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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갤문학) 콩립투사 완결판
게시물ID : thegenius_3133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히히힝
추천 : 17
조회수 : 1117회
댓글수 : 19개
등록시간 : 2014/01/17 22:51:55
[출처]홍진호갤
*더 지니어스를 바탕으로 썼습니다. 가볍게 재미로만 보십쇼*


1.



사람들이북적거리는기차역한복판에서,이은결은자신의주머니무언가를꺼 내어홍진호에게주었다.지하비밀모임에서자주쓰던노란색쪽지와얼마간 의돈이었다.돈을보고홍진호가의아해하자이은결은,

"기차 값을주고도돈은남습니다.이기차는왕복이아니고편도가아니겠습니 까?"

라고말하였다.순간홍진호는목이메어더이상말을할수가없었다."부디 건강하십시오."라고고개숙여인사를하고등을돌려플랫폼을나서는이은결 의뒷모습을보며비장하고애끓는마음에눈물만흘릴뿐이었다.


2.

다음 날도 무사히 밝았다.
이두희는 아침나절부터 바깥을 쏘다니더니 저녁무렵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어디 다녀왔냐는 홍진호의 질문에 찔끔 놀라기만 한다.

"그냥 좀, 분위기 좀 보러."

다들  별 말을 하지 않았다. 홀로 떠난 이은결의 빈자리가 의외로 커서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그 침묵은 거사가 있을 다음 날 점심 무렵까지도 이어졌다.

"호외요! 호외! 광장에서 누군가가 폭탄을 던졌답니다!"

그러나 폭탄이 불발로 끝났다는 소식에 홍진호는 잘근잘근 물던 연필을 떨어뜨렸다. 임요환은 골방을 나가버렸고, 구석에 선 이두희만 새파래진 얼굴을 양 손으로 감쌌다.

"은결……."


3.

믿을수없는지금의사태에홍진호는물고있던연필을떨어뜨렸다.여러가지 로어지럽던머릿속에한가지이름이떠올랐다.이두희의소개로잠시그들의 골방에들렀던여자.신식학교의학생이라고했던,

"조유영…!"

자리를떨치고일어선그는골방을나와찻집을향해달렸다.자신의도움이필 요하다면언제든오라고했던바로그곳이었다.아니나다를까,그곳에그녀가 유정현과함께있었다.

"이게 대체무슨짓이란말이오?!"

홍진호가버럭소리를질렀다.유정현은의아한눈으로홍진호와조유영을번 갈아쳐다보았고,조유영은빙글빙글웃으면서찻잔을들었다.

"당신이잖아.당신이그놈에게알린거야."

"누가 알리든그게중요한게아니잖아요.무엇보다중요한건-,"

조유영이비웃는표정을홍진호를올려다보며말을이었다.

"저희가그사람생사까지책임져주는거였나요?솔직히저는그건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4.

홍진호는 이를 악물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이곳에서 싸울 수는 없었다.

"저뿐만의 생각도 아닌걸요?"

"그게 무슨."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고-"

"누가 그런 말을 하덥니까?"

"여기 찻집보이 미스터 노가요. 왜 지원씨를 노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전 이게 옳다고 생각해요. 독립을 한다 어쩐다 하지만, 전 그 사람의 폭력적인 행동이 독립에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기어이 홍진호는 소리쳤다.

"이런 상황에서 폭력은 통용되는 겁니다! 조선인으로서 그걸 척결하자고 몰아세우는 거,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뒤돌아 나가는 홍진호의 앞에서 찻집 보이가 쪼르르 달려와 문을 열었다.

"아하하하, 좋은 시간 보내셨습니까? 미스터 홍, 또 오세요!"

눈치없는 인사에 홍진호는 대꾸도 없이 나갔고 보이는 히죽이며 문을 닫았다.
바깥에서 기다리던 이두희는 홍진호가 나오자마자 그 뒤를 따라갔다.

"어, 어떻게 됐어?"

"미스 조가 한 짓이다. 저기 미스터 노도 관련된 거 같고."

"미스터 노라면?"

"찻집 보이로 일하지만, 사실은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는 정보통으로 유명하지. 아마도 그 둘이……."

이두희는 그저 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한편 골방을 나온 임요환은 근방 소식을 담당하던 소년을 찾아갔다.

"폭탄을 던진 놈은 그 자리에서 붙잡혔답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알려주지 않으니 모르겠지만요, 이젠 틀렸습니다. 임요환씨는 어쩔 겁니까?"

"이런 폭력으로는 더 이상 수가 없다."

"그럼 홍진호씨에게는 안 갈겁니까?"

"난 이제 나 혼자 움직이겠다. 네가 좀 전해다오."

임요환은 소년에게 동전 한 닢 쥐어주고는 떠났다.
소년은 동전을 주머니에 쑤셔넣고 골방으로 냅다 달렸다.

임요환이 떠났다는 말을 들은 홍진호는 예상했던 듯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층 더 비어버린 골방에서,

"두희, 이젠 우리뿐인 것 같다."

말했고 이두희 또한 알았다는 듯 눈을 마주쳤지만 눈동자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홍진호는 그 눈빛을 애써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그날 밤, 이두희는 골방을 나와 이상민이 있는 마천루의 노름장으로 향했다.


5.

이두희가찾아오기전,이상민을먼저만난것은임요환이었다.

"아이고,이게누구신가."

이상민이일어서며임요환에게악수를청했다.임요환은이상민이내민손을 잡으며그의눈을보았다.속내를전혀드러내지않는눈빛이지만어딘가모르 게차가운ㅡ그래서더욱더무섭게만느껴지는사람이다.문득아내의말이떠 올랐다.그에게현상황을타개할비책이있으니그것을구해야한다.

"들리는말에이선생께서소중한것을가지고계신다고…."

"아, 그것말입니까?있지요.있고말구요."

사람좋아보이는미소를지으며이상민이말했다.아내가말했던그것일까.만 약그것이라면'일연회'와의싸움에서유리한고지를점령할수있을것이다.그 것도홍진호의도움없이,나자신의실력으로보기좋게한방을먹일수있는 기회를잡을수있다.그렇게생각한임요환은나름자기가생각했던무기를꺼 내들었다.

"헌데 말입니다,이선생.당신이가지고있다는그단서말입니다."

"어이쿠,단서라는것까지알고계시다니역시임씨집안자제다우십니다요."

"나역시홍진호에게들은단서가있습니다."

홍진호라는이름석자에이상민의눈빛이살짝흔들렸다.자신이벌이고있는 위대한과업에있어가장큰걸림돌이바로그홍진호였다.홍진호가이상민의 목을조르기위해숨겨두었던그결정적인단서를이열등감에사로잡힌불쌍 한남자가스스로들고찾아온것이었다.

"그래요?어디,협상을시작해보도록합시다."


6.

"나에게 필요한 건 비밀번호 뿐입니다."

임요환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상민의 눈이 번뜩였다.

"그 말은, 계좌번호는 알고 있다는 말인데. 잘 됐구만. 우린 서로가 필요하겠어. 어서, 알려주시오."

"비밀번호가 있습니까?"

"물론. 하지만 계좌번호가 먼저요."

"아니, 비밀번호 먼저."

의외로 임요환은 단호했다. 그러나 이상민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계좌만 안다면, 그곳의 돈은 모두 자신이 차지할 수 있었다.

"비밀번호를 그대가 알면 끝이니 장소 먼저-"

결국, 품에서 봉투를 꺼내는 임요환의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리고는 기어이 내민 손아귀의 봉투를 이상민이 잽싸게 낚아챘다.

"잠깐!"

임요환이 다급하게 손목을 붙들었다.

"비밀번호는."

이상민이 슬쩍 웃는다.

"실은 나도 반밖에 모른다오. **00"

"그런!"

그러나 이미 계좌번호는 이상민에게 넘어간 후였다. 임요환은 간신히 표정을 진정시켰다.

"정확히 반으로 나눠야 합니다! 반으로!"

"알았네, 알았어."

"분명 계약한 겁니다!"

이미 이상민은, 방을 나선 후였다. 임요환은 텅 빈 손바닥만 보다가 뒤늦게 자리를 떴다.


이상민은 방을 나오자마자 대지주 아들인 은지원을 불렀다. 은지원은 만주에서도 유력한 세력가 집안으로 사람들에게 노려지곤 했다. 며칠 전만해도, 모종의 연락이 없었더라면 그들의 결탁은 끝이 나버렸을 것이다. 은지원에게 계좌번호를 알리고 급히 돈을 옮기니 벌써 밤이었다.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누구?"

"이두희라고……."

"아, 알겠어."

그러나 이상민은 나갈 마음이 없었다. 조유영에게 연락해 이두희를 상대하라고 한 뒤, 느긋하게 밤을 보냈다.



조유영을 만나고 온 이두희는 골방 앞에서 한동안 망설였다. 아침이 되어 방을 나서던 홍진호가 먼저 그를 불렀다.

"왜 그래, 두희?"

"진호형, 나 고백할 거 있어."

대뜸 이두희는 홍진호 앞에 무릎을 꿇었다. 홍진호는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이두희가 어떤 일을 해왔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종종 서신을 빼돌렸고, 자신을 이기겠다며 조유영을 비롯한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니던 걸 봐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떠나고 둘이 남은 지금은 이두희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두희야, 이젠 너랑 둘이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제와서 과거를 고백하지 않아도 된다.'

홍진호는 마음 속 말을 숨겼다. 그러나, 이두희는 금방이라도 울것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형, 나 신분증이랑 총을 잃어버렸어. 이젠 아무데도 갈 수 없어."

언제라도 검열이 나오면 이두희는 끌려가는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해, 형."


7.

"지원씨. 이두희가 왔다 갔어요."

조유영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은지원은 중절모를 고쳐쓰고 별스럽지 않게 대꾸했다.

"미스터 홍도 왔다 갔어."

"그럼 혹시 그들이-"

은지원은 제 가슴팍을 툭툭 두드렸다.

"여기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를테니 걱정 말아, 유영."

"이두희는 걱정없지만 역시 그 사람은 만만히 볼 수 없어요."

"어차피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없어. 이두희의 발이 묶였으니 직접 나서겠지. 상민 형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미스터 홍만 붙잡으면 될 일이야."

그러나 유영은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이두희는 계속 돌아다니고 있어요. 오히려 신분증을 찾았다고 하던데."

그제야 은지원도 멈칫, 동작을 멈췄다.

"그럴 리 없는데. 총도 함께였는걸. 혹시 미스터 홍의 것인가. 상민 형님은 뭐라셔?"

"글쎄요. 도통 대답이 없으세요."

"그럼 조금 더 있어보지. 어차피 검문이 뜨면 가짜신분증은 모두 잡아갈테니."

벌써 어둑하니 하루가 지나고 있었다.


8.

이두희는 며칠동안 홍진호의 신분증을 들고 다녔다. 그러나 제 신분증과 함께 총이 있었기 때문에 불안함은 더했다. 막상 검열에 잡히면 홍진호의 신분증이 더 위험할 수도 있었다.
홍진호는 잠시만 모든 활동을 접자고 했다. 결국 몇달 동안 싸워왔던 모든 것을 멈추었다.
이은결이 남겨두었던 가네또라는 일제폭탄은 그대로였고, 떠나버린 임요환에게서는 소식이 없었다. 이쯤되니 차라리 오래 전에 중국 본토로 떠났던 의병장 남휘종이 그리울 지경이었다. 사자처럼 싸우던 그는 충칭에 간 후로 소식이 없었다.
홍진호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온종일 골방에서 신문을 읽고 책을 읽는 그를 보기가 괴로워, 이두희는 홀로 거리로 나왔다.
이두희가 나오자마자 찻집보이 노홍철이 다가왔다.

"이봐요, 우리 형님께서 좀 보잡니다."

"이상민 형님께서?"

놀란 이두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고는 급히 따라나섰다.
노홍철은 왠일인지 조용했다. 마천루의 꼭대기층에 도달한 후에야 이두희는 새삼 긴장감에 손바닥의 배인 땀을 슥 닦아냈다.

"두희, 왔구만!"

이상민은 크게 웃으며 맞이했다. 그 혼자였다.

"앉아, 두희. 요새 뭐하느라 얼굴을 그렇게 안 보여."

"좀, 조금 바빴어요."

애써 시선을 피하는 이두희의 어깨를 이상민이 꾹 잡았다. 눈이 마주쳤다.

"두희, 긴 말 안 할게. 내가 왜 불렀는지 알지?"

"……."

"곧 만주에 피바람이 불거야. 신분증 없이 여기서 깽판치는 것들 다 잡아갈거라고. 특히 무기랑 엮이면 답도 없는 거 알지? 얼마 전 은지원이가 험한 꼴 당할 뻔 해서, 이번엔 그냥 안 넘어 갈거야."

"무, 무슨 말씀이 하고싶으신 건데요."

"내가 들은 게 있지. 은지원이가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몰래 기미 줬다며. 그래서 내가 두희를 도와주려고."

이두희는 입안이 바짝 말라버린 것 같았다. 주먹 쥔 손이 차가웠다. 이상민은 환한 미소 그대로, 술 한잔을 건넸다.

"이두희, 나 좀 도와줘. 홍진호가 이번에 들어가야 해.독립운동인지 뭔지 한다고 여기저기 깽판 치고, 사람들 갈라놓잖아. 그러니까 두희가 한번 도와줘. 나한테 조선왕실에서 나온 보물이 있어. 도와주면 내가 두희 모른 척 하겠어?"

이두희는 건넨 술잔은 내려놓고 소매로 이마를 훔쳤다.

"일단, 제 신분증 돌려주세요. 초, 총도요. 괜히 그걸로 꼬리잡히기 싫어요."

"당연하지, 그럼."

이상민은 웃으며 일하는 아이를 불러, 다른 이들을 데려오라 말했다. 이두희는 이를 악물고 눈을 감았다 떴다. 정신을 차릴 때였다.


9.

방에 들어온 이는 지주 아들 은지원, 신여성 조유영, 찻집보이 노홍철, 그리고 교수이자 통역가인 유정현이었다. 이두희를 둘러싸고, 은지원이 품에서 신분증을 꺼내 탁자에 두었다.

"두희, 너무 나쁘게 생각말아. 네가 야학소 탁자에 두었길래 챙겨준다는 게 그만."

"장난인 거 알죠? 두희씨가 그리 심각해할 줄 몰랐어요. 어차피 검열 전에 줬을텐데요."

"미안허이. 내 비록 그자리에 있던 건 아니었지만, 철없이 한 일이니."

은지원과 조유영, 유정현이 모두 사과하고 난 후에도 이두희는 바로 말하지 못했다. 우선 탁자에 올려둔 신분증을 확인하고 품에 넣어 단단히 갈무리했다.

"초, 총은요?"

"그거 두희씨 꺼였어요? 왜 그런 위험한 걸 들고 다녀요. 혹시나 해서 챙겨뒀지. 자-"

총알은 없었다.
이두희는 총을 만지작거리다 역시 품에 넣었다.

"내가 두희한테 정말 미안해. 그러니 노여움 풀어."

이두희는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너무 오랫동안 안 돌려주셨어요. 장난이겠거니 했지만, 걸리면 위험해질 거 아셨잖아요. 계속 기다렸는데."

이상민이 이두희의 어깨를 두드렸다.

"두희 맘 내가 알지. 그래서 저렇게 사과하잖아. 다 잊고. 응, 알지?"

이두희는 고개를 끄덕인 후 천천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새벽녘이 된 만주바람은 어느새 차가워서 금방이라도 겨울이 올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두희는 차라리 폭풍이라도 쳤으면, 하고 바라며 골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틀 후, 이상민의 계획대로 홍진호가 있는 골방으로 제국군이 들이닥쳤다. 둘러싸인 홍진호와 이두희는 그대로 광장으로 끌려나갔다. 이두희가 힐끗 홍진호를 보았지만 그의 입매는 여전히 굳게 다물려 있었다.

"진호형……."

홍진호는 그러나 이두희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광장행이라 함은 모든 게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제대로 된 재판도 없이 말도 안 되는 죄목으로 즉석에서 내려지는 판결을 받게 된다.
저 형장의 최근 피해자는 이주조선인들 대리로 법정에 서던 임윤선이라는 여자였다. 친하지는 않았지만, 홍진호도 임윤선의 도움을 종종 받았었기 때문에 그 소식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다행히 중국본토의 감옥으로 이송되었다고 했는데, 역시나 이후로 소식은 끊겼다.
광장의 판결에서 벗어난 건 임요환이 유일했는데, 임윤선이 재판에서 공범로 그를 지목한 것이다. 그러나 임요환은 무사했다. 아마도 집안의 힘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또한 그 말은 집안의 힘도 없는 그들로써는 광장을 벗어날 재간이 없다는 것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광장 한 가운데 선 홍진호와 이두희에게 시선이 쏟아졌다. 안면이 익은 자들 모두 시선을 피하기도 하고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이두희,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느냐?"

한 발자국 뒤에 선 장교가 말했다. 아마도 이상민의 돈을 먹은 자이리라. 이두희는 대답하지 않고 멀리 이상민과 조유영을 확인했다.

"무기밀매다. 누가 시켰지? 사실대로 말하면 훈방으로 처리해주겠다."

"무기 밀매라니!"

홍진호가 탄식하는데, 오히려 이두희는 낯이 희게 바래기만 했다.

"형……."

이두희는 조용히 홍진호를 부르며 고개를 돌렸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홍진호는 웃고 있었다.

"괜찮아."

"고문 받을지도 모르는데."

"우리, 잘해보자."

이두희는 결국 홍진호에게서 얼굴을 돌렸다. 심호흡을 하고 입술을 악물었다.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이두희는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공범, 공범은 조유영입니다!"


10.

삼일 전, 임요환은 계좌가 비었다는 걸 깨달았다. 어느정도 각오를 했었음에도 충격은 컸다.
조선왕실에서 고이 흘러나왔던, 독립을 위한 투자금으로 쓰였을 자금이었다.
이전까지 그 자금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사람은 홍진호였다.

"군대도 만들고 무기도 들여와야지. 비밀번호만 있으면."

어디에서인지 돈냄새를 맡은 홍진호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골방에서 한 말들이었지만,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홍진호는 무방비에 가까웠다. 이후 임요환이 자금줄의 뒤를 캐는 건 매우 쉬운 일이었다.
임요환은 때를 봐서 자금을 빼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홍진호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일이 잦아지며 더욱 생각은 굳어졌다. 그 많은 돈을 한순간에 사라져버리게 할 순 없기에, 확실치 않은 승리를 위해 조선의 젊은이들과 소중한 자금을 희생할 순 없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만주에 오기 전부터 임요환에게는 민중을 깨우치는 게 우선이였다. 밑바닥에서 하나하나 가르치고 길러서,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치고 싸우자고 말했다. 그러나 만주에서는 모든 게 틀어졌다.
낭만적으로 살기에 만주는 조선인들에게는 한없이 척박했고 잔혹했다. 그래서 열성적인 청년들은 홍진호에게 모였고, 임요환은 어디에도 서질 못했다. 만주에서 그는 언제나 홍진호를 올려봐야만 했다. 그렇게 임요환이 제자리걸음을 하는 동안, 홍진호는 여러 시도를 했고 그만큼의 실패를 겪었다. 한 차례 실패할 때마다 사람들이 떠나갔다. 몇 명은 떠나고 몇 명은 잡혀갔다.
마침내 둘의 입지는 다시 대등해졌다. 이젠 자신의 방법을 쓸 차례였다.

분명, 자신의 차례였었다.

"……."

아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지만 차마 말할 수가 없다. 한없이 자신을 어리게 볼 여자이기에 더욱 더 입을 다물었다.

임요환은 다음 날부터 이상민과 은지원을 찾아다녔다. 그들을 만나는 건 어려웠다. 대신 그들과 연이 있는 사람을 찾아다니다, 간신히 야학소에서 조유영을 만났다.

"저희도 도움이 필요했어요."

조유영은 그를 숲쪽으로 끌어당겼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며, 낮고 빠르게 말했다.

"무기가 필요해요."

"무기?"

"그래요. 당신네 선박이라면 충분히 수송 가능하잖아요. 아니, 이미 가지고 있을 수도 있겠고요. 어때요?"

임요환은 머뭇거렸다. 무기라면 있다. 홍진호가 한때 탐내던 것. 그러나 구한말에나 쓰이던 것들이고 녹이 잔뜩 슬어 쓰레기 취급을 받는 물건이었다. 임요환은 정말 순전히 홍진호를 위해 그 무기들을 넘기지 않았다. 그런 무기를 들고 싸운다면 살아남지 못할 게 뻔했으니까.

"무기- 있군요?"

조유영을 속이는 건 그로서는 힘들었다.

"내가 바라는 건 두 가지 입니다. 첫째, 자금. 둘째, 은지원 씨의 땅 일부가 필요합니다."

임요환은 일단 제 생각을 밀고 나가기로 마음 먹었다. 학교를 짓자. 독립을 할 수 있도록 조선인들을 위한 학교와 마을을 다시 만들자.
조유영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래는 그렇게 성립됐다.



그리고 오늘, 광장엔 한차례 침묵만 맴돌았다. 이상민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고, 조유영은 흙빛이었다. 홍진호조차 넋이 나가있는 와중에 이두희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노홍철도 가담했습니다."

은지원은 부를 수 없었다. 그는 이곳에서 가장 높은 자와 함께 있었고, 보호를 받고 있다. 이두희는 여기서 만족하기로 했다.

"잠깐! 잠깐, 판결을 조금 미루겠다!"

다급하게 재판이 중지된 후 끌려간 창고에서 이두희는 생각에 잠겼다. 자신은 어떻게든 살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이상민에게 받은 게 있었다. 조선왕실의 보물이라 하니, 고고학엔 문외한인 본인이 봐도 그럴싸한 붉은 머리장식이었다. 그러니 저 둘만 죄를 지고 가면 된다.
이두희는 이은결을 떠올렸다. 얼떨결이라고는 하나 결국 그의 척살에 자신도 가담한 셈이다. 여태까지도 홍진호에게 말하지 못했던 비밀. 침통해하던 홍진호를 생각하면 아마 앞으로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두희, 괜찮니?"

반가운 목소리에 이두희는 눈을 떴다.

"요환이 형! 부탁이 있습니다."

"응."

"이거, 보석금으로 사용해주세요. 왕실 보물이니까 충분할 겁니다."

"그래."

임요환은 머리장식을 건네받고, 곧바로 홍진호를 보았다. 

"어제 은지원이와 얘기를 하려했다."

홍진호는 대답 없이 임요환을 직시했다. 임요환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당신과 또 한번 거래를 하고 싶다 전했지만, 은지원은 거래장소에 나오지 않았다.

"그 거래만 됐으면, 그랬으면……. 너희를 구하고 싶었는데."

기어이 고개를 돌리고마는 임요환을 보고, 홍진호는 한숨을 쉬었다.

"난 괜찮아. 저들은 이제 날 어쩌지 못해. 하지만 두희가……."

"이게 있으니까, 두희도 살 수 있을 거다."

임요환은 급히 머리장식을 들고 창고를 나섰다. 어둠과 적막 속에서 이두희는 홍진호를 보았다. 모든 걸 놓아버린 듯 포기해버린 얼굴. 그러나 홍진호가 눈을 떴을 때, 이두희는 어떤 열망을 읽었다. 살아날 수 있다는 열망이었다. 동시에 그 눈빛이 자신을 향했다.

"두희야, 너 살아야 해."

이두희는 간신히 고개만 끄덕였다.


11.

머리장식을 넘기고 임요환은 이상민을 찾아 헤맸다. 이상민은 멀리 있지 않았다. 임요환이 다가갔다.

"얘기 좀 합시다."

이상민이 손을 저으며 사람들을 보냈다.

"임요환이. 그래, 왜."

"돈, 가져가셨더군요."

"뭐, 그렇게 됐네."

"반 나누기로 하신 거 아시죠?"

"그게 무슨?"

이상민은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우리 원래 계약대로 말입니다. 공유하기로 했으니, 반을 나누어야지요."

"계약은 내가 비밀번호 준 순간 끝난 거 아닌가?"

"이상민 씨!"

큰소리가 나자 주변에서 그들을 힐끗거렸지만 이요환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미간을 누르고 심호흡을 했다.

"계약이지 않습니까."

"글쎄, 나는 그렇게 생각을 안 해서. 아니 애초에 말이야……."

"계속 가지고 놀지 마시고-"

임요환이 말을 끊으며 한 걸음 다가갔다. 더 가까이 가면 주먹이 나갈지도 모른다. 참고 참으라던 아내의 말을 떠올리며 간신히 문장을 내뱉었다.

"이상민씨. 내가 당신에게 아군입니까, 적입니까?"

계속해서 딴청을 부리던 이상민은 그제서야 임요환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한치도 피하지 않았다.

"자넨 원래 적이었네."

임요환은 그대로 돌아섰다.
임요환에게 적은 일제뿐이었다. 아무리 갈라져 싸우기도 하고 서로를 저격하기도 하지만, 핏줄이라는 신뢰 또한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당연히- 당연히 약속을 지켜야 했다.
그러나 얼마나 어리석은지.
그런 신뢰가 얼마나 가벼운지 정녕 몰랐던가, 스스로에게 물으며 임요환은 이를 악물었다. 힘줄이 솟아오룬 이마는 불그스름했고 주체못할 입에서는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사람들을 밀치고 창고로 들어가니 그제야 온 얼굴이 후끈거렸다.
처음 보는 그의 모습에 홍진호와 이두희도 놀라 다른 말을 꺼내지 못했다.
임요환의 붉은 얼굴과 매서워진 눈매를 보며 이두희는 침만 꿀꺽 삼켰다. 홍진호만큼은 아니지만 그도 임요환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사람 좋은 이상주의자이자 계몽주의자. 그러나 그만큼 큰 실망을 참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두희가 눈치를 보며 숨을 죽이고, 임요환은 간신히 화를 달래는 동안 홍진호는 그저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있을 따름이었다.

잠시 후 재판이 재개되었다.
재판이라고 할 것도 없는 광장 한 가운데, 홍진호와 이두희가 나란히 섰다.
어떤 주장이 제기되기도 전에, 한 군인이 붉은 머릿장식을 이두희 앞으로 던졌다. 경쾌한 소리가 나며 머릿장식이 모래사이로 뒹굴었다.
이두희의 얼굴만 사색이 되었다.

"뭐 하는 겁니까! 저게 뭔 줄 알고-"

이두희의 말은 끊겼다.

"그건 가짜다. 기껏해야 어린애들 머리나 꾸미는 거지."

이두희의 혀가 묶인 것처럼 순식간에 말이 들어갔다. 멀리, 이상민이 웃고 있는 게 보였다. 홍진호가 고개를 숙이고 임요환이 양 눈을 부릅 떴다. 이두희의 얼굴은 새파래졌다 붉어졌다 보랏빛을 띠었다. 결국 이두희는 주저앉았다.

"그, 그럼 저, 저는 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두희는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한듯 그들 또한 이두희를 둘러싸고 서서 내려다보았다.

"조사 결과 노홍철은 아무런 죄상이 밝혀지지 않았고, 조유영은 현재 조사 중이다. 너를 부른 건, 네가 저지른 범죄 중 실질적인 비중을 알아야하기 때문이다."

이두희는 그들의 말이 곧바로 이해되지 않았다. 대답해야 하는데, 생각만 하고 혀가 꼬인 것만 같았다.

"이틀 전, 포구에 갔다 왔다고 하던데. 어째서지?"

"아, 그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옆에서 누군가가 어깨를 붙들었다. 홍진호였다.

"제가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포구에 잘 아는 분이 있어서."

대답을 했지만 쉬는 시간은 없었다. 곧바로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야학소를 다닌다고? 거기서 조유영과 친분이 생겼다지? 조유영에게 추파를 던지고, 이은결이라는 사람과의 자리도 마련하려고 했다는데."

이두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홍진호도 더 말하지 못했다.

"그,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유, 유영씨가 예뻐서, 친해지고 싶어서……."

"그렇다면 왜 이은결과 연결시키려 했지? 어째서 범죄에 동조하게 만들었지?"

왜 그랬더라. 왜 유영이와 친해지려 했더라. 왜 유영이를 골방으로 데려갔을까. 이두희는 쏟아지는 질문을 감당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12.

침묵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이두희가 순간 고개를 치켜들었다.

"은지원! 지원형님에게 물어보십시오! 야학소가 끝나고 술 한사발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지원형님이 말해줬습니다. 조, 조유영씨가 저한테 마음이 있는 것 같다고. 친해져보라고요! 그, 그래서 접근한 겁니다. 유, 유영씨 같은 숙녀는 비밀로 붙잡아야 한다고-"

사람들의 시선은 곧바로 은지원에게로 쏠렸다. 은지원은 안된 얼굴로 다시 한번 중절모를 고쳐 쓰고 대중 앞에 나섰다.

"두희군은 제 아우이자 벗입니다. 함께 야학소를 꾸리며 조선의 미래를 그렸지요."

장교를 비롯한 군인들이 당황하는 모습이 눈에 보이자 이두희의 얼굴이 밝아졌다. 다만 홍진호만은 이두희의 어깨에 올린 손을 내리지 않고 빠르게 속삭였다.

"은지원이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다, 두희야."

"형, 저는 믿어요."

은지원이 다가왔다. 이두희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돌아가려는데, 홍진호가 그를 붙들었다.

"은지원씨. 두희 편인겁니까? 정말, 정말입니까?"

은지원은 알듯 모를듯 묘한 표정이었다. 홍진호는 다급하게 다시 속삭였다.

"두희 편 해주십시오. 제발, 부탁입니다!"

은지원이 미묘할 정도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입가엔 웃음기가 바짝 말라있었다.

이두희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다행이었다.
야학소가 끝나고 둘은 종종 술을 마셨다. 본래라면 어울리지도 못할 신분의 자제였지만 은지원은 도통 그런 걸 신경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중절모를 삐뚤게 쓰고 웃으며 지나가는 계집애들 치맛자락을 힐끗거리곤 했다. 비록 오래 알진 않았지만, 만주에서 독립운동과 상관없는 지인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래서 홍진호가 은지원을 저격했을 때는 당황했었다. 은연 중에 누구라도 말려주길 바라며 조유영을 데려왔고, 엉겁결에 이은결을 노출시키기까지 했다.
그렇게까지 한 이유. 단순히 지인이어서는 아니었다. 이두희가 은지원에 건 가장 큰 기대는 그와 나눴던 대화와 즐거움, 그리고 믿음이었다.

언제든 힘들 때면 도와주겠노라고.

여자 때문에 힘들다고 하니 너 자신의 비밀을 공유해보라고 하며, 조언을 아끼지도 않았다.
맞다. 그런 병신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이런 곳에서는 결코 입밖에 내지 않았을 이유 말이다. 하지만 지금와서는 어쩔 수 없었다.
은지원이 다시 말을 시작했다.

"그렇습니다. 저희는 좋은 벗이었지만 말입니다."

이두희의 귀가 끝부터 붉어졌다.

"하지만 저도 제 벗이 저런 무자비한 일을 치를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조유영씨를 꼬드기라 했다고요? 글쎄요. 저는 매번 술취해서 조유영씨를 부르는 두희에게 잊으라 충고했을 뿐입니다. 우정의 이름으로 말이죠."

이두희의 팔과 다리가 떨렸다. 홍진호는 어깨에 올린 아귀에 더 힘을 주었다.

"그리고 비밀이라. 제법 그럴싸한 말입니다만,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이두희씨가 아무것도 모르는 조유영씨를 작정하고 범죄에 끌어들이려 했다는 말이군요."

범죄가 아닙니다! 범죄같은 건 저지른 적 없습니다!
이두희는 마음 속으로 외쳤다. 더 이상 말할 수가 없어서 그저 속으로만 외쳤다. 누구라도 들어주길 바라며.

"조유영씨와의 관계는 재판과 상관이 없습니다! 이두희가 범죄를 저질렀다고도 안 했잖습니까.  그리고 무기밀매라니요! 그런 큰돈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고요함의 틈새에서 홍진호가 말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은지원이 바닥에 떨어진 붉은 가짜 머리장식을 주어들었다.

"이게 진짠 줄 알던데. 그렇다면 꽤 비싸게 샀겠군요. 돈이라는 건, 어디에 어떻게 숨겨졌을지 모르는 법이지요."

이두희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몇명이 다가와 이두희를 일으키려했다.

"두희!"

이두희는 바로 일어나지 못했다. 고개도 들지 않았다. 끓는 소리가 울음처럼 낮게 퍼졌다. 그걸 들은 건 옆에 있던 홍진호 뿐이었다. 홍진호는 차마 등을 쓸어주지 못하고 어깨만, 줄곧 잡아왔던 어깨만 꾹 꾹 눌렀다. 그러자 흙먼지에 고개를 박은 이두희의 어깨가 바르르 떨리고, 한 점 두 점 땅이 젖어들었다. 웅성거리는 소란함 속에서 유독 그곳만 조용했다.

"혀, 형……."

"미안하다, 두희야."

"형- 사람을, 사람을 믿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요."

홍진호는 더 말할 수가 없었다.

"사람이 사람을 믿는 게, 그게 잘못된 걸까요?"

아니라고 대답해야 했다. 홍진호는 이두희의 떨리는 양 손을 감싸쥐었다.

시간이 지체되자 그들은 이두희를 억지로 일으켜세웠다. 이두희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갑자기 다리에 힘을 주고 멈추었다. 잔뜩 쉰 목소리로 은지원의 이름을 불렀다.
은지원이 돌아섰다.

"도와준다고."

말이 끊겼다 다시 이어진다. 아까보다 더 울음이 배였다.

"힘들 땐 도와준다고, 언제든."

은지원이 씩 사람좋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언제 그랬던가. 혹시 만취였었나?"

이두희는 허탈하게 울음도 웃음도 아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다리에 힘이 풀린채 이끄는 그대로 끌려갔다.

"이두희, 저 청년도 참 순진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말이야. 여기는 한반도 고향땅이 아니란 말이지."

이상민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광장을 울렸다. 홍진호는 딱히 반문하지 않았다. 다만 이두희가 저 소리를 듣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인파 속에서 홍진호와 임요환은 그저 먹먹한 마음으로 이두희 뒷모습을 한참이나 보았다. 차마 이름도 부르지 못하고 다른 이들처럼 서있을 뿐이었다.

저 청년은 또 어디로 가버릴까. 어느 어둔 곳에서 막연히 광복을 기다리게 될까.

사람들이 흩어지고, 홍진호는 먼지와 물기로 얼룩진 얼굴을 쓸어내리고 문질렀다. 이내 가만히 서있는 임요환의 등을 툭툭 치고, 돌아섰다. 역시나 임요환은 홍진호를 따라오지 않았다.
홍진호 혼자 골방으로 돌아가는 길은 너무 멀었다. 하지만 이제는 누구도 붙잡을 깜냥이 없었다. 그저 이곳에서 그날을 마냥 기다리지만은 않겠다, 그렇게 수 십 수 백번 되새길 뿐.
언젠가는 반드시 다가올 여름날의 폭풍을 기다리며, 홍진호는 천천히 제 길을 걸었다.



<에필로그>

1945년.
조국이 독립하고도 며칠이 지났는데, 홍진호는 여전히 바빴다. 얼마 없는 짐을 싸느라 바빴고, 귀향하려는 마을 사람들의 배편 등을 알아봐주느라 내내 뛰어다녔던 것이다. 그래서 골방으로 돌아와서는 그나마 적은 제 짐에 안도했다.
짐을 다 정리하고 천장에서 꾸러미를 내렸다. 만주에 있는동안 받았던 서신들이었다. 이곳에서 보낸 시간을 헤아리며,

'그래도 기어이 독립을 보았구나.'

생각하니 또 다시 가슴이 뜨거워졌다.
사람들을 훈련시키고 한반도 진입을 위해 수십의 게릴라전을 치르며 다쳤던 어깨를 주무르며, 홍진호는 서신 꾸러미를 펼쳤다.
거기에 그들이 있었다.
의병장으로 날뛰었던 자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다고 했다. 또 다른 자는 함께 독립을 외치다가 혼인을 했고, 누군가는 한참 전에 감옥에서 나와 만주로 오는 중이라고 했다. 또 다른이는 러시아 땅에서 조선인 마을을 꾸려가고 있다고 했다. 한때 함께 했던 모두가 이 진흙탕같은 세상에서 제 나름의 길을 가고 있었다. 그리고 내일이면 홍진호도 만주를 떠난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다시는 만나지 못하겠지.'

홍진호가 서신꾸러미를 가방에 넣을 때, 안에서 종이 몇 장이 빠져나왔다. 그리고 사진 한 장.
홍진호는 골방에서 찍은 사진을 주어들었다. 그 많던 사람들이 떠나고 넷 뿐이 남지 않았을 때였다. 누가 찍자고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들의 최근 소식만큼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이은결은 압송 중에 마술처럼 탈출하여 미국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중국으로, 기어이 독립군에 합류했다.
임요환은 남만주로 떠났다. 제대로 된 인사도 없어 서운했지만, 충분히 그 다웠다. 아마 홍진호 자신도 그랬을 것이다. 자리를 잡은 뒤로는 서신이 잦았는데, 아이가 생겼다, 놀러오라, 책을 쓰고 있다는 등 신변잡기만 해댔다. 요즘엔 마작을 즐긴다고 했다. 그리고,

"두희."

이두희는 의외로 형이 심하지 않아서 일 년 전쯤에 풀려날 수 있었다. 이두희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서신만 꾸준히 보내고 있었다.
이곳에 여전히 그들의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이었을까. 물론 독립 이후 그들의 권세는 급락했다. 한때 혼인이라도 할 것 같던 은지원과 조유영은 갈라서서, 은지원은 도쿄로 가버린지 오래였다. 이상민은 전쟁 이후 중국 정부에 돈을 야금야금 빼앗기자 사업을 할 거라며 남은 돈을 챙겨 밤중에 떠났다.
일제와 싸우는데 머리를 쓰는 것만도 지쳐서 홍진호는 그들조차 잊고 지내려 했다. 하지만 이두희만은 그들을 잊을 수 없었나보다.

'아마도 만주에는 다시 오지 않겠지.'

사진을 가방에 넣었다가 다시 빼서 품의 안주머니에 품었다. 그리고 그대로 드러누워 편지를 읽는다.

-형님, 저는 여전히 사람을 잘 믿습니다. 요번에는 사기당해 짐을 몽땅 잃어버렸답니다. 그래도 이 주소만은 외어서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피식, 이제는 웃음도 잦아졌다. 하지만 피로만은 이기지 못하고 홍진호는 결국 잠이 들었다. 그의 얼굴을 덮었던 서신이 사르르 흘러내렸다.

-요즘은 오래 전 제 행동이 한없이 부끄러워집니다. 물론 저는 여전히 실수도 하고 민폐도 끼치고 다닙니다만, 믿음에 관해서는 부끄러워지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진호형님.
사람을 바보처럼 믿는 제가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걸 보면, 세상은 아직 살만한가 봅니다.




-끝-

출처 :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hongjinho&no=146656&page=1&search_pos=&s_type=search_name&s_keyword=%E3%85%8D%E3%84%B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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