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록>
-윤동주-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滿)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간혹 열등감에 꼬투리 잡기가 습관이 되버린 사람이 윤동주 시인을 이야기할때
어디서 처주워들어가지고 창씨개명을 운운 합니다.
...어떠한 변호 없이 사실 인과관계만 몇자 적어두려 합니다.
창씨개명을 대부분 사람들이 개개인의 문제로 해석하는데 잘못 알고 있는 경우 입니다.
창씨개명은 말그대로 성을 바꾸는것으로 곧 한 가문-집안-의 문제로 이해되어야 하죠.
창씨개명령은 1939년 한민족 고유의 성명제가 폐지된 뒤 1940년 2월부터 동년 8월 10일까지
일본식‘씨(氏)'를 결정해서 제출할것을 명령한 것 입니다.
이 과정에 조선총독부의 관헌을 동원한 협박,강요 과정은 익히들 알고 계시기에 생략 합니다.
그 시기 윤동주 집안 또한 창씨개명을 강요받아 왔고, 그러한 강압을 1942년 까지 약 2년간 견뎌오다
그 해 1월 29일, 윤동주의 일본 유학을 위한 출국 절차에서 '히라누마(平沼)'라는 창씨 성으로 서류가
제출되면서 어쩔 수 없이 일본이름을 안고 도쿄 릿코대학에 들어갑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창씨개명되기 5일전에 쓴 '참회록'을 읽으며 그의 심경을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느끼는 그것 때문이었을까요, 윤동주 시인은 유학 후에 소위 저항의 시를 다작했고,
결국 일본 현지에서 수많은 시와 글들이 압수당하고 항일운동 혐의로 후쿠오카 형무소에 복역하다
옥사 하시고 맙니다.
윤동주 시의 진가는 도시락 폭탄의 화약 속에서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일제 감점기의 암울한 시대상 그대로를 깊이있게 담아내고, 거기서 때론 우울하고 때론 순수하게 살아가는
윤동주 시인 내면에 있는겁니다.
그리고, 그도 우리 민족이 웃을 그 날을 희망한 사람중 한명이었습니다.
(중략)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 1941년 11월 5일 <별 헤는 밤> 윤동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