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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칼럼] 서울은 눈물을 믿지 않는다?
게시물ID : sisa_3153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muaythai
추천 : 5/2
조회수 : 516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07/07/26 10:04:56
[박노자칼럼] 서울은 눈물을 믿지 않는다? 
 
 


[한겨레] 이 글을 쓰는 순간에 계속 반전을 거듭하는 아프가니스탄 인질 사태를 보면서 여러 가지 착잡함을 느낀다. ‘대테러 전쟁’을 빙자하여 아프간을 무단으로 점령한 미국의 지시에 따르듯 아프간에다 한국군을 보낼 필요는 애당초부터 있었던가? 기독교 나라를 자처하는 미국 주도의 서방 세력들이 점령하고 있는 아프간 땅으로 종교적 색채를 띤 ‘봉사’를 간다는 것이 피침략 지역의 이슬람 신도들에게 좋게 비칠 리가 없다는 것을, 교회가 처음부터 간파할 수 없었을까? 그런데 이 모든 착잡함을 넘어서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국내 일부 누리꾼들의 반응이었다.


물론 전쟁터에 침략국과 같은 종교적 ‘코드’를 공유하는 ‘봉사’를 간다는 것은 한국 교회가 제국주의와의 친밀성이 얼마나 강한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로마 침략자들과 유대인 부역자의 손에 죽임을 당했던 예수의 정신으로 돌아오기를 교회에 촉구해야 한다. 그러나 죽음의 위협을 받는 23명이 우리와 ‘같은 인간’인데다, 우리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부의 ‘파병’으로 말미암아 곤란에 처한 것이 아닌가? 정부는 당연히 어떤 양보를 해서라도 그들을 구출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도 인터넷에서의 상당수의 댓글들을 보면 생사의 갈림길에 선 피랍자들에게 차갑기 짝이 없다. “거기로 갔을 때에 처음부터 생명을 포기한 것이 아니냐? 국가의 위상을 깎는 인질범들과 협상을 하느니 순교하게 놔두자”, “국가가 가지 말라는 데에 간 이들을 억지로 구출하기 위해 테러 집단과 협상할 일이 없다” …. 독자 여러분의 가족이 만일 납치됐을 경우 이런 글을 접하는 순간에 소회가 어떠실지 궁금하다. 옛날 소련 영화의 제목을 본떠서 이야기하자면 우리가 지금 ‘눈물을 모르는 서울’에서 살고 있는 느낌이다.


우리에게 연대 정신이 없는가? 수직적 통합, 즉 위로부터의 동원에 잘 응하는 자세라면 오히려 과잉상태다. 국가나 언론들이 “금을 모아서 외환위기를 극복하자” 하면 위기의 본질과 무관한 이 행동에 300만여명이 동참하고, 월드컵 때라면 서민들의 악화돼 가는 생활을 개선시킬 일 없는 국가 대표팀 응원에 인구의 절반 정도가 나선다. 국가 대신에 우리의 복지나 노후를 책임져 주는 소규모 집단, 곧 가족이나 동창의 부름에도 우리는 보통 적극적으로 응해준다. 그런데 완전한 타인의 경우에는, 그가 비록 대한민국의 시민인데도 우리는 그와 수평적 연대를 잘 하려 하지 않는다. 갈매기의 땅 독도에 대해서 일본 극우가 망언 한 마디를 해서 ‘국토의 신성’을 건드린다면 나라가 금방 누군가가 쑤셔놓은 벌집처럼 되지만, 개인으로서의 대한민국 시민 23명 위에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도 상당수 누리꾼들이 냉정한 비아냥으로만 일관한다. ‘국가’가 지배하는 ‘대한민국주의’ 정서에는, ‘개인’의 위치는 좁다.


우리가 서로로부터 소외되고 원자화된 ‘타인들의 사회’가 된 것은 타고난 ‘국민성의 결함’ 때문은 결코 아니다. 초등학교부터 같은 반 친구들을 성적 순위를 다투는 경쟁자로 만드는 적자생존 식의 시장주의 사회에서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이 나라가 비정규직의 피땀으로 주주 배당금을 늘리는 약탈적 재벌들의 포로이자 이전투구를 일삼는 족벌, 학벌 패거리들의 싸움터로 남아 있는 한 시민 연대의 덕목을 아무리 설교해도 소용이 없다. 학벌 타파, 평등한 무상 교육, 비정규직의 의무적 정규직화와 기업 경영에서의 노동자 참여 등 연대주의적 사회·경제 정책만이 대한민국을 시민 공화국으로 만들 수 있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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