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일상 속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삶일까?
어려운 세상사를 살아가다 보면 당장 먹고 사는 것도 힘들고
어렵게 직장을 잡더라도 일상에 찌들어
젊은 시절 품었던 꿈과 이상은 사라지고
생존만을 위해 발버둥치는 짐승같은 모습을 발견하고 만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이렇게 사는게 아닌데 하고 자신을 되돌아보지만
일상은 우리를 놓아주지 않고 평범과 타락의 길로 계속 이끌고 간다.
아직 마음속에 양심의 불이 꺼지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조금이라도 밝음으로 이끌기 위해 안간힘을 써보지만
너무나 어두운 세상이라 한치의 빛과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과연 어두운 이 세상에 진리가 있으며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밝고 좋은 길이 있을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현실의 한계를 벗어나 삶의 의미를 찾고자 애태우고 있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글을 쓴다.
세상은 무의미와 혼돈으로 가득 찬 말세로 보이지만
그 실체는 진리로 가득찬 법계다.
세상이 이렇게 무의미하고 혼돈스런 것은 세상 자체가 무질서하기 때문이 아니라
욕심많은 인류가 그동안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이치를 어기고 질서를 해치려는 많은 나쁜 원인들을 지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동안 인류역사를 통해 지어진 많은 나쁜 원인들이 결과를 가져와
그들의 의도대로 세상의 질서는 흐트러지고 이치가 흐려져
지은대로 받지 못하고 억울함이 넘치는 어지러운 세상이 되고만 것이다.
그래서 어둡고 고통스러워진 세상은 스스로 망하게 되고
순환의 이치에 의해 또 다시 새로운 세상이 열려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다.
따라서 겉으로는 혼란스럽고 무의미해 보여도
이 세상은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 한치의 어김없이 작용한다.
그러므로 현실의 삶이 아무리 어렵고 무의미하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 진리와 보람을 찾고자 하는 자는 항상 찾을 수 있으며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북돋울 수 있다.
어두운 세상에서 참된 진실과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먼저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지금 이 세상은 그동안 인류가 지은 모든 나쁜 원인들이 크게 자라나 기세를 떨치고 있는 말세이다.
따라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오탁악세에 몸을 담그는 것이기 때문에
도도히 흘러가는 오탁악류의 물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므로 현실을 살아가는 한 더러움을 묻히고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때를 묻히는 것에 대해 너무 두려워하거나 결벽증을 가질 필요는 없다.
다만 진리와 세상을 좋게 만드는 길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굳은 마음으로 뜻을 꺽지 않고 성실히 노력한다면
완성으로 나아가는 참된 길을 분명히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을 살아가면서 여러가지 잘·잘못을 행한다.
그러나 삶의 바른 의미와 가치를 알고 항상 진리를 생각하며 선한 쪽으로 최선을 다한다면
생의 결실은 선과 악의 흐름 속에서 선한 쪽으로 기울게 될 것이니
그렇다면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의무와 가치는 다한 것이다.
이 생에서 인간으로서 충실히 살았기에
다음 생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며
좋은 마음은 언젠가 싹을 틔워 인간완성의 열매를 맺게될 것이다.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좋은 삶이란 바르고 부지런하여 문제가 없는 삶을 말한다.
산다는 것은 움직이는 것이다.
움직임이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따라서 움직임을 통해 우리가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고
인간으로 태어난 의미와 가치를 다할 수 있다.
이 세상에 태어나 내가 지은 것이 나의 삶의 전부가 되는 것이니
부지런히 움직여 인생을 풍성하게 만들어야 한다.
사람은 우주의 주인이며 움직임(활동, 변화)의 주체이다.
움직이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생겨나지 않으므로
문제를 풀고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쉬지 않고 원인을 지어야 한다.
하늘은 인간에게 세상의 주인이 되도록 완전한 주체성을 주고
다만 그 결과에 대해 심판할 뿐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문제에 부딪힌다.
문제가 있다는 것은 그동안 쌓여온 인과 속에
무언가 이치에 맞지 않고 일그러진 것이 있었다는 뜻이다.
현실은 인과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니
현실 속에는 문제와 함께 그것을 만든 모든 과거의 원인이 들어 있다.
따라서 현실을 살펴 문제를 낳게 한 원인을 밝히고
이를 겸허하게 받아들여 이치에 따라 대책을 세우며
부지런히 실천하면 모든 문제가 풀리는 것이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마음이 맑고 현명한 사람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문제가 생기더라도 지혜롭게 해결하므로
좋은 삶에는 큰 문제가 없다.
우리가 해탈한 이를 존경하는 이유도 모든 문제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으셨기 때문이다.
의식주를 해결하고 가정사의 고민을 해결하고
세상의 문제를 풀어 안정되고 평안한 사회를 이루었을 때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좋은 삶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삶의 목적을 소유와 쾌락에 두고 더욱 자극적인 것을 원한다.
그래서 문제를 풀기 위해 문제를 만들고 결국 문제 속에 사는 힘든 인생이 되고 만다.
말세의 삶은 그동안의 역사를 통해 잘못 지어진 일들이 너무나 많다.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기에도 벅찬데 구태여 새로운 일을 만들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해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성경구절도 있듯이
이 세상에 새로운 가치는 더 이상 없는 것이니
그 동안 쌓여온 문제를 푸는 것에 전념하고
새로운 일거리를 만들어 새 고민에 빠지는 것을 삼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새로운 문제를 만들지 말라는 얘기이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 아이디어를 내거나
창조적인 개척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문제를 풀 때는 모든 일을 정당하고 이치에 맞게 사심없이 해야 한다.
사심이 없어야 마음에 어둠이 없고 지혜가 생겨 문제를 잘 풀게 된다.
사심이 있는 자는 마음이 편협되기 때문에 바른 이치를 보지 못하고
욕심을 부려 상대를 화나게 하고 매사를 어렵게 만든다.
특히 큰 꿈을 품은 자는 모든 일에 공정하고 사심이 없어야 한다.
주위에 잘 나아가는 사람들이 한순간에 명예를 버리고 감옥에 가는 것은
작은 이익에 집착하여 잔꾀를 부렸기 때문이다.
세상의 법칙은 엄정하여 이치에 어긋나는 일은 반드시 그 댓가를 치르기 때문에
거짓되고 약은 꾀를 쓴 자들은 언젠가는 제 꾀에 제가 당하게 되어있는 것이다.
문제를 풀 때는 상대가 억울함을 갖지 않도록 정정당당하게 이치대로 풀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삶의 목적이 마음을 키우고 완성에 이르는데 있기 때문이다.
진리를 배우고 공덕을 쌓아 지혜와 평안을 얻고
모든 문제와 업의 족쇄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얻을 때
마음이 완성되어 해탈이 오는 것이다.
그런데 욕망과 어리석음으로 인해 내가 상대에게 억울함을 갖거나
악하고 그릇된 행위로 인해 상대가 나를 원한으로 잡고 있으면
나의 영혼은 무거워 높은 곳에 오르지 못하고
법계의 일체성과 상호관계성에 의해
끈적끈적한 윤회의 인력대를 벗어날 수 없게 되니
유혼의 세계를 헤매다 지옥과 미물의 과를 받게 된다.
그러나 모든 것을 순리대로 이치에 맞게 살아간 자는
그 마음에 어둠이 없고 걸림이 없어서
항상 맑고 당당하고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이며
죽어서도 마음이 맑고 가벼워 높은 곳으로 가게 된다.
따라서 좋은 삶은 이치에 어긋나는 욕심을 내지 않고
모든 일을 공정하고 이치대로 풀어
스스로 한을 안거나 남에게 한을 주지도 않는다.
문제를 이치대로 해결하고자 하는 맑은 마음은
주위의 잘못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은 맑고 맑아서 조금의 어둠이나 그릇됨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위의 문제를 보게 되면
모든 것은 이치대로 흐르도록 해놓아야만 마음이 편해지는데
이것이 바로 사랑과 자비의 원천이다.
맑은 마음은 끝없이 이웃을 사랑하여 행복한 사회를 만들고
세상을 이치대로 하여 밝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며
자신의 마음을 완성에까지 이르게 하므로
우주에서 가장 귀한 보물이다.
즉 진리를 찾는 맑은 마음과 이웃을 사랑하는 좋은 마음과
밝은 세상을 찾는 정의로운 마음은 모두 하나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이것을 선근이라 한다.
그래서 부처님도 선근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선근이 있어야만 자신을 키우고 세상을 밝힐 수 있기 때문에
진리와 자비를 배워 선근을 지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선근을 얻고 키우는 것은 매우 어렵다.
수천년동안 수많은 수행자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산야를 헤맸지만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스러져간 이유는
정법 500년, 상법 1000년, 말법 1만년이라는 말이 있듯이
무엇이 선근인지 어떻게 길러야 하는지 실체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 재세시 부처님의 곁에서 시봉한 제자들은 모두 아라한의 위에 올랐는데
그 이유는 생생한 부처님의 선근을 보고 살아숨쉬는 이치를 그대로 따라 행했기 때문에
행하는 만큼 부처님의 실제를 닮을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진리를 좋아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좋은 세상을 꿈꾸는
선근의 가치와 진실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말세에서 사람들은 부귀와 권력과 화려한 위광만 좋아하지
세상을 위해 봉사하고 바르게 사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선근이 있어야 세상을 바로 보고 바르게 살아갈 수 있으며
좋은 자신과 좋은 세상을 만들게 되므로
선근의 크기가 곧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다.
선근을 한번 얻게 되면 그것이 씨앗이 되어
더 맑은 지혜와 강한 용기를 갖게 되어 더 큰 공덕을 행하게 되고
그로 인해 선근이 더욱 강해져 불퇴전의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것을 정법의 고리를 돈다고 한다.
아라한에 이르면 아무리 나쁜 환경에 태어나더라도
자신 속에서 빛나는 선근이 지혜를 밝혀
스스로 악의 영향에서 벗어나 밝은 길로 나아가게 되고
마침내 완성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선근이야말로 인간세상의 가장 귀한 보물이며
선근이 있기에 인간의 의미와 가치가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선근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좋은 일을 하게 된다.
좋은 일은 우리의 인생과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공덕을 말한다.
우리는 더 좋은 삶을 위해 살아간다.
오늘보다 더 좋은 내일을 위해 우리는 오늘도 힘든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좋은 일이라고 하면
세상을 구하거나 깨달음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거창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좋은 일은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아니며
조금이라도 현실을 좋게 하는 일은 모두 좋은 일이다.
건강을 위해 열심히 운동하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좋은 일이며
넘어진 아이를 일으키고 글을 가르치며 배고픈 자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좋은 일이라고 해서 무조건 남을 도와서는 안되며 이치에 맞아야 한다.
상대가 돈을 원한다고 남의 돈을 훔쳐 도와서는 안되며
돈을 버는 법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좋은 일은 모든 일이 이치에 따라 이루어지도록 축복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남을 축복하는 것과 무조건 남을 돕는 것은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칫 남을 잘못 도우면 자신과 상대에게 모두 해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세상사람들이 모두 좋은 일을 한다고 말하는데도 세상이 더욱 어두워지는 것은
좋은 일을 한다는 것이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좋은 예로 자식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지나친 집착으로 자식을 망치는 경우와
거지를 돕는다고 하면서 독립성을 상실시켜 영원한 거지로 만드는 경우가 있다.
연말연시에 구세군의 종소리를 비롯하여 각지에서 불쌍한 이를 돕자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자선들이 얼마나 세상을 좋게 했는지,
얼마나 불쌍한 이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말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이따금 들려오는 소리는 그러한 기금들이
못된 종교인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사용되었다는 좋지않은 소식들이다.
남을 돕기 위해서는 상대를 인간적 가치를 지닌 주체적 인간으로 서게 해주어야 한다.
무조건 베푸는 자선은 받는 사람의 자립능력을 약화시키고 인간으로서 자질을 저하시켜
공덕이 아니라 오히려 악덕이 되고 만다.
이러한 시혜는 받은 자에게는 불행이 되고 세상에는 부담이 된다.
그러므로 자선은 베풀되 받는 사람이 고마움을 알도록 하여
세상에 보답하려는 양심을 일깨워야 하며
받는 것을 부끄러이 여겨 스스로 일어서도록 각성시켜 주는 것이어야 한다.
인간은 단순히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성장시키기 위해 살아간다.
따라서 남의 도움으로 생명만 연장하는 것은 오히려 그의 인간적 가치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남의 도움이 육신을 살리고 영혼을 망친다면 그런 도움은 아니 받느니 만도 못한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도 고기가 아니라 그물 던지는 법을 가르쳐주라고 하신 것이다.
세상일을 할 때는 항상 현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상황을 무시하고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처방해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의 삶이 다 다르고 각자가 원하는 것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배고픈 자에게 사랑을 주고
사랑을 구하는 자에게 명예를 주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는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현실은 다양한 삶의 형태가 모여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세상은 사람의 몸과 같이 다양한 기능이 모여 전체를 구성하며
사람과 가정과 사회와 국가는 모두 같은 이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람의 몸에는 일을 하는 손발이 있고
욕망을 즐기는 생식기가 있으며
세상을 감각하는 이목구비가 있으며
이치를 생각하고 판단하는 머리가 있다.
이것들이 상호 조화되어 건강한 삶을 구성하는데
만약 정신적인 삶이 중요하다고해서 성생활과 생식기를 부정한다면
세상은 대가 끊어져 절멸하고 만다.
사회나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정신계를 이끄는 종교 교육계도 있고
손과 발의 역할을 하는 경제계도 있지만
세상의 욕망을 달래주는 유흥가도 있다.
이들 또한 각 부분이 역할을 하여 전체를 살리고 있으니
정신적 가치와 질서가 중요하다고
성과 욕망이 넘치는 대중문화와 유훙가를 너무 부정적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세상을 살다보면 갖가지 긴장과 피로가 쌓이는데
이때에는 육체와 정신의 휴식을 위해 쾌락이 필요한 것이니
유흥과 쾌락은 중생의 삶에 필요불가결한 부분인 것이다.
따라서 진리가 가장 높은 가치라고 해서
욕망을 원하는 자에게 진리를 이야기해서는 안되며
돼지에게 진주를 주어서도 안된다.
밥을 원하는 자에게 밥을 주고
사랑을 원하는 자에게 사랑을 주고
힘을 원하는 자에게 권력을 주는 것이 좋은 일인 것이다.
그러나 중생들이 원하는 것은 자주 변한다.
처음에는 배부른 것만 원하다가도 이것이 충족되면
점차 권력과 명예와 완성으로 나아가는 것이 인간의 고귀함이다.
그 이유는 인간의 정신이 조금의 부족함도 용납하지 않고 계속 완전함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먼저 상대가 원하는 것을 주고
자꾸 바른 이치대로 격려해가다 보면
더 나은 삶을 원하게 되고 결국 완성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가 좋다고 다양한 세상을 향해 정신과 같이 한부분만 강조해서는 안된다.
상황을 살펴 진정 상대를 축복해줄 수 있는 방향으로 처방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정치는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고 관념에 빠져
이상만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매춘의 불법화가 그 좋은 사례이다.
성욕은 생명 활동에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요소이다.
인간사회도 생명의 흐름 속에 이루어지는 만큼 성을 매개로 인연이 시작되고 사회가 유지된다.
따라서 성은 매우 중요하며 남을 해치지 않고 즐기는 한 죄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전통적 관념과 종교적 교리 때문에 성 자체를 죄악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세상을 볼 줄 모르는 자들이 관념에 빠져 흑백논리로 보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자유주의 국가에서 모든 사회행위는 주체성을 지닌 자유인이 자기 책임하에 행하는 것이며
국가가 개인의 사생활까지 관여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자유주의 국가가 전체주의 국가보다 발전한 힘의 원천이다.
따라서 국가가 개인의 자율적 의사에 의한 성매매까지 규제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이 사회적으로 부당한 경우,
즉 남에게 해를 끼친다거나, 부녀자를 약탈하고 인신매매한 경우를 막고 보호하면 되는 것이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은 개인이 최대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에 따른 문제를 제거하면 되는 것이어지,
국가권력이 세상을 모두 책임진다는 식으로
개인의 도덕적 판단과 주체적인 삶까지 개입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매춘도 자기 책임 아래 남을 해치지 않고 이루어진다면 무방한 것이다.
인류역사에 매춘처럼 오래된 직업은 없으며 사라진 적이 없는 직업이다.
따라서 국가의 강제적인 폐지정책에 의해 매춘이 겉으로는 사라진 것 같아도
음성적으로 계속될 것이며 여러 곳에서 부작용이 터져 나올 것이다.
그리고 현재 매춘과 관련된 유흥업이 국가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커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그 폐해는 의외로 심각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들은 세상의 일들을 볼 때 상호 모순되는 현상을 많이 본다.
돈을 많이 번 기업가들이 경제에는 기여하지만 노동자를 착취하는 측면 등이 그러한 예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세상을 보지 못하는 갈등론자들의 시각이다.
세상은 기본적으로 질서와 이치로 이루어진다.
모든 것이 모순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아도
세상은 하나의 이치로 어울려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모든 좋은 일은 이치로 이루어지고 이치로 통하기 때문에
모든 좋은 일은 서로 하나가 되어 좋은 세상을 만드는데 기여한다.
얼핏 보기에 기업가와 노동자는 경쟁관계로 이익을 위해 서로 다투는 것 같아도
이 둘은 운명공동체로 서로 도와가며 살아야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기업가들이 사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하도록 일에 대한 확실한 댓가와 동기를 부여하고
스스로는 모범을 보여 노동자보다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
기업이 안되는 것은 기업의 주인인 사장이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종업원은 사장이 일하는 것을 보고 그를 따라 한다.
따라서 사장이 월급의 2배일을 하면 종업원은 1배반의 일을 해서
그 반의 수익을 기업가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이것이 기업을 성공시키는 숨은 비결이다.
사장이 자기는 일을 안하고 종업원에게 일만 시켜서 수익을 얻고자 한다면
노동자들은 자발적인 노력과 성취동기를 발휘하지 않고
일하는 시늉만 내기 때문에 그 기업은 생명력을 상실하고 만다.
이 세상은 생명력이 서로 생존하고자 다툼을 벌이고 있는 곳이다.
따라서 생명력이 없는 기업은 살아남을 수 없으며
기업의 모든 구성원들이 회사의 일을 자신의 일과 같이 생각하여
혼신의 노력을 쏟아 부어야
기업가와 노동자들의 혼과 기백이 기업활동 전반에 뿜어져 나온다.
따라서 기업과 노동자를 서로 경쟁관계로 보고
보수에 의한 이해관계에 의해서만 일한다고 보는 갈등론은
합일된 생명력을 만들어 내지 못하기 때문에
치열한 약육강식의 경쟁사회에서 결국 도태되고 만다.
즉 모든 것을 모순과 갈등관계로 보는 갈등론은 세상을 분열시킬 때 사용하는 이론이니
세상을 구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모든 것을 이치로 푸는 조화론으로 접근해야 한다.
모든 것은 이치의 틀로 보아야 세상이 보이는 것이며
모든 정책을 상호 조화시키는 방향으로 이끌어 나갈 때
국가는 살아나는 것이다.
기업가가 이윤을 위해 창업하고 노력하는 이치와
노동자가 보수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이치와
국가가 경제를 발전시켜 국민의 복지를 향상시키는 이치와
인간이 살아가는 이치와 도에 이르는 이치가 모두 동일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다양한 삶이 공존하는 현실 속에 진리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여러 가지 모순 상황에 부딪힌다.
선이 악의 꼬리를 물고 악이 선의 수단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혼돈스럽고 모순처럼 보여도
그속에는 분명한 길과 해결책이 있다.
모르는 자에게 세상은 혼돈투성이이지만
보는 자에게 세상은 인과관계로 이루어진 완전한 법계인 것이다.
세상은 사람들이 지은 원인들이 모여 나타난 결과체이다.
그 속에는 선과 악, 좋고 나쁜 원인들이 서로 뒤얽혀 있다.
따라서 나쁜 원인은 제거하고 좋은 원인은 길러주면
세상은 좋아지고 서로의 관계는 향상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사실관계와 원인을 무시하고
현재 시점만을 기준으로 선악의 결론을 내리는 것은 옳지 않다.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현상에 얽힌 원인을 정확히 보고
그 대책을 세워 그것이 세상에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 확실해야
무엇이 선인지 결론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은 이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생각만으로 선이라 주장하고 고집스럽게 행동하다
서로에게 아픔을 주고 불행을 가져오는 것이다.
사실을 사실대로 알지 못하는 자들은 절대선을 주장한다.
그러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절대선을 주장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사실을 정확하게 알면 그 상황에서 행해야 할 최고의 선이 나온다.
선과 악이 뒤얽혀 있는 현실에서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무조건적인
선이란 존재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어느 독재자가 세상을 정복하려고 전 세계와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하자.
그 휘하의 병사가 정당한 전투행위를 한다고 해서 그것이 정당하다고 할 수 없다.
전쟁을 일으킨 독재자의 생각과 욕망, 그동안 민족간에 얽힌 은원의 역사 등을
모두 고려하여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일은 그 일의 원인과 뿌리를 보아야 하는 것이며
그 일이 가져올 결과 또한 고려하여 판단을 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선악이 분명해져도 악을 극복할 힘이 없다면 무조건 대항해서는 안되며
먼저 이를 극복할 용기와 힘을 지혜롭게 길러야 한다.
도적소굴에 붙들렸을 때 너희들은 모두 도적이니 천벌을 받아야 한다고
소리치는 것은 어리석은 만용이다.
앞뒤를 가리지 않고 흉폭한 자에게 대들어 주위의 모든 선한 자를 죽이고
세상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면
그러한 행동은 선이라기보다는 어리석은 악인 것이다.
그리고 거짓과 위선과 탐욕이 판치는 세상에서
선한 자가 양심과 진실을 지키며 살아남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거칠고 악한 현실 속에 선한 뜻을 가진 이들이 모두 꺽이고 만다면
이 세상은 악한 자의 몫이 되어 저들끼리 싸우다가
마침내 세상전체를 파멸시키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선한 자들이 악에 굴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지키는 슬기가 필요하다.
악이 강할 때는 침묵하는 것도 필요하고 악과 부딪히지 않는 것도 필요하다.
살아남지 못하면 선을 실천할 수가 없기에 살아남는 것은 선한 자의 의무인 것이다.
선한 자들이 힘을 길러 악을 제압하고 좋은 세상을 만들 때까지
뜻을 꺾지 않고 열심히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다.
가장 분명한 선악의 판단기준은 결과이다.
모든 것을 정확히 보고 바르게 처방한 것은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결과가 나쁜 것은 사실을 정확하게 보지 못하고 이치를 몰랐던 것이며
원인을 잘못 지은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보고 결과가 좋았던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어떤 경우에는 여건이 좋았는데도 지도자의 어리석음으로 실패하고
어떤 경우에는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지도자가 올바른 처방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좋은 결과를 가져옴으로써
세상을 평안하게 하고 많은 백성들을 행복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처럼 상황 속에 얽혀있는 문제점과 선악을 정확히 보고 행동한다면
그 결과는 모두에게 이로운 것으로 선업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모르고
선악이 어떻게 얽혀있는지 고려하지 않은 채
무조건적인 선만 주장하는 이상주의자가 현실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다.
현실은 삶의 기반이며 생의 실재이다.
이것을 뺀다면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현실 속에 나의 삶의 전부가 있으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원인과 결과가 머물러 있다.
모든 진리도 이속에 있으며
우리의 삶과 미래의 약속도 이속에 지어야 한다.
그런데 요즘 세상이 힘들다고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포기하려는 자살의 검은 그림자가
땅거미처럼 온 세상을 뒤덮고 있다.
그러나 삶은 끝없이 돌고 돌면서 영원히 이어지는 생명의 흐름 속에서
더 나은 자기를 짓는 귀한 과정이며
우리의 미래를 밝힐 수 있는 유일한 복밭이기에
한순간도 자신을 놓아서는 안된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낳다는 말이 있다.
이말은 이 세상만이 우주의 중심이며
더 나은 자신을 지을 수 있는 복밭이라는 말이다.
천상에 있는 신들조차도 더 나은 자신을 얻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야 한다.
모든 존재는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현실속에서 원인과 변화를 통해서만
더 나은 자기와 인간 완성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자신을 새로 지을 수 있도록 부여받은 이 귀한 삶을
한 순간이라도 허비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과 같은 완성에 이르라는 조물주의 뜻을 받아
이 땅에 태어난 신성의 씨앗이다.
자살의 잘못된 문제는 이러한 삶의 목적을 모른 채 자기 마음대로 인생의 목적을 정하고
그것이 충족되지 않았다고 삶의 의미가 사라진 듯이 비관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기 때문이다.
이들은 인간의 삶이 얼마나 고귀하며 무한한 가능성과 가치가 있는지 모른 채
“나의 생명은 내 것이니 내 맘대로 할 권리가 있다”는 무지한 주장을 한다.
하지만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우주의 법칙은
작은 인간들이 제멋대로 행하는 일들을 그냥 방관하지 않고
자연의 완전한 이법으로 한치의 어김없이 심판한다.
자살은 완전한 신성에까지 이를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이 존재하는 귀한 생명의 길을
완전히 포기하는 어리석음과 교만의 극치이다.
자살은 삶의 가능성을 중도에 모두 단절해 버리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죽은 후에 받게 되는 영혼의 업보이다.
삶을 만족스럽게 마친 자의 영혼이 받게 되는 후생은 평안하고 깨끗하지만
자살하는 자의 후생은 약한 의지와 잘못된 삶의 자세가 영혼 속에 남아
계속 나쁜 후생을 맞는 불행의 씨앗이 된다.
자신의 삶을 포기한 허약한 의지와 게으런 천성은
앞으로 다가올 현실의 고된 환경과 생활의 어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쉬이 좌절하여 비천한 운명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살을 통해 삶을 마감한 자는 그 한과 집착에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고
이승을 떠돌며 계속 지옥의 고통에 헤매게 된다.
이 땅에서 이룬 것이 하늘에서도 계속되는 것이기에
현실에서 맺힌 한은 저승에서 계속 품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몸이 건강하고 움직일 수 있는 때
삶의 의미와 진실을 빨리 깨우쳐 하나라도 더 나은 자신을 짓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죽을힘이 있으면 그 힘으로 죽은 순간까지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어려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진리의 힘에 의해 자신을 지켜야 한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진리가 지켜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그 길은 세상의 흐름과 일치하는 길이요!
자연과 조화되는 길이다.
우주 속에서 우주의 일부로 태어나
우주의 흐름과 일치한 삶을 산다면
부조화와 한계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자연의 흐름에 따라 사는 것은 이치에 따라 사는 것으로
열심히 움직이고 분수를 알며
거짓이 없이 세상을 사랑하며 살 것을 요구한다.
열심히 일하면 살림 걱정이 없으며
욕심을 부리지 않고 분수를 알면 부족함이 없다.
거짓이 없으면 하늘을 우러러 당당하며
세상을 사랑하면 정신이 더욱 밝아져 자신을 완성시키고
밝은 세상을 만드는데 기여하게 된다.
이 길은 세상이 원하는 욕망과 화려한 위광의 길은 아니다.
인간이 가야할 가치와 길을 지키며 성실히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세상에서 뒤쳐지는 것 같은 느낌이 올 수도 있다.
하지만 열심히 일하고 거짓없이 살다보면
남보다 현실에서 성공하지는 못하지만
인간의 가치에 있어서 진실로 소중한 공덕과 인격을 쌓을 수 있다.
사람의 가치는 자신이 지은 가치와 공덕에 의해 결정된다.
높은 자리에 올라 세상을 망쳤다면
그는 세상에서 인간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악한 과보를 지은 것이니
그의 인생은 쓰레기 하나 주은 어린아이보다 오히려 더욱 미천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어렵고 힘든 세상이지만 그 속에도 하늘이 마련해놓은 축복이 있다.
사람은 어둠과 거짓을 극복하고 진리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에 부딪혀 자신의 애가 타고 사심이 사라져
습이 떨어지고 마음이 익어 완성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도 오탁악세가 되어야 비로소 나타난다고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악이란 악은 모두 다 모인 오탁악세의 시련을 이겨내고
자신의 업을 모두 태워버려야만 비로소 마음의 열매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의 어려움과 고통은 하늘이 준 선물이요, 기회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하늘도 큰 인물을 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큰 시련을 준다.
짓지 않고 이룰 수 있는 것은 없으며 고난이 없이는 크게 성취할 수 없다.
그러므로 현실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신성한 뜻과 진리가 이 세상에 있음을 분명히 확신하고
좋은 마음과 좋은 일의 가치를 중히 여기며
좋은 세상을 위해 힘차게 현실을 극복해 나간다면
이생도 좋고 내생도 좋은 영원히 좋은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