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일기 쓰는 걸 깜빡했다. 낙엽처럼 누워서, 시집을 얼굴 위에 얹고 잠이 들었다. 시집은 문태준 시집인데, 꿈은 왜 이이체와 가까운 꿈을 꾸는지 모르겠다. 꿈 속에서는, 어둠이 눈송이 져 내려오고.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을 볼 때 만큼이나, 서글프고 일그러진 나의 얼굴. 나는 내 얼굴을 캔버스에 그리며 눈 꼬리를 길게 늘렸다. 영사기에서는 그림을 그리는 나의 얼굴이 틀려 나오고 있다. 나는 영화관 끝에 앉아 시를 쓰고 있다. 바깥과 바깥으로, 시어들은 작아져 가고. 내 얼굴들은 작아져 가고. 이제는 무슨 표정인지도 모른 채로, 나는 액자 소설을 기획하려고 했다.
2 - 나는 오늘도 편지 쓰는 일을 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나는 편지 숨기는 일도 했다. 그저께부터 나는 선생님 타령을 했다. 그런데 누가 선생님이지? 헤겔? 쇼펜하우어? 니체? 아버지? 문태준? 이이체? 나는 누구에게 편지를 보내는 걸까. 편지? 편지를? 보내야만 하는 걸까? 편지처럼 일기장을 쓰고 있었던 걸까? 나는 우체통 말고, 우편배달부 앞에서 서성인다. 선생님에게 부쳐주세요. 아니요, 인정하고 말 할 겁니다. 편지를 읽어주실 선생님이 아직 없어요. 제 선생님이 되어 주세요. 제가 어디로든 갈 수 있게. 어디로든 가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일기장으로 죽지 않게. 선생님은 일기장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3 - 방 안에 들어앉으니, 기적 소리가 시끄럽다. 이어폰 보다 스피커로 듣는 것을 좋아한다. 어제는 풀벌레 소리를 다운 받았다. 극에서는, 저 극이 그립다. 일기장에서는 편지가 그립다. 풀벌레 소리가 빗소리처럼 피어오르면, 나는 이 외딴 방에 작은 창문 하나를 낼 수 있다. 편지를 쓰는 것도 풀벌레 소리를 듣는 것과 같을까? 일기장에도 창을 내고 싶어라. 이처럼 우편배달부가 매일 이 창 앞 까지 와, 창문을 두드리고, 나는 그 두드림을 심장의 고동소리로 삼고 싶다. 선생님, 그 고동소리를 타고, 어디로든 가서, 다른 극으로 내 편지를 보내주세요.
4 - 나는 시를 읽다 찬물처럼 차가워져야 한다. 종이 냄새는 언제나 갈색이다. 글을 한 자 한 자 어루만질 때마다, 나는 파도소리처럼 부숴지고 있다. 그 속에서 나는 나를 딱히 규정하고 싶지 않다. 이 파도소리도 감동이라는 형식으로 고립시키고 싶지 않다. 하지만 파도소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눈물만을 흘리다보면 부초처럼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를 규정하여야 한다. 그 어떤 눈물 속에서도 종이 냄새는 언제나 갈색이다. 나도 갈색처럼 머리맡에는 또 찬물 한 그릇을 내어놓을 것이다.
5 - 아침이다. 바람이 분다. 폴 발레리처럼 각오하지는 않지만, 살아야겠다는 소리로 들리기도 한다. 하루를 돌아보니, 그래도 나는 나를 내어가기를 위하고 있었다. 편지를 쓰거나, 음악을 듣거나, 시를 읽거나. 나는 아직 살 수 있는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