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물질위주의 서구문명사조에 동양의 유심론적 사고방식을 제시함으로써 서구문명에 새로운 조망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는 깨달음의 실체를 보지 아니하고 전래의 철학적 관념을 소화하여 자기나름대로 논리를 제시함으로써 논리적으로는 서구에 대항할 수 있었으나 실체는 왜곡하는 과오를 저질렀다.
그는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완전한 신의 실체를 감싸고 있는 환영이므로 어느 것 하나 부정할 것도 긍정할 것도 없으며 모든 것에 대해 잘 잘못을 따지지 말고 그저 신의 몸짓으로 느끼며 일체가 되어 살면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모든 것을 신의 몸짓으로 보아 슬픔이나 기쁨, 고통이나 행복, 잘잘못에 대한 모든 구분을 놓아버리고 신과의 일체감속에서 자유를 얻어야 하며 그 방법으로는 명상을 통해서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생명은 살아움직이는 변화속에 있고 이러한 생명의 활력속에 신은 자신의 존재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은 움직인다는 뜻이니 만약 움직임이 없으면 완전한 신성조차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은 신의 현현이며 장엄한 실재인 것이지 신의 장난이거나 환영이 아닌 것이다. 세상이 나고지는 과정속에 이루어지는 성장과 소멸의 고통이 존재하는 뜻을 모른 채 그는 논리에 빠져 생생한 삶의 실체를 관념화시켜 버린 어리석음을 범한 것이다.
그가 이러한 논리를 주장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무명에 대한 깨달음이 없기 때문이다.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세상에 고통과 악이 존재하는 원인으로 무명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문제는 과연 이무명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완전한 불성(신성)에서 나타나는 것인데 맑고 맑은 불성에서 어찌 무명이 나올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 힌두교를 비롯한 동양철학의 근본적인 의문이었다.
만약 무명이 불성에 근거하는 것이면 불성은 완전하다 할 수 없는 것이며 만약 불성에 근거하지 않은 것이면 또 다른 우주적 근거가 있는 것이니 이것은 우주가 본디 완전한 불성에서 비롯되었다는 논리에 맞지 않는 근본적인 모순에 부딪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라즈니시는 신이 만들어낸 세상은 완전한데 인간들이 어리석은 무지와 관념으로 구분하고 차별하여 완전한 우주의 모습을 고통으로 느끼며 살아간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기존의 세상의 관념과 실체를 무시하고 그저 우주와 하나되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즐기며 생생한 삶을 명상으로 대체하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고통은 단순한 인간의 환상이나 착각이 아니라 우주의 완전하게 움직이고 있는 소중한 증거임을 알아야 한다.
우주는 자신의 완전하게 세상을 움직이고 있는 증거로서 세상에 소멸과 고통에 이르는 과정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완전한 불성은 자신의 완전성을 표현하는 길로서 스스로 움직임을 나타내어 싹이 틔워 기운과 의식을 내고 생명을 내어 자신과 같은 완전성의 열매를 얻는 과정을 밟고 있는 것이다.
작고 여린 씨앗에서부터 완전한 밝음을 얻기까지 신성한 씨앗을 키우는 과정에서 잘 키운 것은 완성에 이르고 잘못된 것은 고통속에 소멸하는 과정이 나타나는 것이 완전한 존재방식이며 완전성의 자기표현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명의 정체인 것이며 인간이 바른 삶을 통하여 극복해야할 과제인 것이다.
라즈니시는 이와 같은 무명의 의미와 현실에 실재하고 있는 고통의 의미를 몰랐다. 그는 모든 것이 나고 자라서 다시 열매를 맺는 과정을 끝없이 반복함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나타낸다는 이치를 알지 못하고 철학적 단순논리에 빠져 신성이 무명을 만드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세상은 완전한데 단지 인간이 관념을 가지고 부정하고 구분하고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겨난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생생한 우주적 실체인 삶의 생명성을 무시하고 모든 실재하고 있는 현상을 인간의 아집이 만들어 내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도그마를 주장함으로써 세상의 옳고 그름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연극화시켜 버리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깨달음은 오로지 생생한 삶의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부처님의 정법을 무시하고 단순한 명상기법만으로도 우주의 근원에 이를 수 있다는 허위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결과 그의 추종자들은 신성한 삶을 단순한 명상으로 대체해 버렸고 현실속에서 공덕을 쌓는 인과의 이치와 실천하는 진리의 길을 무시하고 인생을 단순히 즐기는 곳으로 왜곡시켜 버리고 만 것이다.
그결과 그들의 집단인 아쉬람은 진리에 대한 이치가 없이 단순한 쾌락과 욕망의 장으로 찌들고 있어 인도사회의 커다란 비난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고래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모든 명상법을 수집하여 자기적인 논리를 전개하여 모든 사람이 쉽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달콤한 주장을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오도하고 있다.
이와 같이 진실로 깨닫지 못한 자가 존재하지 않는 이치를 주장함으로써 세상을 환상과 욕망으로 가득채우는 악업의 결과는 너무나 엄청난 것이어서 말로는 다 할 수 없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는 예술인 명상을 통하여 모든 행위의 근원속에 들어있는 흔들리지 않는 진아를 분리해 냄으로서 불변의 의식이 나타나고 이때 영원과 이어지는 의식의 자유와 해탈이 가능하다는 논리를 편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인위적으로 의욕하지 않고 무조건 받아들이며 죽음까지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그는 영원한 근원과 합일하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말로는 혹한 논리이나 실재 이치에는 맞지 않는 일이다. 마음속에 업과 찌끼가 많은 자가 의식적인 명상훈련이나 기법으로 자기라는 의식을 떨어버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만약 착각으로 자신을 버리는 일을 하게 된다면 그는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깨달음은 바른 이치를 통한 공덕을 쌓아 그결과로 마음이 정화되어 오는 것인데 만약 진정한 삶의 공덕을 통한 자기정화없이 그저 명상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주시함으로서 해탈하는 착각을 가진다면 그에게 다가오는 것은 죽음과 소멸 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일시적으로 깨달은 것 같은 착각에 빠지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 곧 닦아내지 않는 그의 마음속에 든 숙업이 다시 나타나 그를 지옥의 환상속에 헤메게 할 것이다. 이것이 라즈니시 명상법의 결론이며 현재 인도의 정신을 이끌고 있는 힌두철학의 오류인 것이다.
인도가 지금 무기력한 이유는 삶을 환상으로 여기고 생생한 삶의 실천대신 명상을 삶의 주조로 여기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삶은 우주의 중심이며 실재이고 핵이다.
이것을 무시하고 명상으로 삶을 가상화, 논리화한다면 세상은 어두워질 것이며 삶은 무기력해질 것이다.
삶은 실재하는 것이기에 마음으로 분리한다고 해서 결심만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자신에게 주어진 고귀한 이생애는 항상 몸 전체로 부딪혀야 하는 장엄한 과정으로서 관념으로 연습으로 살아서는 결코 안되는 것이다.
장엄한 삶의 과정을 쉽게 요령있게 살려는 이러한 삿된 시도는 어떠한 것도 성공할 수 없으며 잔재주에 불과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이치에 맞지 않는 논리를 전개하는 것은 그가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는 증거이며 진실을 모르는 자가 함부로 非法을 떠벌이는 것은 그 악업을 감당할 길이 없는 것이다.
윤회에서 벗어나 자신을 완성시켜 해탈에 이르는 길은 자비와 사랑으로 불쌍한 세상을 애태우며 선업을 쌓고 자신을 태우는 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의 글은, 진리의 본질을 보지 못한 자가 부처님이 부정하신 힌두교의 명상법에 빠져 공한 체험을 한 후 수많은 책에서 지식을 얻어 자기 나름대로의 관념적 논리를 세운 후 생생한 삶의 실상을 무시하고 관념으로 세상을 우롱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가 깨달음의 체험이라 주장하는 나무위에 혼이 앉아있는 현상은 많은 사람이 겪고있는 유체이탈에 불과한 것으로 반야심경에 모든 제불보살이 깨달음을 얻으실 때에 반드시 체험한다는 마하반야바라밀다와는 거리가 먼 것인 것이다.
마하반야바라밀다는 자신의 모든 업이 사랑과 자비의 불에 의해 모두 타버려 불성(신성)만 남을 상태로 모든 것이 사라진 우주의 근원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때 인간의 마음으로서 영원한 불성과 합일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불성과 합일한 인간의 마음만이 해탈한 것이며 세상의 모든 것을 맑은 불성에 비추어 사실 그대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체험을 그는 얻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글에는 사실에 대한 인과의 이치가 없고 밝은 세상을 위한 사랑과 실천의 가르침이 없으며 명상이 무엇이고 깨달음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느냐 하는 추상적 이야기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면 그는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보다 명상이란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논리를 개발하는 것에 자기인생을 바쳤기 때문이었다.
수행에 있어서 아무리 개인의 마음이 평안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 이기적이고 헛된 일은 없는 것이다.
세상을 구하는 일은 양심과 정의가 있어야 가능하다. 양심은 자기를 구하고 정의는 세상을 구한다. 이것을 가르치고 전하는 것을 우리는 사랑이라 하는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바른 이치대로 이루어지게 하며 세상을 위해 축복하는 삶을 말한다. 이것이 뒷받침되어 있지 않는 깨달음의 길들은 모두 거짓이며 헛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