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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코틴틴님께 드리는 간단한 반론 (3)
게시물ID : history_515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1/7
조회수 : 74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07/27 09:38:33

항상 안 배운 사람에게 설명하시느라 참 수고 많으십니다.


제가 일신의 사정상 몇일 늦게 답글을 다는 점이나 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못 배워 가방끈이 짧은 점 아무쪼록 양해 부탁드립니다.


사실 뭐라 쓰든간에 안 배운 사람한테 설명하는건 힘들다고 반론할 시간에 한자라도 더 찾아보라는 말씀이 이전의 글들 처럼 다시 나올께 뻔합니다만 뭐 어쩌겠습니까, 미흡한게 있으면 배워야죠,


부디 수고를 아끼지 마시고 가르침을 내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글의 순서는 님께서 제게 재 반론을 내려 주신 순서를 따르겠습니다.



우선 인구수를 애기하셨는데 그 이전에 반론한 글을 읽어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인구수를 꺼낸것은 물물 교환이라는 원시적인 경제구조의 인력 중심의 농업과 그에 부차적인 공업 수준을 유지하던 조선에서 인력이라는것이 가지는 의미 때문입니다.


또한 16세기 이후의 인구수나 변동의 패턴이라도, 의학이나 경작 면적 등 여러 요소에 의해 그 이전의 인구 변동과 갑자기 달라질 수 없기에 왜란과 호란의 시기인 16세기 이후를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리고 첫번째 글에서 상업 경제 화폐 체제를 이미 확립하였다는 것이나 소농 경제에 따른 직영제의 쇠퇴와 그에 따른 지주제의 확립등 말씀하신 양란 이전에 경제력이 미흡하였다 라고 보기 힘든 사실에 대하여 설명드렸고 말이지요,


글을 따로 작성하다보니 아무래도 양측을 연결짓기 힘든 부분이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두번째로 동북아 역사 재단의 말을 빌리자면 일본의 경우 17세기 이후 인구 급증 이른바 폭발의 시대를 거치게 되는데 17세기 초 1700만 명 에서 18세기 초 2700만 명로 증가하나 영주의 수탈과 자연재해 등으로 정체에 접어들게 됩니다.


조선의 경우는 경지 면적의 확대, 이앙법과 시비법의 확산, 온난한 기후, 의학 발달로 사망률 감소(동의보감) 등의 요소가 들어가 16세기 대략 1천만 명에서 17세기 전후 전란으로 감소하고 17세기 중반 이후 증가 추세를 거쳐 1670년 경신대기근으로 급격히 감소했다 다시 증가하여 18세기 중반 1,800만 명 정도 추정 된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인구압으로 인한 식량수요 및 필요농지가 많았고, 그로 인한 면적당 개간이 더 빈번하게 일어났고 이는 지대량및 논가격하락등 단위면적당 생산량의 악화를 가져와 다시 인구압을 불러일으켰다거나 하는 애기는 일단 넘어가겠습니다.


아무튼 일본 식민 근대화론과 연결 지으시는데 저랑은 별로 관계도 없고 가까이 하고 싶지도 않은 분들입니다.


다음으로 단천의 연은 분리법이 일본의 은광을 폭팔적으로 성장시켰던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국의 동란을 넘어 일본 전체의 정치 경제적 구조를 바꾸고 독자적 경제 시스템으로 이끌었을뿐 아니라 마침 동진해온 포르투칼로 하여금 중국과의 무역 네트워크의 한 축을 담당할 기회까지 주었던 경제학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되는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15~16세기에 일본 은이 약세일 때에도 쓰시마와 조선의 구리거래는 한 건에 11만근의 동괴가 거래될 정도로 큰 규모였습니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삼포의 왜관에서는 이러한 일본 은에 대한 비가를 어떻게 책정하느냐의 논쟁이 중종시기 삼포왜란의 발발 요인 중 하나로 지적되기도 하며 일본은 16~17세기 세계 은 생산량의 1/3을 담당하는, 주요한 은 수출국가로 보는 연구도 있습니다.


만력연간 당시 한 관리가 각 지방의 특산물을 정의하기를 일본의 경우 백은과 금속을 들고 있습니다, 동남아가 후추, 향료 등을 언급된데 반하여 지리적으로 인접한 조선은 언급도 안되있지요,


조선의 경우 연은분리법 개발 이후에도 개발자가 천민이라는 탓에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을뻔 했고 기술의 활용 역시 중국의 코크스 식 용광로의 경우 처럼 사장되었습니다, 도리어 경제적인 가치의 인정은 일본에서 받았지요,


곡물 생산량이 지표중 하나는 맞습니다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봅니다. 간략하게 몇가지 물론 아시겠지만 또 앞서 설명드린바도 있고 단 시간에 급증되는 문제가 아닌것은 아시니 이전의 이야기는 넘어가고 17세기 일본의 상황을 설명드리자면 17세기 말의 오사카는 36만 5천명의 상인과 장인들로 도시가 활기에 넘쳤습니다.


1700년 오사카의 장인들은 평지씨에서 램프 기름을 추출하거나 원면을 옷으로 만드는 일에 종사하고, 중고품을 손질해서 다시 판매하는 일에 종사했는데 스기모토 일가를 비롯한 동 제련업자들은 당시 오사카에서 가장 큰 규모의 노동력 시장을 형성 했으며 17개의 제련소를 통해, 대략 만 가구 이상이 생계를 꾸려갔습니다. 


1710년대에는 2천여명이 넘는 직업 목수들이 오사카에서 살면서 배를 만들었고 도매상을 비롯한 유통업자, 삯꾼, 운송업자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습니다.


17세기에 일본인들은 필리핀, 샴, 캄보디아에도 진출했고 1673년엔 에치고야가 세운 포목점에선 "현금만 취급, 가격 정찰제"라는 유명한 문구를 표어로 세웠고 오사카와 교토에 분점을 세우기도 했죠,


당시 일본의 에도, 오사카, 나고야, 그리고 가나자 같은 도시들은 평균적 수준인 10만을 넘어서고 일본 전체 인구의 5% - 7%가 대도시에 집중됬다는 것은 당시 유럽의 2%에 비교해 보면 일본의 도시화 수준은 상당했고 이를 넘어서 일본을 아시아에서 최고로 도시집중화된 국가로 만들었다는 이야기 인데, 이는 도시의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사태를 만들었고, 다른 지역에서 물자를 조달해야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여러 지역들의 특산화를 유발시켰습니다. 특히 남큐슈산 장뇌와 시이케산 버섯, 도사산 재목과 숯, 도야마산 약품, 고후산 포도는 대도시에서 상당한 가격에 판매된 품목들이었습니다.


또한 전국시대를 거치며 다이묘의 정책들은 물물교역을 전국적으로 확대했습니다. 그들의 사업에는 막대한 현금이 필요했고 그들의 수입은 농민들로 부터 받는 미곡이었는데, 이를 현금으로 바꾸기 위해 오사카에 보내야 했습니다. 


이에 대한 결과로 해마다 100만석의 쌀이 오사카의 도매상을 통해 유통되었으며 그 양은 1720년대에 4배가 증가했습니다. 


이런 활동에는 이에 합당한 교역로가 필수적인데, 일본은 그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막부의 지령으로 에도의 거상 가와무라 즈이켄은 위험한 수로와 해로를 분류하고, 등대와 수로표지판을 설비하고 구조 시설까지 정비했습니다. 


그리고 육로로는 에도를 중심으로 5개의 주요 대로들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 중 도카이도는 500km가 꾸준히 이어져있었고, 모래와 자갈로 땅을 평평하게 하고 평균 폭이 6m이상으로 해놓았습니다. 그리고 출발지와 도착지까지의 거리를 표시한 이정표와 표지판이 즐비해 있었고 도카이도를 따라 53개의 역참이 존재했습니다. 


이런 도로망의 효율성은 에도에서 오사카까지 가는데 이틀이면 충분한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19세기 초반 기준).이러한 이점 때문에 금융업도 발달할 수 있었고 산업의 효율성을 위한 다양한 연구를 가능케 했습니다. 


1860년에 출간된 백과사전에는 200여종의 누에 종류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일본인들이 더 싸고 좋은 실을 생산하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연구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18세기 중반에 비록 보편화 되지는 않았지만, 수력이나 톱니장치로 돌아가는 자동화 기계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것을 생략하고, 일본은 면직 산업에 대단히 집중했고 결과적으로 매우 다양한 색깔과 모양의 의류를 만들어 냈습니다.


조선 전기를 보면 고려 말의 혼란을 교훈삼아 민생안정을 목표로 농업의 진흥과 조세의 경감에 주력하였고 유교를 국가통치의 기본이념으로 삼았기 때문에 사치와 낭비를 조장하는 수공업과 상업을 통제하다가 16세기 들어서야 농업의 발전과 사회 경제적 변화와 함께 상공업의 통제는 풀어지고 점차 자유로운 경제활동이 가능해졌습니다.


당시 사회구조의 변화로 수공업에 종사하는 장인들의 등록제가 폐지되면서 장인들이 임금근로자로 전락하거나 자영수공업자로 변모하게 되었는데 농촌에서도 여인들을 중심으로 농사보다 베짜기 등 가내수공업이 성행하게 되었는데, 정약용의 기록에 의하면 한사람의 베짜는 여인의 수입이 농부 세사람의 수입보다 낫다고 하는 수준이었죠,


농업은 개간사업에 의한 토지의 증대와 이양법, 밭고랑에 작물을 심는 견종법의 보급으로 농업생산력이 크게 증대하였는데 이양법의 보급은 1인당 경작면적을 늘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광작을 계기로 지주들이 직접 경작하게 됨으로써 소작농의 감소를 가져와 영세농가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고 농민층의 분화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죠,


광업의 경우는 농민의 광산 집중을 방지하기 위해 금과 은의 채취를 금지하여 상인들이 몰래 금, 은광 등을 개발하는 잠채가 성행하였습니 다.  대동법 실시 이후 관가에 물건을 납품하는 공인과 민간상인이라 할 수 있는데 1791년 금난전권의 폐지로 사상들의 자유로운 활동이 보장되었습니다.


물론 자본주의 이념에 기반한 개방 경제와 중상주의 이념에 따른 폐쇄 경제간의 경제력 비교가 난해한것은 모자란 저도 아는 사실입니다만 단순하게 곡물 생산량으로 경제력을 판단하기는 무리가 아닐까 합니다.


네번째로 군사에 대한 이야기는 이전의 글에서 군사적인 이야기를 꺼내셨기에 언급을 해본것입니다.


조선의 경우 조선시대 무기제조에 많이 사용된 정철은 숙철에 포함되었는데 특히 화포는 반드시 정철로 제조하여야 견고하고 오래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철이 조총 및 군기제조에 많이 사용된 것은 동보다 강한 장점이 있었기 때문인데, 조총의 총열, 화포의 총통 등에 이용할 수 있으려면 제련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즉 철광석을 제련하여 수철을 만들기는 쉬었으나 군기제조에 필요한 연철을 만들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반면에 구리 광석은 제련하기 쉬었으며 화기로 제작하기에도 적합하였고 따라서 일찍부터 화기제조에 동철을 많이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현존하는 조선시대 화기들의 제원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는 문제입니다. 


동은 철보다 성분 구조상 화기제작에 용이하였던 반면 그 가격이 훨씬 고가였으며 농기구와 같은 도구를 만들 수 없는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다만 동은 유기제품 등의 제작에 사용되었기에 국내산보다 값이 싼 왜동이 대량으로 수입되어 사용되었습니다.


왜동의 무역은 공무역을 통해 부산왜관에서 진행되었는데 아시겠지만 사족을 적자면 수입된 동철을 한양으로 보낼 때 동철속에 모래를 섞어 그 양을 속이는 폐해가 발생하였습니다. 


즉 차사원과 왜관 훈도가 제품의 내용을 점검하는 것을 왜면한 채 올려 보냈기 때문인데 이에 따라 정부에서는 동철을 상납할 때 본부 차사원과 왜관훈도의 성명을 기록한 후 올려 보내게 하였으며 물품에 이상이 있을 경우 차사원은 파직, 훈도는 한양으로 압송하여 치죄, 경상감사, 동래부사는 면책하는 대책을 세웠다고 합니다.


아무튼 숙종연간에 조선의 구리 구입 요청량에 맞추기 위해 대마번은 일본 막부에 연 20만근(약 120톤)의 수출을 요청했으나 그만한 양은 일본에서도 감당하기 쉽지 않는 터라 막부는 연 10만근(약 60톤)을 한계로 정한 기록이 있습니다.


대마도 종가문서에는 구리 교역량이 다소 줄었던 1800년대 중엽에 대마도의 대형 중계상들이 조선 측에 실제 판매한 양의 기록도 나오는데 연평균 6만근(약 36톤)의 구리를 조선에 판매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1800년대 이후 일본에서도 구리 생산량이 줄어 구리 수입이 제한되면서부터 조선도 국내 구리 광산 개발을 추진하기도 했습니다만 조선 전기만해도 어디까지나 구리의 주 확보 대상은 일본으로부터의 수입 내지 국내 구리 재활용에 그쳤습니다.


앞서 1593년 윤11월17일에 이순신 장군이 조정에 올린 하납철공문겸사유황장에서도 구리의 부족함은 명시되어 있습니다.


> 지자총통 한 자루의 무게가 150여 근이나 되며, 현자 총통 한 자루의 무게도 역시 50여 근이나 되는데, 이 같이 물자가 남김없이 말라진 오늘에 있어서는 비록 관청의 힘으로도 손쉽게 변통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배를 만드는 일은 거의 끝났으나 각종 병기들이 한꺼번에 되지 않으니 참으로 걱정입니다.신이 중들을 모집하여 별도로 화주라 이름하고 권선문을 지어 주어서 마을마다 두루 다니면서 쇠붙이를 구하여 만분의 일이나마 보충하고자 하였으나, 배겅들은 곤궁하고 재정이 다되어 그 역시 쉽게 되지 않아 밤낮으로 생각해 보아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듣자오니 멀고 가까운 여러 고을에서는 쇠를 바치고 병역을 면제하려고 하는 자가 있다고 하는데, 아래에 있는 사람으로는 함부로 할 수 없는 일이므로 감히 품의하오니 혹시 그 철물의 중량에 따라 혹 직함으로 상주기도 하고, 혹 벼슬길을 티워 주기도 하고, 병역을 면제하게 하며, 천한 신분을 면하게도 하는 공문을 만들어서 내려 보내 주시면 쇠를 거두어 총통 등을 만들어 군사의 중요한 일을 성취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식민지 근대화론이나 자본주의 맹아론의 경우 저는 언급한 바도 없으니 넘어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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