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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의 심장이 맥동했다. 스테돌프는 그것의 심장에서 눈을 땔 수도 때지 않을 수도 없었기에 흐릿한 시선으로 그것의 심장을 봐야 했다. 의료 조합에서 쓰는 다이아몬드로 날을 간 메스보다도 더 날카로운 것에 의해 조각된 게 분명한 심장은 한 번도 온정이라곤 느껴보지 못한 존재가 만든 것처럼 미숙하고 거칠었다. 여지 저기 튀어나온 붉은 혈관들, 그 붉은 혈관이 뛸 때마다 흩어지는 파란색 핏줄기는 그것이 상처를 입었다 생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핏줄기가 흘러나오는 곳은 곳 영영 아물지 못할 딱지로 흉터가 졌고 심장의 피가 한 번씩 돌 때마다 상처는 생기며 늘어나고 분홍빛 살점은 더럽혀졌다. 스테돌프는 역겨움을 느꼈다. 뜨거운 증기 같은 맥동이 올라올 때 한 번, 그것이 푸른 혈관에서 피를 흘리면서 다시 내려갈 때 한 번. 그것의 심장은 완전히 아물 수 있었지만 그것의 의지가 그걸 거부하는 듯 했다. 미숙한 심장은 끊임없이 따듯함을 갈구했으나 힘을 잃은 차가운 정맥의 파란 피가 살덩이를 넘어 흘러나오도록 내버려 두었다. 뜨거움과 차가움이 반복되는 삶과 같은 흐름은 반쯤 끊겨 있었다. 마치 무거운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서투른 새끼 동물의 이기심처럼 심장은 온기만을 갈구할 뿐이었다.
심장은 한번씩 뛸 때마다 냉기를 남겼다. 겨울 같은 냉기 말이다. 무책임하게 바깥으로 떠넘겨진 심장의 냉기 어린 피는 스테돌프의 영혼을 집어삼키고 또 폐허로 만들고 잿더미가 되게 하는 것 같았다. 그 소비되고 낭비되고 버려진 것들은 종말을 상징했기에 그것을 인지한다는 것 만으로도 스테돌프는 죽어가는 것 같았다. 완전히 버려져, 숨이 멎고 수의 조차 덮여지지 않은 채 지하의 납골당이 아니 쓰레기 더미에 버려지는 그 느낌은-
“깨어나셨군요. 아, 아니 저를 헤치지 말고 정신을 차리시라는 뜻입니다. 여행자님.” 멀리 이성 아니,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는 지평선에서 차분한 그러나 조금은 따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스테돌프는 눈을 떴다. 아니, 눈을 뜨고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지금 스테돌프는 아무 옷가지도 걸치지 않을 채 어느 건물의 3번째 층에서 서빙용 무쇠 접시를 들고 있던 암컷 사슴의 양쪽 어깨를 발톱으로 찍어 내리고 있었으니까.
스테돌프는 당황해서 사슴을 어깨를 파고들었던 발톱을 바로 뺐다. 사슴의 색이 바래 누래진 하얀 옷에서 피가 묻어 나왔다. 스테돌프는 육식동물이라는 체면이 부끄럽게 피가 흐른다는 사실에 약간 놀라 뒷걸음질 치다 그만 70cm쯤 되는 침대 턱에 뒷발이 걸려 넘어졌다. 그는 낡았으나 여전히 부드러움을 전하는 침대의 푹신함을 느꼈고 동시에 이미 지쳐 근육마저 탈진한 다리가 제풀에 항복하는 뻐근한 고통을 느꼈다. 공포는 사라졌고 그 자리를 익숙하리만큼 진부한 혼돈이 채웠다.
“이러실 줄 알았으면 다 깨어나실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나을 뻔 했네요. 우유와 후추를 친 고기는 엎질러졌고 제 어깨를 직접 찌르셨죠. 고객님께서 혼란스럽다는 건 알고 있지만 땅에 엎질러져 버린 고기와 우유 그리고 망가진 제 옷까지 합쳐서 560입(Bite)의 추가 요금을 내셔야겠습니다. 그럼 완전히 정신을 차리실 때까지 물러나 있을까요?”
빛 바랜 분홍 치마를 입은 암사슴이 문 앞에서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지금 무슨 상황이지?”
스테돌프는 동물세계의 평균보다 조금 나았다. 적어도 모두가 이런 상황에서 사용할 /여기는 어디지?/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았으니까. 지금 무슨 상황인지를 묻는 것은 공간판단력은 물론 상황판단력까지 요구하는 질문이었으니까.
“브로큰 엔 이래이즈드 게이트(Broken and erased Gate) 여관에 와 계시죠. 집이 프라이드 랜드시에 있는 방직 조합원인 러쉬하트 스테돌프님이 맞으시죠? 집이 있는 도시에 잘 도착하셨습니다.”
“자세히 말해봐.”
스테돌프가 요구했다.
“노상강도에게 습격 당하시고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끈적끈적한 오물에 피와 스컹크 냄새를 뒤집어 쓰시고 저희 여관 문을 박차고 들어오신 것 기억 안 나시나요? 노상강도에게 습격을 당하시다니 확실히 도시에 들어오는 신고식을 제대로 하신 셈이네요.”
치마와 비슷한 색상인 붉은 두건을 머리에 두른 사슴이 대답해주었다. 사슴은 웃는 건지, 슬퍼하는 건지 아니면 스테돌프가 낸 상처에 아파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는데 그 미소가 왠지 여전히 반쯤 정신을 차리지 못한 스테돌프를 비웃는 것 같았다. 초식동물이 포식자에게 내보여서는 안 되는 그 표정 말이다.
실용적으로 말해 스테돌프는 그 비웃음에 화낼 처지는 아니었다. 그것이 포식자와 피식자의 섭리를 거스르는 것이라도 말이다. 그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체였으며 침대에서 어정쩡하게 일어나 주둥이를 벌리고 있었고 침도 흘리고 있었으니까. 사슴의 미소가 의미하는 것만큼이나 스테돌프는 나머지 반쯤 없어진 정신을 되찾을 필요가 있었다.
“그 괴물이 쫓아왔나? 그 아무튼 끔찍한데, 젠장 설명을 못하겠어- 그러니까 무장한 포식자들까지 살육하는 괴물이 말이야?”
지금 스테돌프는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질문을 던졌다. 진짜 뭔 돌이나 20kg짜리 납 추를 던지는 것처럼 말이다. 사슴이 눈을 몇 번 깜빡 하면서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게 보였다. /하긴, 그 존재하지 말아야 할 건 그렇지./ 스테돌프는 생각했다.
“정확히 설명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옛길을 여행하시다 일행하고 함께 꽤 큰 무리의 노상강도들에게 당하셔서 여기 오신 상태입니다. 물론 군부에 이미 신고는 해두었습니다. 그리고 괴물은 상상 속에만 존재하지요.”
사슴이 여관방의 문을 열어놓고 나갈 준비를 하면서 차분히 말했다. 포식자인 스테돌프가 좀 더 난동을 치겠다면 미리 도망쳐 있겠다는 심산이었다. 프라이드 랜드에서 피식자는 포식자에게 반항하면 안됐다.
스테돌프가 있는 여관방은 이미 스테돌프가 같이 머릿속이 혼란스럽거나 격한 감정을 가진 손님들을 여러 번 겪어 왔는지 발톱과 아이언 클로 자국에 나무문에는 납탄이 뚫고 나간 총알자국을 대충 때워놓은 흔적까지 보였다.
“왜 나가려는 거지 사슴? 습격은 노상강도들이 벌인 일이 아니었고 빌어먹고 소름 끼치는 뭔가가 일행을 박살낸 거라고. 난 대답을 원해. 군부에 보고했다고 했지 그럼 괴물은 처리한 건가? 지금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느냐고?”
스테돌프가 외쳤다. 그 끔찍한 걸 떠올릴 때마다 겁을 먹는다는 건 좋은 일이 아니었다. 포식자의 미덕은 두려움을 가지지 않는 것에 있었고 혹여 라도 그런 모습을 보이면 다른 동물들이 말한 건처럼 체면이나 인상을 완전히 구겨 버리는 것이었다. 지금 스테돌프는 그 체면보다 사실을 위해 초식동물에게 부탁했다. 스테돌프는 자신의 기억을 정확히 하기 위해 안달이 나있었다.
“괴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말하기는 죄송하지만 습격 때문에 당황하셨거나 약간 헷갈려 하시는 것 같군요. 괴물은 과거의 전설 속에 존재했고 지금은 저 같이 곡물을 먹는 자들도 그건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요.”
암사슴이 딱 잘라 말했다. 그녀의 갈색 눈에는 이런 일은 몇 번 겪어 봤다는 귀찮음이 섞여있었다.
“전 지금 나가서 물 주전자와 컵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필요하시다면 커피를 타와 드릴 수도 있고요. 뭔가 복수하고 싶거나 스트레스를 풀고 싶으시다면 이 방의 집기들을 부수셔도 됩니다. 추가 요금을 내신다면 저희는 이 방에서 무엇을 하시는 상관하지 않지요.”
문은 거의 닫혀버렸고 굽이진 앞발만이 보이게 된 암사슴의 목소리가 들렸다. 밖으로 사라져버리지 않은 암사슴의 앞발엔 무쇠 쟁반이 들려있었고 우유가 뚝뚝 흘러나왔다.
포식자인 자신을 바보처럼 대하는 행동은 늑대치고 얌전하다는 이야기를 듣는 스테돌프도 분노할만한 것이었다. 서서히 자신이 생각하던 괴물이 진짜였는지 스테돌프 스스로 의심하는데 바쁘지 않았다면 정말로 사슴에게 화를 냈을지 몰랐다. 스테돌프가 가지고 있던 습격에 대한 기억은 죄다 혼란스러운 것들이었다.
“그래 괴물은 없어. 조용이 있을 생각이니까 이리 들어와서 내가 이 여관에 들어왔을 때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봐. 그렇게 해준다면 추가 요금이라도 지불해 주지.”
스테돌프는 포식자의 최면을 꽉꽉 접어서 어딘가에 구겨버리며 말했다. 기억은 혼란스러웠지만 존재했다. 그렇다면 이 복잡함을 어디서부터 해결해야 한단 말인가?
“여관 종업원과의 개인적인 대화는 원래 1000입의 요금을 받지만 지금은 100입만 받도록 하지요. 하지만 요금엔 제 몸값 그리고 제 몸을 구성하는 살, 고기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혹여 라도 절 산채로 잡아먹으실 생각이라면 감옥에서 오랫동안 머무실 각오는 하셔야 할 겁니다.”
고기를 사서 먹는 것인 아닌 문명 이전의 방식대로 그냥 먹어버리고 마는 건 현재의 프라이드 랜드에서 죄가 되는 일이었다. 차가운 지하감옥에서 습기에 집어 삼켜 지는 건 부차적인 문제였고 포식자들의 사회에서 진짜 문제 있는 야만족으로 찍히는 게 더 위험한 일이었다. 현재의 스테돌프는 흥분해 있었지만 이성을 잃을 만큼은 아니었고 마음을 다스리려 숨을 내쉬었다. 스테돌프는 왜 자기가 있는 방이 엉망인지 깨달았다. 주인 되는 동물이 누구인지 몰라도 이 여관은 3층 방을 흥분한 동물을 집어넣는데 쓰고 있었고 그것이 왜 이방이 온갖 동물들이 만들어낸 야만적인 흔적으로 덮여있는 이유일 것이었다.
“내가 이 여관에 올 때의 상황과 지금 내가 왜 이방으로 옮겨져 있는지 말해봐.”
스테돌프가 재빨리 침대를 싸고 있던 침대 보를 태양을 섬기는 교회의 제사장들이 입는 토가나 로브처럼 걸치며 말했다. 나체로 있는 건 부끄러운 일이 맞았다. 태양의 교단이 지겹도록 설교하는 것처럼 스테돌프는 문명을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말씀드렸다시피 1층 여관 홀의 문을 박차고 들어오셔서는 다른 손님들의 팔을 붙잡으려 하시고 가슴을 잡은 채 무릎을 꿇기도 하시면서 다른 손님들을 방해하시더니 테이블 몇 개와 술병 수십 개를 부수시고 나서는 /내 말을 들어다오./, /맥동하는 존재다. 그 존재가 나타났다/ 그런 이상한 소리를 치셨죠. 그러다가 갑자기 쓰러지신 거고요. 저흰 쓰러진 손님을 이곳으로 옮겨드린 뒤 더러워진 옷가지는 빨기 위해 뒤뜰 빨래 통에 넣어두었고 소지품은 석회와 세제를 뿌려서 닦은 뒤 배게 근처 장롱에 넣어드렸죠. 그리고 이제 일어나신 거고요.”
사슴이 침대에 앉으면서 말했다. 스테돌프는 반사적으로 일어섰다.
“그게 다인가?” 스테돌프가 아직은 약간 격해져 있는 마음을 가다듬지 못하고 말했다.
“그것이 전부랍니다. 다만, 노상강도의 습격 사건 조사차 나왔던 군부에서 손님이 부순 테이블과 바닥에 흘린 음식 값을 대신 지불하고 갔습니다. 으레 이런 강도사건의 피해금액은 불공평한 피해 당사자가 내는 것인데도 말이죠.”
“강도라고, 그게 정말 사실 인 거야? 숲 속에서 프라이드 랜드의 감시를 벗어난 존재가 있었던 건 아니고?”
스테돌프는 물어야 했다. 잠시 잃어버린 기억 때문인지 스테돌프가 옛길에서 당했던 일 때문인지 스테돌프는 서서히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요즘은 대부분의 것들이 비적 마른 씨앗처럼 바스러져 가고 있다고 하죠. 오래 전부터 말입니다. 꽃은 더 이상 스스로 피어나지 않고 그 아름다움도 보기 힘들어졌습니다. 그런 재 같이 어두운 숲에 뭔가 있을 리가요? 요즘은 새끼 동물들을 겁줄 때 숲은 텅 비었다고 하고 그 말은 사실이랍니다.”
사슴은 약간 체념한 듯이 말했는데 스테돌프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스테들프가 경험한 바로는 피식자들은 종종 뜻을 알 수 없는 어두운 분위기의 단어들을 말하고는 했다. 스테돌프는 이번에도 괴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답변을 받았다. 머리가 더 어지러웠다. 스테돌프가 보고 느끼고 그의 심장 속에 파고 들었던 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럼, 군부에서 현장을 조사할 동물들을 보냈을 텐데 그 동물들에게 전해들은 예기는 없나?”
스테돌프가 옷처럼 매고 있던 이불보의 매듭을 단단히 조이며 말했다.
“저희가 여관에 이상한 손님이 도착했다고 알리자 바로 조사하러 대부대를 꾸렸던 그들 말인가요? 그들은 돌아와서는 큰 습격 사건의 현장을 발견했다고 했고 시체들을 수습하고 피식자들의 고기를 도축해 갔습니다. 현장에서 대포를 쓴 흔적과 다량의 납 산탄이 발견되었다고 하더군요. 사슴 사냥용 블런더버스의 탄약들 말입니다. 도로 바로 곁 나무에 바짝 붙어있다가 양쪽에서 화력으로 기습한 샘이죠. 노상강도들이 대담해 졌습니다. 감히 프라이드의 피가 흐르는 사자까지 공격하다니 말입니다.”
암사슴이 한숨을 쉬었다. 스테돌프는 그 한 숨이 노상강도들의 습격을 안타까워하는 건지 까다롭게 질문하는 스테돌프가 귀찮아져서 그렇게 말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사슴 사냥용 블런더버스와 대포라/ 스테돌프의 불안한 마음만 뺀다면 모든 건 어떻게든 설명됐다. 하지만 스테돌프는 계속 두통을 느꼈다.
“지금 나는 메케한 냄새가 뭔지?”
스테돌프가 묻자 사슴이 스테돌프를 뻔히 바라보았다. 스컹크의 독소탄. 습격이 있을 때 스컹크들이 조준도 안 한 독소탄을 쏘아대서 주변이 하얗게 변했었다. 어쩌면 스테돌프가 가진 두통의 원인이 그것 때문인지도 모를 일었다. 그 군용설탕과 뒤섞여 끔찍하게 지워지지 않는 냄새가 스테돌프의 마음과 심장에 영향을 끼친 걸 수도 있었다. 그 존재가, 일행을 몰살시켰던 존재가 어디까지 환상이었다면.
스테돌프는 사슴의 눈을 바라봤다. 사슴은 약간 당황스럽다는 듯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사슴의 거듭된 설명이 맞는다면 이제 미지근한 현실 그러니까 도시 초입 여관방에서 침대보만 걸치고 있는 난감한 상황으로 돌아와야 했다. 스테돌프는 크게 숨을 한 번 쉬었다. 먼지와 함께 여관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눅눅한 습기가 폐로 한 가득 들어왔다.
스컹크의 냄새는 절대 쉽게 지워지는 게 아니었다. 그게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화학 약품과 뒤섞인 독소탄이라면 이야기는 더 심했다. 으깬 토마토라든지 표백용 산성 세제를 쓰면 냄새가 좀 덜해졌지만 한 달은 넘게 가는 악취였다. 토마토는 밀을 심느라 바빠서 우선 순위 뒤로 밀리는 온실에서 자라는 귀한 작물이었고 표백용 산성 세제는 털 아래 피부가 따갑고 그 부분의 털이 변색되어 버리는 위험한 물질이었다.
“뭐라도 입을만한 옷이 있나?”
방직 조합원이어서 잘 알았지만 한 동물이 제대로 차려 입을만한 맞춤복은 구하기 어려웠다. 만드는데도 시간이 걸렸고 그래서 아무 옷이나 냄새 없고 깨끗한 걸 물은 것이다.
“보통은 술을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어 발톱과 주둥이로 할퀴고 물어 뜯는 분들을 위해 여분의 옷을 마련해 두는데 오늘은 다 떨어져버리고 말았네요. 아까 고객님이 낸 소란 때문에 다른 손님들이 서로 망가진 테이블에 있던 바닥에 흘러 넘친 술값은 안 내겠다고 싸우셔서 옷들을 모두 구입해 가셨거든요. 너덜너덜한 넝마 차림으로 한 밤중을 돌아다니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었죠.”
암사슴이 대답했다. 사슴은 찢어진 웃옷을 잠시 벗더니 스테돌프가 낸 상처를 확힌하고 치마에서 라벤더 연고 병을 꺼내 상처에 발랐다. 사슴은 네 게의 열을 가진 동물의 가슴을 가지고 있었고 가장 큰 첫 번째 가슴을 천으로 묶어서 감싸고 있었다. 스테돌프는 무슨 관심이나 흥분 같은 걸 느끼지는 않았다. 암사슴은 피식자일뿐더러 스테돌프의 조금 정상적이지 않은 취향은 다른데 있었으니까.
“그럼 구할 수 있나? 다른 건 하얀 거면 됐고 롱코스는 파란색이면 돼. 알잖아 방직조합이 쓰는 질 좋고 가격 적당한 코발트 염색 말이야. 난 지금 옷이 없는데다가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정확히는 숨돌릴 시간이 맞겠지만 스테돌프는 어쨌든 그렇게 말했다.
“새벽이 되어 날이 밝아오고 있다고 해도 아직은 밤 시간입니다 손님. 포식자 분들이 사냥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시간이지죠. 저희 여관의 종업원이 거리에 나선다면 금세 잡아 먹혀 고기가 되고 말 거랍니다.”
암사슴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제껏 멀쩡하던 사슴의 눈에서 일말의 공포가 보였다. 밤이란 피식자들에게 두려움의 시간이었다.
사냥의 권리란 시장에서 고기를 살 수 없는 가난한 포식자들이 어떤 처벌 없이 저녁 9시부터 아침 7시까지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피식자들을 잡아먹어도 아무 죄값을 묻지 않는 제도이자 법이었다. 그 방법이 조금은 야만스러워도 말이다.
이 규칙은 오랫동안 철저히 지켜져 왔다. 사냥의 권리가 주어지는 시간에 피식자들은 포식자들에 맞설 수 없었고 만약 그렇다면 엄중한 처벌을 받았다. 만약 피식자가 근처 건물이나 집으로 도주한다면 문을 열어주는 당사자와 그곳에 거주하는 피식자들도 사냥의 권리에 포함되어 잡아 먹히는 동물이 될 수 있었다.
프라이드 랜드시를 가로지르는 폐수와 도살장의 피로 오염 된 하모니강(Harmony River)의 블로터스 다리 위에 집을 가지고 있는 스테돌프도 예전에 몇 번 포식자에게 쫓기며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집과 가게의 문을 두드리며 열어달라던 피식자의 비명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물론 스테돌프의 집에 피식자가 문을 두드린 적도 없었고 왜 피식자에게 그런 호의까지 보여야 하는지 생각한 적도 없었다. 프라이드 랜드의 포식자인 스테돌프에겐 그건 그냥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새벽이라고? 여기 온지 몇 시간이나 지났지?”
스테돌프가 약간 놀라서 말했다. 스테돌프는 자신이 언제 피의 습격 현장에서 빠져 나왔는지 도대체 언제부터 깨어나 눈을 뜨고 있었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것만 생각하면 몸에서 피가 빠져가듯 가슴이 텅 빈 느낌을 받았으니까.
“전 시계가 없어서 정확히 말씀 드리지는 못하겠지만 여관의 여우들이 가지고 있는 걸 몇 번 살펴본 걸로 어림잡자면 8시간 정도 지난 거 같군요. 손님께서 여기 달려들어오신 게 사냥의 권리가 발동되기 직전이었으니까요. 그럼 뭐 다른 시키실 건 없으십니까?”
스테돌프는 사슴을 할퀼 때 힘 조절을 하지 않았고 발톱은 분명히 어깨 깊이 박혔었다. 비록 연고를 발랐다고는 해도 전혀 아픈 기색을 보이지 않는 사슴이 스테돌프는 이상하게 느껴졌다. 어쩜 암사슴은 피식자로서 이런 경험이 많은지도 몰랐다.
“옷을 구할 다른 방법이 없나? 웃돈을 주고서라도 다른 동물의 옷을 빌려 입는 다는지?”
스테돌프가 현제 자신의 상황을 잊지 않으며 말했다. 옷이 동물을 만든다는 말처럼 스테돌프는 제대로 차려 입을 필요가 있었다.
“그것보다는 저희 여관을 지키는 여우들 중 하나에게 심부름을 보내시는 건 어떠신가요? 새벽에 의류 가게의 주인들을 깨우는 건 귀찮은 일이지만 수고비만 주신다면 문지기 여우에게 귀띔 해드리지요. 수고비는 3000입 되겠습니다.”
사슴이 말했다. 사슴이 드디어 뭔가 느꼈는지 앞발로 어깨의 피묻은 상처를 몇 번 만졌다. 그게 활기 있는 동물들이 할만한 일이었고.
“이 고기는 내가 먹지.”
사슴이 바닥에 떨어진 후추에 절인 고기와 우유 컵을 주우려던 순간 스테돌프가 먼저 앞발을 뻗었다. 배가 꼬르륵거리며 고기와 피에 대한 욕망이 되살아 났다.
“무슨 고기지?”
스테돌프가 물었다. 프라이드 랜드의 피식자들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완전히 자신을 바칠 준비가 되어있는 착실한 돼지들이 아니었다. 가끔은 감히 포식자를 다치게 할 정도로 그들은 불만 많고 유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고기에선 노린내가 났다. 누군가는 그게 피식자들이 도살 당할 때 저항하고 두려움을 느끼기에 스트레스를 받아 그런 거라고도 했지만 스테돌프는 진실을 몰랐고 그걸 알 생각도 없었다.
“사슴 고기입니다. 프라이든 랜드에서 피식자의 운명은 누군가는 고기가 되고 또 누군가는 새로운 하루의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나눠지지요.”
암사슴 종업원이 이상하게도 기이한 어조로, 그러면서도 부드럽게 말했다. 스테돌프는 방을 둘러봤다. 군대군대 상처 입은 것처럼 갈라진 회칠로 마감된 방에는 동물들이 난동을 벌여 여기저기 할퀸 자국 이외에 여행자의 짐을 넣어둘 수 있는 큰 상자와, 기다란 선반, 세 게의 서랍장 그리고 장롱 하나와 침대가 있었다.
스테돌프는 혹시라도 하는 생각에 짐 상자를 열어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진실이 뭐가 되었든 스테돌프의 짐은 피와 땀냄새와 함께 옛길에 버려져 있을 수레에 있었다. 현장을 조사했다는 군부가 그걸 수거해 갔을 수도 있지만 지금 스테돌프가 있는 곳은 군부 감찰대의 사무실이 아닌 여관이었다.
스테돌프는 장롱을 열어보았다. 그곳에는 물건이 조금 있었다. 아직도 고무가 타는듯한 역한 독소탄 냄새를 풍기는 황동 탄피 권총과, 기름먹인 두꺼운 양피지에 인쇄된 방직조합 조합원 자격증, 지폐가 들어있는 지갑과 금화가 든 돈주머니였다. 어머니가 주었던 방직조합 휴직 사유서는 없었다.
스테돌프는 이제 교활한 여우들이 옷을 가져다 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분명한 육식동물이었지만 교회가 정하는 섭리에서 포식자의 자격을 가지지 못한 여우들은 격 낮은 피식자들과 자주 어울리고는 했다. 그들은 사악함을 가진 그 언변으로 피식자들이 잘못한 일을 변호하기도 했고, 사자와 고양이과 동물들이 자신의 말을 초식동물에게 전하도록 대리인으로 뽑아 그 곡물을 먹는 초식 동물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여우들은 육식동물들과는 어깨동무를 하고 잡식동물들에게는 웃었으며 초식동물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양쪽에서 포식자도 아니고 피식자도 아닌 것처럼 중간에서 행동하기에 여우들을 교활하다고 부르는 거였다. 그리고 스테돌프는 지금 그 교활한 앞발들이라도 필요했다.
습격 따위는 일어나지 않고 이상한 괴물 같은 환상도 존재하지 않으며 걱정이나 신경을 쓰지 않을 때가 스테돌프의 삶에서 있었을까? 스테돌프는 그런 행복한 삶을 누려 본 적이 없었다. 지금의 습격처럼 삶은 언제나 걱정거리가 있었다. 스테돌프가 어릴 적 어머니에게 들었던 그 옛날의 이야기들은 그렇지 않았지만.
프라이드 랜드 동물들의 섭리를 규정하고 그걸 강제하는 태양의 교회는 예전에 이런 이야기들을 했다. 한 그루의 청사과 빛 밝은 녹색의 나무가 번쩍이는 태양의 빛을 받아서 자라듯 초식동물들이 태양의 빛 즉 고기가 되어서, 나무인 육식동물들은 살찌우고, 육식동물들이 문명을 세우고 나라를 다스리며 프라이드 랜드를 건강과 번영의 장소로 만든다고 말이다. 그것만이 방법이라고 모두가 만수무강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했다.
지금 시대에 보이는 로브와 태양의 빛 줄기 모양으로 갈라진 반 원형의 황금 등 장식을 단 교단의 사제들이 말하는 것이 아닌, 태양 자체가 정해 준 방식으로서 수 십 세기도 넘는 과거에 돼지라는 동물이 영원히 태양의 빛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다. 지금에 와선 비판적인 동물들이 그건 강제로 떠넘겨진 운명이 맞는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 때의 돼지들은 태양의 교회를 따랐고 기꺼이 밭을 갈고 또 당연하게도 제분소의 날카로운 원형 톱날 아래서 고기가 되는 운명을 받아들였다. 모든 동물들이 만찬을 즐겼고 걱정은 없는 시대였다.
전설 속에 등장하는 사악한 파충류가 천국의 나무와 계단 사이로 몰래 기어들어와 날카로운 이의 독과도 같은 몇 마디의 말들로 그 꽃들이 만발한 봄날의 만찬장에 흘려 넣기는 전까지 말이다.
모든 일의 시작은 하늘에서 떨어진 조약돌이 물가에 퍼져나가는 파문을 일으키듯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6 세기 전 엔리븐 왕의 해에 내전이 있었다. 프라이드 랜드를 휩쓴 오랜 기근은 그때 시작되었고 왕의 동생인 디와은 왕자는 왕위를 찬탈하려 지지자들을 모았고 돼지들에게도 무기를 들 권리와 싸울 자격이 있다고 그들을 부추겼다. 전 쟁은 해를 넘겼고 곧 이제는 잊혀져 버린 4 세력의 혈투로 바뀌었다.
내전은 프라이드 랜드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그 내전 막바지에 소문이 있었다. 가장 힘없고 약해진 존재의 군대가 프라이드 동쪽 트레디얼 평원으로 향한다는 소식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4 세력은 군대를 움직였고 전투가 벌어졌다. 마침내 모든 세력이 사이 좋게 몰락했을 때 그곳에 도착한 것은 돼지들이었다. 재분소의 지하, 도축용 톱날로 끌려가던 돼지들이 트레이얼 평원과 군대의 소문을 퍼트렸던 것이었고 그들은 반란 세력을 모두 쫓아낸 채 다시는 고기가 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지방의 성을 가진 숫사자 영주들의 민병대가 오랜 수성전과 공성전 끝에 간신히 배신을 선언한 돼지들을 파멸시켰지만 그 대가는 컸다.
교회는 믿음을 버린 돼지들의 반항에 놀랐으며 저항하지 못한 채 무너졌고 결국에는 여전히 그들을 따르는 일부의 신실한 돼지들과 정원(The Garden)이라 불린 비밀스러운 곳으로 후퇴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동물들은 황폐해진 농토를 버리고 도시로 향했고 곧 새로운 규칙이 정해졌다. 돼지들의 수는 엄격하게 통제되고 제한되었으며, 피식자들에겐 출산세와(Birth Tax) 성년세(Mature Age Tax)등이 부과되었다. 그리고 돼지가 아닌 다른 피식자들이 농사를 짓고 세금을 낼 시기가 될 때마다 자신들의 새끼와 갓 성년이 된 자식들의 일부를 고기로서, 또 세금으로서 바치게 되었다. 이 신성한 서약이 무너지지 않도록 살아남은 교회는 군부를 동원해 엄격한 통제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게 현재로 이어진 것이다.
지금은 만찬을 즐기던 옛날과 달랐다. 기나긴 흉년에 돼지의 수까지 줄어든 건 좋지 않은 일이었다. 과거에는 늘 즐겼다던 돼지 고기도 이제는 권력을 쥔 사자들이 아니면 맛보기도 힘든 게 되었다. 세금은 걷는 체계엔 한계가 생겼고 그 덕에 고기도 귀해져 버렸다.
스테돌프가 태어나던 때에 심한 한파가 있었다. 그 한겨울에 태어나고도 가문의 상징인 하얀 털을 가지고 태어나지 못했다는 이유로 스테돌프의 할머니는 그 겨울을 운명의 장난이라고 불렀다. 스테돌프가 기억하는 선에선 말이다.
그 한파는 상당히 심한 것이어서 얼어 죽은 동물들은 물론 봄은 물론 여름에도 작물이 자라지 않았다. 많은 초식동물들이 굶어 죽었고 그로 인해 고기는 생겼지만 누구도 그걸 좋아하지는 않았다. 끊임없이 고기로 바쳐질 피식자들이 한꺼번에 죽는 건 나쁜 일이었다. 다행히도 한파는 두 해 이상 지속되진 않았다.
새로 즉위한 프라이드 랜드의 엠렛 사자왕은 포식자들에게도 농사에 신경 쓰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것이 그의 다섯 번째 칙령이었다. 여섯 번째 칙령은 빈 왕실 금고를 채우고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기근을 대비해 금화로 된 세금을 올리는 것이었다. 프라이드 랜드의 노동조합 조합원들의 일부는 조합회비를 내기 버거울 정도로 힘겨워졌고 곧 탈퇴 당해 부랑자가 되었다. 스테돌프 가족의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스테돌프의 가족들은 다행히 작은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 영지와 작위는 고양이과 동물들 사이에서 되 물림 되는 것이었고 프라이드 랜드를 통틀어 비 고양이과 동물 중 작위를 가진 동물은 채 열이 되지 않는다고 스테돌프는 알고 있었다. 그의 가족은 그 귀한 작위를 가지고 있는 늑대 가문이었다.
죽어가는 밀의 기사. 스테돌프 어머니의 먼 조상이 트레이얼 평원에서 돼지들과 싸웠을 때 얻는 작위였다. 이름도 괴상했고 무엇보다도 패배한 전쟁에서 얻은 이상한 작위 말이다. 누구도 작위가 있다고 스테돌프의 가족을 고양이과 동물로 취급해 주지도 않았고, 그나마 얻은 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어떤 동물도 그걸 영지라 부르지 않을 것 같은 조그마한 농장이었지만 말이다.
어머니는 그게 정말 별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고 할머니는 그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스테돌프는 어릴 때 보았던 두 집안 어른의 싸움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스테돌프는 어머니의 말이 맞다 생각했지만 뭔가 가지고 있는 것은 나쁘지만은 않았다.
조합은 함께하는 것이다. 그것이 방직 조합이든 주조 조합이든 말이다. 스테돌프의 어머니가 조합을 위해 열심히 일하기도 했지만 몇몇 조합원들은 스테돌프의 어머니가 땅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신경 썼다. 그의 가족은 조합에서 어느 정도 높은 자리에 있었고 그만큼 내야 하는 돈도 많았다. 어머니는 그게 다 관계를 유지하는데 필요하다고 훈계했다.
스테돌프의 어머니가 방직조합의 휴직서를 쓴 건 그 돈을 내기 위해서였다. 농장의 대리 동물로 여우를 고용하는 건 비쌌다. 직접 농장으로 내려가 태업을 일삼는 반항적이고 못된 초식동물들을 다그쳐 영지의 작물 수확량을 늘리는 게 나은 방법이었다. 그리고 스테돌프는 16살의 성년이 돼서 새로 방직 조합원이 되었고 그 때문에 프라이드 랜드시로 돌아온 것이다.
뒤를 돌아보니 종업원 사슴은 사라져 있었고 바닥의 우유자국은 깔끔하게 닦였으며 방문은 닫혀있었다. 아마도 사슴이 다른 신선한 우유나 커피 그리고 음식을 서빙하기 위해 1층 여관 홀로 내려간 것 같았다. 스테돌프는 무쇠 접시 위의 우유가 살짝 묻은 사슴고기를 집어 들어 한입 물었다. 노린내를 감추지 위한 진하고 매운 후추의 냄새가 주둥이 안에 가득 찼다.
스테돌프는 잠시 침대에 앉아 부탁한 옷이 준비되기를 기다릴까 하다가 아직 열어보지 않은 서랍장으로 향했다. 서랍장의 가장 위쪽은 살짝 젖혀져 열려있었다. 서랍을 열었다. 그는 순간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가 진홍색 바탕의 마름모 모양인 장식을 발견했다. 정확히 숫사자의 갈기 모양 금속 세공 가운데에 마름모 무늬가 새겨져 있었고 마름모를 사분면 했을 때 오른쪽 위와 왼쪽 아래 두 부분에만 검은색을 칠한 장식이 말이다. 그건 프라이드 랜드 사자들의 상징이었다.
사자들은 분명 이런 허름한 여관에 머물지 않았으니 상징이 우연히 버려졌을 리는 없었다. 혹여나 그것이 여행자 일행을 호위하던 암사자의 것은 아닐까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그럴리가 없었다. 종업원 사슴은 스테돌프가 혼자 여관으로 도망쳐 왔다고 했다.
스테돌프는 어찌할지 모르다가 그 진홍빛 금 상징을 손에 쥐었다. 기이하게도 손에 쥐자 스테돌프의 마음도 머리 아픔도 가라앉는 것 같았다. 괴물에게 당한 건 그저 상상이라는 확신이 강해졌다.
“여기 있습니다.”
암사슴은 소고기 조금과 우유 2잔 그리고 따듯한 커피를 자지고 돌아왔다. 스테돌프는 자신이 마신 우유가 어떤 초식동물의 우유인지 궁금해졌지만 그건 묻지 않기로 했다. 아침이 시작될 쯤 옷이 도착했고 스테돌프는 재빨리 하얀 속옷과, 셔츠 바지 그리고 푸른색 롱코트와 하얀 스카프를 맺다.
“이것 좀 매줄 수 있겠나? 리본 줄의 양쪽 길이는 되도록이면 똑같이 맞추도록 해.”
스테돌프는 암사슴에게 늑대의 꼬리가 시작되는 부분에 맬 파란 리본을 묶어 달라고 했다. 이 리본은 프라이드 랜드의 조합원들이나 조합원과 비슷한 지휘를 포식자들이 매는 일종의 전통이었다. 때문에 프라이드 랜드의 동물들은 스테돌프와 같은 계급의 동물들을 리본테일(Ribbon Tail)이라고 불렀다.
주머니에 아까 발견한 상징을 집어넣긴 했지만 여전히 습격에 대한 조금의 불안이 남아있었다. 마치 자르고 잘라도 조금의 나머지 부분이 생기는 괴상한 물건처럼 말이다. 담력 있고 차분하게 행동하는 게 포식자가 가져 야할 미덕이었지만 스테돌프는 별로 용감한 편인 늑대가 아니었다.
“나가실 건가요? 빨래는 어떻게 하실거죠?”
암사슴이 다 먹은 서빙용 쟁반의 뼈를 치우며 말했다.
“우선 집에 들렀다 내일쯤에 가지러 오지.”
무슨 나쁜 짓을 당했든 그건 이미 지났다. 스테돌프는 정신을 차리고 다음 행동을 할 상태였다. 스테돌프는 우선 1년 동안 텅 비었던 가족 집에 들르기로 했다. 바로 다음엔 노상강도 습격 사건을 담당한 군부의 포식자들을 그들이 조사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생각이었다. 어머니가 쓴 휴직서는 없었지만 프라이드 랜드시에 존재하는 조합들의 본부인 길드 홀에도 가서 사정을 설명해야 했고.
“저희 여관에 지불해 주셔야 할 총 금액은 총 4360입 입니다.”
암사슴이 말했다. 어깨를 덮은 한 겹의 찢어진 옷자락 아래 스테돌프가 찍어 누른 상처가 부풀어 올라있는 것이 보였다.
“여기 지폐 4장 그리고 금화와 은화.”
스테돌프가 값을 치렀다. 원래 화폐 단 뒤 입은 고기 한 입과 금화의 비율을 동등하게 계산했기 때문에 닢이 아니라 입(Bite)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물론, 스테돌프가 태어나기 한 참 전에나 그렇게 거래되었다는 뜻이고 지금은 고기와 물건들의 가치가 몇 백입, 몇 천입으로 뛰어있었다.
프라이드의 현 왕인 엠렛 왕은 한 때 프라이드 랜드에서 유일하게 초식동물이 담당하고 있는, 재무장관 직의 동물을 갈아치우면서 시장 가격에 개혁이 있을 거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화폐를 개혁한다는 게 성공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거니와 뭔가 살 때마다 주머니에서 빠져 나오는 돈은 늘어만 가는 실정이었다.
“감사합니다.”
암사슴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녀는 스테돌프가 옷 대용으로 썼던 이불보를 다시 매트리스 위에 개고 있었다.
스테돌프는 창문을 덮고 있던 나무 판자를 걸쇠에서 분리했다. 날은 충분히 밝았다. 창문을 통과해 서서히 그리고 조금씩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정확히 아직은 새벽시간이었고 져가는 달도 희미하게나마 하늘에 떠있었지만 하늘은 연한 청색에 회색 빛의 구름들로 차 있었다. 스테돌프가 질릴 정도로 많이 본 프라이드 랜드의 평범한 이른 아침 풍경이었다.
스테돌프는 방을 나서는 암사슴을 따라 복도로 나왔다. 아침이어서 그런지 여관의 3층 복도는 조용했다. 하지만 계단으로 나서자 주점의 옅은 말소리들과 잔을 부딪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스테돌프는 속담 하나를 떠올렸다. /같은 업계의 사람들끼리는 좀처럼 만나지 않는다. 심지어 흥겹게 떠들며 노는 일도 거의 없다. 하지만, 그들이 대화한다면 그건 다른 동물들에 대한 음모로 끝나기 마련이다./ 하긴, 방직 조합원들 같은 이름 아침 시간에 주점에 모일 동물들이 할 말이라는 게 그런 거였으니까.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고 생각했을 때, 스테돌프가 다시 현실 세계에서 뜻 모를 위화감을 느낀 건 2층으로 내려갔을 때였다.
“돈을 내든지 감옥에 가든지 선택해. 아니면 고기가 되는 것도 좋겠군.” 2층 복도에서 짙은 남색의 우비를 쓴 여우가 쥐에게 따지고 있었다. 쥐는 아까 스테돌프가 그랬던 것처럼 쥐 크기의 이불보를 옷 대신 쓰고 있었는데 쥐는 악에 받힌 듯 짙은 붉은 색의 뭔가가 묻은 은박시계와 나무기둥에 로프가 꼬여진 물건을 들고 여우에게 따져 묻고 있었다.
“이것들로 대신하면 되잖아요. 돈은 안내요. 시계는 분명히 값어치 있는 거고 이 막대기는 안보여요? 냄새라도 맡아봐요. 샤프란 보다 고급인 향로 막대기잖아요. 시계는 얼룩만 빼면 꽤 괜찮아 보였고 쥐의 말이 맞게도 막대를 둘러싼 기름 먹은 로프는 아름다운 하프시코드와 류트의 선율 같은 냄새를 풍겼다.
“문제는 네가 그걸 훔쳤으니까 그렇지. 쥐야. 시계에는 20년을 함께한 사랑스러운 남편, 최고의 여우라고 쓰여있고 피까지 묻었어. 거대에 막대기를 봐라 태양을 섬기는 교회의 표식이 새겨져 있잖니.”
여우가 화를 내며 이빨을 드러냈다.
“훔치지 않았어요. 시계는 주운 거고 요즘 교회에서 안 쓰는 물건은 중고로 파는 거 몰라요?”
“미안하지만 말이다. 쥐야. 우리 여관은 프라이드 랜드시 초입에 있는 동물들이 많이 다니는 여관이고 쥐새끼들의 회색시장 물건은 받지 않아. 그냥 도수 높은 술과 밀주 땜에 너희 종족이랑 거래 하는 거지 그 이상도 이하도 없어. 해치기 전에 여관비를 내놓는 게 좋을 거다.”
여우가 앞발을 들어 할퀴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쥐는 대담하게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쥐가 스테돌프를 봤다. 스테돌프는 이게 무슨 일인지 몰랐다. 쥐는 교묘하게 몸을 숙여 앞을 막은 여우의 뒷발 사이를 네 발로 지나가더니 스테돌프 앞에 서버렸다.
“당신 그 늑대 맞죠? 우리가 괴물에게 습격 당할 때 함께 있었잖아요.”
여행자 일행에 끼어있는 죽은 이의 유품을 좀 도둑질 하려던 그 쥐였다.
“당신도 봤죠. 괴물 말이에요. 그 끔찍한 괴물. 그건 정말 존재하는 거에요. 다른 사람들은 믿어주지 않지만 당신은 알 거 아니에요.”
스테돌프가 가짜라고 납득했던 그 끔찍한 존재는 진짜 있는지도 몰랐다. 계단 참에 있던 스테돌프는 갑자기 다시 소름이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