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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내란음모죄
게시물ID : sisa_21252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쿤타치
추천 : 10/3
조회수 : 634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2/07/05 16:05:30
...는 레알! 김대중은 진짜로 내란을 꾸미고 있었다.











군사쿠데타를 꿈꾼 김대중, 내란음모는 1972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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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지하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1972년)에 이종찬 중앙정보부 보좌관과 함께 혁명을 꿈꾸고 준비한 적이 있다"면서 '군부 쿠데타'를 모의했었다는 사실을 회고록을 통해 밝히고 2005년 5월 3일 국민대 강연에서 다시 한번 말한 바 있다.

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0505/h2005050414165321000.htm

 

그는 회고록을 통해 '이종찬 전 국정원장과 함께 죽음을 각오하고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내세우는 혁명을 모의한 적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대통령은 김대중을 세우되 책임지는 각료와 집권 세력의 3분의 2는 김지하 세력이 차지하고, 나머지는 이종찬 세력이 차지하는 것 등에 대해 합의했다고 발기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10월  유신이 성공하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72년에 김대중이 일으키려 하였던 군사쿠데타를 10월 유신이 막자 김대중은 일본에 건너가 조총련 산하단체 한민통 두목이 되었으며, 북한에서 보내주는 공작금으로 정치활동을 하였다.

 

김대중은 해방정국 때 공산주의자였지만 북한과의 첫 연결고리는 1973년 결성된 한민통이었다. 비록 허수아비였을망정 김대중은 한민통 우두머리로 임명되었다. 바로 이 한민통이 1974년 박정희 암살을 시도했던 단체요(박정희를 암살하려다 육영수를 쏜 문세광이 한민통에서 1년간 암살훈련을 받았음), 광주 녹두서점에 북한 사상서적들을 공급하다가 1980년 5월에 미리 입국하여 광주사태를 선동하였던 단체였다.

 

1980년 5월 10일 중국은 일본 정부에 두가지 사실을 알렸다. 5월 20일 경 김재규 사형 집행을 기해 군부 내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이며, 때를 같이하여김일성이 남한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면서 남침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으며, 일본은 그 사실을 즉각 미국과 한국 정부에 알렸다. (이 사실을 왜 아직도 아는 이가 드문지 의문이다. 이것만 알아도 5.18이 민주화운동이 아니고 무장폭동운동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중국은 1980년 5월 20일에서 5월 22일 사이에 군부에서는 김재규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킬 때 김일성이 남한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면서 남침하려 한다는 사실을 일본 정부에 통보하였다. 김일성이 남침 전에 먼저 중국에 알려야 했는데(조중 상호방위조약 때문), 당시 중국 경제의 목을 핑퐁 외교에 달고 있었던 중국은 다시 한국전이 발발하여 모처럼 30년만에 찾아온 미국과의 외교 정상화 기회가 물거품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 정부에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통보하였다.

 

그래서 당시 석유위기 때문에 5월 10일 중동 석유외교를 떠났던 최규하 대통령이 일정을 취소하고 갑자기 귀국하였으며, 신현확 총리가 5.17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였고, 미국의 항공모함 두 대가 급히 부산과 제주도에 입항하였던 것이다. 한국 뉴스는 이 특종기사를 보도하고 싶어했으나 5.17 비상국무회의는 경제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보도치 못하게 하였다.

 

광주 녹두서점 주인 동생은 부산항에 미항공모함이 입항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폭동 주동자들은 미국이 폭동을 지지하기 위해 항공모함을 보냈다고 대자보를 붙여 광주시민들을 속였다.

 

혁명 모의가 중단된 이유에 대해 김지하는 강연회에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총으로 살해한(1979년 10월 26일, 10.26사태) 이후 하나회가 방대하게 세를 형성하면서 '더이상은 안되겠다'는 마음에 발을 뺐다고 말했다. 따라서 김대중은 최소한 1980년까지는 군부내의 김재규세력과 더불어 군사 쿠데타를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1980년 7월 4일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에서 김대중이 내란음모를 기획하였다는 것은 신군부에 의해 급조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수 있다. 오래전부터 꿈꾸어온 내란음모였던 것이다.

 

당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담당했던 중앙정보부 수사관 이기동씨는 전남 광양 출신인데, 김대중 일가에서 동향사람으로 여기는 여기는 막역한 관계이다

 

이기동은 그가 1999년 7월호 신동아에 기고하였던 특집기사 "남산 지하실에서 만난 김대중,김홍일,한화갑"에서 '김대중의 내란음모는 사실이었으며, 그럼에도 자기가 김대중을 어떻게 보호하여 주었는지'를 증언하였다.

 

"나는 '이 여사님, 제가 직접 보았으니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여기 군인들을 시켜 강제로 회수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ㅇ낞으니 저에게 건네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자 이 씨는 체념한 듯 A4용지 두 장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두 장 중 한 장에는 소위"예비내각" 명단(당시 일간지에 발표)이 적혀 있었고 또 한 장에는 5월 22일 정오에 서울 장충단공원을 비롯한 각 지방 시청 앞에서 '민주화 촉진 국민대회'를 개최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즉 5월 22일에 전국적 민중봉기를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http://blog.naver.com/far_rightist?Redirect=Log&logNo=120157339477

 

‘예비내각’ 명단이란 무엇인가?  요즘 아이티에서는 반군과 정부군간에 시가전이 한창이다.  왜 반군인가?    ‘예비내각’ 명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왜 6.25때 북괴군의 남침이 침략이었는가?  '예비 시장"명단을 가지고 쳐들어왔기 때문이다.  4월에는 김영삼씨 지지자들과 각목 들고 싸우던 김대중씨 일행이 선거를 거치지 않고 민중봉기로 집권하는 혁명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그리고, 물리적인 방법으로 최규하 대통령을 강제로 하야시키고 내각을 개각하여 하였던 이런 시도는 법치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므로 "민주항쟁"도 "민주화운동"도 아니다.

 



김지하 "朴統때 이종찬과 쿠데타 모의"
'혁명 모의' 재확인, 박정희 시해후 무산…"독재자 숭배하는 이유 뭔가"

시인 김지하씨가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과 함께 혁명을 꿈꾸고 준비한 적이 있다"면서 '군부 쿠데타'를 모의했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는 3일 오후 국민대학교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박정희 정권이 엄청나게 강권이었다”면서“거기에 부딪치다보니 시인답지 않게 병법도 공부했었다”며 '혁명의 추억'을 회고했다.

 

그는 "이종찬 선배가 나와 고 조영래 변호사를 피신시키는 등 민주화운동에 숨은 공이 있다"고 밝히고 그와의 혁명 논의가 상당한 정도로 진행됐었다고 말했다.  

 

김씨가 혁명을 모의했었다는 사실은 그의 회고록에도 이미 밝혀진 내용이다. 그는 회고록을 통해 박정희 정권에서 중앙정보부(전 국정원) 보좌관을 맡았던 이종찬 전 국정원장과 함께 죽음을 각오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새 대통령으로 내세우는 혁명을 모의한 적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자서전에서 김씨는 "우리 두 사람은 학생운동이나 민중운동은 이념 그 자체를 그대로 관철하려 들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구상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는 것, 그 구상은 박윤배·청강 장일순·이종찬과 그 동료들 그리고 나와 내 동료들로 이루어지는 한 통합 세력에 의한다는 것, 지금의 운동은 결국 새로운 군부(軍府)의 효과적 쿠데타에 의해 관철되어야 한다는 것, 그 쿠데타의 준비는 우선 장일순과 이종찬 두 사람의 합의에 의해 지도된다는 것, 대통령은 김대중(金大中) 씨를 세우되 책임지는 각료와 집권 세력의 3분의2는 반드시 우리 세력이 점거해야 한다는 것 등에 대해 합의했다"고 밝히고 있다.

 

청강 장일순 선생은 5·16 쿠데타 직후 펼친 중립화평화통일론을 빌미로 3년간 옥고를 치른, '민주화운동의 배후'로 평가받는 사상가다.

 

김씨는 또 "이종찬은 곧 송죽회(松竹會)의 믿을만한 자기 동료 한 사람을 상시적 연락책으로 원주의 청강 장일순 선생에게 연결시킬 것, 쿠데타의 시기와 방법 등은 유동적이되 최종적으로는 바로 전술(前述)한 세력의 지도부에 의해 결정되며 그 전까지는 목숨을 걸고 그 기밀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 미국의 지지나 동맹국들의 문제, 북한이나 러시아·중국의 있을 수 있는 동향 등은 모두 이종찬 선배가 맡을 것 등에 대해서도 합의했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와 관련해 그는 "며칠 있다 장일순 선생에게 이 사실이 보고되었고 바로 이틀 후엔가 이종찬 선배의 동료인 한 현역 중령이 사복 차림으로 장선생의 봉산동 자택을 한밤중에 다녀갔다"면서 혁명 모의가 무르익었다고 말했다.

 

혁명 모의가 중단된 이유에 대해 김씨는 강연회에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총으로 살해한 이후 하나회가 방대하게 세를 형성하면서 '더이상은 안 되겠다'는 마음에 발을 뺐다고 말했다.

 

한편 박정희 기념관 건립 반대에 앞장서고 있는 그는 일각에서 '박 전 대통령이 국민들을 먹고 살게 해주었다'고 주장하는 데 대해 "인정할 수 있다"면서도 "(박 정권의 경제계획은) 이미 민주당 때부터 시작된 일인데 독재한 인물을 숭배할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말했다.

 

한국아이닷컴 뉴스부 [email protected] 
2005.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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