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가지고 있는 책중에 정말 아끼는 책중 하나 입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다면 한권 구입하시기 바랍니다. 잔다르크,토마스모어,에밀졸라등의 재판에 관한 이야기가 써있습니다. 이렇게 책 내용을 그대로 올리는 것은 불법이지만 여러사람이 읽고 즐기시기를 바래 올려 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재미있게 읽으셨다면 한권 구입해서 소장하시면 꽤 유익하고 쓸만한 책입니다.
최근 피납된 사람들 때문에 더 많은 생각해 주는 예수님 편입니다. 저는 기독교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예수님은 참 좋아합니다. 엄청난 고통을 겪으며 우리 죄를 사하여 주려 하셨고 옹졸한 유대인의 신에서 전세계를 두루 보살피는 신으로 바꾸어 주셨으니깐요. 위대하고 어찌보면 가여운 예수님의 재판 내용입니다. 스크롤의 압박이 조낸 심하지만 다 읽어 보시면 많은 것을 느끼실수 있을겁니다.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예수의 재판
나자렛 예수, 법정에 서다 피고인 : 나자렛 예수 나 이 : 33세 직 업 : 무직. 전직 목수 죄 명 : 신성모독죄, 반역죄 공소사실 : 자칭 '하느님의 아들'로 행세하면서 무리를 끌고 다니며 사술로 이적을 행 하여 제사장과 성전을 함부로 비난하는 등 하느님을 모독하며 동시에 '유대의 왕'으로 군 림하면서 행방자인 양 혹세무민하여 대로마 황제에 반역한 자임. 서기 33년, 유월절 축제를 하루 앞두고 신성모독과 반역죄 혐의로 체포된 나자렛 예수 가 로마총독 법정에 섰다. 그러나 로마제국 변방의 식민지 젊은이의 재판이 그리 큰 관심 거리는 아니었다. 따라서 어떠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도, 정치적 관심도 끌지 못했다. 속세 의 권력에 눈이 먼 유대 종교지도자들이나 무지한 로마군대가 이 젊은이의 신성과 언동의 탁월함에 주목할 리 만무하였다. 이들에게는 예수가 턱없이 헛소리나 하고 다니는 정신이 상자나 아니면 기적을 행한다며 혹세무민하는 치안사범 정도로 보였을 터였다. 하지만 그 대로 두기에는 점차 그 독설이 지나쳤고 따르는 무리가 많아졌다. 아무도 하찮은 한 젊은 이에 대한 재판과 처형이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기억되는 사건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 을 것이다. 또한 그 재판에 등장한 가야바 대제사장이나 로마총독 빌라도 역시 자신들의 이름이 그 황당한 젊은이와 함께 무한한 세월 동안 회자될 것이라고는 아마 꿈에도 생각하 지 못했을 것이다. 복음서마다 예수의 체포와 재판, 사형선고에 관한 기록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 있다. 그 내용을 정리해 보면 세 차례 심문과 재판을 받았다. 루가복음에 따르면 빌라도가 예수의 신병을 헤로데에게 넘겼다가 다시 넘겨받을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심문을 다섯 번 이나 받을 셈이 된다. 어떤 사람은 산헤드린의 공식 재판 직전에 가야바가 개별적으로 심문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것이 모두 공식적이 재판 절차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가 운데 대제사장 가야바가 주재하는 종교의회 산헤드린 앞에서의 심문, 총독 빌라도 앞에서 의 재판이 공식적인 재판절차라고 할 만하다. 제1막 체포 : 열두 제자의 하나인 유다를 앞세워 대사제의 부하들이 겟세마네 동산에 머 물던 예수를 체포하러 왔다. 예수의 일행 중 하나가 칼을 빼들고 그 부하 한 사람의 귀를 자르는 소동이 벌어졌다. 그러나 예수는 "그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라. 아버지께서 주신 이 고난의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고 달래며 순순히 운명의 잔을 받았다. 이때가 자정 무렵이었다. 제2막 하난의 심문 : 체포된 예수는 유대 민족의 최고 실력자로 군림하던 하난 앞으로 끌 려온다. 하난은 현직 대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자 대사장을 지낸 유대 민족의 최고실력자 다. 그는 예수에게 교리와 제자들에 관해 여러 질문을 던진다. 예수는 "세상사람들에게 모두 버젓이 말해왔고 숨어서 얘기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고 말하여 "들은 사람에게 물어 보라"고 한다. 이 불경스러운 대답 때문에 예수는 경비병에게 뺨을 맞는다. 그러나 하난은 공식적으로 예수를 재판할 법적 귄위가 없었으므로 가야바에게 송치한다. 예수는 이미 묶인 몸이었다. 제3막 가야바의 재판 : 가야바가 주재하는 유대의 최고 종교의회이자 최고법원인 산헤드 린에서의 재판이었다. '탈무드'에 기록된 법에 따라 설치된 이 법정은 의회이면서 동시에 재판권을 행사하는 신정일치의 권력기관이다. 71명의 율법학자, 원로 등으로 구성된 이곳 에서 예수는 신성모독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이 혐의가 인정되면 바로 사형이었다. 증인 들은 "이 사람이 하느님의 성전을 헐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지을 수 있다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재판장 가야바가 물었다. "그대가 과연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인가?" 예수는 "그 것은 너의 말이다."라고 받아넘겼다. 이어서 예수는 "너희는 이제부터 사람의 아들이 전능 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것과 또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라고 말했 다. 예수의 이 말은 당장 꼬투리를 잡혔다. 가야바는 "이 사람이 이렇게 하느님을 모독했 으니 이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하겠느냐"며 심리를 종결했다. 제4막 빌라도의 재판 : 이제 예수는 로마총독 빌라도 앞에 선다. 그곳은 바로 헤로데의 옛 궁전이었다. 유대 법정은 사형판결을 시행할 아무런 권한이 없었다. 로마총독이 예수에게 걸 수 있는 죄목은 로마에 대한 반역이었다. 빌라도의 질문은 "네가 유대인의 왕인가"였다. 예수는 단지 그것은 너의 말"이라고 일축하였다. 예수는 "내 나라는 이 세상의 나라가 아 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왕국은 하늘 나라의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하지만 이 종교적 메 시지를 이해 못한 빌라도는 단지 예수를 '무해한 몽상가'로 단정짓고 그를 석방하려 하였 다. 유월절 축제에서 죄인 한 사람을 석방하는 관례를 그 기회로 이용하려 한 것이다. 제5막 유대 민중 앞의 심판 : 유대 민중 앞에 예수가 섰다. 강도 바라바와 함께였다. 빌 라도 총독이 군중들에게 묻자 민중들은 바라바를 외쳤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아우 성이었다. 잘못하면 폭동이 일어날 기세였다. 자연히 사면의 기회는 바라바에게로 돌아갔다. 예수의 신병은 이제 사형집행을 위해 로마군대 백부장이 지휘하는 별동대로 넘겨졌다.
위대한 변론가, 예수 예수는 홀로 섰다. 사지로 몰아넣으려는 악의에 찬 재판관과 방청객 앞에서 예수는 혼자 일 뿐이었다. 새벽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을 부인하리라던 베드로만 멀찌감치 서 있었다. 극악한 상황에 서도 예수의 답변은 위엄과 진실을 지키고 있었다. 묵비권을 적절히 행사하며 어려운 질문 을 따돌리기도 하고 때로는 명쾌하게 답변했다. "네가 유대의 왕이냐"는 빌라도의 질문. "그 대가 하느님의 아들인가"라는 가야바의 질문에 예수는 "그것은 너의 말이다"라고 말함으로 써 직접적인 답변을 피했다. 빌라도에게 "내 왕국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예수의 답변은 로마제국의 권위를 전혀 손상시키지 않았으며 반역죄에 해당되지도 않았 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늘나라가 자신의 왕국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예수는 부질없는 변론을 늘어놓지 않았으며 "나는 세상사람들에게 버젓이 말 해왔다. 내가 숨어서 말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들은 사람들에 게 물어보아라"하고 역공을 펴기도 하였다. 예수는 비굴하지도, 그렇다고 무리한 주장을 내 세우지도 않았다. 최선의 변론이며 방어였다. 예수는 위대한 변론가였다. 4대 복음서에는 마흔 한 가지의 기막히게 훌륭한 비유들이 나온다. 파종과 수확, 참고 기다리는 농부, 겨자씨, 무지기, 재판관에게 가는 길, 누룩, 보 물, 자비로운 고용주, 두 아들, 감독에 임명된 종 등 보석 같은 비유를 보면 예수가 언어 의 연금술사였음을 알게 해준다. 독일 튀빙겐 대학 신학교수 요아킴 예레미아스의 노작 '예수의 비유'는 마흔 한 가지의 비유를 자세하게 비교분석한 뒤 그것이 하나도 어그러지 지 않고 아귀에 꼭 맞아떨어지는 절묘한 비유들임을 논증하였다.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에 맞서 보여준 그의 행동은 그가 얼마나 김니한 사람이며 임시변 통에 능한지 알게 해준다. "하느님의 아들이거든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하여 보시오"라는 악마의 요구에 대해 그는 "사람은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고 답변한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 엎드려 절하며 세상의 모든 왕국을 주겠다는 등 악마의 또 다른 유혹에 대해서도 예수는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떠보지 마라는 말씀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고 답변한다. 이미 구약에 정통한 예수가 그 가운데 가장 적절한 말을 인용하여 악마를 물리치고 있는 것이다. 사후에 덧칠이 되었든 아니든 간에 적어도 복음서들이 전하는 예수의 변설은 가히 탁월하다. 그 야만적인 재판에서 예수 자신보다 더 훌륭한 변호사는 있을 수 없었다. 군더더기 변론은 예수의 위대함에 오히려 손상이 될 가 능성이 많았다. 이미 운명이 정해진 재판이었다. "네가 하느님의 아들인가"라는 물음에는 쌍 올가미가 준비되어 있었다. 시인하면 신성모독이요, 부정하면 사기꾼이 되었다. 어떻게 대 답하든 목숨은 이미 적의 수중에 있었다. 예언의 실현이기도 하였다.
이스라엘 법원에 접수된 어떤 재심사건 그렇게 모든 것은 끝났다. 예수가 체포된 지 겨우 24시간 안에 모든 재판절차는 끝이 난 것이다. 재판절차라기보다는 즉결처분에 가까웠다.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재판은 완전한 불법이며 무효이다. 재판은 단심으로 이루어졌고 사형선고에 대해 항소나 상고를 했을 리 도 만무하지만 정당한 재판을 받을 예수의 권리는 철저히 무시당했다. 적대적인 대중 앞에 내맡겨진 일종의 인민재판이었다. 변호인 선임권인 주어지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 권한의 고 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란다원칙'의 위배였다. 구속영장은 발부되거나 제시된 적이 없었다. 형사법의 초고 원리인 '영장주의'의 유린이었다. 증인은 미리 확보돼 있었고 그 증 인들은 한결같이 예수의 유죄를 증거하였다. 예수에게 유리한 증인과 증거를 제출할 기회조 차 주어지지 않았다. 함정을 파놓고 예정된 결론을 향해 각본에 따라 이루어진 재판이었다. 물론 예수재판의 불법성을 오늘의 관점으로만 따지기는 어렵다. 재판은 당시의 규범과 절차에 따를 수밖에 없다. '죄형법정주의'는 행위 당시의 법률에 의해 범죄로 규정된 것만 처벌할 수 있다는 원칙이다. 그러나 당시 제대로 완비된 법도 없었으며 있었다손 치더라 도 예수와 같은 식민지 청년에게 적용될 리 만무했다. 한편 복음서에 기술된 재판조차 없 었으며 예수는 일종의 계엄상태에서 즉결처형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더구나 법 이란 얼마나 조변석개하며 우습고 보잘 것 없는 것인가. 칼릴 지브란은 '인간의 법이란 모래탑'이며 그것은 '끊임없이 부서지고 또다시 쌓아질 운명에 있다.'고 노래하였다. 예수를 재판하고 처형시켰던 법은 부서지고 지금은 없다. 하지만 예수를 범죄자인 채로 내버려둘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수 많은 저작들은 예수의 무고함을 증명하고 그 재판의 무효를 논증하였다. 법률을 배운 사 람이라면 누구나 예수재판에 관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유혹에 빠진다. 예수재판만큼 흥미 로운 게 없는데다 기독교도인 변호사라면 일종의 사명감까지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당시 법규와 관행에 따르더라도 예수재판은 무효라고 주장한다. 1889년에 출간된 '예수 그리스도의 재판'은 유대법정과 로마법정을 구분하여 당시 법률과 관행을 분석하면 서 예수재판의 불법성을 나열하였다. 미국 변호사 데이비드 브리드는 1948년 쓴 '예수의 재판'에서 그 재판은 열 일곱 가지의 잘못을 저질렀으며 그 중 한 가지만 가지고도 당연 히 상급심에서 파기될 수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1954년 출판된 '예수의 불법적 재판'이라 는 책은 그 후에 진전된 연구성과를 근거로 왜 예수의 재판이 무효인지 조목조목 따지고 있다. 예수의 신원을 위해 더 행동적인 사람들도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유대인의 피의 대가로 막 수립된 신생국가 이스라엘 법원에 한 건의 재심 사건이 접수되었다. 피고 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재심을 요청하는 소장이었다. 이 소장을 받아든 법원당국자들의 낭패감은 뭐라 말할 수 없었다. 도대체 예수재판의 절차에 대한 기록이 하나라도 있어야 재심을 열고 말고 할 게 아니던가. 누가 위증을 했는지, 재판부가 어떤 증거를 잘못 채택했 는지, 법률을 어떻게 잘못 적용했는지 심리하고 판단하기 위해서는 재판기록이 필수적이다. 난감한 이스라엘 최고 재판소는 고민 끝에 1967년 결론을 내렸다. 최고재판소는 나자렛 예수에 대한 재판을 다시 열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로마의 계승국가인 이탈리아에서 재판 을 열어야 한다며 소송을 기각해 버렸다. 예수재판의 재심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그 난처 한 문제를 이탈리아에 떠넘긴 절묘한 판결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탈이아에 이런 재심 소송이 제기되었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법은 어차피 '이 세상의 것'이다. 법으로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을 다투고 가리는 일은 그 어리석기가 예수를 십자가에 매단 사람과 다 를 바 없지 않은가.
주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예수의 옷을 벗기고 대신 주홍색 옷을 입힌 뒤 가시로 왕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 오른 손에 갈대를 들린 음 ... 그에게 침을 뱉으며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때렸다. ... 골고다에 이 르렀을 때 그들은 예수께 포도주를 마시라고 주었으나 예수께서는 맛만 보시고 마시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나서 .. 예수의 머리 위에 죄목을 붙였는데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적혀 있었다. ... 지나가던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며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다시 짓는다던 자야, 네 목숨이나 건져라..."하며 모욕하였다. 같은 모양으로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도 "남을 살리면서 자기는 못 살리는구나 저 사림이 이스 라엘 왕이래. 십자가에서 한번 내려와 보시지"하며 조롱하였다. ... 낮 12시부터 온 땅이 어 둠에 덮여 오후 3시까지 계속되었다. 3시쯤 되어 예수께서 큰소리로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고 부르짖으셨다. ...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 해면을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 끝에 꽂아 예수께 목을 축이라고 주었다. ... 예수께서 다 시 한 번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마태복을 26:28~27:51) 이 장면이야말로 문학 작품에 등장한 수많은 비극을 능가하는 걸작이다. 비극은 보통 영 웅의 수난과 죽음을 그린다. 거기에는 장렬하고 위엄 있는 죽음이 있다. 그러나 성서의 이 부분은 가장 치욕적이고 고통스런 죽음의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침을 뱉고, 모독하고, 조 롱하고, 뺨을 치고, 저주하고, 가시면류관을 씌우고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아 홀로 죽어가게 한 예수의 처형과정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이 장면에서 예수의 위대성은 더욱 빛을 발하며, 반대로 처형자에 대한 분노는 극대화된 다. 천수를 누리고 우아한 죽음을 맞이했다면 예수일 수 있겠는가. 예수는 바로 그 비천한 태생과 최고의 비극적인 죽음을 통해 실현되고 완성된 존재이다. 가장 극악한 형벌인 십자 가형을 통한 순교야말로 후세의 경악과 숭배, 상상력을 불타오르게 만들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두 발과 두 팔을 십자가에 못박힌 채 죽음을 기다리던 예수, 예 언된 운명을 충실히 따랐던 예수. 그가 숨을 거두기까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누구도 알 수 없다. 복음서에 적힌 간단한 기록을 보면 단지 그가 엄청난 고통을 느꼈으리라는 점만 짐작 할 뿐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자신이 아버지라고 부르던 하느님께 "왜 나를 버리시나 이까"라고 외쳤다. 만약 그의 외마디 절규가 없었다면 우리는 단지 '신의 아들'일 뿐인 예 수에게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기계처럼 고안된 운명의 틀 안에서 움직이 는 그를 숭배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사람의 아들'로서 느끼는 그 고통의 무 게와 깊이 때문에 우리는 그에게 무한한 연민을 느끼고, 고마움을 동시에 엄청난 죄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원래 십자가형은 로마인들이 개발한 형벌이었다. 유대인들에게는 전통적으로 모세율법 에 따라 돌로 쳐 죽이는 형벌이 있었다. 십자가형은 로마 당국이 노예들에게, 특별히 죽음 의 불명예를 가중시키고 싶을 때 사용되었다. 마구간에서 태어난 예수는 출생만큼이나 죽 음도 가장 비천한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십자가형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처형도구인 십자가를 스스로 옮겨야 했다. 로마의 사형집 행관들이 그 수치스러운 나무를 직접 들고 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명예니 불명예니 따지 는 것은 어쩌면 사치였다. 정작 십가자형의 악명은 그 고통에 있었다. 인류가 발전시켜 온 수많은 사형집행 형태 가운 데 십자가형만큼 고통스럽고 잔인한 것은 없었다. 못박힌 손과 발에서 흐르는 피는 오히려 치명적인 게 아니었고,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은 육체의 본질에 반대되는 '자세'에 있었다. 의사들의 연구에 따르면 십자가형은 순환기에 엄청난 장애를 일으켜 머리와 심장에 무시 무시한 고통을 가한 후 결국 사지를 마비시킨다고 한다. 나무 한 그루, 구름 한 점 없는 그 이름 그대로 해골산 골고다 언덕에서 사지가 못박힌 채 꼼짝도 못하고 죽음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 했던 것이다. 그 와중에 느껴지는 갈증. 예수는 골고다에 도착한 직후 유 대인들의 관행에 따라 주어진 포도주 한잔을 이미 거절했다. 십자가에 매달리 지 한참 후 고통의 신음소리를 듣고 누군가 신 포도주를 해면에 묻혀 입가에 갖다댔다지만 그 갈증을 달랠 수 는 없었다. 십자가는 예수의 처형과정에서 핵심적인 소도구이다. 아니 예수의 일대기에서 필수불가결 한 고리이다. 그것은 마치 독배를 빼놓고 소크라테스를 이야기하는 것이나 길로틴을 빼놓고 미리 앙트와 네트를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어떤 죽음보다도 예수의 죽음을 보다 더 극적으로 만든 것은 바로 이 십자가의 존재이다. 십자가는 고난과 형극, 죄악과 대속, 초월 과 세속, 그리고 부활과 희망의 상징이다. 예수 생애의 모든 것이 그 속에 녹아 있다. 십자 가 없는 예수는 있을 수 없고 십자가 없는 기독교신앙은 존재할 수 없다. 그의 죽음은 라마 르틴의 말처럼 '구시대의 무덤이고 새시대의 요람'이었다.
삼차원으로 지어진 거미집 가야바 : 기원 후 36년 유월절 이전에 면직당함. 빌라도 : 예수 사후 곧 면직되었고 기원 후 36년 사망함. 하난 : 존경가 경의를 받으며 생애를 마침. 가롯 유다 : 자살했다는 주장과 배반의 대가로 예루살렘의 부근의 밭을 사들여 농사를 지었다는 주장이 있음. 예수의 적들도 이렇게 저렇게 인생을 마감하였다. 하지만 예수의 가족과 제자들은 당분 가 더 큰 고난을 감내해야 했다. 예수의 동생 야고보는 산헤드린의 판결에 따라 돌에 맞아 죽었다. 설교중인 예수를 보러 어머니가 왔을 때 애써 호기를 부렸던 예수는 죽어서도 가족 에게 재앙을 남겼다. 제자들은 더욱 혹독하게 핍박당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몫은 더 험난했다. 곳곳에서 순교 가 이어지자 이들은 쿠오바디스를 외치며 로마가 닦아놓은 길을 따라 로마의 속주로부터 로마의 심장부로 전교해 나갔다. 그 강대한 로마제국은 아직 미래의 파괴자가 태어났다 는 사실을 개닫지 못하고 있었다. '팍스 로마나'로 접어드는 최고의 번영기 로마의 먼 변 방 유대 지방에서 자신과 인류의 운명을 바꿀 씨앗이 뿌려졌다는 사실은 전혀 모른 채 제 국은 계속 자신의 길을 걸었다. 성서의 기록들은 하나같이 유대인들을 예수 죽음의 책임자로 명기하고 있다. 빌라도는 " 이 사람에게 아무런 잘못도 찾아낼 수 없었다"고 선언하거나 "너희가 보는 앞에서 직접 신 물을 했는데도 너희의 고발을 뒷받침할 만한 아무런 죄상도 찾지 못하였다"고 실토하였을 뿐이다. 재판의 전과정에서 빌라도는 예수에게 아무런 적의를 보인 적이 없으며, 그에게 예 수는 기껏해야 '무해한 몽상가'이거나 '비현실적인 에언자'정도였다. 예수를 놓아줄 명분 만 찾는 빌라도에게 유대인들은 "우리 율법대로 하면 그자는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죽어 마땅합니다"라며 사형을 요구하거나 "만일 그자를 놓아준다면 총독님은 카이 사르의 충신이 아닙니다"라고 도리어 협박하기까지 했다. 저주받을 유대인이 되고 만 것이 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과연 빌라도는 선량한 총독이었으며 유대인들의 압 력에 굴복하여 예수를 처형했을 뿐일까. 성서의 재판기록은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주장이 끝없이 제기되어 왔다. 예수는 식민지의 하찮은 신분의 하층민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변변한 재판을 받을 기회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성서에서 말하는 그런 재판은 로마인이거 나 유대 귀족계급에 속한 사람들만이 받을 수 있다고 읻르은 주장한다. 유대의 전통적 종 교의회 산헤드린의 재판절차도 성서의 내용과는 달리 낮에만 열릴 수 있었고 공식 집회 장 소는 사원의 영역 내로 한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밤에 그것도 제사장의 집으로 끌고가 재판을 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더구나 식민지인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던 빌라도는 골 치아픈 유대인들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잔혹한 통치를 해왔는데 유독 예수에 대해서만 공정하고 자비로운 재판을 할 리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당신의 제사장과 산헤드린에는 사법권이 없었으며 오직 로마총독 빌라도만이 사형선고의 권한이 있었다고 한다. 1961년 런던에서 출반된 폴 윈터의 '예수의 재판에 관하여'는 위의 입장을 대변하는 대 표적인 책이다. 그에 따르면 '마르코복음'의 경우 대부분 '잠언' 등 구약의 내용을 옮겨 그 예언들의 실천이 이루어진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 사실상 예수의 산헤드린 재판도 허구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심지어 예수의 체포조차 빌라도의 체포명령에 따른 것이라는 게 이 사람의 주장이다. 그러나 유대인이었던 폴 윈터의 생애를 들여다보면 유대인 무책임 론이 이해되고도 남는다. 프라하에서 국제변호사로 활동하던 그는 나치 독일을 피해 팔레 스타인으로 도망쳐 나오는 데 성공하지만 그의 어머니, 누이 동생들은 강제수용소에서 죽 음을 면하지 못하였다. 종전 후 영국으로 이주한 윈터는 BBC 고문 등을 역임하지만 어 느날 갑자기 공직을 샂기하고 잠적한 채 오로지 도서관에 틀어 박혀 20년 동안 밤낮으로 예수재판을 연구하였다. 이 책은 바로 결과물이다. 책으로 더욱 유명해진 윈터는 '예수의 죽음에 대해 유대인은 책임이 없다'고 선언하였던, 제 2바티칸공의회 어거스틴 비 추기경의 초청을 받았지만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1969년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와 같은 주장에 따르면 빌라도야말로 예수처형의 유일무이한 책임자라 ㄴ 것이다. 따 지고 보면 빌라도만큼 예수 때문에 득을 본 사람도 없다. 하늘의 성좌처럼 명멸한 수많 은 로마황제, 장군, 원로원 의원과 비교할 때 한직에 불과했던 유대지역 총독 빌라도가 그렇 게 유명해진 것은 전적으로 예수 때문이다. 더구나 복음서의 기록 덕에 그는 자신에게 돌 아올 화살을 유대인들에게 돌릴 수 있었다. 심지어 3세기 초 라틴교회의 신부는 빌라도 가 비밀기독교인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집트 기독교인들은 그를 성인으로까지 숭배 했다고 한다. 수천년 동안 지속된 숱한 논쟁 속에서도 예수의 생애, 특히 그 재판과 처형과정에 관한 정답을 찾아내기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볼드윈 스미스의 말처럼 '삼차원으로 지어진 거미 집'이며 '사실과 허구와 신앙이 함께 혼합'되어 있었다. 또한 '어떤 부분이라도 손을 대기 만 하면 거미집 전체가 무너져 불화와 다툼의 험한 몰골을 드러내게 마련'이며, '아무리 오류가 없이 순수하며 기록된 존재라 할지라도 예수의 생애처럼 철저한 검증을 받게 된다 면 그것은 불신앙과 신비화와 변증들이라는 흔들리는 덫으로 변해 버리고' 만다. 20세기 최대의 발굴이었던 1948년 사해 북쪽 '와디 쿰란'의 문서를 포함한 많은 자료들은 복음서 들의 정확성을 논증하며 예수의 시대와 그 이후 존재한 사본들의 단절을 연결시켜 주었다. 그러나 수많은 의문점이 여전히 수수께끼처럼 남아있다. 19세기에만 6만여 권의 예수 전기가 출간되었다. 20세기에는 아직 자료가 없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예수전기들이 쏟아져 나왔을 게 틀림없다. 이 모든 전기들은 각자 다른 이 야기로 사람들에게 다가와 다른 예수의 모습과 얼굴을 전하고 있다. 죽음은 인간을 가장 완 벽한 인물로 완성시키게 마련이다. 소크라테스, 석사 공자와 마찬가지로 예수도 스스로는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더구 나 제자들도 모두 도망친 마당에 예수의 재판과 처형의 장면을 기록한 속기사, 연대기 작 가가 어디에 있었겠는가. 그 미로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예수의 진정한 모습, 그 재판과 처형의 진상을 되살릴 수 있 을까. 그러나 십수 세기에 걸쳐 가장 확실한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로 군림해 온 이 복음서 들의 영향력은 어느 것도 뒤따를 수 없다. 아마도 이4대 복음서의 저자로 알려진 마르코, 마태오, 루가, 요한 등의 자손이 저작권을 주장했다면 이들은 세계 최대의 갑부가 되었을 것이다. 호텔의 호화로운 룸에서부터 비좁은 교도소 감방 한쪽 구석에까지 도처에 모셔져 있는 성경은 도대체 얼마나 인쇄되고 배포되었는지 통계조차 낼 수 없으리라. 아무튼 예수 의 재판이야기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은 장차 자신들이 어떤 운명에 처하게 될지 조금도 상 상하지 못했다
예수재판이 몰고 온 피바람 거대한 민심의 동요가 끊이지 않는 반항의 도시 예루살렘. 축제가 시작되고 군중이 모 여들면 이 도시에는 수많은 예언자들이 나타나 인류의 종말에 대하여, 예루살렘의 운명에 대하여, 민초들의 길흉에 관하여 예언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이렇게 자칭 타칭 수많은 예 언자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이 도시에 예수가 출현한 후 죽었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일 사람은 별로 없었다.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쉽게 다루었던 초강대국 로마의 식민지, 한 어줍잖은 식민지 청년의 죽음과 그것을 기록한 복음서 때문에 또 다른 수백, 수천만 명 의 목숨이 뒤따를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한 유대학자가 이를 가리켜 '인간 의 피로 바다를 메운 책임을 져야 하는 한 장면'이며 '비참함과 절망감이 끊이지 않는 역 사의 폭풍우'라고 언명하였던 것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예수를 죽인 유대인은 모든 기독교도들의 저주와 핍박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예 수를 향해 돌팔매질하며 죽이라고 아우성치고 침뱉고 조롱할 때 이미 그들은 그런 운명에 처해진 것이다. 예수는 이미 유대인의 운명을 예언하였다. "저 모든 건물을 잘 보아두어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저 돌들이 어느 하나 제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것이다. ... 그때에는 사람들이 너희를 잡아 법정에 넘겨 갖은 고통을 겪게 하고 마침내 는 사형에 처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넘겨 갖은 고통을 겪게 하고 마침내는 사형 에 처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온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예수를 죽인 동족 유대인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응징과 보복의 역사는 피해가기 어려 웠다. 기독교의 역사 속에는 피 냄새가 스며들고 말았다. 예수의 예언은 이루어졌다. 예루살렘의 성은 무너져 폐허가 되고 유대인들은 자신의 땅 에서 쫓겨나 전세계로 유랑의 길로 떠났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편견과 조롱에 시달리며 수난을 겪었다. 반유대주의는 이미 전 유럽인의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렸다. 19세기 프랑스 지 성사에 새로운 장을 연 드레퓌스 사건 역시 유대인데 대한 편견이 낳은 비극이었다. 그러나 히틀러가 역사에 럭루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차라리 행복 한 상태였다. 유대인인종말살을 기도한 히틀러는 사실상 유럽 인접국가의 적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심정 적인 동조를 얻고 있었다. 그 광란의 도살장에서 유대인은 얼마나 죽어나갔는지 정확한 숫자조차 알 수 없다. 600 만이라는 설도 있고 700만이라는 설도 있다. 인간의 피, 그것도 유대인의 피가 바다를 메웠 다. 로스엔젤레스 북부에 '관용의 박물관(Museum of Tolerance)' 이 잇다. 나치 강제수용 소에 감금된 경험이 있고, 나치전범들을 찾아 전세계를 뒤지고 다녀 나치사냥꾼으로 유명 한 시몬 비센탈이 세운 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은 인종적 편견을 버리고 상호 이해와 우호를 증진시켜야 한다는 주제를 가지고 세심하게 설계되었다 그러나 런던 북부, 뉴욕 브롱스 지 역, 아니 웬만한 서양의 대도시 어디를 가더라도 검은 망토에 검은 모자, 수염을 기른 유대 인들의 집단거주지를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여전히 히브리어를 쓰고 전통의식을 지키며 살아간다. 미국은 유대인이 지배한다고 할 정도로 유대인들은 언론, 재계 등 각 분야에서 두 각을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미국을 내세워 벌이는 지나친 이슬람 압박정책은 이슬람세계 의 저주를 사고 있다. 지나친 선민주의, 메시아사상, 뛰어난 두뇌와 장사술은 유대인들을 승승장구하게 만들었다. 히틀러의 학살로 예수 처형의 죄값을 다했다는 것일까.
최초의 양심수, 예수 유럽을 여행할 때는 로마를 제일 마지막에 보라는 말이 있다. '구원의 도시 로마.'로마 를 먼저 봐버리면 나머지 도시들은 너무 시시해져 여행할 맛이 삭 달아난다는 것이다. 실 상 유럽 어느 구석을 가도 로마제국을 만날 수 있다. 로마로 통하는 모든 도로, 그 위의 수 도교, 원형경기장, 군사주둔 시설, 목욕탕, 도시와 성곽이 잉글랜드에서부터 룩셈부르크, 스 페인까지 전 유럽의 구석구석에서 발견된다. 막강한 군대로 광대한 영토를 아무튼 무적 로마제국의 입장에서 저 변방의 속주 유대지역이 유달리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로마 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서기 110년경에 저술한 "연대기에서 딱 두 줄로 예수를 언급했다. ' 악행을 많이 저질러 우리 민중이 증오하는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름 은 티베리우스 황제 시절 빌라도 총독에 의해 사형 당한 그리스도라는 사람에게서 연유한 다'고 썼다. 이 간단한 기록을 보면 예수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이다. 로마인들에게 예수 는 '악행을 저질러 증오를 받았던 그리스도인들'이라는 한 불순한 종파의 우두머리 정도로 밖에 인식되지 않는다. 당시 로마 지배자들은 자신들에게 대항하는 자들에게 강도라는 이름을 붙여주기 일쑤 였다. 예수와 함께 처형된 두 사람 역시 강도혐의였다. 하지만 이 경우 강도란 진짜 남의 물건을 훔친 도둑이라기보다는 로마의 통치에 저항하여 조세납부를 거부하는 등 유대민족 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민족해방투쟁운동가들이 대부분이었다. 사리 로마제국과 유대 지 배세력에게 이중으로 착취당한 유대 민중의 반란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으며, 급기야 정치권력에 대한 타도투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 중에 대한 하느님에 대한 율법 과 비타협적신앙으로 로마 군대와 용감하게 싸워 마시다(Massda)요새에서 3년간 버텼던 젤롯당은 유대인들의 영광의 상징이었다. 이들의 민족해방운동과 예수의 인류해방운동이 제 대로 구별될 수 없는 시대였다. 예수는 분명 양심수였다. 엠네스티의 정의에 따르면 양심수는 '자신의 신념이나 사정을 어떤 폭력이나 무력에 호소하지 않고 표현한 혐의로 수인이 된 사람'이다. 예수는 이러한 정의에 딱 들어맞는 양심수이다. 그는 어떤 폭력이나 무력에 호소한 적이 없었다. 신학자 들은 유대 역사에서 로마군대와 저항한 많은 세력들은 폭력적 반란의 옹호자로 몰면서 예 수를 무저항의 온건한 예언자로 돋보이게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로마군대와 싸우며 민족 해방투쟁을 벌였던 사람들 역시 양심수일 가능성이 많다. 엠네스티는 당초 인종차별정책을 철저하게 고수한 백인정권에 저항하여 무력으로 전복하려 한 넬슨 만델라를 양심수로 인정 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수한 논쟁 끝에 결국 그의 석방운동에 동참한 걸 보면 형식적 인 양심수 정의를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고대 로마제국의 무자비한 철권통치 앞에서 양심수 논쟁을 벌이는 것 자체가 어리석 은 짓일지도 모른다. 로마제국의 안전제국을 위협하는 모든 반대 세력에 대해 차별성을 부여한 만큼 제국의 통치는 분별력이 없었으며, 2000년의 인류의 투쟁과 헌신 끝에 마련 된 인권기준을 예수시대에 적용한다는 것은 어차피 적절치 못하기 때문이다.
히피가 지명 수배한 예수 예수는 2000여 년 전 그렇게 골고다에서 죽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살아나 지구상의 3분 의 1의 사람들로부터 경배를 받고 있다. 부활의 사실성을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부활을 통해 예수는 '역사의 경계'를 넘어서 '믿음'의 영역으로 옮아간 것이다. 인간에게 신은 언제나 필요하다. 볼테르는 '신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인간이 신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예수의 신성과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예수는 여전히 위대하고 특별한 존 재이다. 19세기를 통틀어 가장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비판적 입장에서 검증한 예수의 생애'를 쓴 독일의 철학자 슈트라스 역시 부활을 포함한 복음서의 여러 기적을 부인하면서 도 자신은 여전히 위대한 예수의 신봉자라고 말했다. 사실 '나자렛 예수'를 '예수 그리스도 ' 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운동은 끊임없이 있어 왔다. 아들은 성경에서 포장된 예수가 아니라 역사적 예수, 삶 속의 예수를 찾으려는 것이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신학자들이 만 든 인조인간' '그리스도교의 먼지로 뒤덮인 석고상'일 따름이라고 생각한다. 신격화된 예수 보다 비천하고 고통스런 삶을 살면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 바친 인간 예수에게 매혹된 사람들이었다. 예수가 말했듯 사람들은 모두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지고 산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자기 가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을 만큼만 예수의 십자가를 받아들인다. 유대교 신학자들은 예수를 '가장 유대인다운 유대인' '위대한 유대인 형제'로 본다. 계몽주의적인 휴머니스 트들은 예수를 '인간을 선하게 이끌려했던 위대한 한 인간'으로 받아들인다. 실존주의자들 은 '자신의 운명을 직시하고 그 운명을 피하지 않음으로써 마침내 운명과 자기 자신을 능 가하였다'고 생각한다. 카뮈는 '예수가 마지막 순간 죽음에 대한 불안 때문에 절규한 까닭 에 나는 그를 나의 친구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의 가르침을 '세상에 대한 구원과 철저한 변혁을 위한 갈망'으로 해석한다. 오늘날의 젊은 세대에게 예수는 '집 도, 가구도, 손가방도, 신분증이나 예금 통장, 보험증서도 가져본 적이 없는 욕심 없는 순회 설교자'이며 '모든 인습을 거부한 무상한 무정부주의자'이기도 하다. '현존하는 모든 것에 발작을 일으킨 광대이자 바보, 지하운동과 팝의 옹호자'로 예수를 이해하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히피들이 발행하는 신문에 게재된 예수 수배 전단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수배자 이름 : 예수. 일명 메시아. 신의 아들. 왕 중의 왕. 군주 중의 군주. 평화의 왕으로 불리는 그리스도를 수배함. 지하해방운동의 악명 높은 지배자임. 죄목 : 다음과 같음. 면허도 없이 의사로서, 포도주 제조업자로서, 빵 배급업자로서 활 동하고, 성정에 있는 상인들과 싸움을 벌임.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과격분자들, 전복자들, 매 춘부들, 거리의 부랑아들과 교제함. 믿음을 갖고 있던 인간들이 신의 자녀로 변해야 한다고 주장함. 외모 : 전형적인 히피의 모습으로 긴 머리에 수염을 달고 야회복을 걸쳤으며 샌들을 신었 음. 슬럼가를 돌아다니기 좋아하고 부자친구들도 있으며 종종 광야로 숨어들기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