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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ID : phil_312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타자기사★
추천 : 1
조회수 : 49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07/07 05:20:35
포스트 포드주의 경제에서 보편화된 서비스 노동은 정치를 자신의 영역으로 호출한다.
지금 노동자는 정치적 행위를 수단으로 노동을 해야 한다.
서비스 노동자가 고객과 소통하며 관계를 맺는 정치적 행위를 할 때, 이 행위는 행위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윤이라는 결과에 수단으로써 종속된다.
사랑한다며 수화기 너머로 수줍게 고백하는 콜센터 상담원의 구애, 혹은 내게 노골적으로 상냥한 미소에 던지며 이미 마음을 열었음을 암시하는 매력적인 백화점 여직원에게 조차 우리는 섣불리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는다.
그들의 인격은 내가 아니라 이윤에 종속되어 있다.
우리는 진정성 없는 소통 행위를 반복해야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고, 비로소 노동의 진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데, 이는 예전 대부분의 공동체에서 경계했던 노동형태다.
서비스 노동이 보편화된, 포스트 포드주의 경제 이전에도 정치를 호출한 노동형태는 물론 존재했다.
예컨대 선생님, 의사, 성직자 등등의 직업은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직업이었고, 아마추어리즘에 입각한 정치적 능력이 중시되는 노동이었다.
교사가 학생을 기계적으로 가르치거나 의사가 환자를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만 치료하려고 할 때 교육과 의료는 붕괴된다. 학생과 환자의 우발성, 우연성, 고유성을 긍정하는 정치적 능력이 뛰어날 때 그는 훌륭한 교육자이며, 고귀한 의료인이다.
하지만 교사와 의사 그리고 성직자는 직업의 하나일 뿐이고, 이들은 교육, 의료, 성직 행위라는 노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
따라서 공동체는 이들의 직업이 생계 수단으로써의 노동일 때조차 노동으로써의 성격을 보류시키기 위해 각별히 신경을 써야했다.
즉 교사는 교육 행위를 통해 생계를 보장받을 때에도 생계를 목적으로 교육을 하는 것이 아님을 최소한 명목상으로나마 주장해야했고, 의사는 환자에 대한 치료가 돈보다 우선임을 선서해야 했다.
예컨대 교사의 임금은 고객인 학생이 수강한 수업에 대한 수업료가 아니라 스승의 은혜에 대한 보은의 선물로 포장돼야 했던 것이다.
교사, 의사, 성직자 등등의 직업을 사람들이 여타의 노동 형태와는 구분되는 기준으로 높게 평가했던 이유는 이들이 사람을 상대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임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아니라 행위 그 자체에 목적을 두어야 하는 희생적 성격 때문이었다.
학생, 환자, 성도가 교사, 의사, 성직자의 고객이 될 때 교육, 의료, 종교는 망가진다는 사실로 인해 공동체는 이들의 행위가 생계를 위한 수단일 때조차 노동으로써의 성격을 지우기 위해 노력했다.
노동자가 자신의 생계수단 비용인 임금에 신경을 쓰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면, 비록 노동자이지만 정치력을 발휘해야하는 교사, 의사, 성직자 등등이 임금에 신경을 쓰는 것은 공동체의 암묵적인 비난의 표적이 됐다. 한편 광대, 집사(하인) 등의 서비스 노동은 천대해야했다.
이들은 사람을 상대하는 정치 행위를 수단으로 하는 노동임에도 불구하고 교사, 의사 등등과는 달리 노동으로써의 성격, 즉 생계수단으로써의 성격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한때 한국 사회에서 연예인을 ‘딴따라’라며 힐난했던 정서의 배후는 정치를 포섭한 노동이, 노동으로써의 진정성을 노골적으로 주장할 때 이 영역 종사자들의 정치성이 타락한다는 사실에 근거를 둔다.
진정성이 없는 비굴한 인간은 천대받아 마땅하다. 인간과 인간이 관계를 맺고, 소통을 하는 정치적 능력이 이윤 추구의 메커니즘에 종속될 때 인간은 인격적으로 비굴해지기 쉽다.
이윤의 흐름에 따라 유연하게 소통해야 하는 직종의 종사자는 과도하게 테크니컬한 정치적 스킬을 보유하게 되는 반면, 이들의 지나치게 조리 있는 발언은 중력을 상실한 채 신뢰할 수 없는 유희적 잡담 수준으로 추락한다.
쉽게 말해 그들은 비굴한 사기꾼의 외양을 갖게 된다.
따라서 예전에 대부분의 공동체는 노동이 정치를 포섭할 때, 노동과 정치를 구분하려 각별히 주의했고, 양자의 구분이 미숙한 영역을 천대함으로써 이것들이 사회 전면부에 등장할 수 없도록 하거나 오직 음성적으로만 유통될 수 있도록 신경을 썼다.
노동과 정치의 하이브리드(잡종화), 이는 공동체의 재앙이다.
과도한 정치적 기술이, 과소한 정치적 진정성과 합류할 때 인간은 비굴해진다.
쉽게 말해 이윤에 종속된 정치적 행동은 빈말 노동이며, 생존을 위한 잦은 빈말은 인간의 인격을 굴종적으로 바꾸기 쉽다.
비굴한 인간들의 사회에서 정치는 지능적으로 부패하며, 정치가 부패한 사회의 미래는 말할 것도 없이 참담하다. 포스트 포드주의 경제에서 서비스 산업은 사회의 보편적 노동으로 성장했다.
우리는 노동하기 위해서 고도로 테크니컬한 정치적 스킬을 소유해야하고, 살아남기 위해 정치적 진정성을 포기해야 한다.
변화무쌍한 이윤의 흐름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해서 정치적 능력은 진정성의 닻을 제거해야 한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지만 지금 우리는 생존을 위해 이윤이 요구하는 대로 생각해야 한다.
생각하는 대로 살려고 할 경우 위태로운 생존을 감수해야 한다.
노동의 변화는 노동자의 멘탈리티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앞서 언급했듯 포드주의의 노동자가 과묵해야했다면, 포스트 포드주의의 노동자는 수다스러워야 한다.
서비스 산업의 급격한 성장은 노동자들의 과잉된 정치적 기술과 과소한 정치적 진정성을 교차시킴으로써 교묘하게 정치에서의 퇴행을 야기한다.
지금 우리들은 수다스럽게 정치적 이슈를 떠들어대지만, 이 정치적 수다가 근본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포스트 포드주의에서 수다스런 다수의 목소리는 텅 비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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