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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이야기. (길티크라운 감상후기 스압주의)
게시물ID : animation_822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천마리학
추천 : 1
조회수 : 61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07/23 21:28:16

왕 이야기. -길티 크라운과 눈먼자들의 도시 그리고 세상 모든 왕에 대한.

 

 

 

-본 글은 애니 길티크라운의 감상문입니다. 원작의 내용을 덧붙이되 많은 내용누설을 피하기위해 있는그대로 가져와 설명하기보다 의미가 흔들리지 않을정도로만 탄력적으로 개괄하였습니다.




나는 종교를 믿지 않는다. 그 중에서 예수를 믿는 종교는 싫어하는 쪽에 속한다. 하지만 예수그리스도 라는 인물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평은 달라진다.

성경은 자의적 해석이 필요한 현실성 떨어지는 구문들로 이뤄진 경전이라는 평이 지배적이지만 예수라는 인물은 비교적 실존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세상의 박해를 짊어지고 세상 모든 약자들에게 종교라는 희망을 주었고 그리하여 그는 왕으로 칭송되어 죽었다.

신격화 된 존제를 왕으로 격하시키고자 왕이라는 표현을 쓴것이아니다. 그는 죽고난 이후에도 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세상 모든 종교중에 으뜸으로 왕으로 살았다. 그것이 신이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람된 존재로 천년왕을 꿈꿔보지 않겠는가 누군가 묻는다면 감히 엄두조차 내지 못할 것을 그는 해냈다. 그것이 내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을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뿐만 아니라, 왕으로써 모두를 대표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것이 내가 그를 최고의 왕으로 인정하는 이유이다. (다시 살아났다는 성경의 이야기가 있지만 그런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는 오히려 천년왕의 격을 떨어트리는 일이다. 모두를 위해 죽었다는 것 만으로도 그는 왕으로써 충분하다.)


왕 이야기와는 별개로, 나는 애니메이션을 즐겨본다. 하지만 분기별로 요일별로 근성있게 챙겨보는 편은 못되서 이따금씩 완결애니중 좋은 애니를 추천받아 보곤하는데, 그중 가장 최근에 추천받은 것이 이런 '왕 이야기' 를 다룬 애니였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요 근 한달내에 읽었던 책들 중에서도 이런 '왕 이야기'에 대한 책이 있었다.




길티 크라운. 죄악의 왕좌 라는 멋들어진 이름이 낯설을 정도로 애니는 난항을 거듭한다. 에피소드마다 개연성도 떨어지고 주인공 성격이나 태도가 이해하기 힘들고 유치해서 몰입하기 어려웠다. 특수한 능력을 지닌 주인공을보고 왕의 힘을 지녔다고 하던데 어째서 그것이 왕에 대한 이야기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의미를 알기 힘든. 흔한 겉멋들은 대사에 넌덜머리가 났다. 하지만 하루 한편씩 넘기며 겨우겨우 진행하는 와중에 중반쯤 넘어서야 작품은 돌연 본색을 들어내기 시작했다.


도쿄가 오염되고 외부로부터 봉쇄되었다. 온몸이 경질화가 되는 바이러스에 도쿄가 오염되었다고 판단한 당국은 바이러스가 외부로 전염되는것을 차단하기위해 차단막을 건설해 올리고 도쿄 주민들을 압박한다.

외부와의 연결은 단절되고 물자보급은 끊겼다. 주민들은 혼란에 빠진다. 구조를 기다려야 할 것인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벽을 뚫고나서야 할 것인가. 이 와중에도 물자분배의 편중은 존재했다. 봉쇄된 내부에서도 격차가 벌어지고 불만이 조장되어 테러조직이 기승을 부리고 선량한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거기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당국은 도쿄내부를 가만히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병력을 투입하고 차단막을 점점 좁혀오는 '레드라인'을 형성해 일명 '바이러스 퇴치'를 빙자한 일방적인 학살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도쿄 정화작업이 서서히 목을 죄어오고 있었다. 아직 발병되지 않았음에도 감염된 사람들을 학살하는것이 정화라면 그들은 착실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이제 도쿄 내부사람들은 무턱대고 구조를 기다리거나 혼란에빠져 서로 다투기만 해선 안된다는것을 직감했다. 그들을 이끌어야할 왕이 필요한 시기였다.


주인공에겐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사람 각각이 지니고있는 마음의 기질을 물질화시켜 현실세계에 사용할 수 있는 물건으로 구현화 시키는 능력이다. 온갖 무기를 앞세운 당국을 상대로 도쿄주민들은 당국을 상대로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원했고 때마침 주인공의 능력은 주민들로 하여금 무기를, 힘을 부여해 줄 수 있는 것이었다. 모두가 그를 원했다. 사람들이 주인공을 향해모이기 시작했고, 왕이 필요한 시기에 모두는 주인공을 왕으로 추대하는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여기까지 길티크라운을 보는 와중 나는 또 다른 세계에서 길크의 주인공과 너무나 닮은 방식으로 왕으로 추대된 또 다른 이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몹시나 공교롭게도 그녀는 내가 가장 최근에 읽은 책들의 주인공중 하나였고, 어떤 우연의 일치인지, 얼마 지나지않아 책과 전혀 상관없는 애니메이션으로 다시금 그녀를 떠오르게 만들었다. 누구에게도 자신을 왕이라 생각하게 하지 않았지만 이미 모두에게 앞선 왕. 스스로 왕으로 추대되길 원하지 않았지만 이미 그녀를 따르는 이들의 왕이 되어버린 그녀는 바로 눈먼자들의 도시의 눈뜬여자였다.


 

도시는 눈이머는 전염병에 빠지고 말았다. 당국은 눈먼자들을 집단으로 치료하겠다는 구실로 모두를 쓰지않는 정신병동에모아 감금하고 외부로부터 단절시켰다. 그리고 그 병동에 아직 눈이 멀지않은 눈뜬여자가 잡혀들어간다. 눈뜬여자는 눈이먼 자신의 남편을 보호하기위해 자진해서 눈이멀었다는 거짓말로 남편을 따라간다. 그리고 아무도 보지못하는 눈먼자들의 세계에서 두눈으로 똑똑히 인간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 목격하고만다.

처음에 눈먼자들을 수용소로 대려가기위한 당국의 태도는 호의적이었다. 병의 치료와 전염병 해결을 위한 연구에 도움을 달라는 명목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치료를 위한 격리수용이며, 모두의 인권을 보호하겠다는 당국의 입장은 전혀 말도안되는 거짓말이었으며 급한데로 병의 전염을 막아보기위한 미봉책에 불과했다. 그들을 관리해야할 관리자들도 병의 전염이 두려워 가까히 하지않는다. 오히려 도움을 구하기 위해 가까히 다가오는 눈먼이들을 일방적으로 처형한다. 내부에 얼마나 많은 환자가 있는지 그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알고있지도. 알려 하지도 않는다. 그런 와중에 눈먼자들의 인권은 바닥으로 추락한다. 수리하지 못하는 고장난 변소는 그마저도 찾아가지 못한 눈먼자들이 곳곳에 배설한 오물들로넘치고, 한정된 식량을 차지하기위해 눈먼자들은 병동별로 편을갈라 대치한다. 감염이 두려운 관리자들은 병동내 눈먼자들의 갈등을 의도적으로 방관한다. 그야말로 눈먼 다툼이다. 직접 살인하지 않았다 뿐이지 서로 다투다 죽어준다면 오히려 줄어드는 감염자수에 감사라도 할법한 수준의 인격적 타락이 만연한다. 세상은 그야말로 나락으로 떨어졌고 그와중에 눈먼자들은 자신들을 이끌어줄 왕을 필요로 했다.

 

이렇게 두 이야기는 너무나도 비슷한 상황에 닮은 왕을 상정하고 있었다.

외부와 단절된 곳에서 왕으로 추대된 것도 같다. 모두와 다른 특수한 능력을 바탕으로 앞장서게 된 것도 같다. 그들이 이끌어야 될 모두가 절박한 질병에걸려 한정된 자원으로 서서히 인권을 침해당하고 인간으로써 최저의 나락으로 떨어지게된 것도 같다. 하지만 너무나도 닮은 상황에 왕으로 추대된 두 남녀는 너무나도 다른 왕의길을 걷는다.


길티크라운의 왕은 마음씨는 고왔지만 성정은 그렇게 다부지지 못했다. 자신을 둘러싼 너무 많은이들의 여러갈래의 바람을 다 어루어줄 수 있을만큼 큰 그릇이 되지 못했다. 그레서 스스로를 왕으로서 타락시키고 악을 방관했다. 어쩌면 살아남기 위한 궁여지책속에서 벌어지는 악을 스스로 판별하고 처분할 수 있을만큼의 능력이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순수했고 순수했기 때문에 모두에게 미움받는 수 밖에는 없었다.


왕은 사람을 차별하기 시작했다. 왕으로서 남기위해 살아남기위한 능력의 편중을 갈러 사람을 다르게 대했다. 그렇게 하고싶지 않았지만 스스로 왕이 되지 않고서 많은 이들을 통제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거기다 그가 조금만 교활했더라면 받지 않아도 됬을 미움을 너무나도 융통성없이 일관되게 대처하는 바람에 모든 책임을 다 자신이 받아내야만 했다. 하지만 아직 모든것을 감당하기에, 그는 너무 어렸다. 결국 모든이들의 슬픔을 마저 마셔내지 못했던 왕은 모든 이들을 출구로 인도하고서도 혼자 배신당해 나락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눈먼자들의 여왕은 조금 달랐다. 그녀는 스스로 왕이되는것 조차 거부하고 모든일들에 앞장섰다. 심지어 모두를 위해 스스로 타락귀들에게 몸을 팔면서도 그녀는 다른이들을 위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타락과 악은 결국 첨예하게 대립하여 폭발하고 눈먼자들을 가두던 병동은 불타소진되었다. 타오르는 화마로 하여금 모두를 지키기위해 그녀는 자신을 따르는 눈먼이들을 이끌고 이미 바닥을 드러낸 새상으로 인도하였는데, 정신차리고 뒤를 돌아보니 그녀는 모든이들로금 하여금 이미 왕으로 올라있었다.




다시 예수의 이야기로 넘어가자. 나는 예수가 정확히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모른다. 허나 추측컨데 그는 당시 기득권층의 박해를 받은 이들을 종교적 교리로 하나로 묶어 그 우두머리로 모두를 위해 희생했음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범위안의 이야기다. 그에 대한 대가로 보기엔 좀 뭣하지만 덕분에 예수는 성경 구절 그대로 '세상 모든 이들의 죄악을 대신해 십자가에 못박힌' 신격화된 존재로 죽고난 이후에도 천년왕으로 추대받았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란 말인가. 모두를 위해 대신죽은대신 모두가 수천년동안 그를 왕으로, 신으로 기억한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이야기 또한 우리가 지금껏 해왔던 왕의 이야기들과 몹시나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길티크라운이 왕으로써 부족했던것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그를 영광의 왕좌가 아니라 죄악의 왕좌로 끌어내린 것일까. 나는 그 해답을 눈물을 마시는 새를 통해 제왕론을 설파코자했던 한남자의 이야기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영도는 소설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제왕이란 무릇 모두의 눈물을 마시고 일찍 죽어줄 수 있는 자여야만 한다고 했다. 독을 마시는 새보다, 피를 마시는 새보다 어째서 눈물을 마시는 새가 일찍 죽어야만 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눈물이야말로 모두가 내뱉고싶어하는것이기 때문에, 모두의 '슬픔' 이기 때문에 일찍 죽을 수 밖에 없다는 대답을 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모두의 슬픔을. 그리고 왕의 슬픔을 모두 받아내었던 자가 죽음을 혹은 죽음을 대신하는 수호를 하였다는 결말로 해당 소설은 마무리가 되었다.

 

위의 길티크라운의 줄거리에선 언급하지 않았지만 해당 애니메이션에서도 결국엔 이와 비슷한 결론을 내린다. 제왕이란 무엇인가. 타인의 슬픔과 아픔 고통을 받아내야만 하는 자리이다. 세상 가장 낮은 자리에서 모두의 슬픔을 눈물을 받아낼 수 있어야만 하는 자가 진정한 왕이 될 수 있는것이다. 모두를 차별하고 억압하여 원망을 생산해내고 슬픔을 받아내지 못하는자는. 눈물을 마실수 없는 새는 왕이되지 못한다.

 

그렇다. 동양의 작은 반도의 판타지소설이나, 열도의 애니메이션이나, 세계에서 가장권위있는 문학상을 수상한 포르투갈작가나, 마지막으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종교에서조차 바라 마지않는 제왕의상이 공교롭게도 모두 차이가 없다. 이것을 그냥 단순한 설정놀음이라고 해야할지, 세상 모두가 바라마지않는 왕의모습이 장소와 시대를 불문하고 별반 차이가 없다고 받아들여야 할지는 읽으시는 분들이 판단할 문제다.


눈먼자들의 도시의 마지막에 더러운 여자들과 사람들을, 왕이 손수 자신의 손으로 두눈으로 빗물을 받아 깨끗히 하여 정화하였을때, 세상은 다시 개안 할 수 있었다. 모두가 다시 빛을 찾아 환호하는 세상의 시작속에서 이제는 자신의 눈이 멀차례임을 담담히 예감하는 왕의 모습에서. 나는 다만 이 세상의 진정한 왕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지 직감할 수 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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