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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아 네 행동은 옳았어..내 딸, 존경한다"
게시물ID : sewol_3207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유체이탈가카
추천 : 28
조회수 : 1036회
댓글수 : 22개
등록시간 : 2014/07/04 20:21:38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40704160012691&RIGHT_REPLY=R18

[한겨레]제자들 구조하다 희생된 전수영 교사 부모님 인터뷰


"수영이가 원하는 것은 '세월호'가 환기되는 것입니다"

[나들의 초상]

죽은 자와 산 자의 대화

"엄마, 미안해. 그사이 6kg이나 빠졌다며? 그렇지 않아도 몸 안 좋은데. 나 때문에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매일 울기만 하고. 엄마, 나 잘 지내고 있어. 이제 그만 슬퍼해. 힘을 내. 엄마랑 오래 함께하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꼭 두 달째가 되던 지난 6월16일, 최숙란(51)씨는 오랜만에 꿀떡을 입에 댔다. 달콤한 꿀이 혀에 닿아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평소 '떡보'임을 자임하던 최씨는 지난 두 달 동안 떡 한 조각 먹지 않았다. 아니 먹을 수 없었다. 실은 이제껏 제대로 된 식사를 해본 적이 없다. 큰딸 수영1 때문이었다.

"외모에서부터 성격, 취향까지 판박이인 큰딸은 저만큼이나 떡을 좋아했거든요. 어젯밤 수영이가 꿈에 나타나 그러더군요. 기운을 내라고. 오늘따라 더욱 수영이가 생각나네요."

최씨의 큰딸은 세월호 참사 현장에서 제자들을 구하다 숨진 경기도 안산 단원고 국어교사 전수영(25)씨다. 교사에 임용된 지 1년2개월, 첫 제자들과 함께 교사 신분으로 처음 떠난 수학여행길이었다. 떠나기 전날 밤, 들뜬 마음으로 최씨 옆에서 '어떤 옷을 입고 갈까' '배낭을 가져갈까, 아님 캐리어를 가져갈까' '엄마 선물은 꼭 사올게' 재잘대던 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딸의 목소리가 특이해요. 콧소리가 섞여 있는데, 그래서 학생들이 딸 목소리를 많이 흉내낸다고 했어요. 그래도 똑 부러지게 수업 하나는 참 잘했다고 들었는데…. '댕기(다녀올게요)~'2 하고 떠났는데, 이제는 그 목소리가 점점 가물가물해지려고 해요. 어쩌면 좋지요?"

시간은 야속하게 흘렀다. 수영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수학여행을 떠날 즈음 길가에 흐드러지게 피었던 아카시아꽃이 그사이 모조리 떨어졌다. '너는 내게 아카시아꽃이었구나!' 지난 25년 동안 수영이 덕분에 최씨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엄마였다. 그만큼 수영은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딸이었다. "야간자율학습 감독을 하고 밤늦게 퇴근해도 꼭 드라마를 보면서 엄마와 수다 떠는 것을 빼먹지 않았어요. 월·화요일엔 <기황후>를 보면서 드라마 속 역사와 허구에 대해 의견을 나누곤 했어요." 엄마와 딸은 지난 4월 말 종영한 이 드라마의 마지막 회 본방 사수에 실패했다.

사고 당시 수영은 탈출이 비교적 용이한 5층 객실에 있었다. 하지만 수영은 세월호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상황에서 4층으로, 3층으로 내려갔다. 제자들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참사 34일 만에 발견된 수영의 주검은 3층 주방과 식당 사이에서 수습됐다. 구명조끼 없이 고등학교 때부터 즐겨 입던 청색 긴팔 후드 티셔츠와 카키색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발목이 부러진 채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사력을 다해 아이들을 끌어올리느라 자기 발목이 어딘가에 끼어 골절된 걸 몰랐나봅니다."

딸 "엄마, 학부모들께 미안하다고 말해줘"

딸의 주검이 수습되기 전까지, 최씨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다. 세월호 내 에어포켓 혹은 인근 무인도에 제자들과 함께 생존해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딸의 수영 실력은 수준급이다. 7년 넘게 훈련했고, 수영장에서 몇km씩 왕복하는 일은 예사였다. "절박한 상황이었어도 헤엄쳐서 물 위로 올라오면 되니까 혼자 살고자 했으면 얼마든지 살았을 겁니다. 그런데 수영이는 처음부터 그 선택지를 포기한 것 같아요. 자신의 구명조끼를 제자한테 넘겨주는 것도 모자라 바닷물이 목구멍으로 넘어올 때까지 한 아이라도 더 구하려고 혼신을 다했나 봐요. 발목이 퉁퉁 부어 있더군요. 그런 판단은 한순간에 나오는 게 아니라 오랜 품성과 성격에서 나오는 건데, 수영이는 마지막까지 내 딸다웠어요."

수영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최씨는 "'착하고 성실하며 책임감 강한 천사 같은 아이'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녔다"고 회상했다. 임용고시 공부를 하면서도 매일 밤 늦게 유럽 배낭여행을 떠난 선배네 집에 들러 고양이를 돌봤다. 퇴근한 엄마가 힘들까봐 몰래 집안 청소를 해놓을 정도로 기특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 2000년 5월9일 수영의 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엄마 돕기 2가지가 과제다. 청소했다. 엄마 다리 주물러드렸다. 맨날 하는 건데 힘들지 않다."

친구들, 선후배 사이에서도 수영은 '천사'로 통했다. 사고 소식이 알려진 뒤 커뮤니티 사이트 '루리웹' 종합게시판에는 수영의 친구가 쓴 글이 올라왔다. "전수영 선생님은 제 중학교 동창입니다. 감히 이분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정말 천사 같은 친구였습니다. 소심한 제게 말동무도 해주고, 학교생활도 도와주고, 정말 배려심 깊은 친구였어요." 수영의 빈소에 들른 친구들은 하나같이 최씨에게 "걔는 살아올 애가 아니에요"라고 말했다.

수영은 매사 적극적이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과대표를 했고, 재즈 동아리 활동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공부도 꽤 잘했다. 공부하라는 소리 한번 안 했지만 스스로 알아서 했다. 학창 시절 친구들이 보낸 편지에는 '모범생' '공부벌레' 호칭이 빠지지 않았다. 중학교 시절 전교 2~3등을 놓치지 않았던 수영은 외고를 졸업한 뒤, 고려대 국어교육과에 입학했다. 대학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최씨는 "수영이 고3 때, 애들 아빠가 일본에서 파견근무를 하게 되어 홀로 한국에 남아 대입을 치렀다"며 "서운하다고 투정하기는커녕 하얀 곰인형을 만들어 보내며 자기를 생각해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사려 깊은 아이였다"고 회상했다.

이날 최씨가 떡을 입에 댄 건 일종의 '의식'이었다. 수영이 당부한 말 때문이다. 전날 밤, 최씨는 모처럼 달고 긴 잠을 잤다. 수영의 방에서 수영의 체취가 묻어 있는 이불에 누웠다. 딸의 옷을 이불 삼아 끌어안은 채였다. 수영이 찾아왔다. 울먹이며 그녀에게 "미안해, 엄마. 너무 슬퍼하지 마"라고 했다.

"처음에는 억울한 마음도 컸어요. 하지만 우리보다 더 억울하고 큰 고통을 겪는 이가 부지기수더군요. 단원고 희생자 중에는 외아들·외딸인 경우가 많은데, 부모들 심경이 어떻겠어요. 탑승객 중에는 졸지에 부모와 형제를 잃은 어린아이도 있잖아요. 그분들에 비하면 우리 가족은 상황이 낫다고 생각하니 위안이 되더군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떡집에 갔다. 애초 인터뷰차 방문할 기자를 대접할 요량이었다. 어느 순간 자신의 손이 접시를 향하고 있었다. 최씨는 생각했다. 어젯밤 딸이 그녀 앞에 나타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죽은 영혼을 보내줘야 한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닐 거라고. 자꾸 울고 붙잡으면 영혼도 슬퍼서 못 떠난다고. 영혼이 더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도록 보내주는 것이 남은 가족이 해야 할 일이라고 말이다. 수영의 근심을 덜어주기 위해서라도 기력을 회복해야 한다. 아직도 차디찬 바닷속에 12명(6월28일 현재 11명)의 실종자가 남아 있고, 그중 2명(현재 1명)이 수영네 반 학생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세월호'가 잊혀지는 것 같아 최씨는 두렵다. 방송에서도, 신문에서도 세월호 관련 뉴스를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그녀만이라도 수영의 죽음을, 단원고의 비극을, 세월호 탑승객들의 희생을 기억해야 할 것 같다. 그것이 수영이 원하는 일이고, 살기 위해 음식을 삼켜야 한다. "수영이가 마음 편히 제 갈 길 갈 수 있도록 보내줄 겁니다. 저 역시 달라질 거고요. 수영이한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될 겁니다."

엄마 "내 딸은 교사로서 할 일을 …"

최숙란씨는 교사였다. 이태 전 건강상의 이유로 퇴직하기 전까지 중·고등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쳤다. 수영은 엄마의 뒤를 이어 교사의 길을 택했다. 최씨는 "수영이 외할아버지가 교편을 잡았고, 고모와 고모부도 현직 교사"라며 "어릴 적부터 아이들을 좋아했던 딸은 선생님을 동경했고, 교사는 수영이한테 천직이었다"고 회상했다.

"임용 합격했어요. ㅠㅠ. 항상 학생을 생각하는 선생님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년 2월5일 수영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남긴 글이다. "임용시험에 합격한 날 수영이가 '어떤 선생님이 좋을까' 묻기에 제가 해준 말이었어요. 수영이 학교에서 자신이 쓰던 노트 맨 앞 장에도 이 문구를 적어놓은 걸 유품을 정리하면서 알았죠. 세월호에서 그 말에 책임을 지려고 자신의 목숨과 맞바꾼 겁니다."

4월16일 오전 9시11분, 최씨는 "엄마, 배가 침몰해. 어떡해"라는 딸의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처음엔 '장난하나' 싶었지만, 불안한 예감에 텔레비전을 켰다. 곧바로 딸에게 전화했다. "구명조끼 입었어?"라고 물으니, 딸은 "학생들은 입었어. 엄마 미안해"라며 전화를 끊었다. "제자들은 입히고 정작 자신은 입지 않았다는 걸 에둘러 표현한 거였어요. 제가 걱정할까봐. 구조대가 오고 있고, 학부모들과 전화를 해야 해서 끊어야 한다더군요. 얼른 조끼를 입으라고 했는데, 결국 끝까지 입지 않았더라고요."

오후까지 최씨는 "구조가 됐으면 연락해" "사랑해 얼른 와" "예쁜 내 딸 보고 싶어. 엄마가 미안해. 사랑해" 등의 문자메시지를 딸에게 보냈다. 끝내 답이 오지 않았다. 오전의 '전원 구조' 발표는 오보로 판명됐고, 오후가 되면서 생존자 수가 줄어드는 대신 실종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생존자 명단에 '전수영'은 없었다.

그날 이후 전남 진도 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은 분노와 통곡의 공간이 되었다.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이 몰려들었다. 최씨는 사고 이튿날인 4월17일 그곳을 찾았다. 지금도 그때 본 모습이 생생하다. '○○, 살려내라' 오열하는 가족들, 주검을 실은 구급차가 올 때마다 실신하는 어머님들의 모습이 눈에 밟힌다. "오죽 억울하고 분하면 그랬겠어요. 내 자식이 죽었는데, 학부모님들은 학생들을 인솔한 선생님들도 원망스러웠을 겁니다. 감히 내 딸만 먼저 찾아달라고 애원하거나 슬퍼할 수는 없었어요. 그저 빨리 바다에서 나오길 바라는 수밖에요."

최씨가 진도에 있는 동안에도 수영은 수시로 그녀에게 말했다. '엄마, 학부모님들께 미안하다고 말해줘.' 하지만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입 안에서만 맴돌었다. 울부짖는 학부모 곁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함께 숨죽여 울어주는 것뿐이었다. 실종자 수색 성과는 점점 지지부진해지고 있었다. 최씨는 체육관을 청소하는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슬픔을 극복하고, 또 같은 고통을 경험하는 이들을 위로하는 방법 같았다.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던 딸에게 꿋꿋하게 슬픔을 이겨내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진도체육관과 팽목항에서 최씨는 슬픔을 삭이는 법을 배웠다. 수시로 최씨는 딸에게 묻는다. "엄마, 잘했지? 잘하고 있는 거지?"

엄마는 딸의 장례식장에서조차 의연했다. 조문 온 딸의 제자와 학부모, 딸의 친구와 선후배를 외려 위로하고 진정시켰다. 5월20일 오후 딸의 빈소에 어린 제자들 수십 명이 찾아왔다. 엄마는 딸의 영정 앞에서 오열하는 학생들을 한 명씩 꼬옥 안아주었다. "내 딸은 교사로서 할 일을 했을 뿐이야. 너무 슬퍼하지 마." 활달한 성격도 아닌데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두려워했던 엄마는 용기를 냈다. 하루하루 단련되는 중이다. 언론의 인터뷰 요청에도 적극 응하고 있다. "수영의 죽음이 허무한 것만은 아니라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호소하는 제 나름의 방법이 이것밖에 없네요."

아빠 "살았다면 죄책감에 고통스러웠겠죠"

빈소에서 딸의 제자들을 안아주는 아내를 바라보던 전제구(54) 산업통상자원부 남북경협팀장의 눈가가 벌겋게 충혈됐다. 딸의 실종 소식에도, 딸의 주검이 수습됐을 때도 슬픔을 억눌렀던 그다. 심지어 "딸이 죽음 앞에서도 어쩜 그렇게 태연할 수 있냐"고 서운해하던 아내를 "슬퍼한다고 되돌려지는 것도 아니다"라고 설득했다. 언론을 통해 그의 사연이 알려진 4월21일 이전까지는 휴가도 안 내고 평소처럼 세종시로 출근했다. "그날 아내와 딸의 제자들이 포옹하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 저라도 이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딸이 우리 곁을 떠났구나'라고 새삼 다시 인지했던 것 같아요."

4월16일 9시11분께 그는 아내로부터 "수영이 탄 배가 침몰한대"라는 연락을 받았다. 초조한 마음으로 텔레비전 뉴스 속보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딸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딸의 휴대전화 위치를 확인했다. 사고 해역 인근이 찍혔다. 심장이 멎는 듯했다. 예감이 불길했다. 점심을 굶은 채 텔레비전 화면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할 일도 남아 있었고, 어른이 아니라 자녀의 죽음과 관련된 일인데다 동료들이 충격받을 것 같아 망설였어요. 앞으로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할 수 없었고, 주검이 수습된 상황도 아니었고요. 겉으론 태연한 척했지만, 관심은 온통 진도 바닷가에 있었어요."

4월22일부터 딸의 주검이 수습된 5월19일까지 그는 진도에서 상주했다. "그 한 달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며 "나중에는 주검이라도 수습됐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고 했다.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소식을 접한 지인들이 수시로 전화를 해왔고, 또 직접 진도를 찾아오기도 했다. 하루 4번 잠수부들이 바다에 들어갈 때마다 현장과 주검 인양 상황을 체크했다. "딸과 딸의 제자들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까요. 주검이 수습돼 장례식을 치르는 학생들과 선생님들 조문도 가고, 유족·실종자 가족 회의에도 참석하고. 오히려 그때는 슬픔도, 딸의 부재도 느끼지 못했어요. 장례식까지 다 치르고 난 지금, 수영이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집니다."

"수영이 아빠는 자칭 타칭 '딸바보'예요." 옆에 있던 아내가 거든다. 성격상 겉으로 애정 표현을 하지는 않지만, 묵묵히 딸의 일상과 발전을 지켜보고 격려해주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책에서 괜찮은 문구를 보면 슬며시 딸의 책상 유리판 아래 꽂아놓고는 했다. 압권은 몇 달 전 수영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다. 최씨는 "도서관에서 <남자의 심리학>이라는 책을 빌려와 슬그머니 수영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며 "남자를 잘 선택하라는 말은 직접 못하고…. 서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학생들이 여전히 배 안에 있는데 수영이 혼자 살아 왔다면…. (오랜 침묵) 내 딸이 먼저 빠져나왔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살아 나왔어도 죄책감에 더 고통스러워했을 겁니다."

6월22일 전씨는 팽목항을 찾았다. 수영이네 반 학생 2명이 여전히 차가운 바닷속에 있었다. "수영이가 실종자 신분이었을 때, 끝까지 주검이 수습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컸어요.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의 위로가 가장 큰 힘이 되었어요. 조금이나마 저도 힘을 보태고 싶었어요. 수영이도 그걸 바라는 게 분명하니까요."

전씨에게 요즘 새로운 습관이 하나 생겼다. 밤 11시께가 되면 어김없이 현관문 쪽을 바라보는 것이다. 수영이 "댕기(다녀왔습니다)~" 하고 해맑은 표정으로 들어올 것만 같다. "활달한 성격이어서 집안 분위기를 이끌어주는 편이었거든요. 부모한테 말대답은커녕 꾸중 들을 일을 아예 만들지 않았죠. 제 컴퓨터에 이상이 생기거나 휴대전화 기능을 알 수 없을 때 수영이가 해결해주곤 했는데, 지금은…." 그가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꼬옥 움켜쥐었다.

수영은 가족 안에서 분위기 메이커였다. 올해 초 영화 <겨울왕국>이 개봉됐을 때, 직접 3D 영화티켓을 예매해서 온 가족을 관람시켰다. "그렇게 단체로 영화를 볼 때가 종종 있었죠." 극장을 나서니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수영은 "사이 좋은 엘사와 안나가 동생과 나 같다"며 까르르 웃었다. 수영은 주말농장에 가는 걸 좋아했다. 올봄에도 씨앗을 모두 직접 심을 정도로 식구 중에서 가장 열심히 텃밭을 일궜다. 상추와 고추를 따온 날이면 삼겹살을 구워 먹자고 제안하던 아이였다. 얼마 전에 가보니, 참사 이후 돌보지 못한 농장에는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4월 첫 주말, 어린이대공원과 양재천까지 자전거 하이킹을 하면서 벚꽃 구경을 하자고 꼬드긴 주인공도 수영이었다. 수영은 카스테라, 케이크, 스콘을 직접 만들어 식구들에게 대접하는 것도 즐겼다. "수영이가 있어서 우리 가족이 오순도순 뭔가 취미활동을 하지 않았나 싶어요. 함께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각자 일기를 써서 발표해보기도 하고, 가족신문을 만들 엄두도 냈던 것 같습니다."

딸의 죽음 앞에서 의연했던 부모는 5월22일 영결식 날, 학교에서 딸이 쓰던 책상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제자들이 선물한 편지와 선물, 딸이 학생들에게 나눠주려고 사다놓은 사탕과 초콜릿, 학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 소통·엄격함·믿음·따뜻함이 공존하는 선생님이 될 목적으로 공책에 그려놓은 벤다이어그램을 보며 교사로서 딸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그간 참아왔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딸의 공책에는 틈틈이 발췌한 교수법과 관련한 내용, 교과 연구 내용은 물론이고 갈등 해결 대화법, 학생이 심리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대화법, 진로학습 클리닉, 첫 시간에 할 수 있는 이벤트, 반별 수업 진행 상황 등이 꼼꼼하게 적혀 있었다. 최씨는 "교사인 내가 봐도 대단한 열정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며 "꿈을 맘껏 펼치지 못하고 떠난 딸이 불쌍해서 슬픔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수영아, 네 행동은 옳았어, 참 잘했다

"내가 낳았으니 내가 해줄게."

5월29일, 최씨가 동사무소를 찾았다. 딸의 사망신고를 하기 위해서였다. 작성한 신고서를 창구 앞 직원에게 내밀자, 그 직원이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사인은 '불의의 사고로 인한 익사'. 장례식을 치른 뒤에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딸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었다. 그녀 역시 꽤 오랫동안 창구 앞에서 오열했다. 단 몇 년만이라도 더 교사 생활을 하고 떠났더라면 지금처럼 참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최씨는 수영의 방으로 갔다. 토끼와 판다 인형들이 방 한쪽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수영의 남자친구가 선물한 것들이다. 딸은 남자친구를 '토끼', 남자친구는 딸을 '판다'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세월호 사고 당시 딸은 남자친구한테 "미안해. 아이들을 구하러 가야 돼. 사랑해"라는 짧은 메시지를 남겼다. 최씨의 집 곳곳에는 현재까지 수영의 흔적이 남아 있다. 유품을 단 하나도 정리하지 않아 수영의 방은 4월15일 아침에 멈춰 있다. 당분간 정리할 계획이 없단다. "수영이는 영원히 내 딸이고, 또 우리 가족이니까요. 나중에 다시 만나 우리가 얼마나 사랑했고, 또 자랑스러워했는지, 수영이 덕분에 얼마나 멋진 인생을 살았는지 이야기해줄 겁니다." 수영이 거실 벽에 걸린 액자 속에서 해맑게 웃고 있다.

'산 자'가 '죽은 자'를 잊지 않는 방법은 뭘까. 전씨는 생각한다. 가장 시급한 건 실종자 수습이다. 진실 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그다음이다. 해양경찰과 해양수산부, 청와대 등의 대응과 책임 소재와 관련해서는 현재로서 할 말이 없다. 다만 당시 안내방송만 정확하게 나왔더라도 많은 학생들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단기간 초고속 성장을 꾀하다보니 안전이라는 가치보다 경제적 이해득실에만 치중하는 풍토가 만연해 이번 참사를 불러왔다고 봅니다. 우선은 국정조사가 어떻게 진행되고, 또 어떤 결론을 내놓는지 지켜보려고 합니다."

현재 수영이 원하는 건 세월호가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환기되는 것'이라고 부모는 확신한다. 수영은 '산 자'인 엄마와 아빠, 그리고 우리 사회에 죽음으로 호소하고 있다. 책임의식과 도덕성이 사회적으로 강조되고, 이런 사태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완벽하고 확실한 대책을 만들라고 말이다. 그것이 수영을 비롯한 세월호 희생자들이 바라는 진정한 '추모' 혹은 '애도'의 본질이어야 한다.

6월28일은 수영의 생일이었다. 식탁 위에 흰쌀밥과 미역국이 놓였다. 소박하지만 정갈하다. 가족들이 제 그릇을 비워가는 동안에도 수영의 그릇은 처음 상태 그대로다. "수영이가 맛있게 먹었다고 하네요." 최씨가 가족들에게 일러줬다. 그녀는 오늘도 보이지 않는 딸에게 말한다. "수영아! 네 행동은 옳았어. 참 잘했다. 자랑스러운 내 딸. 존경한다. 엄마는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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