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는 조세피난처 밖에 있다조세피난처의 중심은 열대의 이국이 아니라 미국 뉴욕과 영국 런던이다. 저자는 극소수 부자가 군림하는 세상을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으려면 조세피난처에 관한 전 지구적 토론을 당장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하다. 우리말로 비우량 모기지 상품 정도로 번역하는 이 용어에서는 구린내가 진동한다. 비우량이라니. 쉽게 말하면 불량 상품이라는 건데 여기에 이런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 전 세계를 현혹했다. 이렇듯 금융을 이해하는 첫걸음은 그 용어에서 현란함을 걷어내는 것이다. 치밀한 계산에 따른 것이든, 아니면 무지에 의한 것이든 금융 전문가나 언론이 살포하는 선입견에서 벗어나야 실체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금융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도 보통 조세피난처라고 하면 수상한 범죄자들이 허름한 술집에서 목이나 축이는, 야자수 우거진 섬 정도를 연상한다. 하지만 그 본모습은 사람들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조세피난처를 움직이는 힘을 이해해야 국제 경제 흐름을 비로소 볼 수 있다. 조세피난처를 둘러싼 복잡한 국제 정치·경제 역학이야말로 현대사의 숱한 미스터리를 풀 수 있는 마스터키이다.
ⓒ한성원 그림
글로벌 정치·경제 분야 저널리스트이며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 연구원인 니컬러스 색슨이 쓴 <보물섬>(부키, 2013)은 세계의 부를 빨아들이는 이 역외의 보물섬을 둘러싼 짙은 안개를 걷어냈다. 그렇다. 저자에 따르면 조세피난처란 어느 정도 잘못된 용어이다. 역외는 단지 일을 처리하는 장소만이 아니라 발상이자 방식이다. 민주주의하의 규제, 법, 제도적 개입의 수준이 끊임없이 추락하는 현상이다. 역내라는 비교적 안전했던 성채를 부숴버리는 공성망치이다.
저자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듯 조세피난처를 넓게 정의한다. 일단 다른 나라와의 정보 교환을 회피하면 조세피난처로 봐야 한다. 금융에서의 이런 비밀주의 사법체계를 가진 나라는 60여 개국에 달한다. 또한 역외 거주자에게 현격히 낮거나 제로 세율을 부과하는 곳도 조세피난처이다.
이런 조건을 충족하는 곳은 어디일까. 대체로 세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유럽의 전통적인 역외인 스위스,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벨기에, 리히텐슈타인, 모나코를 들 수 있다. 북한의 새 지도자 김정은이 스위스에서 공부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케이먼 제도의 돈, 뉴욕 전체 은행의 4배
<보물섬>니컬러스 색슨 지음부키 펴냄
정작 주목해야 할 곳이 두 번째 그룹이다. 영국 런던 한복판에 운집한 금융회사를 통칭하는 시티그룹을 중심점으로 세계 비밀체제의 절반가량이 수레바퀴 형상으로 뭉쳐 있다. 영국 왕실령인 저지섬, 건지섬, 맨섬, 그리고 해외 영토인 케이먼 제도가 악명 높다. 외곽에는 홍콩, 지브롤터, 바하마, 싱가포르, 두바이 및 아일랜드 같은 동맹체도 있다.
시티와 영국계 조세피난처 집단은 전 세계 국제 은행권 총자산의 2분의 1가량을 틀어쥐었다. 인구가 고작 5만명이고 극장이 하나밖에 없는 케이먼 제도에는 8만 개가 넘는 등기 회사, 전 세계 헤지펀드의 4분의 3이 있다. 뉴욕 시 소재 전체 은행의 4배가 넘는 1조9000억 달러의 수신고를 자랑한다. 영국 왕실령을 비롯한 수레바퀴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터질 때마다 영국은 “우리가 개입할 여지는 없다”라고 변명하지만 이들이 영국 시티의 통제력 아래 있다는 것은 비밀도 아니다.
세 번째로 역외의 깃발을 세운 곳은 미국이다. 조세피난처에 강한 거부감을 가졌던 미국은 ‘이길 수 없다면 같은 편에 서겠다’는 식으로 바뀌고 있다. 델라웨어를 필두로 플로리다, 와이오밍, 네바다 같은 주들이 비밀주의를 앞 다퉈 받아들였다. 미국령 버진아일랜드, 마셜 제도, 파나마가 이런 미국의 주들과 거미줄처럼 연결돼 중남미의 더러운 돈을 빨아들인다.
자, 이쯤이면 역외 세계가 결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악역을 자처한 독립국가 집단이 아님을 알게 됐을 것이다. 조세피난처의 중심은 섬은 섬이되 열대의 이국이 아니라 미국 뉴욕의 맨해튼이며 영국의 런던인 셈이다. OECD의 부유한 국가들은 자신들이 비밀주의 국가를 단속하는 것처럼 전 세계를 기만해왔다. 우리나라 언론들은 OECD가 발표한 조세피난처 블랙리스트를 종종 인용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이는 의미 없는 짓이다. 그 블랙리스트란 게 잔챙이만 우글대는 눈 가리기용 분칠에 불과한 탓이다. OECD 조세문제 책임자는 “비밀주의에 기대던 구식 모델의 시대는 지나갔다”라고 선언했지만 이는 여우가 닭장을 고쳤다고 소리 지르는 격이다.
역외 비즈니스의 원리는 단순하다. 국경을 넘나드는 서류상의 흔적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것이 본질이다. 저자가 소개하는 바나나 무역을 예로 들어보자.
다국적 기업에 고용된 온두라스 노동자는 바나나를 기른다. 다국적 기업은 그 바나나를 운송해 우리의 대규모 슈퍼마켓 체인에서 판다. 그런데 회계 서류상의 경로는 이보다 좀 더 복잡하다. 다국적 회사는 룩셈부르크에 금융 자회사를 설립해 온두라스 소재 자회사에 대출해준 것처럼 꾸미고 연간 2000만 달러의 이자를 부과한다. 온두라스 자회사가 그만한 액수의 이자를 비용으로 처리하면, 이는 세금고지서를 없애는 것과 같다. 룩셈부르크 자회사가 챙긴 초과 이득 2000만 달러에는 조세피난처 세율이 적용된다.
회계사가 마술봉을 한번 휘둘렀을 뿐인데 세금은 사라지고 자본은 역외로 유출된다. 이 다국적 회사는 이익은 저세율 국가로, 비용은 고세율 국가로 옮기는 ‘이전 가격’(transfer pricing)이라는 흔한 사업 수완을 부린 것이다. ‘이중 과세’ 금지라는 명목 아래 ‘이중 면세’라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다국적 기업이 제3세계의 불의하거나 금융에 무지한 정치 엘리트들과 결합하면 그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런 식이라면 온두라스 농민은 뼈 빠지게 바나나 농사를 지어도 가난을 면할 길이 없다.
이런 치졸한 사기 행각의 누적 총액은 실로 엄청난 규모다. 국경을 넘나드는 세계 교역의 3분의 2는 다국적 기업 내부에서 발생한다. 이런 이전 가격으로 개발도상국이 입는 연간 손해 예상액은 약 1600억 달러에 이른다. 개발도상국의 독재자나 마약 밀매업자는 역외로 돈을 빼돌릴 갖가지 기법을 보너스로 배운다. 역외는 개발도상국 어린이에게서 교육받을 기회와 말라리아나 에이즈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앗아간다. 역외 비즈니스는 어째서 원유와 광물 자원이 풍부한 아프리카 대륙이 황량한 먼지만 날리는 눈물의 땅이 됐는지 잘 설명한다. 선진국은 아프리카에 1달러를 원조하고 10달러를 빼앗아간다.
역외 위성체는 제국주의의 유산
현대사를 돌아보면 역외는 어둠의 자식이다. 유럽 역외의 최고참인 스위스는 2차대전 중 나치에 핍박당하던 유대인의 재산을 보호하려고 비밀주의를 채택했다고 강변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나치 잔당의 재산을 흡수하려고 은행 업무를 은밀화한 혐의가 짙다. 영국의 경우는 식민지의 앞문으로 나왔다가 옆문으로 슬그머니 들어간 꼴이다. 금융을 통해 식민지를 쥐어짜던 호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영국을 둘러싼 숱한 역외 위성체는 제국주의의 유산이다. 시장 자유주의자들은 별 이론을 다 들이대며 옹호하지만 역외는 뿌리부터 썩었다.
역외의 칼끝은 이제 부자 나라를 겨눈다. 금융의 불투명성은 만성적인 경제 위기와 사회 불안을 불렀다. 제조업은 활기를 잃었다. 역외는 부패한 정치인과 범죄자, 그리고 테러리스트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터진 대형 스캔들의 이면에는 언제나 역외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분배의 균형이 깨져 사회 약자의 삶은 날로 피폐해간다. 역외가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저자는 극소수의 부자가 샴페인으로 부츠를 세탁하는 세상을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으려면 조세피난처에 관한 전 지구적 토론을 당장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의 부자들이 어째서 이 조세피난처에서 얼씬거렸는지 알아내는 일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사실 그보다 훨씬 심각하다.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6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