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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스포] 목장 - 아케미 호무라
게시물ID : animation_31617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Evangelion
추천 : 2
조회수 : 465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5/03/10 01:20:08




113
 
 벌써 나흘, 눈이 내리고 있다. 어떤 소설에서 말했던 것처럼, 눈의 고장이었다. 거뭇한 하늘과 달리 땅은 눈으로 순수했고, 어쩐지 경외심까지 들었다. 이따금 짐승들과 마도카가 흩트리는 것 빼고는 눈의 세상이었다. 눈 속의 마도카를 보고 웃었는지, 아름다운 풍경과 마도카에 웃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어느쪽이어도 괜찮다 싶었다. 사실 눈은 예정된 일정이 아니었다. 여행으로 찾은 목장은 첫날부터 눈이 내려서 우리는 발이 묶여 있는 상태였다. 그 의도치 않는 눈 사이에 우리가 있었다. 처음 아침에 눈을 떴을 땐 크게 걱정했지만, 마도카도 나도 다른 일정은 없었기에 함께 며칠 더 지내는 것에 만족했다. 그렇게 나흘째였다. 나는 달리 할 일도 없었고, 동물들을 다루는 것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았기에 마도카에 비해 시간이 남았다. 마도카는 늘 동물들과 놀려고 했고, 눈이 내려서 갇혀있는 소, 양들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먼지 쌓인 마도카의 머리를 감겨주며 씻겨주는 것이 나의 일과였다. 마도카가 아침부터 눈사람을 만들겠다고 뛰쳐나갔다. 나갈 수 없을 정도로 퍼붓던 눈이 간만에 소강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늘 귀를 시려워했기 때문에 귀마개에 큰 모자를 씌워줬다. 마도카는 예쁘게 웃었다.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는지, 마도카는 나를 보고 한번 더 웃었다. 마도카는 눈사람 2개를 만들었다. 가끔 들어와서 눈사람 장식품을 찾아갔다. 나는 당근 2개를 건내줬다. 당근코가 생겼다.
 

 
1115
 
 벌써 나흘 째 눈이 내리고 있다. 날짜에 11월이라는 글자를 남기려다 멈칫한다. 오늘이 11월이 맞던가. 어제도 나흘 째 눈만이 가득했다고 했던 것 같아 일기장을 넘겨본다. 일기장은 비어있다. 이렇게 일기를 쓰는 건 오늘이 처음인데 당연했다. 어제 마도카가 눈사람을 만드는 것을 보면서, 사진을 찍을 수 없으니 일기라도 남기자는 생각에 시작했던 일기이다. 어제가 있을리 없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잠시 연필을 들고 기름등을 가만히 바라봤다. 기름이 흔들거린다. 이내 시선을 돌려 다시 글을 쓴다.
어제 마도카가 만든 눈사람 둘은 여전히 잘 서있었다. 한쪽엔 빨간 리본 하나. 한쪽엔 리본 2개가 떨어질 듯 붙어있다. 그래도 얼었는지 바람이 날려도 잘 붙어있어서 안심했다. 마도카에게 누구를 만든거냐고 물었지만 답하지 않았다. 누군지 보였지만, 나는 하루 종일 물었다. 다섯 번째 물었을 때, 마도카는 놀리지 말라고 부루퉁해졌다. 씻을 때 여섯 번째로 물었고, 나는 얼굴에 물을 맞았다. 마도카는 어제 오늘 피곤했는지 일찍 잠들었다.
 
 
 
 79

 나흘째 눈이 내리고 있다. 7월이었지만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니, 1월을 7월이라 잘못 쓴 것이겠지. 그런데 나흘째였던가. 스스로도 확신이 들지 않아 일기장의 앞을 뒤적거린다. 일기장은 비어있다. 오늘 처음으로 쓰는 일기가 남아있을리 없을텐데, 왜 찾아본 것일까. 하얗지만 기름등에 주황빛으로 비추는 종이들은 나에게 계속 말을 거는 듯 했다. 나무의 소리일까, 기름등의 소리일까. 나는 그 위에 나의 이야기를 적어간다.
 오늘 마도카는 목장 동물들과 온종일 지냈다. 토끼 사육장에 들쥐들이 몇 마리 들어왔는지 밥주러 들어간 사육장에서 뛰쳐나오다가 문간에 머리를 부딪혔다. 온 세상이 조용해서 그랬는지 부딪히는 소리가 컸고, 나는 큰 소리에 놀랐다. 다행히 멍이 들진 않았다. 마도카는 도리어 미안해했다. 내가 너무 호들갑을 떤 것일까 싶었다.
 미키 사야카는 간혹 돌아오는 기억으로 조롱하듯이 말하곤 했다. 조롱이 아닌 분노일 수도 있겠고, 기억에 없는 적대감에서 나오는 당황스러움일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건 미키 사야카는 할 말이 있으면 하는 소녀였고,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너는 다 알고 있어. 세상 모든 것, 마도카 뿐만 아니라 나와 쿄코, 마미 선배부터, 세상 모든 것을 알고 있을거야. 나는 왠진 모르지만 알아, 그게 너의 가장 큰 실수이고 잘못이라는 걸. 나의 사소한 비밀과 나의 과거도 알고 있을테고. 그런 이야기를 들은 나는 너무나도 정확한 그녀의 평가에 잠깐 놀랐던 것 같다. 하지만 넌 몰라. 넌 몰라. 그게 어떤 의미인지 넌 모를거라고. 알지만 알 수는 없을거야. 그녀는 그렇게 말을 이어 나갔다. 악마에 대한 천사의 평가로는 굉장히 정확했다.
 
 

 433

 마도카는 목장 뒤의 숲속으로 찾아가봤다. 어제 마도카는 사슴을 봤다고 말했고, 오늘은 그 사슴을 찾아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는 반대했지만, 마도카는 어쩐지 크게 아쉬워했다. 마도카가 뭔갈 바랐던 적은 많지 않았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수락한다. 이 시기에 늑대처럼 위험한 동물들이 찾아오진 않는다고 했다. 요 며칠 사이의 눈 덕분에 야생동물 자체가 보이지 않았기에, 나는 걱정하면서도 보내준다. 마도카는 목장이 보이는 곳까지만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이 걱정을 어떻게든 표현할 곳이 없어서 이렇게 일기장을 찾아 글을 남긴다. 가까운 숲이고, 그다지 큰 나무들도 없었기에 걱정할 일은 없음에도 나는 어쩔 수 없었다.

 마도카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목장집 2층에서 바라본다.

 비내리는 숲을 본 적은 있었지만, 눈 내리는 숲의 소리는 묘했다. 사각거리면서 흘러내리는 눈들의 노래만이 울린다. 그리고 마도카의 작은 발소리들이 들리고, 멀어져간다. 눈이 흩날리는 소리만이 남았다. 숲은 시끄러웠다.
 
 
 
 
433일 오후
 
 마도카가 돌아오지 않았다.
 

 
687
 
 마도카가 돌아오지 않는다.
 
 

1218
 
 첫 일기다. 내 정신을 어딘가에 남겨두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은 어제와 오늘이다. 어젠 눈이 폭풍처럼 내려서 밖에 나설 수 없었다. 하지만 어제에 찾으러 나가지 못한 내가 저주스러웠고, 이틀 전 그녀를 말리지 않는 나를 죽여버리고 싶었다. 그런 혐오감 사이에 나는 오늘 날씨를 기대하며 밤을 지새웠다. 사흘째 잠들지 못했다. 미쳐가는 듯 했다. 그래서 나는 어디선가 일기장을 구해서 이렇게 글을 남기고 있다. 이건 나가기 전에 쓰는 일기다. 새벽임에도 세상이 하얗게 표백되어 있었기에, 기름등 없이도 방안은 밝았다. 나는 제정신은 아닐 것이다. 그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
 나는 늑대를 떠올린다. 이런 날씨에 사람을 공격하는 건 늑대 밖에 없다. 다른 건 떠오르지도 않았다. 일단은 마도카를 찾아야했다.
 
 

1218일 오후
 
 이건 돌아와서 남기고 있는 글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만 확신한다. 나는 힘겹지만 써야한다. 나는 사흘째가 되어서야 미칠 것 같은 정신을 부여잡고 엽총을 집어들고 나선다. 눈은 방해될 정도로 내리고 있지 않았다. 숲의 입구는 작았다. 숲 자체가 작은 나무들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제각각 촘촘히 자리잡고 있었고 사람이 지날 수 있는 길은 몇 없는 듯 했다. 나는 총을 들고 들어갔다. 하지만 늑대의 자취도, 사람의 자취도 보이지 않았다. 숲과 나무들만이 속삭였다. 숲은 오롯하게 숲의 것인 듯 했고, 누군가 들어왔다는 사실조차 숨기듯이 고요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속삭인다. 눈을 떨어뜨리며, 길을 보여주며, 나에게 가라고 재촉한다. 총을 든 손에 감각이 사라지려고 할 정도로 걸었지만, 보이는 것은 없었다. 숲에는 내가 걸어온 길만이 남은 듯 했다. 사박거리는 내 발소리가 정지하자, 남은 건 나무였다. 내가 멈추자 나무들도, 숲도 침묵한다. 그 고요함은 광기와 닮았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돌아온다.
 

 
93

 사슴 한 마리를 잡았다.
 
 

 134
 
 일기장을 오늘에서야 간신히 찾아 몇자 남긴다. 어제 일을 적어야했다. 마도카를 찾으러 나간 이틀째였다. 숲의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손이 먼저 반응해서 총을 당겼다. 총탄의 끝엔 늑대가 아니라 하늘색, 혹은 파란색의 사슴이 피를 뿌리며 죽어있었다. 늑대가 아니었다.

 사슴. 사슴이었다. 마도카가 보고 떠난 사슴이 이것이었을까. 나는 문득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이 사슴 때문에 마도카가 떠났고,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시체를 밟는다. 나뭇가지를 날카롭게 꺾어서 목에 찔러넣는다. 풀리지 않는다. 나는 사슴 시체를 들고 돌아왔다.

 어젯밤 잡은 사슴의 피를 흩뿌려 늑대들을 꼬일 작정이었다. 마도카의 흔적은 여전히 없었지만, 늑대 이외엔 떠오르는 상대가 없었고, 차라리 그렇게라도 늑대들의 실존 여부를 알 수 있다면 손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슴의 시체에서 총탄만 꺼내고, 대충 짐승들이 먹기 좋을 정도로 난도질 해서 목장 주위에 뿌려뒀다. 그게 사슴의 죄였다. 나는 여전히 불안감 속에 밤을 보내지 않을까 싶다. 잠에 들지 못하는 괴로움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
 
 

246
 
 마도카는 여전히 흔적조차 없었다.
 흩뿌린 사슴 시체에는 코요테와 너구리들이 찾아왔다가 떠난다. 박제된 것처럼 사슴의 피와 시체는 굳어버렸다. 비린내조차 나지 않는다. 늑대들은 찾아오지도, 울음소리도 남기지 않았다. 늑대가 아니었을까. 나는 다시금 사슴의 시체를 짓밟았다. 이 자식 때문이었다. 얼굴을 밟아 형태를 알 수 없게 뭉개놓았다.
 
 

41
 
 목장은 고요했다.

 






사슴은, 카나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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