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단편] 절제된 침묵
게시물ID : art_423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말라무트
추천 : 1
조회수 : 614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2/07/24 00:26:17

인포메일 시절부터 오유를 썼지만 예술 게시판이 있는건 새삼스레 처음 알았네요


전직 글쟁이(작가라는 호칭을 쓰기가 부끄럽긴 하지만 글밥을 먹기도 했으니 작가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하다가 지금은 비슷하지만 다른 분야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예술 게시판에 간간히 소설도 올라오길래 좀 머쓱하지만 예~~전에 써두었던 글 몇 개 꺼내볼까 합니다. 


처음 올리는 글은 제가 갓 대학생이 되었을 시절 썼던 거네요. 절제된 침묵이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어렸을 적 쓴 글이라 미숙하지만 재밌게 봐주시길...


-----



“너 나랑 진영이가 어떻게 헤어졌는지 알어?”

  새끼손가락만한 높이의 잔에 담긴 소주를 단숨에 들이킨 그가 문득 입을 열었다. 나는 안주로 내놓은 김치 한 조각을 물었다. 입안 가득 퍼지는 맵싸한 향을 느끼며 고개를 젓는다.

  “우리 둘이 지하철을 타고 있었어.”

  그는 잔을 내밀어 내가 술을 따르기를 종용했다.

  “밑도 끝도 없이 진영이가 그러더군. 우리 헤어질래?”

  지금껏 별 말도 없이 술만 들이키는 그가 내심 못마땅했던 나는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흥미로운 이야기에 집중했다.

  “난 별 생각도 없이 그러자고 대답했어. 진영이가 말하길 그럼 우리 매일 만나던 것도 일주일에 한두 번으로 줄이고 하루에 세 번씩 전화하던 것도 이틀에 한번으로 줄이자더군. 지금까지 만난 시간이 오래 되서 곧바로 헤어지는 건 힘들고 서로에게 상처가 될 수 있으니 조금씩 이별을 준비하자고…….”

  그는 안주도 없이 독한 소주를 연거푸 들이부었다.

  “왜 그랬을까. 그 때 이후로 진영이에게선 전화 한 통 오지 않았어. 나도 연락하지 않았고.”

  상념에 젖은 듯 멍한 그의 시선은 초점을 잃은 채 헤맨다. 익숙한 동작으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곤 필터를 한두 번 씹는다. 

  “불 있냐?”

  라이터의 작은 불이 주위를 잠시 밝힌 후에야 나는 어느 새 어스름이 지고 있음을 알았다.

  “왜 그랬을까…….”

  긴 한숨처럼 담배 연기를 뿜어낸 그는 병에 남은 소주를 아쉬운 듯 잠시 바라보곤 몸을 일으킨다. 나는 홀로 앉아 남은 소주를 모두 비웠다. 

  


  

  어제 마신 술 때문인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고 이불을 걷었다. 여느 때처럼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쓰는 그가 보인다. 생각만큼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 듯 짜증스레 키보드를 두들겨 대는 그의 뒷모습 위로 뽀얀 담배연기가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내 방에서 담배 피우지 말라니까.”

  잠이 덜 깬, 약간 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왼손을 휘휘 저어 보인다.

  “그럼 컴퓨터를 옮기던가.”

  항상 그렇듯 들을 때마다 억지스러운 말이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부엌으로 가서 물을 마셨다. 창문을 열어놨는지 싸늘한 아침 바람이 볼가를 스친다. 학교가 방학을 한 지는 이주쯤, 삼촌이 우리 집에 온 것도 이 주쯤 되었다. 말이 좋아 자유기고가지 사실상 실업자나 다름없는 삼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잠을 깬 것도 그쯤 되었다. 삼촌은 무슨 이유에선지 내가 잠에서 깰 즈음이면 글을 쓴다. 그 덕에 내 방은 아침부터 매캐한 담배연기가 가득하다. 매일 재떨이를 하나씩 채우는 그가 담배를 끊길 바라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모레까지 마감이야. 거실에서 TV나 보고 있어라.”

  문지방을 채 넘기도 전에 그가 말했다. 나는 조용히 문을 닫는다. 매번 같은 패턴으로 방청객만을 웃기는 코미디 프로그램의 재방송은 아침마다 방영되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길게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할 때쯤, 드드드, 탁자 위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진동한다.

  “됐어, 난 바쁜 일이 있으니 너네끼리 마셔라.”

  언제부터 대학생의 방학이 음주로 점철되었나. 나는 이틀에 한번 꼴로 술자리에 나오라는 친구의 권유를 거절한다. 폴더를 덮자마자 집 전화가 요란스레 울린다. 외가에 가 계신 어머니였다. 

  “일이 생겨서 내일 모레 밤 늦게서야 들어갈 것 같구나. 끼니 거르지 말고 삼촌이랑 밥 챙겨 먹으렴.”

  “네.”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는 내용이다. 전화를 끊고 리모콘을 들자마자 또 전화벨이 울린다. 그러게 전화 끊기 전에 더 할 말 없는지 한번 더 생각해보라니까. 

  “제길, 짜증나게시리.”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수화기를 들었다. 하지만 나보다 먼저 전화를 받은 사람이 있다.

  “여보세요.”

  서른이 넘은 노총각의 담배 냄새 배긴 목소리가 들렸다. 상대방은 말이 없다. 장난전화인가? 수화기를 내리려는 찰나,

  “오빠야?”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다. 이번엔 삼촌이 침묵한다. 약속이나 한 듯 말없이 시간을 보낸다.

  “나…….”

  더 이상의 정적을 허용치 않은 것은 진영이 누나 쪽이었다. 

  “결혼할거야.”

  이십년 만에 만난 혈육을 부둥켜안고 우는 이산가족을 보는 느낌이랄까. 말할 수 없는 무언가가 확 치밀어 올랐다.

  “축하해.”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신음을 흘리듯 씹어뱉는 그 한마디와 함께 그는 그렇게 아프게 웃고 있었다.

  “모레가 마감이라 바쁘거든. 끊자.”

  흔히 써먹는 핑계로 그는 통화를 마쳤다. 나와도 연락을 꽤 하던 사이였으니 우리집 전화번호를 아는 것은 그렇다 쳐도 삼촌이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문득 웃으며 ‘감이야.’ 라고 말하던 그녀가 떠올랐다. 수화기를 든 채 과거를 회상해본다. 백육십 오 정도의 늘씬한 키에 긴 생머리, 깨끗한 피부와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그녀는 성격 또한 밝아 누구나 호감을 가질 만한 그런 여자였다. 다섯 살이라는 많다면 많은 나이차를 가졌었지만 삼촌과 그녀는 꽤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뚝. 전화가 끊기는 소리에 현재로 돌아온다. 수화기를 놓지 못한 건 나뿐만이 아닌 듯 했다. 우리 셋은 한손에 수화기를 든 채 그렇게 회상에 잠겨 있었다.

  


  

  “음?”

  깜빡 잠이 들었었나보다. 소란스레 울리는 전화벨에 못 이긴 척 부스스 눈을 떠본다.

  “나와라.”

  삼촌이다. 마감 안에 원고를 끝낸 건 오랜만이라며 아침부터 부산을 떨던 그가 나간지는 두 시간쯤 되었다. 항상 마감 후엔 술에 거나하게 취해 들어오곤 했는데 이렇게 일찍 무슨 일이지?

  “왜?”

  “잡지사에서 마감 안에 끝내줘서 고맙다고 티켓을 두장 주더만. 윤지향의 피아노 콘서트.”

  “윤지향? 그 사람…….”

  문득 뇌를 스쳐가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그 사람 뭐?”

  “아냐, 아무것도.”

  무심코 말해버릴 뻔 했다. 누나가 좋아하는 피아니스트잖아. 클래식을 좋아하는 편이 아님에도 누나 때문에 자주 가곤 했으면서……

  

  


  안내 방송이 끝난 후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 입은 윤지향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을씨년스레 혼자 놓인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 위로 손을 얹는 그는 차분했다. 그의 연주 또한 그러했다. 맛깔스런 에피타이저처럼 시작된 연주는 점점 진중해지며 관객을 흡수한다. 그의 두 손은 흑백의 건반 위에서 왈츠를 춘다. 짜여진 하나의 인형극처럼 정교하게 움직이며 심장을 조인다. 좋아할만한 사람이다. 클래식에 그다지 관심 없는 삼촌이 단지 누나 때문에 이 사람을 보러 나는 것은 아닌 건가? 윤지향의 두 손은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움직임을 멈춘다. 관객들은 약속이나 한 듯 앞 다투어 박수를 친다. 그의 공연은 그렇게 끝이 났다. 

  

  


  날씨가 더욱 쌀쌀해졌다. 밖으로 나오기 무섭게 담배를 사러 간 삼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내 온몸으로 한기가 스며든다. 짧은 한숨을 몰아쉬며 코트자락을 여미는 내 시야에 문득 들어온 것은

  “가자.”

  언제 나왔는지 삼촌이 내 어깨를 툭툭 친다. 나는 흠칫 놀라며 그를 바라본다. 능숙하게 담배의 포장을 벗기고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무는 그의 시선이 조금 흔들린다. 딸칵, 그의 지포라이터 뚜껑이 열리는 소리는 유난히 크다. 

  “쳐다보지 마. 알아볼라.”

  그도 본 것이다.

  “나랑 있을 땐…….”

  걸음을 옮기며 무언가 말을 하려다 잠시 멈추곤 담배연기를 길게 한번 빨아들인다.

  “나랑 있을 땐 저렇게 웃은 적이 없는 것 같아.”

  마른 그의 입술 사이로 뿌연 연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온다. 웃고 있었나? 잠깐 전의 기억을 떠올려본다. 친구로 보이는 몇몇 여자와 같이 걷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얼굴 표정이 어땠는지 잘 모르겠다. 몇 초나 지났다고……. 머리가 썩어버렸나?

  “한 잔 해야지?”

  대답하지 않았다. 허나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는다. 싸늘한 바람을 맞으며 우리는 정처 없는 사람처럼 걸었다.

  


  

  “넌 죽고 싶단 생각해 본 적 있냐?”

  지글지글 익어가는 고기조각을 말없이 주시하던 나를 사색에서 현실로 끌어낸 그의 한마디는 조금 생뚱맞았다. 그리고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으며 말을 이어 간다.

  “다른 사람도 그렇겠지만 글 쓰는 사람은 생각이 존나 많어. 가끔 혼자 있을 때면 과거사를 하나씩 끄집어 놓고 별별 생각을 다 박아 넣지. 그러다보면 좋은 생각보단 나쁜 생각이 많이 들어. 항상 안 좋은 기억이 먼저 떠오르고 그렇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보면 죽고 싶어질 때가 있지. 단지 나쁜 기억 때문만은 아냐.”

  술한잔을 가볍게 입 속으로 털어 넣는다.

  “왜 사는 거지? 무슨 이유 때문에 살고 있는 걸까? 더러운 거야. 삶의 의미 자체에 의문이 생기는 건 정말 슬프지.”

  아직 조금 덜 익은 듯 보이는 고기를 한 점 물곤 긴 한숨을 내쉰다.

  “널 왜 글을 쓰냐?”

  “어?”

  갑작스런 그의 물음에 약간 갸웃하며 반문했다.

  “그거야……. 어릴 때부터 쓰기도 했고 어떤 목적이 있어서 쓴 적은 잘 없는 것 같은데. 그냥 쓰고 싶어서랄까? 가끔 쓰고 싶단 생각이 들 때가 있으니까.”

  “취미냐?”

  “특기가 아닌 게 아쉬울 뿐이지.”

  살짝 웃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그도 웃는다.

  “직업으론 삼지 마.”

  그게 글 쓰는 사람 입에서 나올 소리냐? 맘속으로 묻는다.

  “먹고 살기도 힘들고, 별로 할 짓이 아니다.”

  반쯤은 인정. 실제로 글 쓰는 데에 재주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여유롭게 살지 못하는 표본이 눈앞에 있으니까. 게다가 나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글쟁이는 자신의 글에 만족하기 힘들다. 어디까지나 자기 주관으로 쓰는 것이기 때문에 내 눈에 안 보이는 허접도 많고 스스로 떠올린 장면을 미처 글로 다 표현해내지 못할 때는 반쯤 미친다. 실력의 한계점을 느끼는 것이다. 글을 쓰다보면 그런 상황을 꽤 겪기 때문에 더더욱 만족하기 힘들어진다. 자신의 일에 만족이 힘들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리고 삼촌이 굳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비단 그런 것 때문만은 아닌 듯 보인다.

  “글쟁이는 결혼하기도 힘들어. 성격이 독단적이고 쓸데없이 자존심만 센 부류가 많거든. 특징이랄까. 사람들이 기를 쓰고 돈을 벌려 하는 이유, 인류가 꿈꾸는 최대의 지상과제가 좋은 직장 얻고 좋은 사람 만나 잘 먹고 잘 사는 거라고 볼 때, 글쟁이는 거진 최악의 직업이지.”

  그것도 인정.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면 그만이겠지만 말처럼 쉽지 않으니 문제다. 단순히 실력만으로는 불가능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요.”

  어느 새 술 한 병을 다 비운 그가 종업원을 부른다. 그다지 술이 세지도 않으면서 마시는 건 오지게도 빨리 마신다. 종업원이 가져다준 소주병을 따며 그가 나를 바라본다.

  “잘 살기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할 수도 있는 두 가지에 모두 실패한 사람에겐 뭐가 남아 있을까?”

  문득 그의 말에 내 미래를 떠올려본다. 아직까지는 뚜렷한 목적의식이 없다. 대학은 가고 싶어 간 것이 아니라 가야만 하기 때문에 갔다. 내가 대학에서 배운 것들을 제대로 써먹을지나 의문이다. 두렵지는 않지만 조금 불안하다고나 할까.

  


  걸음이 조금 흐트러질 정도로 술을 마신 그는 집 열쇠를 꺼내드는 나를 바람 좀 쐬자며 옥상으로 이끌었다. 술에 취해 두려움도 사라졌는지 그는 불안정해 보이는 옥상 난간에 턱 걸터앉는다.

  “여기서 떨어지면 죽겠지?”

  당연하지. 십오 층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지고 무사할 인간이 어디 있겠어? 속으로 대답해본다. 그는 담배를 꺼낸다.

  “필래?”

  “됐어.”

  담배를 피우긴 하지만 삼촌 같은 골초는 아니다. 지금은 피우고 싶다는 생각이 없다.

  “진영이는 잘 살겠지?”

  “그렇겠지.”

  “울고 싶을 때 눈물이 나지 않는 건 괴롭군. 지위와 체면을 떠나서 말이야. 눈물이 말라버린 것 같아.”

  그의 말을 끝으로 우리는 꽤 긴 시간동안 침묵을 지켰다.

  “두 가지를 모두 실패한 글쟁이가 쓰면 어떤 글이 나올까?”

  “무슨 소리야?”

  “두 가지를 모두 실패했지만 마지막 한 가지……. 꿈이 남아 있기 때문에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거야. 스스로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드네.”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나를 빤히 바라보던 그가 벌써 세 개비째 피우던 담배를 바닥에 버리곤 짓밟는다.

  “글을 쓰고 싶어졌어.”

  웃는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어른이 된다는 것이 아니다. 꿈을 잃은 어린아이가 되어 가는 것이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 고뇌해도 소용없는 두터운 현실의 벽. 그는 그 사이에서 꿈을 되찾은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아프게 웃고 있었다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