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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 펌) 매국노의 삶, 의인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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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리볼버오셀롯
추천 : 7
조회수 : 1777회
댓글수 : 21개
등록시간 : 2011/12/02 14:13:46
양기훈, [민영환혈죽도]
민영환이 자결한 후 남은 핏자국에서 자라났다고 전해지는 대나무의 그림

서울 길 가운데에는 옛 위인들의 이름을 딴 것들이 많다. 율곡로 퇴계로 충무로 세종로는 굳이 말 안해도 누구나 알 것이고, 동대문 근처의 왕산로는 의병장 허위의 아호에서 연유한 것이며, 사가정길은 조선 초기의 명신 서거정의 호에서 유래한다. 그럼 충정로는 누구의 시호일까? 그 주인공은 충정공 민영환이다.

1882년 임오군란 때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무려 13개월 동안 봉급을 받지 못했던 군인들에게 모처럼의 쌀이 지급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울화통이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던 군인들이었지만 어쨌건 간만에 급료가 나온다는 소식에 사뭇 상기된 채 선혜청 앞마당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그런데 쌀을 받아든 군인들의 입에서 격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 도둑놈의 새끼들이 이걸 사람 먹으라고 주는 거냐." 쌀에는 겨와 모래가 섞여 있었고, 그 양도 정량의 반 밖에 되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먹을 것 가지고 장난치는 자들의 말로는 그렇게 곱지 못한 법이다.

흥분한 군인들은 항의 시위를 벌였고, 병조판서 민겸호가 그 주동자를 잡아들여 사형에 처하려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폭동을 일으켰다. 그 분노의 가장 큰 표적은 병조판서 겸 선혜청 당상 민겸호였다. 민비의 척족으로서 조선 왕조에서 가장 부패한 일가붙이로 평가되는 민씨 일족으로서, 이 사태의 직접적인 책임을 진 사람이었다.

조선 왕조 사상 최초로 관군이 궁궐을 범하는 일이 벌어진다. 임오군란이었다. 대원군의 은밀한 명령 하에 대궐에 뛰어든 군인들은 민씨라면 왕비 이하 다 죽여 버릴 기세였고, 민비는 무예별감 홍재희(여러 문학작품이나 영화나 공연 속에서 민비를 사모했다고 상정되는 그 인물)에 의해 구사일생 목숨을 건지지만 병조판서 민겸호는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다. 대원군에게 살려달라고 싹싹 빌었지만 매정하게 거절당하고는, 원한에 사무친 병정들의 손에 비참하게 죽음을 당한 것이다. 이때 그의 아들 영환은 스물한 살이었다.

17살 때 과거에 급제한 것은 영특하다고 치지만 민영환의 그 뒤의 출세 가도는 도가 지나친 것이었다. 스무 살에 승지를 지냈고 스물한 살에는 성균관 대사성, 요즘 말로 하면 서울대학교 총장이 되었으니 하늘에 닿는 재주가 있었다 해도 가문의 영광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출세였다. 그 역시 민씨 척족이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그렇게 비명에 간 후 벼슬에서 물러서기도 했지만 민비가 보무도 당당히 복귀한 뒤 다시 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그다지 충직한 관료는 못되었다. 녹두 장군 전봉준은 심문 과정에서 조선의 3대 탐관오리로서 민영준과 고영근, 그리고 민영환을 들었고 "방백과 수령에 이르기까지 기름진 자리는 모두 민 씨 아니면 민 씨의 사돈들이었다. 게다가 명성(황후)도 친정집에 빠져서 성(姓)이 민 씨라면 촌수가 멀고 가깝고를 따지지 않고 한 가지로 여겼다. 민 씨 성을 가진 자들은 모두 의기양양하여 사람을 물어뜯을 기세였다"라고 적었던 매천 황현의 경우 가장 극심한 부패 척족 4인방 중 하나로 영환을 꼽았다. 즉 잘 먹고 잘 살았던, 권세가의 떡고물에 포만감 그득했던 세도가 중의 한 명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이후 세계를 한 바퀴 돌면서 근대를 이해하게 되고, 그의 행적은 점차 탐관오리 세도가의 판에 박힌 궤도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한다. 개화사상을 실천하고자 유럽열강세력들 제도를 모방하여 정치제도를 개혁하고, 민권의 신장을 꾀할 것을 고종에 상소를 올린 것은 그 가운데 하나였다. 독립협회의 적극적인 후원자 가운데 하나였고, 근대적인 개혁을 시도하려다가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종씨들에게 미움을 사 요직에서 파직되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1905년 11월 30일 그는 을사조약으로 식물 국가가 된 나라를 통탄하며 망국의 관료로서의 마지막 책임을 다 할 것을 결정한다. 가문의 힘을 얻어 벼락 출세를 하고 나라에서 으뜸가는 부패 관리의 오명도 썼던 그였으나,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 그는 부귀영화를 놓지 않으려던 그의 척족들과는 다른 선택을 한 것이다. 고종의 시종무관장 민영환은 스스로에게 칼을 휘둘러 목숨을 끊는다.

그 정도로 또르르한 세도를 굴리고, 방귀 깨나 뀌던 자들 중에서 그와 같이 책임을 통감한 이는 거의 없었다. 그의 유서는 앞서가는 지사의 비장함 같은 느낌도 있지만, 동시에 누렸던 만큼 돌려주지 못하고, 받은 만큼 역할을 하지 못한 이로서의 미안함이 그득하다. 그의 유서를 그의 기일 다시 읽는다.

"오호라, 나라와 민족의 치욕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구나. 생존경쟁이 심한 이 세상에서 우리 민족이 장차 어찌 될 것인가. 무릇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사람은 살아나갈 수 있으니, 이는 여러분들이 잘 알 것이다. 나 영환은 한 번 죽음으로써 황은(皇恩)을 갚고 우리 2천만 동포 형제들에게 사(謝)하려 한다.

영환은 이제 죽어도 혼은 죽지 아니하여 구천에서 여러분을 돕고자 한다. 바라건대 우리 동포 형제여, 천만배나 분려(奮勵)를 더하여 지기를 굳게 갖고 학문에 힘쓰며, 마음을 합하고 힘을 아울러 우리의 자유 독립을 회복할지어다. 그러면 나는 지하에서 기꺼이 웃으련다..."

우리 역사에서 가물에 콩나듯 등장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체현자. 민영환이 오늘 마흔 넷의 나이로 자진했다.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일도 쉽지는 않다.

마지막 문장에 격하게 공감... 잘 사는 것만큼 잘 죽는것도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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