확고한 이념으로 자리잡았으며 전세계적으로 주류 경제학의 표본이 되어 버린 것이다.
 

미 재무부의 IMF 프로그램 강요와 그 결과 

다시 이야기를 한국 외환위기로 돌아와 보자. 80년대 이후 점진적으로 그리고 김영삼 정부 들어 시장개방과 자본시장 자유화 등을 결행하며 신자유주의 길로 들어섰던 한국이었지만, 그 개방의 속도와 폭에 대해서는 미국은 여전히 불만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들은 외환위기가 터지면 급진적인 자본시장 자유화를 구제 조건으로 내걸면서 국가의 경제 구조를 신자유주의적으로 전면적으로 개편시키는 전략을 구사한다.

 
한국이 외환위기에 직면하자, 미국은 정부 차원에서의 지원을 전면적으로 가로막고 오직 IMF 구제금융의 외통수 길로 몰아갔다.

 

한국 정부는 97년 12월, 결국 IMF 구제 금융 요청을 하며 그들과 협상할 수밖에 없었다.

초기 IMF와 협상은 금융 개혁, 긴축 통화정책, 시장 개방만을 두고 진행되었고, IMF 대표단도 구조개혁에는 별다른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자신들의 전문영역 바깥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은 한국 정부와 IMF와의 협상 내용을 시시각각 보고를 받고 있었고, 협상 진행이 자신들의 기대만큼 이루어지지 않자, 배후에서 IMF를 조종하기 위해 립턴 차관을 급파하여 협상장이었던 힐튼 호텔에 묵게 하였다. 그는 한국에 채권시장 개방, 외국인 주식투자한도 확대 등 금융시스템 자유화를 압박하도록 IMF 대표단을 조종했다. 


미국은 작년, IMF의 2인자로 립턴을 밀었다.
립턴이 협상을 아주 꼬이게 하자, 한국 협상단은 립턴 차관을 찾아가 협상에 개입하지 말라고 강력히 항의를 하고 그의 숙소를 다른 호텔로 옮기게 할 정도였다.

 
미 재무장관 루빈은 아주 완강하게 한국 정부의 '개혁' 내용에 불만을 터트리고 캉드쉬 IMF 총재가 강경하게 협상하도록 압박했다.
 

그리하여 캉드쉬 총재는 애초 잠정 합의안보다 훨씬 강력한 '개혁'과 구조조정을 요구하고 한국 정부는 결국 그것을 수용하게 된다.


1차 협약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금리 인상 : 12.5% → 25% 인상
2) 긴축 재정
3) 외국인 주식한도 상향 : 98년도까지 현행 28% → 55% 확대
4) 외국인 개별소유 한도 : 7% → 50% 상향
5) 외국인 국내 금융기관 인수합병
6) 해외차입 제한 폐지
7) 무역 관련 보조금, 수입승인제 폐지
  중앙은행 독립, 금융기관 구조정(퇴출 및 회생) 등

 
이같은 프로그램의 진행을 조건으로 12월 5일 56억 달러가 한국은행 계좌로 입금되었고, 한국 정부는 이에 응답하여 외국인 주식소유한도를 50%로 확대하고, 외국인에게 채권시장을 개방하였다.


그러나 IMF 초기 개입은 예상과는 달리 외국인 투자자들의 발걸음을 잡지도 못했고, 한국 경제를 안정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더 파국으로 몰고 갔다. 25%가 넘는 고금리 정책과 금융구조조정 조치로 인한 금융비용 폭증으로 기업 도산이 속출하고, 유동생 경색으로 경제 상황은 악화되어 갔다.

 

IMF 프로그램은 한마디로 발목 부상 당한 환자에게 뇌수술을 집도한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일이 이렇게 흘러가자 무디스와 S&P 등은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정크본드 직전 수준까지 급락시켜 사태를 최악으로 몰고 갔다. 이제 한국 경제는 문자 그대로 IMF 프로그램 자체에서 기인한 'IMF 위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IMF는 경제 상황의 악화를 모두 한국 정부에 뒤집어 씌웠다.
 

IMF의 지원액도 12월 만기로 돌아오는 외채를 갚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2차 지원을 요구하는 추가협상을 하게 되었는데, 이 때 미 재무장관 루빈은 지난 번 IMF 프로그램보다 훨씬 더 가혹한 조건을 추가로 요구한다.
 

IMF 플러스로 명명된 이 조건은 외국인 주식소유 한도 완전 폐지, 채권시장 완전개방, 금융서비스 완전자유화, 이자제한법 폐지 등이 골자다. 한국의 금융 경제는 더이상 보호할 한 치의 여지조차 남김 없이 개방되었다.
 

그런데 한국 협상 대표였던 김기환은 여기에 덧붙여 정리해고 및 파견근로제 등 노동유연화 조치까지 스스로 만들어 IMF 프로그램으로 끼워넣었다. 이렇게 하여 IMF와 미국은 98년 한국 경제를 극도의 침체에 빠지게 하고 노동자/서민들에게 궤멸적 타격을 입혔다.
 

또, IMF에서 제공한 여신은 한국 기업에 제공한 빚을 떼일 위험이 있던 국제 금융자본을 위한 '구제 금융'이었다. 다만 한국정부를 경유한 것뿐이었다.
 

우량자산을 헐값으로 챙기고, 거기다 2퍼센트가 넘는 가산 금리까지 더 보태서 받았으니 국제금융 자본은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한국이 기업 줄도산과 실업으로 최악의 고통을 당할 때, 어느 외국 논자가 평하듯이 "월스트리트는 역사상 최고의 해를 만끽하고 있었다." 골드만삭스 같은 투자은행에 근무하는 사람들 말로는 어느 나라에서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 그 바닥 사람들은 그것을 두고 '장이 들어섰다'고 반겨한다고 한다.
 

2008년 미국 금융위기가 터졌을 때, 미국이 금리를 거의 0수준으로 내리고 금융기관에 천문학적인 공적자금을 쏟아부은 것을 보면, 그들이 외환위기에 처한 다른 나라에 강요하는 경제 처방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것인지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참고로, 한국에 가혹한 금리인상과 금융기관 퇴출을 주도했던 골드만삭스 출신 미 재무장관 루빈은 퇴임후 시티그룹으로 회장으로 자리로 옮겼는데, 금융위기 때 파산지경에 몰린 시티은행은 구제를 위해 3천억 달러라는 엄청난 공적 자금을 제공받았다.



 

 

4. '민주 정부'는 어떻게 신자유주의를 확산시켰나

 
신자유주의로의 전면화와 국부 유출

IMF의 압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통스러운 구조조정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지만, 결국 정부의 노력으로 외환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했다고 한다. 그리고 야권지지자들은 그것을 DJ 정부의 치적으로 내세우곤 한다.
 

그러나 이같은 일방적 평가는 전면적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물론 외환위기가 회복을 하는 데에 있어서 금리인하와 재정 확대를 주도한 정부의 역할이 컸다. 그리고 98년도 하반기 러시아와 브라질의 경제위기로까지 번졌던 세계경기 위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금리인하가 급속도로 이루어졌던 외부 환경의 영향도 컸다. 우리나라만 단독으로 금리를 인하했다면 통화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금리인상과 재정지출 확대라는 국면적 부분만 빼놓고 보면, 김대중 정부는 IMF 프로그램 대부분을 거의 맹목적으로 추종했다. 한국 경제 구조를 확고히 신자유주의적으로 개편하였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국부가 투기자본으로 유출되었다.
 

97년 김대중의 경제철학은 시장주의로 이미 경도되어 있었다. 그는 외환위기의 원인을 정경유착, 관치경제, 부정부패에 혐의를 두어 시장 중심 경제체제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대통령 취임식 때 비서관들 사이에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와 '민주적 시장경제'라는 취임사 문구를 두고 한때 논란이 빚어졌다고 하는데, 그는 전자를 선택했다고 한다. 시장경제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포기했음을 상징한 것이다.
 

그는 "세계화된 경제에서 외국인 투자를 환영해야"하며 "정리해고는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는 데 필요"하다고 역설하기까지 했다.
 

그는 자신이 직접 경제를 챙긴다고 자신하며, 경제부처 장관직은 자민련에게 양보했다. 신자유주의에 완전히 포섭된 옛재무부 관료들, 이규성과 이헌재가 재정경제부 장관과 금융감독위원회에 등용되었고 이들은 가혹한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했다.


 

김대중은 '재벌 개혁',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생산적 복지', '벤처기업 육성' 등을 역설했지만 그것은 IMF와 정부 관료들이 짜놓은 틀 안에서의 얘기였고, 그들의 정책을 이데올로기로 치장하는 것에 불과했다.


자본시장 개방과 외환자유화로 말미암아 외환위기가 터졌는데, 그것을 더 확산시키는 것으로 외환위기를 예방한다는 발상은 마약을 마약으로 극복하겠다는 식의 어처구니 없는 것이었지만, 시장근본주의자들에 동조한 김대중과 노무현은 외환위기에 대한 엉뚱한 진단으로 그런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오죽하면, 주한 미대사가 "김대중 정부가 IMF 프로그램을 준수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이상으로 해주고 있는 것에 크게 고무되고 있다"고까지 얘기할 정도였을까.
 

김대중 정부는 경기가 회복세에 접어든 시점에서조차, 한국의 알토란 같은 자산을 외국인들에게 헐값으로 매각하고 공기업을 빠르게 민영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금융 자유화의 부작용을 최소화 하는 노력조차 보이지 않았다.
 

30%가 넘는 고금리와 은행 자기자본 비율인 BIS 10% 때문에 수많은 기업들이 떼도산을 하게 되었다. 은행은 BIS 비율을 맞추느라 기업의 채권을 신속하게 회수를 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흑자를 내던 기업조차 도산하게 되었고, 이것은 금융기관의 '부실 채권'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 '부실 채권'은 이후 론스타를 비롯한 국제 투기자본에게 땡처리 수준으로 처분하게 된다.

 
더구나 이런 투기자본들조차, 달러가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했던 외환위기 초기에 들어온 것도 아니고, 경제가 회복세로 완전히 돌아서자 그때서야 들어온 것인데, 정부는 그들에게 온갖 특혜를 제공하며 우량 자산을 헐값으로 처분하는 데 엽기적인 수준을 방불케 했다.
 

86억 원의 정부 지급 보증된 채권을 100원에 판매하는 등 거의 황당한 투매를 한 경우까지 있었다. 그나마도 외국자본과의 협상력이 떨어지는 시점에서 김대중 정부는 오히려 그 협상력을 더욱 악화시키는 조처들을 강요했다. 국내기관들에 보유자산을 외국인들에게 빨리 팔아치우도록 막대한 압력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시한을 정해두고 그때까지 자산매각으로 외자 조달액을 보고하라고 했다. 99년말 4대재벌이 외국자본에게 매각한 자산만 108억 달러에 달했다. ‘닥치고 매각’이었다.

 이뿐만 아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판다고 해보자. 시가 1,000만 원짜리 자동차지만, 엔진이 고장났다. 엔진 수리비에 500만 원 투입하고서 그 자동차를 100만 원에 팔아버리는 사람을 정상적인 두뇌의 소유자라 할 수 있을까? 그것도 앞으로 2~3년안에 고장이 날 경우 수리비도 파는 사람이 모두 부담하겠다고 한다면?


이런 짓거리가 DJ 정부때 자행되었다. 대우자동차 같은 경우를 보자.

대우자동차는 보수적인 추정치에 따르더라도 자산가치가 당시 12조 원이 넘었다. 근데 이걸 GM에 단돈 5천억 원에 넘긴다. 인수조건도 기가 막힌다. 12억 달러의 자산과 8억 달러의 부채를 선택적으로 인수하는데, 인수조건은 현금이 아니라 주식으로 채권은행단에 넘기고, 채권은행단은 앞으로 20억 달러의 장기대출을 제공한다.
 

이건 정말 꿈에서나 가능한 조건이었다. 그나마도 GM은 부실자산의 상당부분을 인수회피했고, 그 부담은 모두 공적자금이 투입된 채권은행단의 부담으로 남아, 궁극적으로 납세자의 몫으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현대가 기아자동차를 인수할 때 1조2천 억의 현금과 6조 원에 달하는 부채를 떠안았던 것과 비교해 보면, 정말 황당한 조건이었다.


제일은행 매각은 더 기가 막혔다.
 

제일은행은 100% 정부 지분을 갖고 있는 국가 은행이었는데, 한보와 기아 부도사태에 직면해서 약 8조 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되었다. 그런데 이것을 외국 사모펀드에다가 단돈 5천억 원에 팔아버렸다. 그것도 모자라 향후 2~3년간 발생하는 모든 부실채권들을 매입해주기로까지 약정했다. 미국조차도 사모펀드에 상업은행을 넘기는 법은 없다. 은행은 ‘군대보다 무서운 무기’라는 일설이 있을 정도로(이 말도 미국재무장관이 한 말이다!) 한 국가 경제의 젖줄인데, 이것을 대놓고 투기하는 업체에 넘긴다는 것은 정말 상상 초월의 조처였다.

 
여기에 더해 노무현 정부는 자산규모 62조 원이 넘은 멀쩡한 외환은행을 느닷없이 부실은행으로 둔갑시켜서 단돈 1조 3천억 원에 론스타라는 사모펀드에 팔아넘겼다. 부실은행이라고 했던 그 은행은 론스타에 팔아먹은 이듬해에 5200억이 넘는 당기 순이익이 났고 그 다음해는 2조 원 가까운 순익을 냈다.

 
제일은행이야 IMF 직후였다고 치더라도 노무현 정부 들어서 그런 황당한 짓거리를 계속했던 것은 도저히 용납되기 힘든 국부유출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은 론스타가 이익을 본 것은 리스크를 감내한 대가이기 때문에 그들의 이익을 환수해야 한다는 주장은 크게 잘못되었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였던 김재익조차도 은행을 외국에 넘기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을 정도였는데 말이다.
 

부실채권을 노리는 투기자본은 론스타를 비롯하여 모건스탠리, 골드만삭스, 리만브라더스, GE 캐피탈 등 주요 미국의 사모펀드였는데, 이들이 98년도부터 2006년도까지 빼간 수익이 무려 150조 원에 이른다. 그것도 세금을 거의 한 푼도 안 낸 경우도 많다. 라부안 등 조세회피지역에 페이퍼 컴퍼니 등을 세웠기 때문이다. 제일은행 먹은 뉴브릿지 캐피털, 외환은행을 비롯한 수많은 '부실채권'을 접수한 론스타도 그렇다. 조세회피 지역을 통해 들어온 외국자본의 비중은 98년 1%에서 불과 2년 사이에 30%에 육박한다.

 
대체로 투기자본이 들어와서 회사를 사들이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전략은 대체로 이렇다.

① 헐값에 사들인다. → ② 대규모로 배당한다. → ③자사주 매입 소각 등으로 대주주 지분을 늘리고, 유상감자로 회사 자산을 주주들에게 배당한다. → ④ 더 이상 빼먹을 게 없을 때는 상장폐지하여 매각하거나 청산하여 껍데기마저 벗겨먹고 나가는 것이다.

브릿지 증권이 정확하게 이 수순을 밟았다.

자동차 부품회사 만도기계는 2005년 기준 매출 1조 5천 억에 당기순이익이 1500억 원에 이르는 회사이다. 이 기업을 1900억 원에 인수한 선세이지는 유상감자를 통해 2010억 원의 자금을 빼갔고 이듬해에도 360억 원을 배당해간다. 2년후에 매각을 협상하고 있는데 금액이 1조 원이라고 한다. 위니아 만도도 비슷한 수순으로 팔려나갔다. 950억 원을 투자해 불과 6년만에 2070억 원을 빼갔다.

대체로 이런 투기자본들이 휩쓸고 간 기업마다, <노동자들이 정리해고와 대량 실직으로 길거리에 내몰렸던 것은 기본적인 수순이었다. >

알찬 공기업들 역시 대부분 민영화되었는데, 마찬가지로 투기자본에 급속하게 노출되었다.

옛 담배인삼공사인 KT&G와 K.T, 포스코 등이 대표적이다. KT&G는 지배주주가 없는 상황인데, 아이칸 등 외국 자본이 주식매입을 늘려가며 경영권을 위협하면서 자산가치가 있는 것을 팔고, 주주 배당을 늘리고 압박해왔다. 2004년도에 2073억 원을 주주들에게 배당했다. 담배 한 갑 팔아 이익이 86원이면 이 가운데 36원이 나갔다. 심지어 순이익의 150%가 배당으로 빠져나간적도 있을 정도다. KT&G는 독점적 사업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소유구조만 민영화되었는데, 소유지분의 60% 이상이 외국인들의 것이다. 국민은행, 한국전력 등도 마찬가지다.
 

몇 년 전 정부는 경제침체가 지속되자 한전에 전기료를 올리지 못하게 했는데, 한전의 주식을 갖고 있는 어떤 주주는 한전 사장을 상대로 전기료 인상하지 않아 주가 하락으로 손해를 보았다며 1조원의 소송을 낸 바 있다. 한전 사장은 퇴임 후에도 이 소송에 대비하느라 스트레스로 몸살을 앓는다고 한다.


KT는 민영화 직후 무려 1만7천 명이 정리해고되었고, 2003년 한 해에만 12%가 명예퇴직으로 빠져나갔다. 불과 수 년만에 6만5천 명의 정규직 직원이 3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필요한 유지보수 인력이 빠져나갔고 필요한 설비투자를 미루었다. 2005년도에 수도권과 부산, 대구에 전화불통사태까지 이르게 되었다. 통신사업이 100% 민영화 된 결과 한국은 멕시코 다음으로 OECD 국가 중 통신비가 가장 많이 소비되는 나라가 되어버렸다. KT는 민영화 이후 주식 배당금이 이익금 50% 이하로 떨어진 적이 없다. 2009년도에는 그 해 벌어들인 이익의 94%가 주주들에게 빠져나갔다.


더욱이 외환위기를 거치며 삼성전자, SK, KT 등 몇개 기업만이 초고도 성장을 했는데, 사실 혹독한 구조조정 속에서 다른 전자업종과 통신회사들이 절멸하고 남아있어 독점 했던 탓이 크다. 그나마도 그 이윤의 대부분은 미래에 대한 투자나, 협력업체를 키우는 데 쓰이는 것보다는, 자사주 소각이나 배당 등으로 빠져나가는 돈이 훨씬 많다.
 

김대중 정부는 그나마 남아있던 공기업들조차도 일반 기업과 같은 구조로 개편하고, 수익을 얼마나 내느냐 하는 것을 경영 평가의 주된 내용으로 삼았다. 공기업 자체가 이미 공공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그것의 평가를 수익을 기준으로 삼게 되니 일반 기업과 별 차이가 없었다.
 

토지-주택공사가 조성원가에 비춰 터무니없이 비싸게 분양하고, 공공임대 주택 건설에 소극적이었던 것은 이런 영향도 크다.

 

주주자본주의와 서민경제의 침몰

외환위기를 지나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우리나라 기업의 패러다임이 성장 중심에서 단기 수익 중심으로 옮겨갔다. 다시 말해 언제든 주식을 사고팔 수 있는 주주들의 이익을 위해 기업이 존재하는 주주자본주의로 재편된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IMF 프로그램은 이와 같은 영미식 체제로 급속하게 전환시키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국제 초국적 자본은, 생산설비를 설치하고 노동력 고용 등 번거로운 절차와 과정이 필요한 산업적 투자 방식 대신, 사회적 저항이 없고 속편 한 자본 투자 방식으로 전환하여 엄청난 이득을 챙기므로 자본시장 개방을 전제로 한 주주자본주의 체제를 선호하게 된다.

이찬근 교수는 영미형 주주자본주의와 독일식 라인형을 비교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금융경제학 사용설명서', 부키 참조.)

 
외환 위기 이후 한국에 등장한 주주는 기존의 산업자본과 전혀 다른 각종 펀드로 대표되는 외국계 금융 자본이다. 금융 자본은 속성상 재무적인 지표에만 주로 관심을 갖는 단기 투자자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주주가 기업에 핵심적 안정 자본을 공급하는 주체이기 때문에 기업 지배구조에서 우월적 지위를 갖는 게 당연하다는 논리를 갖고 있다.
 

그들은 시장의 변화를 신속하게 수용해야 하므로 구조조정이 상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적대적 인수 합병이 사회적으로 용인되어 경영자가 수시로 교체할 수 있어야 되고 노동자의 정리해고가 자유롭게 이루어져야 된다고 본다.
 

적대적 M&A라는 채찍과 스톡옵션이라는 당근으로 주주들은 경영자를 규율하는데, 이에 따라 경영자는 주주 이익을 기업활동의 최우선 가치로 두게 되고 노조 무력화와 정리해고를 단행하는 것을 당연시 여긴다.

 
따라서 주주자본주의 논리에 따르면 영속적인 경영지배 하에 있는 한국의 재벌구조는 하루 빨리 청산되어야 할 구태일 뿐이다. IMF가 재벌개혁을 강력히 요구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 재벌은 국가로부터 간섭을 배제하고 이윤 추구를 극대화하는 차원에서 신자유주의 이념을 절대적으로 환영했지만, 이와 같은 주주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자신들의 경영권이 위협에 처하게 되자 그들은 주주들에게 배당금을 획기적으로 늘리면서 타협을 하며, 순이익 제일주의의 주주자본주의로 재빨리 적응하게 되었다.

 
얼마 전, 재벌 딸들의 빵집 진출 등으로 골목상권까지 침해하는 재벌의 탐욕에 대해 사회적 비난 여론이 한동안 급등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재벌들은 준비하던 사업을 마지 못해 접었다. 이때 한 언론이 재벌의 탐욕을 고발하기 위해 중소기업 고유업종 침해를 하는 대기업을 조사해 보았다. 재벌계열사 대기업과 비재벌계 대기업을 비교했다. 그런데 오히려 비재벌 대기업군이 재벌계열사보다 2배 넘게 중소기업 업종을 침해한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와 비교되는 독일형 자본주의는 시장과 사회적 연대를 모델로 '사회적 시장경제'를 기본 이념으로 삼는다고 한다. 이들은 안정적으로 자금 공급이 가능하도록 은행을 통한 간접 금융이 중심이며 기업 지배구조는 자본과 노동이 공동으로 참여한다. 따라서 경영자는 수시로 교체되지 않으며 노조와 장기적인 협조 관계를 유지하면서 기술 축적에 전력을 경주할 수 있다.
 

주주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주주의 이익을 대표하는 성격을 갖는 경영자와는 다르게, 이 체제 속의 경영자는 사업상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금융기관과 종업원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이해를 절충하고 조종하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필요에 따라서는 장기적으로 핵심역량과 현장 인력이 꾸준히 클 수 있도록 한다. 기술적인 핵심역량을 키워나가야 할 제조업이라면 이런 체제는 더욱 절실하다고 할 수 있다.
 

지난 민주정부 시기 참여연대 등에서 '재벌개혁'을 모토로 '소액주주운동' 등을 전개하며 '경제민주화 운동'을 전개한 것은 그 의도와는 상관없이 완전히 미국식 주주자본주의 체제로의 이행을 가속화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소버린 등 외국 투기자본은 그런 운동을 후원하기도 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재벌개혁에 대한 수단으로 바로 주주자본주의를 선택하였던 것이고, 이것에 대한 상징적 움직임이 참여연대에서 장하성 등이 진행한 소액주주 운동이다. 포트폴리오상 투기자본은 한 기업에 몰빵할 수 없으니 당연히 그들 입장에선 소액주주 운동을 후원하기로 한다.
 

지금도 장하성은 론스타가 조선일보 칼럼을 통해 먹튀하는 게 뭐가 문제냐는 투로 이야기 한다. 자본의 속성이 원래 그런 거 아니냐고 외려 그들을 변호하거나, 심지어 그 돈으로 현대자동차 투자했으면 더 돈을 벌었을 텐데 그런 기회비용을 생각하면 그리 나쁜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외환은행을 론스타에 넘기는 문제에 대해 당시 노조와 일부 시민단체 및 학계에서 엄청난 문제제기를 했었는데, 그는 그 당시 신문조차 보지 못했다는 것인가?
 

소액주주운동으로 KT&G, KT 등 최소한의 지배주주가 존재하지 않아, 투기자본의 놀이터가 되어 있는 기업을 재벌 개혁의 대안으로 보고 있었던 거다. 적대적 M&A 위협에 노출되어 있어 투명성이 높아지고 지배구조가 개선된다고 그것을 오히려 더 긍정적으로 보면서 상까지 줘가면서 기업사냥꾼들의 투기적 이익추구를 옹호했다.

 
당시에도 노동계와 일부 학계, 그리고 투기자본감시센터 등 시민운동 단체가 투기자본에 대한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했었던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재벌개혁이라는 명분으로 신자유주의라는 수단을 도입했던 것은 벌레 잡겠다고 맹수를 도입한 짓거리를 한 셈이었다.
 

이익 극대화를 위해 노동권을 끊임없이 파괴하고, 설비투자와 고객 보호에도 소홀한 투기자본과 주주자본주의 운용방식을 대안으로 삼은 자가 노무현 정부에서 공정거래위원회를 역임하고 통합민주당의 공천심사위원장이 된 강철규 교수다.
 

이른바 '민주 정부'는 독일식 사회자본주의 대신, 이와 같은 미국식 '주주자본주의' 체제를 선택하고 그것을 확실하게 밀어붙였다. 그 결과 저성장, 저투자, 양극화, 고용불안은 이제 상시적인 체제가 되어버렸다.
 

45세 정년이라는 '사오정'이라는 슬픈 자조에 더해 '평생 직장 개념을 버리고 평생 직업을 갖으라'는 것이 우리 시대의 처세가 되었다. 소득 감소로 인한 투잡은 흔한 옵션이 되었다.
 

민주화와 함께 추진한 '경제 개혁'은 외환위기를 불러오고, 그것을 계기로 한국은 완벽한 미국식 신자유주의 국가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노무현과 이명박 정부는 미국식 금융자본주의를 롤모델로 삼으며, 한-미 FTA와 한-EU FTA를 통해 되돌이킬 수 없는 구조로 고착시켜버렸다.

 

노무현 정부의 경제 자살골 

외환위기 트라우마 때문인지 김대중 정부는 외국자본 유치에 사활을 걸었다. 아예 편집증 수준이었다. 그 결과 오늘날 대략 3000억 달러의 외환을 보유하게 되었다. 외환 유치 규모로는 세계 6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2008년 금융위기 때 다시 외환위기가 찾아왔다.

지구상에 돌아다니는 하루 외환거래액은 대략 4조 달러 규모인데 3000억 달러는 40분만 시간을 줘도 거덜난다.
 

지금 미국은 거의 무한대로 달러를 찍어내는데, 전세계 파생상품 금액 규모만 600조 달러이다. 이것은 전세계 GDP의 11배를 넘는다. 실물경제와 금융은 따로 논 지 오래다. 금융이 실물 경제를 빨아먹어가는 구조 속에서, 달러에 아무리 미친 듯이 매달려봐야 태산에서 흙 한 줌씩 퍼나르는 꼴밖에 안 된다. 쓰나미를 예방한다면 제방을 쌓아야지, 하수관을 넓히는 일만을 해서야 되겠는가?

그러나 노무현 정권에서도 이런 무의미한 달러 집착증은 달라지지 않았다. 오늘날 최대 경제 비극 중의 하나인 쌍용자동차 사태를 야기한 것도 노무현 정부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산업은행은 쌍용자동차를 중국 상하이 자동차에 매각하였다. 그러나 당시 여러 사정을 감안했을 때, 상하이 자동차가 쌍용자동차를 인수할 이유는 기술 유출이었다. 노조는 이런 이유로 쌍용자동차 매각을 결사 반대했다. 그러나 산업 은행은 상하이 자동차에 매각을 강행했고, 예상대로 상하이 자동차는 쌍용자동차에 거의 투자를 하지 않고서는 핵심 기술만을 빼간 채 법정관리로 넘겨버렸다.


이후 이명박 정권에서 인도 그룹 마힌드라에 넘기고 이후의 비극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2천6백여 명의 정리해고와 수십 명의 자살과 구속, 그리고 해고자의 상당수가 우울증과 가족 해체로 이어지며 비극으로 치달았다.
 

노무현 정부는 금융 산업발전과 선진화를 모토로 금융허브 전략을 마련했고, 그것을 경제의 핵심정책으로 삼았다. 그것은 자본시장을 육성하고, 선진금융기법과 신금융상품을 적극 도입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구체적으로 보면, 투자은행 출현, 파생금융상품(ODS, CDS), 사모펀드 적극 육성, 헤지펀드 허용, 월가 출신 금융전문가 자문관으로 영입 등이다.

 
한 마디로 전 세계를 신자유주의적으로 몰아가는 금융자본주의를 통째로 수입하겠다는 것이었다. 최악의 금융위기를 야기시킨 핵심 요소들로 구성된 월가의 시스템이었는데, 만일 금융위기가 1년만 늦게 터졌어도 예정대로 도입되었을 것이었으며, 그랬다면 우리나라는 97년 외환위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거덜났을 것이다. 이명박이 리먼브라더스를 인수할 계획을 세웠던 것도 바로 이같은 전략의 연속선상에 있었기 때문이다.
 

모골이 송연한 것은 국민연금 등 국민들의 노후 보장이 되어야 할 돈도 다 여기에 투자할 수 있게 만들었던 것이다. 더구나 황당한 것은 노무현 정부 말기까지 이 계획은 예정대로 추진되고 있었는데, 이 때는 이미 미국의 부동산가격 폭락과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로 헤지펀드의 손실이 눈덩이처럼 확산되고 있다는 보도가 넘쳐나는 시점이었다.
 

그런 현실을 두고서도 노무현과 재경부 관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런 금융시스템에 신앙적 집착을 보였다.

  

이것의 연장선에서 노무현 정부는 한-미 FTA, 한-EU FTA 등 시장자유주의를 맹목적으로 밀어붙였다. 이런 철학은 노무현 정부 시기의 어느 한 변곡점에서부터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인수위 시절부터 배태되어 왔던 것이다. 그 배경에는 삼성경제연구소가 있었다. 이광재, 안희정을 비롯한 핵심 친노 486 들은 이미 이때부터 삼성의 충실한 스피커가 되어 있었다.
 

인수위 때 정태인은 '장하준', '스티글리츠'를 경제 자문위원으로 초빙하려고 했었는데 그것을 무산시킨 것도 그들이었다. 스티글리츠는 클린턴 행정부에서 한국에 대한 가혹한 IMF식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월가 금융자본만 배불리는 정책이라며 격하게 반대했던 유일한 인물이었었고, 신자유주의에 대단히 비판적인 학자였다. 그러나 월가에서 싫어한다는 이유로 그는 배제되었다.


이미 노무현 자체가 고등학교 동창 이학수 삼성 구조본부장의 관리 대상이었던 데다가, 삼성전자 부사장이었던 진대제를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임명하고 중앙일보 회장 홍석현을 미대사로 발령할 정도로 이미 삼성맨이 되어 있었다.
 

열린우리당 원내기획실장을 역임한 윤석규가 프레시안에 토로한 증언을 들으보면 충격적이다.

 
2002년도 초에 장하성이 소액주주 운동의 일환으로 삼성 주총에서 이학수의 이사 선임을 반대했는데, 이 때 이광재는 "장하성 교수는 빨갱이 아니냐, 삼성을 세계적 기업으로 키운 이학수를 왜 반대하는가"라며 격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물론, 그가 장하성을 비판한다고 해서 삼성맨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까 말한대로 주주자본주의를 강화시키는 취지일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이광재는 그런 취지로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2007년 5월경부터 신자유주의적 논리로 가득찬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발간한 <국가전략의 대전환>이라는 책을 들고 다니며 노무현 대선공약에 반영하자고 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이광재는 김진표, 박봉흠, 최종찬 등 재경부 핵심 엘리트 관료들을 거론하며 "이런 사람들하고 일을 해야 한다"는 취지의 말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들은 결국 이듬해 참여정부의 초대 경제팀에 합류하게 되었다.
 

노무현이 당선된 후 인수위는 앞으로의 국정방향을 담은 국정운영백서를 당선자에게 전달했다고 하는데,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나온 자료도 같이 들어갔다고 한다.
 

노무현 정부 내 얼마 되지 않은 진보적 경제민주화론자들은 철저히 시장주의자로 돌변한 친노 486 그룹으로부터 인수위 시절부터 철저히 배제되어 나갔고, 그 내막의 일부는 2007년도 딴지일보의 정태인 인터뷰에 잘 나와 있다.
 

2004년 9월 열린우리당내의 친노그룹인 이광재, 백원우, 이화영, 조정식 의원등은 삼성경제연구소와 공동으로 심포지움을 열고 "주요 지역별 거점형 FTA 우선체결, 의료/교육/법률 시장 조기 개방"을 주장했다.

 
이화영은 '삼성이라는 기업의 브랜드를 어떻게 살려나갈 것인가, 세계 경제 속에서 경쟁력없는 중소기업이 굳이 많아야 할 이유가 있나'라고 물었고, 김태년 의원은 '기업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불필요한 규제는 제거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며칠 후 정책자료집을 발간하여 '한미 FTA를 신속하게 체결'할 것을 주장했고, 또 다른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주축이 된 '시장경제와 사회안전망 포럼'은 정책발표회에서 "시장친화적인 개혁 없이 결코 G10에 들어갈 수 없다"고 단언하였는데 이 때 발표자는 삼성경제연구소장과 부소장이었다.

 
노무현과 이명박이 체결한 한미 FTA에 대해선 그동안 많이 논란이 되었으므로 자세한 언급은 생략하겠다. 그러나 가장 크게 논란이 되었던 투자자 소송제도 등의 독소조항도 큰 문제지만 향후 한국이 육성해야 할 미래 산업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었다는 것이 더 근본적으로 지적되어야 할 문제점이다.

만일 한국이 강세를 보이는 반도체, 조선, 자동차 분야가 충분히 경쟁력을 갖추기 전이었던 70년대에 미국, 유럽과 FTA를 맺었으면 오늘날의 현대와 삼성이 있었을까? 여기에 부정적이라면 당연히 국가 경제를 위해서 선진국과의 전면적인 FTA 체결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 친구는 중고로 나온 자동화 기계나 반도체 장비를 사들여 쓸만한 부품을 뜯어 외국에 파는 중고업자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런 장비들에서 쏟아져 나오는 기계 부품들 대부분은 일제와 독일제라고 한다. 삼성에서 메모리를 만드는 장비에 들어가는 대부분의 부품 등도 미제와 일제, 독일제 등이다. 일례로 서버 모터는 LG의 새 제품보다 일제 중고품의 가격이 더 높다다고 할 정도다.

 
이처럼 한국 제조 경쟁력은 정밀기계, 우주항공, 제약 등의 다른 많은 분야에서는 선진국의 50% 수준도 이르지 못했다. 이런 형편에서 선진국과 전면적인 FTA를 맺게 되는 것은 우리가 추격해야 할 그런 고부가가치 제조 사업을 포기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삼성, 현대, LG등의 전자, 자동차, 조선 업종만으로 5천만 인구가 먹고살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면, 현 시점에서 한미-FTA와 한-EU FTA는 그 업종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경제적 자살골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 점이 선진국과 체결하는 FTA의 가장 큰 문제점이다.


이런 문제의식이 전혀 없다 보니, 한미 FTA 반대 운동이 전면적으로 전개되고 민주당이 그것을 마지못해 당론으로 채택했을 때조차도 한-EU FTA에 대해서는 아무 문제의식 없이 합의 처리하게 된 것이다.

노무현은 토론 등 민주적 의사 결정을 매우 중시한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한미 FTA 협상 추진과 그 타결 과정에서 보면 비밀주의에 속전속결로 의견 수렴 과정을 전적으로 배제해 왔다.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신념이 얼마나 강한지 미국이 4대 선결 조건(약값 적정화, 스크린쿼터, 자동차배출가스 기준, 쇠고기 수입재개)을 제시하자 군말없이 받아들였다. 그것은 우리나라 환경과 보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였을 뿐만 아니라 최소한, 협상 과정에서도 미국에 다른 양보안을 얻어낼 수 있는 조건으로 제시할 수 있는 사안들이었다. 이명박이 한미FTA 추가 재협상으로 양보한 사안은 '4대 선결조건'에 비하면 그냥 조족지혈 수준이었다.
 

노무현의 핵심 측근 중의 한명인 안희정은 이명박 정부에서 한미 FTA 반대 운동이 절정에 올랐을 때조차도, 한미FTA 자체를 반대하는 건 곤란하다고 하였다. 이명박 정부를 대표하여 토론회 나온 김종훈이, "미 광우병이 정말 진실이라면 미국 사람들이 어떻게 멀쩡하게 지낼 수 있냐"고 하고 "투자자 국가 직접소송 제도는 한국 기업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강변했던 논리는 다름 아닌 열린우리당 송영길이 한미FTA 반대 토론자에게 윽박하던 바로 그 주장 그대로였다.
 

한마디로 친노 486 그룹은 주사파에서 뉴라이트로 전향한 운동권들과 대북정책에만 다소 차이만 났을 뿐, 시장만능주의에 대한 신념은 그들과 본질적으로 동일했다.

 
공무원들조차도 삼성인력개발연구원에서 연수를 받게 하였다. 국무총리실, 공정거래위원회, 금융감독위원회, 재경부 등 3급 이상 고위공무원들이 1박 2일에서 2박 3일 동안 합숙하며 교육을 받았는데, 재벌과 대기업을 관리, 감독해야 할 정부 기관이 재벌의 인력관리 회사의 교육 대상이 되는 놀라운 상황이 연출되었다.

 
노무현이 재벌총수와의 만남에서 '이제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고 표현한 것은 이런 현실을 극명하게 반영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분배 정의를 실현되기를 바랐던 유권자들의 소박한 희망을 스스로가 철저히 짓밟은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처럼 486친노 가신 그룹으로부터 노무현에 이르기까지 삼성으로부터 한국적 신자유주의를 주입받았던 이들은 5년 집권 기간 내내 금융 자유화와 시장근본주의에 경도되어 부동산 거품을 키워나갔고 뒤늦게서야 진정시키기에는 너무 늦은 상황이 되어버렸다.
 

노무현 정부 때 경제부처에 있던 관료들은 모두 김대중 정부는 물론 김영삼 정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노태우 때까지 이어지는 관료엘리트들 출신이고 앞서 말한 바대로 그들은 그 이전부터 시장 근본주의 철학을 모두 공유하는 자들이었다.
 

김대중 정부 때 초대 재경부 장관을 했던 이규성은 노태우 때 재경부 장관을 맡았고, 진념 경제부총리 또한 노태우 때 재무차관을 역임했다. 제일은행을 졸속으로 매각하며 IMF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한 이헌재는 이회창을 지지하였던 재경부 핵심 관료였다. 그리고 그는 노무현 정부 때도 다시 재경부장관으로 올라선다. 전윤철, 강봉규, 김진표 등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들은 신용카드 대란을 야기한 길거리 모집 허용 정책을 수립한 장본인이었고, 노무현 정부에게 금융허브론을 뒷받침했던 김기환 등은 경제 관료 출신들은 IMF를 핑계로 파견근로법과 정리해고제를 전면적으로 만들었던 인물들이었다.
 

이들 관료들 대부분은 관직에서 퇴직한 후, 대기업과 금융기관에 취업하거나 김앤장 법률사무소 등의 고문이 되어, 정부 로비를 주도한다. 예컨대 김앤장은 칼라일펀드, 론스타 등 외국 투기자본의 법률 대리를 도맡아하는데, 외환은행을 팔아먹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결론적으로 80년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집권자가 모두 다섯 번 바뀌었어도 이들이 주도했던 정부의 경제정책은 일관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집권자는 저마다 이전 정권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며 국민들에게 경제정책을 보따리를 제시했지만 포장지만 달랐을 뿐 시장주의라는 그 내용물은 언제나 똑같았던 것이다.

  

경제 정책이 정부의 성격을 규정하는 핵심적인 가늠대로 작용한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김영삼과 김대중, 그리고 노무현과 이명박의 본질적 차별성을 구별해 내는 것은 김일성과 김정일을 정치적으로 구별하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한 일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현 야권 지지층이 외환위기의 책임을 김영삼으로 묻는다면 같은 논리로 김대중 또한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양극화를 더욱 확산시키는 이명박을 욕할 때 그 논리는 똑같이 노무현을 향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외환위기 발발과 서민경제 붕괴를 박정희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려는 욕구를 가졌다면 박정희식 산업정책 전반을 해체한 김영삼을 옹호하면서 시작해야 한다.
 

조선시대 때 성리학적 세계관 내에서 가례 등 소소한 차이를 두고 남인과 서인, 노론, 소론 등으로 갈라진 집권세력 내의 붕당정치가 그 격렬한 대립양상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실질적인 삶의 개선과 별 관계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여-야의 대립구도 속에서의 권력투쟁은 서민들의 입장에선 특별히 누군가를 지지해야 한다는 정치경제학적 근거가 없다는 데 신자유주의에 신음하는 우리들의 비극이 놓여 있는 것이다.
 

서민층을 희생시키는 이명박 정권을 지지하는 서민들을, 바보라고 일컫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리고 바로 똑같은 이유로 그 욕은 현 야권 지지층에도 그대로 반사되어 돌아올 것이다. 새누리당의 혐오스러움과 민주당의 가증스러움. 이것이 두 집권세력을 교차로 경험하며 느껴야 했던 우리들의 솔직한 감정이다.
 

정치세력에 대한 기본적인 평가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관점에서 쓰다 보니, 이번 글이 경제 쪽으로만 치우친 감이 없지 않다. 그리고 글도 너무 길어졌다. 다음 시간에는 여, 야의 정치적인 측면을 좀 더 조명하며 현 정치권의 여-야의 구분의 무의미성을 좀 더 논의해보겠다.

 

 

한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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