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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코틴틴님의 글에 대한 간단한 반론입니다.
게시물ID : history_509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2/5
조회수 : 768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2/07/22 22:53:01

1. 우선 일본에서는 일찍이 율령제도에 의해서 오래전부터 조방적 농경을 특징으로 하는 장원제가 확립되었습니다

 

그러나 개별생산주체의 생산성 증대의 유인이 부재하였기 때문에 생산성이나 발전수준은 정체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15~17세기를 기점으로 중앙재정을 충당하기 위한 연공이 금납으로 지불되게 됨으로써 화폐유통이 활성화되고이것이 농민들의 생산욕구를 증대시키고 그와 더불어 발달된 생산력으로 인하여서 기나이 평원을 중심으로 소농사회가 성립하였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 하였고단위면적당 생산량이 증대하였으며소농경제의 발전에 따라 직영지 경영이 쇠퇴하고 지주제가 확립되었습니다,


  토지생산성이 비약적으로 증대함에 따라 소수 지배계층 뿐만이 아니라 서민층의 광범위한 수요가 생겼고 시장경제가 활성화되고 농촌상업과 수공업등이 발달되며부양할 수 있는 인구가 증대하자 생산성이 높은 기나이 평원을 중심으로 대도시가 형성되고 대형화 되는등 에도시기를 통해 일본은 '경제사회'에 돌입하였습니다

 

 

2. 오닌의 난 이후로 전국시대가 열리고 센고쿠 다이묘들이 일본 열도를 나누어 차지하게 되자자연스럽게 각 번에 부국강병을 이루는 것이 중요해졌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게 당시 일본 다이묘들은 가신들과 백성들을 경제적으로 윤택하게 하는 것이 가장 큰 관건이었고이를 완수하지 못하면 퇴출되기 십상이었습니다.

 

부국강병을 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다이묘들은 자기 지방의 특산물을 개발하여 이를 통해 이익을 취하는 방법을 고안하게 됩니다.

 

농업혁신이나 염전의 개발 등은 물론이었구요그러니까 일본은 일찍부터 자본주의적 시장경제가 뿌리내리기 시작했다는 것이지요이렇게 개발된 특산물들은 상인들의 손에 넘어가 일본 열도 전체로 유통되기 시작합니다.

 

서양에서 들어온 남만동 등의 갑옷이나 지극히 제한적으로 양산되는 철포와 화약들명검들과 해산물 등등 돈을 주고 살만한 물건은 상당히 많았습니다돈이 충분히 가치있었기에 당연히 상업을 천시하고 억압한 조선처럼 베필을 가지고 교환을 할 필요는 없었죠

 

게다가 오사카는 특정 다이묘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이시야마 혼간지 감독하에 있는 상인들의 자치도시적인 성격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물산이 집결되는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는 점입니다따라서 유통될 물건들은 여기를 거치면 상당히 안전하게 운송이 가능했죠.

 

결론적으로상업 화폐 경제체제는 전국시대 말기 완전히 뿌리를 내립니다당연히 지금의 공장처럼 철포나 장창을 규격품으로 양산하여 납품하는 업체들도 생겨났고건설업체가 등장해서 에도 바쿠후 때는 지금의 오사카 도톰보리 운하를 완공하기도 했습니다.

 

자연히 다이묘들에게 큰 돈을 빌려 주는 정도의 금융업도 생겨났고상인들 사이에서 어음과 같은 것도 아주 성했죠상업의 중요함에 일찍부터 눈을 뜬 이마가와 집안이나 오다 집안은 이를 통해서 세력을 키우는 데 성공합니다.

 

에도 바쿠후 이후 화폐가 통일되고 유통망이 정비되며전국을 다이묘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물론 충성도가 의심스러운 토요토미파 떨거지들은 멀고 후진 지방으로 내쫓고충신들이나 도쿠가와 집안의 후손들에게는 에도 근처의 좋은 땅을 주었죠.

 

그리고 다이묘들을 통제하기 위해 가족들을 전부 에도에 붙잡아놓고 매년마다 영지와 에도를 번갈아가며 살게 했습니다.

 

1년마다 쇼군이 있는 에도에 가서 생활해야 했던 다이묘들 덕분에 일본의 상업은 더욱 크게 흥하였으며경제는 크게 발전합니다

 


3. 의 경우에 대해서 일-송 무역의 주요한 상품이 금목재였었고대표적인 광산은 쓰시마의 스가 은광 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야마구치 게이지에 의하면 15~16세기에 생산원가에서 조선 및 중국의 은에 1세기 동안 밀리고(이들 국가에도 15세기에 회취법이 개발되었으므로), 16세기(1530년경)에 회취법의 일본 도입으로 다시 경쟁력을 회복하면서 조선과 중국의 은을 밀어내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리고 이정수와 김희호의 연구에 의하면, 1540년이면 일본 은은 이미 조선 은을 가볍게 제압하고삼포의 왜관에서는 이러한 일본 은에 대한 비가를 어떻게 책정하느냐의 논쟁이 중종시기 삼포왜란의 발발 요인 중 하나로 지적되었을 정도입니다즉 프로이스와 도요토미의 시기(1585년 전후이전에 일본 은은 이미 국제교역의 상품으로 기능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일본에서 회취법이 빠르게 보급될 수 있었던 것은중소규모의 자영적 제련소들이 이미 금동 등을 제련해서 수출하는 전통이 이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금속의 제련이 주요한 산업으로 자리잡고각 제련소들은 조금이라도 이문을 남기기 위해 경쟁하고 있었던 것이 당시의 정황이며그러한 정황에서 회취법의 정착이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사실 15~16세기에 일본 은이 약세일 때에도 일본 동의 수출은 계속되었죠역시 김희호의 연구에 따르면 15세기경 쓰시마와 조선의 구리거래는 한 건에 11만근의 동괴가 거래될 정도로 큰 규모였습니다.) 


즉 프로이스와 도요토미의 시대에는 이미 일본 은은 세계적 상품으로 기능하는것이 가능했다는 애기입니다.

 


4. 혹시나 해서 더하자면  오늘 당장 승리하지 않으면 내일이 없었던게 전국 시대입니다. 승리의 전제는 강병이었고, 강병의 전제는 부국이었습니다. 일본의 영주들은 부국강병의 기반이 되는 온갖 수단을 강구했지요. 


가령 일본 전역에 94만 정보이던 농토가 전국 시대 말기에 163만 정보까지 늘어난것을 사례로 볼수있는데. 영주들은 전쟁으로 영지를 늘인 다음 세금인 연공미를 팔아서 돈으로 교환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연공미로 전쟁자금을 감당할 수 없었고 영주들은 은광개발에 경쟁적으로 뛰어들게 됩니다.





>혹시나 초코틴틴님이 보시게 된다면 과연 어떠한 부분에서 원시적 물물경제 수준의 경제 상황과 인력 중심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공업을 가진 조선의 경제력이 일본에 대하여 우월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일본의 은 생산량이 임란이후에 조선의 기술자를 납치하고 나서야 폭팔적으로 증가 했는지 설명을 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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