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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밍 효과...
게시물ID : humorbest_31398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설민
추천 : 203
조회수 : 11921회
댓글수 : 4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0/11/25 03:00:20
원본글 작성시간 : 2010/11/25 02:03:51
논란이 많이 되고 있는 조선일보의 사진 크롭과 이펙터를 준것이 보정이다 아니다 조작이다 아니다를 떠나서. 일단 유명한 사진을 인용하겠습니다. 전쟁 포로에게 물을 주고 있습니다. 전쟁포로에게 총을 겨누고 있습니다. 흔히들 물이 반밖에 없다, 물이 반이나 남아 있다 라고 알고 계시는것이 '프레이밍 효과(framing effect)'입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의사결정은 문제의 제시 방법에 따라 크게 달라지게 되는데요. 이 때 문제의 표현방법을 판단에 있어서의 '프레임(frame)'이라 부르고, 프레임이 달라지는 것에 따라 판단이나 선택이 변하는 것을 '프레이밍 효과'라 합니다. (참고로 프레임, 미디어프레임, 프레이밍, 프레이밍 효과, 프라이밍 효과 모두 다릅니다.) 이를 잘 나타내는 실험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 '미국 방역 당국은 정글 모기가 퍼트리는 신종 전염병에 맞서고 있다. 이 병을 방치하면 600명이 목숨을 잃게 된다. 당국은 두 가지 전략을 마련했다.' 1. A안에 따르면 200명이 살게 된다. B안에 따르면 600명이 다 살 확률이 1/3, 아무도 살지 못할 확률이 2/3다. 2. A안에 따르면 400명이 죽는다. B안에 따르면 아무도 죽지 않을 확률이 1/3, 600명이 다 죽을 확률이 2/3다. ============================================= 첫 번째 질문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A안을, 두 번째 질문에서는 B안을 선택했습니다. 논리적으로 두 개의 질문은 동일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프레임에 따라 전혀 다른 판단을 하게 되는데요.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과 아모스 트버스키(Amos Tversky)는 이 같은 실험을 통해 사람들이 늘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이는 판단에 있어서 흔히 범하는 오류로 사람은 자신이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본질적으로 감성적 판단에 의해서 의사결정을 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때문에 이 같은 프레이밍 기법을 활용하면 상대방의 의사결정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수 있게 되는데요. 실제로 프레이밍 효과는 마케팅 분야에서는 이미 널리 사용되고 있는 기법입니다. 실질적으로 언론은 정확한 논리만 가지고 글을 적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중동은 한나라당쪽의 감정을 잘 실어주는것입니다. 경향과 한겨레도 한나라당 반대쪽의 감정을 실어주는것이 많습니다. (저는 뭐 그렇게 생각 안하지만 많은분들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일단 예로 들어서 올립니다.) 각 언론에 의해 보여지는 것들이 (모든 언론) 스스로 객관적이라고 보여지려고 노력하지만 절대 객관적일 수 없습니다. 어떤 방향 즉 프레임에서 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러나 언론보다 더욱더 역설적이며 가장 큰 문제인것은 그 특정 언론을 접하는 사람들과 독자들이 모두 진실은 하나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정말 불편한 진실이어서 여러가지 관점으로 볼 필요가 있다는것을 필요치 않는다는것입니다. 그래서 언론도 그 특정 관점으로 프레임을 정해서 특정 관점의 입장에서 보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불편한 진실을 원하지 않습니다. 자기 입맛에 맞는 자신이 원하는 관점을 원할뿐입니다. 거짓이 아닌 다양한 관점중 하나 일 수도 있습니다. 한가지 생각을 해 보십시오. 만약 현재 조선일보가 MB는 전과 14범이며 어쩌고 저쩌고 엄청나게 까는 기사를 매일매일 전면에 낸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렇다면 조선일보는 과연 조선일보 독자들이 좋아라 할까요? 또한 만약 그렇게 조선일보가 완전히 진실만을 적어 나가는것을 보고 반한나라당이나 반MB 사람들이 조선일보를 구입해 줄까요? 절대 아닙니다. 만약 동아일보에서 나온 한겨레 기자들이 모두 한겨레를 없애고 다시 동아일보에 들어가서 지금 동아일보의 행위를 그대로 한다면 한겨레를 지지하던 사람들이 좋아할까요? 아니 동아일보를 보던 분들도 탐탁치 않게 생각할 것입니다. 언론사 역시 사업체입니다. 기자들은 언론인일지 몰라도 언론사는 기업입니다. 이득이 있는 집단을 위해 노력할 뿐입니다. 조중동이 틀렸을까요? 아닙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일수도 있고 관점의 차이에 의해 옳을 수도 있습니다. 한겨레 경향이 옳을까요? 아닙니다. 잘못된 진실을 말하며 호도할 수도 있고 관점의 차이에 의해 틀릴 수도 있습니다. 조중동과 한겨레경향은 거대언론과 작은 언론의 차이에 의해 나오는 관점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한겨레경향이 작아서 틀린것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조중동이 거대언론사이기 때문에 모두 옳을까요? 역시 아니겠죠. 조중동의 기사중에서 틀린것도 엄청 많습니다. 그렇다고 한겨레경향 역시 틀린것도 엄청 많습니다. 하지만 틀린것과 다른것은 다릅니다. 불편한 진실을 어떤 관점에 의해 작성하느냐에 따라 다른것입니다. 그러나 다른것과 틀린것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틀린것입니다. 그리고 위의 사진의 경우 총을 겨누고 있는것만 보여지고, 물을 주는것만 보여주고 있지만... 같은 한장에서 잘라 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오류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총을 겨누고 있는것이 아니라 총은 멀리 떨어져 있는데 우연히 같이 찍혔을 수도 있습니다. 물을 주는것이 아니라 독약을 주는것 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의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모든것이 필요 없습니다. 아주 조그마한 일부만 있으면 됩니다. 그 일부만 가지고 집요하게 모든것을 나쁘게 좋게 만드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이것은 흔히들 다른 언론도 그 상황이 되면 마찬가지 아니냐? 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양비론이 아닙니다. 흔히들 이런식으로 주장하는 걸 보면 기가 찹니다. 그건 양비론이 아니라 그냥 멍청한 무논리일 뿐입니다. 차라리 양시론으로 니같으면 그 상황이 되면 그렇게 안할거 같냐? 라는식으로 감정에 호소하시는게 훨씬 나을거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장 싫어하는 정치인들이나 신문기자나 언론인이나 저놈이나 그놈이나 그놈이 그놈이다 라면서 자신은 정치에 관심없는 자신은 쿨하다고 스스로 참 중립적이면서 흔들림 없다 라고 착각하고 있는 정말로 진심으로 무뇌아들 이라고 명명하고 싶은 공기가 아까운 분들의 경우. 아래 글을 좀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그런 분들은 이런곳에 안오시니 뭐. ---------------------------------------- 해방 후 지금까지 독재적 군사통치가 판을 칠 때 많은 사람들이 비판을 외면했다. '나는 야당도 아니고, 여당도 아니다. 나는 정치와 관계없다' 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을 봐왔다. 그러면서 그것이 중립적이고 공정한 태도인 양 점잔을 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악을 악이라고 비판하지 않고, 선을 선이라고 격려하지 않겠다는 자들이다. 스스로는 황희 정승의 처세훈을 실천하고 있다고 자기합리화를 할지도 모른다. 물론 얼핏보면 공평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것은 공평한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은 비판을 함으로써 입게 될 손실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기회주의적인 태도다. 이것이 결국 악을 조장하고 지금껏 선을 좌절시켜왔다. 지금까지 군사독재 체제 하에서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이, 이렇듯 비판을 회피하는 기회주의적인 사람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좌절감을 느껴왔는지 모른다. 그들은 또한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악한 자들을 가장 크게 도와준 사람이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란 말이 바로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 김대중의 '잠언집' 中 - ======================================= 중립은 그런곳에 쓰는 말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것이 중립이 아닙니다. 정치에 관심 없다라고 말하면서 중립적이다 라는 말을 하는것은 나는 무뇌아요 멍청이이며 그리고 단테의 말처럼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정치적 격변기에 중립을 지킨 사람을 위해 준비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또한 재밌는것은 무엇인지 아시는지요? 단테의 신곡편에는 정치적 중립을 지킨 자들에 대한 말이 없습니다. 케네디가 인용한 말이었는데 이것 역시 정치적 흐름에 의해 나온 명언 아닌 명언으로 치부되어 단테의 신곡에 나왔다면서 사람들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단테가 묘사한것은 모든 사안에 대해 자기 한몸 살기 위해서 여기 붙었다가 저기 붙었다가 하는 박쥐같은 인간들에 대해 말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중에 정치적 중립을 지킨 자들이 포함 될 뿐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중립에서 단하나의 프레임을 선택하여 정치적 중립에 대한 글로만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 역시 프레임일 뿐입니다. 뭐 어쨌든 진정한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보다 정치에 관심이 많고, 투표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왜나면 각 당의 끝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도 모르는데 한 가운데를 정확하게 찾는다는것이 아무데도 찾아가지 않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나는 아무것도 안하지만 중립이다 라고 외치지 말았으면 합니다. 진정한 중립이란게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든 자리인지는 아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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