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존재 하는가?
수세기 동안 신학자들은 신의 존재를 옹호하는 논증들을 펼쳐왔고, 다른 사람들은 잘못된 '상식'을 제공함으로써 그것을 뒷받침 해왔습니다. 13세기에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가 주장한 다섯가지의 '증명'은 엄청난 명성을 얻고 있으며 지금까지 신의 존재를 옹호하는 논증중 최고로 꼽히고 있죠. 지금부터 리처드 도킨스와 함께 아퀴나스의 논증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신의 존재성에 대한 생각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그의 명성을 고려할 때 이렇게까지 얘기해도 될 지 모르겠지만) 그의 증명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하는데다 공허하기까지 합니다. 처음 세 개의 증명은 같은 것을 그저 달리 말한 것으로 하나로 묶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무한 회귀를 수반합니다. 하나의 질문에 대한 답은 선행 질문을 제기하고, 그런 식으로 질문은 무한히 계속됩니다.
1. 부동의 원동자, 그 어느 것도 선행 원동자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다. 이것은 회귀로 이어지며, 회귀로부터의 유일한 탈출구는 신이다. 무언가가 최초의 움직임을 일으켜야 하며 우리는 그 무언가를 신이라고 부른다.
2. 원인없는 원인. 자체가 원인인 것은 없다. 모든 결과에는 그보다 앞선 원인이 있으며, 여기서도 우리는 회귀의 압박을 받는다. 그것은 최초의 원인을 통해 종식되어야 하며, 우리는 그것을 신이라고 부른다.
3. 우주론적 논증. 그 어떤 물체도 존재하지 않던 때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은 물체들이 존재하므로 그것들을 출현시킨 비물리적인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며, 우리는 그것을 신이라고 부른다.
회귀 개념에 의존하는 이 세가지 논증은 신을 불러내 회귀를 종식시킵니다. 그것들은 신 자신이 회귀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전적으로 부당한 가정을 합니다. 비록 우리가 무한 회귀의 종식자를 독단적으로 생각해낸 뒤, 단순히 이름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거기에 이름을 붙이는 수상쩍은 사치를 부린다고 하더라도, 그 종식자에게 일반적인 신의 속성들을 부여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전능, 전지, 덕, 창조적인 설계도 그렇고, 기도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죄를 용서하고 가장 내밀한 생각을 읽는 등의 인간적인 속성은 말할 것도 없지요. 말이 난 김에 덧붙이면, 논리학자들은 전능과 전지가 상호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을 놓치지 않습니다. 신이 전지하다면, 그는 자신이 전능을 발휘하여 역사의 경로에 개입하여 어떻게 바꿀지를 이미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개입하겠다고 이미 마음먹은 것을 바꿀 수 없다는 의미이며, 따라서 그가 전능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카렌 오언스는 이 기발한 역설을 재치있는 시에 담아내었습니다.
전지한 신,
미래를 아는 신은 알 수 있을까?
전능함이
미래에 자신의 마음을 바꾸리라는 것을.
무한회귀와 그것을 종식시키기 위해 신을 불러내는 헛된 짓으로 되돌아가서, 차라리 빅뱅특이점이나 아직 알려지지 않은 물리학적 개념을 떠올리는 것이 더 경제적입니다. 그것을 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별 도움이 안되고, 최악의 경우에는 치명적인 오해를 불러 일으킵니다. 에드워드 리어의 <터무니없는 크럼버블리어스 커틀릿 요리법>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쇠고기 몇 조각을 구해서, 그것을 가능한 한 작게 자른 뒤, 그 조각을 더 작게 자르는 일을 여덟번이나 아홉번쯤 계속할 것." 회귀중에는 자연적인 종식자에게 도달하는 것도 있습니다. 예전에 과학자들은 가령 금을 가능한 한 가장 작은 조각으로 자른다면 어떻게 될까 궁금해왔습니다. 하지만 현대에는 가능한 가장 작은 금 조각은 정확히 79개의 양성자와 그보다 조금 더 많은 중성자로 이루어진 핵 주의를 79개의 전자가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알죠. 이보다 더 작게 자른다면 그것은 더이상 금이 아닙니다. 그 원자는 크럼버블리어스 커틀릿식 회귀의 자연적 종식자입니다. 신이 아퀴나스가 말하는 회귀의 자연적인 종식자인지는 결코 명확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이 말은 아주 온건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이제 아퀴나스의 다섯가지 증명 중 나머지 두개를 살펴봅시다.
4. 정도 논증. 우리는 사물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안다. 말하자면 선이나 완벽성 같은 것에 정도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최대값과 비교해야만 그 정도를 판단할 수 있다. 인간은 선하면서도 악할 수 있으므로, 최대 선은 우리 안에 있을 수가 없다. 따라서 완벽성의 기준이 될 다른 어떤 최대값이 있어야 하며, 우리는 그 최대 값을 신이라고 한다.
위대한 신학자 아퀴니스에게는 죄송하지만, 이게 논증입니까? 그렇다면 저는 이런 말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냄새가 다르지만, 우리는 상상할 수 있는 완벽한 최대냄새를 참조해야만 서로의 냄새를 비교할 수 있다. 따라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냄새를 풍기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우리는 그를 신이라고 부른다고. 비교할 특성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도, 마찬가지로 아둔한 결론이 도출 될 뿐입니다.
5. 목적론적 논증 또는 설계 논증. 세계의 사물들, 특히 살아 있는 것들은 마치 설계된 듯이 보인다. 우리가 아는 것 중에 설계되지 않았으면서 설계된 듯이 보이는 것은 전혀 없다. 따라서 설게자가 있는 것이 분명하며, 우리는 그를 신이라고 부른다.
그의 증명들 중에 지금까지 널리 쓰이고 있는 것은 설계 논증밖에 없으며,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상대를 궁극적으로 패퇴시킬 수 있는 논증으로 여깁니다. 다윈은 케임브릿지 대학교의 학생이었을 때 윌리엄 페일리의 <<자연신학>>에서 그 논증을 읽고 감명을 받았습니다. 페일리에게는 슬픈 일이지만, 성숙한 뒤 다윈은 그 논증을 버렸습니다. 다윈의 설계논증 타파만큼 대중 신앙을 철저히 패배시킨 탁월한 추론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뜻밖이었는데, 다윈 덕분에 우리가 아는 것 중 설계되지 않았으면서 설게된 듯이 보이는 것은 없다는 말이 더이상 진실이 아님을 잘 알고 있죠.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는 복잡성과 우아함을 경이로운 수준으로 올려놓음으로써 설계되지 않은 것들도 설계된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그리고 이 의사설계의 걸작 가운데에는 작은 곤충의 몸속에까지 장착된, 단순한 화살보다 더 정교한 열추적 미사일과 더 흡사한 목표추구 행동을 보이는 신경계가 있습니다.
글을 마치면서, '기도하다'라는 동사에 대한 앰브로즈 비어스(Ambrose Bierce)의 재치 만점의 정의를 떠올려 보죠. "지극히 부당하게 한명의 청원자를 위해서 우주의 법칙들을 무효화 하라고 요구하는 것."
재미있었으면 추천과 댓글 하나 달아주세요! :)
p.s 천주교재단의 학교인 우리학교에서 이런 글을 쓰고 있는게 유머..
p.s2 더 많은 이야기를 얻고 싶으신 분은 리처드도킨스의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을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이번 아퀴나스 논증 이야기도 <만들어진 신>에 언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